Dog君 Blues...
20세기 사학사 (조지 이거스, 푸른역사, 1999.) 또 한번더 본문

조지 이거스의 『20세기 사학사』는 제목 그대로 20세기 즈음의 사학사(史學史, historiography)를 다룹니다. '어디어디 혹은 누구누구의 추천도서 100선' 같은 리스트에도 종종 이름을 올리곤 하는 것을 보면, 아마 이 주제로는 가장 널리 읽히는 책 중 하나가 아닐까 싶습니다. 한국을 기준으로 초간이 1999년이니 이제는 고전(canon)의 반열에도 올랐다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저자는 사학사에서 나타난 역사서술의 경향을 세 단계로 나눕니다. 첫 번째인 전통적인 역사서술의 단계는 역사가 전문적 분과학문으로 자리하기 이전의 시기입니다. 엄격한 학문적 원칙에 의거하거나 일반적 법칙을 도출하기보다는 이야기의 개별성과 문학성이 더 강조되었던 시기입니다. 두 번째는 역사학에 사회과학적인 연구 방식들이 도입된 단계입니다. 우연에 의해 추동되는 개별적인 이야기들이 아니라 합법칙적인 필연과 과학적으로 분석된 인과관계로 설명하는 것이 목표였던 단계죠. 그리고 마지막 세 번째가 포스트모더니즘의 단계지요.
이 책에서 가장 중점적으로 다루는 것은 두 번째 단계입니다. 전에 올렸던 강성호의 『마르크스주의의 새로운 시작을 위하여』의 독후감에서는 이러한 시도가 마르크스주의와 관련이 있다고 썼습니다만, 마르크스주의를 곧장 역사연구로 직결시킬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19세기 말의 사회학자 에밀 뒤르켕이 역사학은 엄격한 과학이 될 수 없고 잘해야 사회학에 데이터를 제공하는 정도의 보조적 역할이나 할 수 있을 거라 했다는 사실(61쪽)은, 역사학에서 '과학성'이란 19세기 말까지도 언감생심이었다는 뜻입니다. 하지만 독일의 역사학자 칼 람프레히트가 1891년 『독일사』를 통해 역사학 역시 "여타의 모든 과학들과 마찬가지로, 이론적 질문과 방법론적 원칙을 통해 접근하려는 시도"가 될 수 있다고 주장하며 "역사학을 체계적인 사회과학과 제휴시키는 것"을 목표로 삼은 것을(58~59쪽) 비롯해 역사학에 '과학성(혹은 객관성)'을 부여하기 위한 노력이 이 즈음부터 다양하게 경주되었습니다.
2차 대전이 끝난 이후에는 경제사를 중심으로 계량적 연구방법이 도입되기 시작했고 (여기에는 전자계산기computer의 발달이 한몫을 합니다) 급기야 아날학파에 이르게 되면 (기존의 역사서술에서 핵심적 위치를 차지했던) '개인'이 사실상 사라지는 수준에까지 이르게 됩니다. 마르크스주의 역사학은 계급'의식'에 주목한 톰슨이나 사회적 실천으로서의 역사서술을 강조했던 『역사 작업장』의 시도 등을 통해 보다 다변화되었지요.
하지만 이러한 역사서술은 1960년대 후반 이후 근본적으로 흔들립니다. 사회의 변혁과 관련하여, 착취와 지배의 원천이 정치나 경제와 같은 제도화된 '구조'가 아니라 어떤 인간이 또다른 인간에게 게 권력을 행사하는 수많은 인간 상호 간의 '관계'에 있다는 푸코 류의 '권력' 이해는 역사학의 관심 또한 같은 방향으로 변화시켰습니다. 흔히 포스트모더니즘으로 불리는 이러한 흐름은 여기서 멈추지 않았습니다. 기존의 문학적 역사서술과 그 이후의 과학적 역사서술은 차이는 있을지언정 ①역사서술은 실제로 존재했던 사람과 행위를 대상으로 하고, ②인간의 행위는 행위자의 의도를 반영하기에 역사가의 작업은 그 의도를 이해하여 일관된 서사를 만드는 것이야 하며, ③일차원적이고 통시적인 시간관 하에서 인과의 선후관계를 이해한다는 점에서는 동일했습니다. 그런데 포스트모더니즘은 이들 세 가지 가정까지 회의하고 의문시했습니다.
저자는 포스트모더니즘 역사학이 역사학의 언어에 반영된 이데올로기적 전제를 올바르게 지적하는 등 긍정적인 측면이 있다고 인정합니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합리적인 역사 담론의 가능성을 부정하고 역사적 사실과 허위의 개념을 의문시"하고 "정직한 학문과 선전·선동 사이에 존재하는 경계마저도 허물어 버리"는 바람에, "목욕물을 버리면서 아이까지도 던져버리는 과오를 범"(이상 32쪽)했다고 비판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비판이 아니더라도, 저자는 포스트모더니즘 역사학이 기존의 역사서술에 끼친 영향이 그다지 크지 않다고 보는 듯합니다. 책의 마지막 부분에서 저자는 실재론을 부정하는 "극단적 입장을 공유하는 역사가는 거의 없었"(202쪽)으며, 대부분의 역사학자들이 여전히 "역사적 정직성에 대한 헌신을 포기하지 않았"고 "많은 측면에서 이전의 역사학이 의거했던 방법론적 절차들의 대부분을 유지하였다"(이상 218~219쪽)고 말합니다.
이 책이 지난 세기에 나온 것임에도 (심지어 마지막 장의 제목은 '1990년대의 관점에서'입니다!!) 결론부의 이러한 내용은 지금 보아도 크게 낡아 보이지 않습니다. 저자 말마따나 역사학의 전통적인 연구방법론은 여전히 튼튼하게 지켜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얼마 전에 올린 조한욱의 『문화로 보면 역사가 달라진다』의 독후감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포스트모더니즘의 문제의식은 기존 역사연구를 완전히 대체하기보다는 연구의 지평을 확장하는 쪽으로 기여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이 책이 쓰여진 1990년대의 관점에서는 포스트모더니즘의 도전이 모든 것을 쓸어버릴 것만 같은 거센 파도처럼 보였을 수도 있겠습니다만 저자가 애초에 이야기했던 세 번째 단계인 '과학적' 역사서술의 다음 단계는 어쩌면 아직도 오지 않은 것은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
전문화 과정의 핵심을 이루었던 것은 역사학의 과학적 위상에 대한 확고한 믿음이었다. 물론 역사가들이 이해한 과학의 개념은 지식을 일반화와 추상적 법칙의 형태로 추구했던 자연과학과는 구별되는 것이었다. 역사학이 자연과학과 구별되어야 하는 이유는 역사학은 의미들을 다루기 때문인데, 그 의미들은 역사를 만들었던 갑남을녀의 의도 속에 있거나 사회를 응집시키는 가치와 이상에 구현되어 있었다. 역사학은 시간 속에 있는 구체적인 인간들과 구체적인 문화들을 다루는 것이었지만, 역사가들은 방법론적으로 통제된 연구를 통해 객관적 지식에 도달할 수 있다는, 전문화된 과학에 대한 낙관적 믿음을 대체로 공유하고 있었다.
다른 과학자들과 마찬가지로 역사가들도 인식과 객관적 실제는 일치한다는 진리대응설에 입각하여, 과거를 "그것이 실제로 일어났던 대로" 구성하고자 하였다. 역사가들이 자신의 작업을 과학적이라고 스스로 정의한 데에는 과학적 담론과 문학적 담론이, 그리고 전문적 역사가들의 작업과 아마추어 역사가들의 작업이 뚜렷이 구별된다는 생각이 내포되어 있었다. 그런데 역사학을 과학으로 정립하고자 했던 역사가들은 그들 연구의 결과가 현실 역사와 사회 구조에 대해 그들이 가정하고 있던 바에 의해 얼마 만큼이나 미리 결정되고 있는가 하는 점을 간과하고 있었다.
(...) 19세기의 '과학적' 역사학과 역사 서술의 오래된 문학적 전통들 간의 단절은 결코 19세기의 역사가들이 생각했던 만큼 크지는 않았다. '과학적' 역사의 담론에도 문학적 상상이 개재되어 있었고, 마찬가지로 오래된 문학적 전통 역시 실재하는 과거를 재구성하는 방식으로 사실을 추구하였다. 레오폴트 폰 랑케(Leopold von Ranke) 이래의 '과학적' 역사학과 투키디데스로부터 에드워드 기본(Edward Gibbon)에 이르는 문학적 전통은 모두 다음과 같은 세 가지 기본 전제를 공유하였다. 1) 그들은 진리대응설을 수용하여, 역사 서술은 실제로 존재했던 사람과 실제로 일어났던 행위를 그려낸다고 생각하였다. 2) 그들은 인간의 행위는 행위자의 의도를 반영하고, 역사가의 작업은 인간의 의도를 이해하여 일관된 역사 이야기를 구성하는 것이라고 전제하였다. 3) 그들은 일차원적이고 통시적인 시간관을 전제로 작업하여, 나중에 일어난 사건과 그 이전에 발생한 사건 간에 일관된 인과 관계를 이끌어 내었다. 이러한 실재성과 의도성 및 시간적 계기성이라는 세 가지 가정이 헤로도투스(Herodotus)와 투키디데스로부터 랑케까지, 나아가 랑케로부터 20세기에 이르기까지 역사 서술의 구조를 결정하였다. 그런데 다름아닌 바로 이 세 가지 전제가 최근의 역사 사고에 의해 점증적으로 의문시되고 있다. (16~18쪽.)
사회과학 지향적인 새로운 연구 방식들은 이전의 역사 서술을 다음의 몇 가지 점에서 비판하였다. 하나는 전통적 역사 서술은 역사학의 주제로서 개인, 특히 '위인'과 사건에만 편협하게 초점을 맞춤으로써, 이들이 가능한 좀더 광범위한 맥락을 소홀히 했다는 것이다. 이러한 차원에서 볼 때, 사회과학적 연구 방식들은 마르크스주의적인 것이든 파슨스적이든, 아니면 아날적이든 간에 역사학의 민주화를 반영하고 있다. 이는 인구의 광범위한 부분들을 역사학에 포함하면서, 역사학의 조망을 정치에서 사회로 확장한다는 것을 의미하였다. 사회과학적 접근 방식들은 이전의 연구 방식이 과학적이었기 때문이 아니라, 충분히 그렇지 못했기 때문에 그에 대해 반대하였다. 이전의 연구 방식이 표방한 기본 전제들 가운데 하나, 즉 역사학은 일반화가 아니라 특수한 것을 다루며 그 목표는 '설명 explain'이 아니라 '이해 understand'라는 주장은 도전을 받았고, 대신에 역사학을 포함하여 모든 과학은 인과적 설명을 포함해야 한다는 주장이 대두했다. (19쪽.)
(...) 최근의 논의들은 로제 샤르티에(Roger Chartier)가 중간적 입장을 취하며 명료하게 설명한 다음의 사항을 인정하는 편이다. 즉 "역사는 다양한 형태의 이야기 방법들 가운데 하나이지만, 사실과 특별한 관계를 유지한다는 점에서 유일하다. 더욱이 역사가 이야기로 구성하려는 것은 실제로 존재했던 과거의 재구성을 목표로 삼는다. 역사적 텍스트에 앞서 존재하고 역사적 텍스트의 외부에 위치하는 실재와의 이러한 관련성이 역사를 구성하고, 역사를 우화나 허구와 구별하게 해 주는 것이다. 여기는 텍스트는 사실을 파악할 수 있는 설명을 생산하는 기능을 수행한다."
이처럼 사실과 허구를 구분하는 것이 여전히 역사가의 작업의 근간이 되고 있다. 진리의 개념은 최근의 비판적 사유과정 속에서 한량없이 복잡하게 되었다. "역사적 지식의 절대적 객관성과 과학성"이란 공리가 "더 이상 유보 조항 없이는 용인될 수 없다"는 것은 명백하다. 그럼에도 진리의 개념과 또한 이를 이용하여 허위를 피하고 밝히는 역사가의 임무는 결코 포기되지 않았다. 역사가는 훈련된 전문가로서 과거의 실재에 접근하게 해 주는 사료를 가지고 비판적 작업을 지속적으로 수행한다. (30~31쪽.)
이와 같은 포스트모던적 비판에는 중요하고 타당한 측면이 포함되어 있다. 그것은 단선적인 통합적 역사의 개념은 지지될 수 없으며, 역사는 연속성뿐 아니라 단절로 점철되어 있다는 것을 증명하였다. 포스트모던적 입장을 취하는 사람들은 전문적 역사학의 지배적 담론에 깊이 새겨진 이데올로기적 전제들을 올바르게 지적했을 뿐 아니라, 전문가의 권위로 말하는 과장된 주장들을 정당하게 공격하였다. 그럼에도 그들은 합리적인 역사 담론의 가능성을 부정하고 역사적 사실과 허위의 개념을 의문시함으로써 목욕물을 버리면서 아이까지도 던져버리는 과오를 범했다. 따라서 그들은 항상 허구적 요소를 포함하는 역사 담론과 주로 실재를 해석하는 것을 추구하는 허구 사이에 존재하는 유동적 경계뿐 아니라, 정직한 학문과 선전·선동 사이에 존재하는 경계마저도 허물어 버리고 말았다. (32쪽.)
내가 이미 지적했듯이, 역사과학을 포함해서 과학은 그 분과에만 고유한 일단의 유리된 사고 과정으로 결코 축소될 수 없고, 단지 언제나 학문적·과학적 제도의 틀 안에서 작업하면서 대다수의 동시대인과 실재의 본질과 관련된 전제들을 공유한 채 살아서 활동하는 인간을 포함한다. (...) 그러므로 역사 서술의 역사를 학문적 작업이 이루어지는 제도와 사회적·지적 배경으로부터 분리하는 것은 가능하지 않다. (39~40쪽.)
독일에서 이러한 논의는 1891년에 제1권이 출간된 칼 람프레히트(Karl Lamprecht)의 『독일사Deutsche Geschichte)』를 둘러싼 논쟁과 함께 격렬하게 전개되었다. 람프레히트는 전통적 역사학이 견지한 두 가지 기본 원칙, 즉 국가에 핵심적인 역할을 부여한 것과 개인과 사건에 관심을 집중한 것을 문제삼았다. 그는 자연과학에서 과학적 방법이 고립된 현상들을 기술하는 데 머물렀던 시대는 이미 오래 전에 '지나갔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므로 역사학 역시 '기술적 descriptive' 방법을 '발생적 genetic' 방법으로 대체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
그는 자신의 기획을 밝힌 여러 글에서 "역사과학의 낡은 방향"―사료를 엄밀하게 연구하여 사실을 확립하고자 하지만, 역사적 행위를 설명하기 위해 그 어떤 '과학적' 방법도 갖지 못한 시도―과 "새로운 방향"―여타의 모든 과학들과 마찬가지로, 이론적 질문과 방법론적 원칙을 통해 접근하려는 시도―을 구분하였다. 람프레히트에 따르면, 역사에 대한 과학적 혹은 학문적 연구라는 낡은 개념은 역사가들이 관찰한 현상 이면에 역사에 일관성을 부여하는 거대한 역사적 힘이나 '이념'이 작동한다는 형이상학적 가정에 기반한 것이었다. '새로운 역사과학'은 역사학을 체계적인 사회과학과 제휴시키는 것을 목표로 하였다. 그렇지만 『독일사』에 제시된 람프레히트의 핵심 개념, 즉 모든 시대에 걸쳐 변함없이 흐르고 있는 '민족정신 Volksseele'의 개념은 진지한 사회과학보다는 독일 낭만주의 철학에 그 뿌리를 두고 있었다. (...) (58~59쪽.)
(...) 1888년에 에밀 뒤르켐(Emile Durkheim)은 「사회학 강의 Cour de science sociale」에서 역사학이 과학의 지위를 지닌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았다. 그 이유는 역사학은 특수한 것에 관심을 기울이지 경험적 검증을 할 수 있는 일반적 진술을 목표로 하지 않기 때문이었다. 경험적 검증이야말로 과학적 절차와 사고의 핵심을 구성하는 것이었다. 기껏해야 역사학은 엄격한 과학이 될 수 있는 사회학에 정보를 제공하는 보조 과학이 될 수 있을 뿐이었다. (...) (61쪽.)
제2차 세계 대전이 종전된 후 20년 동안에 스스로를 '혁신주의 역사가들'이라고 자칭했던 '신사학파'가 견지한 과학적 전제뿐 아니라 그들의 정치적 전제까지도 의문의 대상이 되었다. 냉전 시대에 미국 역사가들은 새로운 국민적 합의를 발견하였다. 그들은, 유럽과 대비해 볼 때 미국은 이데올로기적 분할이 존재하지 않았고, 남북전쟁을 제외하고는 심각한 갈등도 존재하지 않은 진정한 계급 없는 사회라고 파악하였다. 그들에 따르면, 남북전쟁조차도 노예 폐지론자들과 그들에 대한 급진적인 적대자들이 이데올로기적 열정을 개입시키지 않았더라면 예방될 수 있었다. 그들은 팽창적인 자본주의적 시장 경제가 계급 갈등의 최종적 요인을 제거했다고 믿었다. 이러한 맥락에서 대니얼 벨은 1960년에 "이데올로기의 종언"을 선언하였다. 냉전 시대의 초기에 미국 역사와 미국 사회는 점차 '자유 세계'의 모범으로 부각되었다. 냉전 시대의 역사가들이 보기에, 산업적 효율성을 성취하고 대중적 소비 시장을 창출한 사회는 현대 세계의 현실에 부응하는 역사학과 사회과학을 필요로 할 수밖에 없었다. 이를 위해서 컴퓨터가 제대에 등장하였다. 점차적으로 계량적 방법이 미국뿐 아니라 영국, 프랑스, 스칸디나비아 및 여타 국가에서, 심지어는 사회주의 국가에서도 역사 연구에 도입되었고, 계량화는 사회과학이 과학적 분과라는 주장을 강화시켰다. (75~76쪽.)
엄밀과학을 모델로 삼았던 역사 서술의 가장 중요한 옹호자로는 미국의 '신경제사 The New Economic History' 연구자들을 들 수 있다. 신경제사가들은 고전경제학의 전제에서 출발하여 정치와 사회에서 분리된 경제 성장의 모델을 가지고 작업하였다. 따라서 『철도와 미국의 경제 성장 Railroads and American Economic Growth』이라는 유명한 '반 사실적 contrafactual' 연구에서, 로버트 포겔과 더글러스 노스(Douglass North)는 경제 자료만을 이용하여, 철도가 발달하지 않았던 미국 경제가 어떻게 달라졌을까 하는 질문을 제기하였다.
신경제사는 다음의 네 가지 기본 전제를 바탕으로 작업을 수행하였다. 1) 일반적으로 경제 행위를 지배하는 유효한 법칙들이 존재한다. 본질적으로 애덤 스미스(Adam Smith)와 데이비드 리카르도(David Ricardo)가 공식화한 것과 일치하는 법칙들이다. 이러한 법칙들은 결코 아무런 제약 없이는 작동하지 않는데, 그 이유는 정치적·이데올로기적·종교적 그리고 여타의 힘들이 그렇게 하는 것을 저지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법칙들은 경제가 이상적인 자유시장의 조건 하에서 어떻게 기능하는지에 대한 이론적 모델을 보여 준다. 2) 자본주의 경제는 지속적인 성장을 특징으로 하는데, 월트 로스토우(Walt Rostow)가 『경제 성장의 단계들: 비공산당 선언 Stages of Economic Growth: Non-Communist Manifesto』에서 주장했듯이, 그러한 성장은 모든 근대화된 사회와 근대화 도정에 있는 사회에서 유사한 형태를 취한다. 따라서 로스토우 역시 "산업적으로 좀더 발달된 나라만이 저개발국에게 그 자신의 미래상을 보여준다"라는 마르크스의 공식을 받아들인다(이러한 전제에 반대하는 알렉산더 거센크론(Alexander Gerschenkron)은 다른 나라들은 영국보다 늦게, 그리고 영국과는 상잏나 정치적·사회적 조건 하에서 산업화를 시작했기 때문에 완벽한 비교가 불가능하다고 주장하였다). 3) 경제적 근대화의 과정은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서구 산업 국가들이 보여 주었던 것처럼 정치적 근대화, 즉 자유시장 사회와 자유로운 의회 민주주의로 필연적으로 연결된다. 4) 계량적 방법은 경제적 과정뿐 아니라 사회적 과정에도 적용될 수 있다. (78~80쪽.)
이러한 저자 가운데 그 어느 것에서도 개인들의 행동이 결정적인 역할을 담당하는 역사 이야기에서, 이를 끌고가는 지도적이고 핵심적인 제도가 보이지 않는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그렇다고 이것이 정치의 역할이 무시된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봉건사회를 검토한 블로크의 연구에서도 정치는 기본적인 역할을 수행하고 있지만, 다만 독일의 연구 방식과는 다른 것이었다. 후자는 봉건제의 형태적 측면, 즉 정치·교회·사법 제도에 초점을 맞추었던 반면, 블로크는 봉건제를 인류학적으로 접근하여 인간 상호 간의 관계의 '복합체'로서 이해하였다. '복합체 complex'라는 용어를 써서, 나는 의도적으로 '체제 system'라는 단어를 피하고 있는데, 이 단어는 인간 행위를 너무나 객관화하고 물화시키는 것으로 이해되어 '아날' 역사가들에 의해 거의 사용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같은 이유로 '구조 structure'라는 개념에도 주의해야 하는데, 이 기념은 '아날' 역사가들에 의해 사용되고 있다. 그들의 강조점이 '구조'에 있다는 것은 확실하다.
19세기 역사 서술에서 핵심적 위치를 점유한 개인들은 그들의 저작에서 거의 언급되지 않고 있다. 예를 들면, 블로크의 『봉건 사회』에서 왕들은 거의 등장하지 않으며, 등장한다 하더라도 단지 주변적 인물로 처리되고 있을 뿐이다. 지중해에 대한 브로델의 책에서 왕들은 지중해 지역의 정치사에 관한 독립된 장에 속해 있는데, 이 장은 그 지역의 초시간적인 지리적 배경과 느리게 변화하는 경제적·사회적 구조를 다루고 있는 앞선 두 개의 장과는 별다른 유기적 연관을 맺고 있지 않다. 개인들은 르 르와 라뒤리의 14세기 초 이단자의 마을인 몽타이유에서 다시 등장한다. 그는 여기서 일단의 이야기들을 통해서 오래된 민중문화를 구현하는 갑남을녀를 묘사하는 역사인류학으로의 진입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92~93쪽.)
(...) 톰슨은 마르크스로부터 계급 개념과 함께 "계급 경험은 대체적으로 인간이 태어나면서 속하게 되는―또는 비자발적으로 들어가게 되는―생산 관계에 의해 결정된다"는 주장을 채택한다.
그러나 여기서 계급은 "하나의 '구조'나 심지어 하나의 '범주'가 아니라, 인간 관계에서 실제로 발생하는(그리고 발생했다고 증명할 수 있는) 어떤 것으로" 파악되어야 한다. "계급 의식은 이러한 경험이 문화적 차원에서 다루어지는, 요컨대 전통, 가치 체계, 관념 및 제도적 형식으로 구현되는 [의식인 것이다]." 따라서 톰슨은 '원형적 prototypical' 노동계급이란 관념을 거부하고, 그 대신 특정한 역사적 맥락 속에서 출현한 '구체적인 영국 노동계급'으로 전환한다. 문화를 강조한다는 것은 인간 관계를 객관화하는 과학적 방법으로부터 떠나서 문화를 구성하는 질적인 요소에 대한 이해를 산출하는 접근 방식으로 전환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에 따라 그는 문화, 예술, 민간 전승, 상징에 의존하기에 이르렀다. (138쪽.)
(...) 『역사 작업장』 지를 여타의 역사 학술지와 구별시킨 것은 그것의 사회주의적 헌신―『과거와 현재』 지의 초창기 기고자의 대부분이 공유했는데, 이 학술지의 최초 편집진의 절반은 공산당원이었다―이 아니라, "대학 동료 간의 폐쇄된 집단보다는 폭넓은 민주적 독자에게 도달하고 그들에게 봉사하기" 위하여 전문 역사학의 한정된 테두리를 벗어나려는 명백한 의도였다. (...) 창간호의 권두언은 역사 연구의 전문화에 반대하는 긴 연설로 시작한다. 여기서 이러한 전문화는 역사 연구의 "점증하는 파편화"와, 정치·사회와의 무관함, 자율성 상실, 그리고 자본주의 사회에 깊이 뿌리내린 학계의 경직성을 낳았다고 간주되었다. (...) (141쪽.)
『역사 작업장』 지는 분과적 경계를 넘어 서로 연계를 이루려는 목표를 달성하는 데 성공했지만, 이는 또한 다른 중요한 학술지들, 특히 『아날』, 『과거와 현재』, 『역사 잡지 Quaderni Storici』 및 『학제간 역사 잡지 Journal of Interdisciplinary History』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한편 전문 역사가와 제도권 밖의 연구자들 간의 간극을 좁히는 데는 그다지 성공적이지 못하였다. 1990년대 중반까지 기고자의 절대 다수는 대학이나 연구소에 소속해 있던 사람들이었다. 이 잡지가 창간 시에 가졌던 신념과 목적 가운데 무엇이 남아 있는가라고 우리는 물을 수 있다. 마르크스주의의 목적론뿐 아니라 사회와 정치적 실천에 대한 이해에 필수적이었던 계급 개념도 구제할 수 없을 정도로 흔들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갑남을녀에 다가가서 그들을 이해하려는 역사 서술에 대한 헌신은 여전히 남아 있다. (145~146쪽.)
민권과 베트남 전쟁을 둘러싼 갈등으로 미국에서 촉발되었던 1960년대 후반의 분쟁은 당시의 정치·사회적 조건에 대한 비판에 초점을 두었을 뿐 아니라 고도로 산업화된 사회에서의 삶의 질을 겨냥한 것이었다. 계량적인 신경제사뿐 아니라 마르크스주의의 근간을 이루었던 진보와 과학에 대한 믿음은, 기술이 산업 국가를 변모시키고 개발 도상국에 영향을 미칠 때 동반하는 위험과 무자비성 때문에 점차적으로 문제시되었다.
버클리, 파리, 베를린, 그리고 프라하에서 일어났던 1960년대 말의 학생 운동이 서구의 자본주의와 소비에트 마르크스주의 모두를 반대했다는 사실을 인식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 점은 역사 서술의 전개에서 중요한데, 그것을 바탕으로 통상적인 사회과학적 모델이나 사적 유물론이 왜 설득력을 상실했는지를 이해할 수 있다. 사회과학적 모델과 사적 유물론 모두 거시 역사적·거시 사회적 개념에서 출발하는데, 국가, 시장, 혹은 마르크스주의의 경우에는 계급이 그 핵심을 구성한다. 두 경우 모두 과학적으로 조정된 성장의 가능성과 긍정성에 대한 확고한 믿음을 당연하게 받아들인다. 정통 사회과학과 정통 마르크스주의가 지향했던 사회 구조와 사회 과정에 초점을 맞추는 연구들은, 이전에는 무시되었지만 이제는 그 자신의 정체성과 역사를 주장하는 사람들이 차지하는 공간을 거의 고려하지 않았다. 더욱이 사회과학과 마르크스주의 역사서술 모두 일상 생활을 실존적 측면―물질적인 측면뿐만 아니라 희망과 공포와 같은 감정적인 측면―에 거의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근대 서구 문명의 과정과 특성에 대한 비관적인 견해가 대다수의 '신문화사 New Cultural History'에서 핵심적 위치를 차지하였다. 이러한 새로운 역사는 마르크스주의와 역설적인 관계를 유지하였다. 그것은 역사 서술의 해방적 기능과 관련된 마르크스주의의 견해는 공유했지만, 갑남을녀가 해방되어야 할 속박의 구조에 대해서는 고전적 마르크스주의자들과는 상당히 다르게 이해하였다. 착취와 지배의 원천은 일차적으로 정치나 경제와 같은 제도화된 구조가 아니라, 인간이 타인에게 권력을 행사하는 수많은 인간 상호 간의 관계에서 발견되었다. 따라서 젠더 또한 새롭고 의미 있는 역할을 수행한다고 여겨졌다. 푸코가 권력 및 권력과 지식 같의 관계에 대한 분석가로서 마르크스를 대체했던 것은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152~154쪽.)
두 저작(『치즈와 구더기』, 『Inheriting Power: The Story of an Exorcist』―옮겨적은이) 모두 '미시사'의 보편적인 특징을 공유하여, 특정한 지방의 개인에 관심을 집중하고, 좀더 큰 규범적 제도에 비해 이러한 지방적 배경이 지니는 차이를 강조한다. 양자 모두 사회적·정치적 배경을 신중하게 재구성하는데, 초점은 다시 한번 광역의 초지역적 수준보다는 좁은 단위의 지역적 수준에 맞추어져 있다. 그렇지만 메노키오라는 주인공에 접근하는 긴즈부르그의 방식은 레비의 방식보다 훨씬 더 해석학적이다. 초점은 일차적으로 메노키오의 정신 세계에 맞추어져 있으며, 그의 정신에 들어가는 길은 그가 읽었던 텍스트를 통해서인다. 독서는 비인격적 과정을 통해 의미가 의사소통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엘리트의 정신에 의한 저술이 민중문화의 프리즘을 통해 방앗간지기 농부의 정신 속으로 들어간다. 이어서 긴즈부르그 자신의 상상력이 메노키오의 사고 과정을 재구성하는 데 필수적인 요소로 작용한다. 긴즈부르그는 이야기를 전개하는 과정에서 저자의 연구 전략을 끼워 넣는 방식으로 이야기를 중단하곤 했다. (171쪽.)
다음과 같은 몇몇 비판이 미시사가들을 향해 되풀이해서 제기되었다. 1) 소규모의 역사에 관심을 집중하는 그들의 방법은 역사를 일화적인 호고주의로 전락시켰고, 2) 과거 문화를 낭만화했으며, 3) 상대적으로 안정된 문화를 연구한다고 알려졌기 때문에, 급격한 변화를 특징으로 하는 근·현대 세계를 다룰 수 없고, 4) 이와 관련하여 그들은 정치를 다룰 수 없다는 것이다. (175쪽.)
전통적인 정치적·사회적 분석의 방법으로는 답하기 어려운 문제들이 존재하였다. 괴팅겐의 막스 플랑크 역사연구소에서 활동한, 미시사 집단과 긴밀한 관련을 맺었던 알프 뤼트케(Alf Lüdtke)는 20세기 독일인의 역사적 파국이 어떻게 가능했는지를 물었다. 전쟁으로 치달은 독일의 정책에 반대한다고 여겨졌던 사회민주주의 운동 내에서 조직된 노동계급이 대부분 1914년에 전쟁을 지지했던 것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또는 1933년에 노동자들 사이에는 사실상 나치에 반대하는 그 어떤 공개적인 저항도 존재하지 않았고 오히려 광범위한 지지만을 전개했다는 것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이전의 사회학적 계급 범주는 천착과 수정을 요구한다. 주의깊게 이루어진 심층 인터뷰는 정치적·사회적 태도들의 복잡성을 밝혀낼 수 있다.
이를 통해 독일적 노동 윤리에 고취되어 그 규범에 자부심을 지니고 있었던 노동자들이 자신들의 정치적 전망과 상관 없이 군수산업에서 노동을 잘 수행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정치적 반대와 지지의 양 극단 사이에는 노동 현장에서의 광범위한 저항의 스펙트럼이 다양한 형태로 존재하였다. (...)
독일에서 실행되었던 '일상 생활사'를 비판하는 일부 사람들은 "그것이 비교적 변함 없이 지속된 삶의 세속적이고 이상적인 측면에 관심을 집중함으로써 나치 체제의 이미지를 정상화한다는 우려"를 표했다. 이것이 니이타머 팀의 의도가 아니었다는 것은 확실하다. 구술사의 비판적 기능을 보여주는 실례로는 크리스토퍼 브라우닝(Christopher Browning)의 『보통 사람들: 101 예비경찰대대와 폴란드에서의 최종적 해결 Ordinary Men: Reserve Police Battalion 101 and the Final Solution in Poland』(1993)을 들 수 있다. 이 저서는 폴란드에서 유태인 출신의 민간인을 대량 학살하는 데 가담했던 210명의 전직 경찰대원들에 대해 1960년대에 함부르크 주 경찰청이 진행한 심문에 기초하고 있다.
브라우닝의 연구는 홀로코스트의 가해자들의 역사에 새로운 관점을 추가한다. 그때까지 홀로코스트는 라울 힐베르크(Raul Hilberg)의 말을 빌어 "악의 일상화"를 구현했던 아돌프 아이히만(Adolf Eichmann)과 같은 관료들의 책상머리에서 수행했던 광대하고 복잡한 행정적인 과정으로 이해되었다. 브라우닝은 이제 "파괴기계"의 계서제의 밑바닥에서 개인적으로 수백만 명에 대한 처형을 단행한 보잘 것 없는 인간들이 수행한 역할에 초점을 맞추었다. 101 예비경찰대대에 대한 그의 설명은 어떻게 대부분 노동계급 출신이었던 중년의 함부르크 경찰들이 뚜렷한 반유태적 감정 없이 폴란드에서 대량 학살에 가담했는지를 보여 주었다. 브라우닝의 지적에 따르면, "'일상 생활사'의 방법론에는 나치 독일의 역사에서 홀로코스트의 중심성을 필연적으로 축소시키는 그 어떤 것도 내재하지 않는다. 반대로 그것은 집단 살인이 동유럽의 점령지에 주둔한 독일인 요원들의 삶 속에 얼마나 깊이 새겨졌는지를 밝히기 위한 최선의 방법이라고 생각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주장은 우리를 다시 한번 미시사의 연구자들이 제기했던 방법론적 질문으로 이끈다. 역사에 대한 사회과학적 접근 방식을 반대하는 그들의 핵심 주장은 그러한 역사학은 과거에서 그 질적인 측면들을 제거하고 인간의 얼굴을 남겨 놓지 않았다는 것이다. 문제는 어떻게 역사에서 인간적·개인적 측면을 되찾을 수 있는가 하는 점이다. (176~178쪽.)
지난 15년 간의 역사 연구에서 '언어적 전환'은 이전의 사회경제적 접근 방식에 내재한 결정론을 깨뜨리고, 언어가 중심 위치를 차지하는 문화적 요소들의 역할을 강조하는 노력의 일환이었다. 그러나 스테드먼 존스가 지적하듯이, 이것은 사회적 해석을 언어적 해석으로 대체하는 것이 아니라 양자가 어떻게 연관되는지를 검토하는 문제이다. 언어적 분석은 정치사와 사회사, 문화사에서 이루어진 최근의 연구들에서 중요한 보조 수단이라는 것이 입증되었다. 우리가 이 장에서 다룬 역사가들은 언어와 수사 및 상징적 행위가 정치적·사회적 의식과 행동에 미친 영향을 강조했다. 하지만 대체로 "실재는 존재하지 않으며, 단지 언어만이 존재한다"(푸코)라는 극단적 입장을 공유하는 역사가는 거의 없었다. (...) (202쪽.)
우리는 20세기 역사 연구들에 대한 개관을 통해, 역사적 객관성이라는 "고귀한 꿈"이 깨졌다는 사실이 진지한 역사적 탐구의 쇠퇴로 결코 이어지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 주고자 하였다. 그 대신에 그 꿈은 접근 방식의 다양화를 불러일으키고 때때로 학문적 정교함을 증대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특정 사항들은 점차적으로 명백해졌다. 사료에 몰입함으로써 실재와 동일한 과거를 인식할 수 있다는 랑케 이후의 전문적 역사가들의 확신은 오래 전에 수정되었다. 그렇지만 역사가들은 랑케와 그의 동료들을 고무시켰던 역사적 정직성에 대한 헌신을 포기하지 않았다.
최근 역사가들은 객관성의 한계를 더욱더 인식했기 때문에 그들은 어떤 식으로든 객관적 지식이 가능하다는 환상 속에서 작업했던 랑케적 전통의 '과학적' 학파보다 정직성을 위태롭게 하는 편견들을 더 많이 인식하였다. 하나의 '기예 craft'로서의 역사학은 많은 측면에서 이전의 역사학이 의거했던 방법론적 절차들의 대부분을 유지하였다 .역사가들은 여전히 그/그녀의 사료들에 결박해 있고, 그/그녀가 그것들에 접근하는 비판적 장치들은 많은 면에서 동일하게 남아 있다. 그럼에도 우리는 이러한 사료들을 더욱 더 주의깊게 주시한다. 우리는 사료들이 직접적으로 실재를 전달하는 것이 아니며, 이러한 실재들을 재구성하는 이야기적 구성물이라는 점을 더욱 더 인식한다. 그렇다고 해서 그 구성이 아무렇게나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며, 학문적 발견과 학문적 담론에 의해 인도된다는 점을 또한 인식하는 것이다. (218~219쪽.)
교정. 초판 3쇄
22쪽 밑에서8줄 : 대니얼 벨(Daniel Bell1)5) -> 대니얼 벨(Daniel Bell)15)
93쪽 밑에서9줄 : 이야기들은 -> 이야기들을
118쪽 밑에서2줄 : 클라우스 텐펠데(Klaus Tenfelde)2) -> 클라우스 텐펠데(Klaus Tenfelde)20)
175쪽 6줄 : 미시가들을 -> 미시사가들을
208쪽 밑에서4줄 : 엘친 -> 옐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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