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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 죽이기 (김경현, 곰단지, 2024.) 본문

잡冊나부랭이

진주 죽이기 (김경현, 곰단지, 2024.)

Dog君 2025. 10. 31. 13:59

 

  우리나라만큼 서울과 수도권에 인구와 자본이 집중된 나라가 드물다고 하지요. 오죽하면 말은 제주로 보내고 사람은 서울로 보내라는 말도 있겠습니까. 본래는 짐승이건 인간이건 자기에게 걸맞는 환경이 갖춰진 곳에 가야 제 역량을 발휘할 수 있을 거라는 뜻이지만 이런 속담이 존재한다는 것 자체가 이미 서울과 수도권에 그만큼 많은 자원이 집중되어 있음을 반증합니다. 아마도 이는 삼면이 바다로 막혀 있는 작고 고립된 반도라는 지리적 조건과 비교적 일찍부터 중앙집권체제를 완성했던 역사적 경험이 중첩된 때문이겠지요.

 

  이런 대한민국에서 '지역' 혹은 '지방'이란 어떤 의미일까요. 돌이켜보면 '지역'이 마땅히 긍정적인 이미지로 인식되었던 적은 별로 없었던 것 같습니다. 영화와 드라마에 나오는 폭력배들은 어째서인지 항상 사투리만 썼고, 그런 데서 묘사되는 지역의 풍경도 어딘지 모르게 황량하거나 촌스러웠습니다. 〈전원일기〉나 〈대추나무 사랑 걸렸네〉 같은 드라마에서 인심 후한 시골이 묘사되기는 했지만 그것도 국내 버전의 '오리엔탈리즘'은 아닌가 싶어서 썩 흡족하지 않았던 것이 사실입니다. 기실 한국에서 '지방'이란 어딘지 모르게 덜 세련되고 촌스러워 보이는 것이었습니다. 쇠락한 지방 중소도시를 배경에 놓고 이촌향도나 지역소멸 같은 이야기를 더하면, 지방의 촌스러움이라는 게 그냥 막연한 이미지가 아니라 객관적으로 증명이 가능한 실체처럼 느껴지기까지 합니다.

 

  그런데 최근 들어 다른 모습이 종종 보입니다. 지역을 배경으로 한 드라마가 흥행하는가 하면, SNS의 영향력에 힘입어 지역의 축제나 특산물이 전국적으로 유명세를 타기도 합니다. 제주도를 배경으로 한 드라마 〈폭싹 속았수다〉가 큰 인기를 끈 것이나 '노잼도시'라는 별칭이 역설적으로 지역의 가치를 북돋운 대전의 경우가 대표적입니다. 물론 서울이 대한민국의 정치·경제·사회·문화의 중심인 것은 여전하지만 지역이 가진 나름의 가치가 예전보다 훨씬 더 많은 사람들에게 매력으로 다가가는 것 또한 엄연한 사실입니다.

 

  저는 이런 일이 어쩌다 얻어 걸린 우연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OTT와 SNS에 힘입어 지역의 가치가 새삼스럽게 재발견된 것은 맞지만 이런 일이 가능할 수 있었던 것은 그보다 훨씬 오래 전부터 지역의 역사와 문화를 고민하고 만들어왔던 노력들이 축적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지역의 역사와 문화에 대한 오랜 고민과 노력의 일단(一端)이 담긴 『진주 죽이기 : 김경현의 역사·문화·논개 비평』은 이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오랜 시간 진주를 무대로 활동했던 저자가 지난 이십여년간 다양한 공간에 기고했던 글을 갈무리하고, 글이 쓰여질 당시의 맥락과 이후의 상황을 담은 해설을 첨가해서 펴낸 책이지요. 저자의 전작인 『김경현의 진주이야기 100선 : 듣도 보도 못한 진주역사』가 『진주 이야기 100선』를 개정하는 과정에서 이도저도 아닌 어정쩡한 수준에서 그쳤던 것과 달리 이 책은 과거의 맥락과 현재의 해석을 균형있게 배치한 느낌입니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은 2000년대 초반 진주의 상황을 담은 사료(史料)로서의 가치도 있습니다.)

 

  저자인 김경현은 진주 곳곳에 숨겨진 이야기들을 발품 팔아 찾아낸 『진주 이야기 100선』(개정판은 『김경현의 진주이야기 100선 : 듣도 보도 못한 진주역사』)과 한국전쟁 당시 전선도시(戰線都市) 진주의 경험을 꼼꼼하게 정리한 『민중과 전쟁기억 : 1950년 진주』를 비롯해 여러 권의 책을 펴낸 역사 연구자입니다. 또한 의암별제 등의 지역축제에서 실무를 맡았던 현장활동가이기도 합니다. 저자의 이러한 정체성은 책의 곳곳에서 드러납니다. 교방문화라는 것이 본디 가부장적 유흥문화의 산물임을 모르지 않지만 그렇다고 해서 마냥 터부시하기보다는 현대적 관점에서 종합예술로 재해석할 수 있어야 한다는 주장은 역사학자로서의 엄격한 태도를 유지하면서도 현장에서 다져진 실무자로서의 창의적 해석능력이 발휘된 부분이라고 하겠습니다. "천릿길 진주"라는 말에서 서울에서 멀리 떨어졌다는 자격지심 대신 오랜 시간 영남 지역의 중심이자 결절점으로 기능해왔다는 자부심을 읽어내는 것에서는 지역 공동체에 대한 진한 애정도 느껴집니다.

 

  책에서는 다양한 논점을 짚고 있지만 그 중에서도 저자가 가장 많은 분량을 할애해 심혈을 기울여 이야기하는 것은 논개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지역적·역사적 상징을 대하는 우리의 태도에 관한 묵직한 질문이자 저자 나름의 답변이기도 하지요. 이 이야기의 밑바탕에는 논개에 대한 역사적 접근이 실증에만 맹목적으로 매달릴 경우 자칫 논개에 대한 풍부한 해석의 가능성까지 차단될 수 있다는 저자의 염려가 짙게 깔려 있습니다.

 

  기실 논개의 존재를 역사적으로 완벽히 실증한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한 일입니다. 논개에 대한 언급이 최초로 등장하는 유몽인의 『어우야담』 자체가 임진왜란 이후의 야담을 모은 것이라 이를 두고 실증을 논하는 것부터가 넌센스인데다가 논개에 대한 서술 분량도 비교적 소략하다고 합니다. 그랬던 것이 시간이 흐르면서 거듭 이야기가 덧칠되고 윤색된 끝에 오늘날 우리가 아는 논개 이야기가 된 것이라고 하지요. 사정이 이러하다면 여기서 역사적 진실만 체로 거르듯 섬세하게 가려낼 수 있을리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논개 이야기를 그저 허황된 가담항설로 치부하고 말 것인가 하면 그게 또 그렇게 간단치가 않습니다. 논개에 관한 이야기가 지금까지 다양한 형태로 변주되었다는 사실 자체도 역사적으로 중요한 관심대상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논개 이야기가 여러 세기에 걸쳐 수없이 덧칠되는 과정을 통해 당대의 사람들이 희구했던 바가 무엇인지가 드러납니다. 조선시대에 논개가 그토록 각광받았던 것은 한갓 기생조차 군주와 지아비를 위해 절개를 지켰음을 강조하고자 했던 양반 중심의 가부장제적 욕망이 반영된 결과인지도 모릅니다. 최근 들어 가부장제적 사회질서가 퇴조함에 따라 논개에 대한 해석 또한 변화하는 것도 당연한 귀결입니다. 최근의 시대정신을 반영하여 논개는 자주적으로 자기 삶을 선택한 여성의 상징으로 재해석되는 중이라고 하지요. 불평등한 젠더질서에 대한 문제의식이 함께 제기되는 것도 물론이구요.

 

  그러니 역사적 실체로서의 논개를 실증하기는 어려울지 모르지만 수백년간 사람들에게 영감을 주며 끊임없이 변주되어 온 상징으로서의 논개는 지금 이 순간에도 여전한 생명력을 자랑한다고 하겠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다양한 변주와 덧칠들이 곧 진주의 지역 정신이 되고 영감의 원천이 된다고도 하겠습니다. 논개의 존재를 기계적으로 실증하는 데만 매몰된 나머지 논개를 둘러싼 다양한 상상의 가능성을 닫아버려서 결과적으로는 논개를 고정된 이미지로 박제하고야 마는 여러 주장들에 대해 저자가 '논개를 죽이는 마타도어'라며 울분을 토했던 것은 아마 그 때문일 겁니다.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면 이야기는 다시 처음으로 돌아갑니다. 그간 지역의 문화가 '힙'하지 못하고 촌스러웠던 것은 지역의 문화를 해석하는 기준이 무용(無用)한 실증주의와 '애국'이니 '충절'이니 하는 고리타분한 가치에만 있었기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물론 그런 것들을 세련되지 못하다고 뭉뚱그려 버린 채 진지하게 다시 살펴볼 노력조차 하지 않았던 '세련됨 지상주의' 역시 사려 깊지 못하기는 마찬가지였구요.

 

  저는 그런 '실증주의적 고리타분함'과 '세련됨 지상주의'의 사이에 이 책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지역의 역사와 문화에 대한 다양한 가능성을 확보하기 위해 분투했던 기록이 이 책이니까요. 지난 20여년간 지역 문화의 일선에서 고민하고 분투했던 저자에게 경의를 표하며, 지금 현재 또다른 어딘가에서 비슷하게 고민하며 분투하고 있을 더 많은 김경현들에게 누구보다 먼저 이 책을 권하고 싶습니다.

 

* 이 글은 『나, 진주사람 김경현이오!』(김경현, 곰단지, 2025.)에도 실렸습니다. 책 저자의 허락을 얻어 올립니다.

 

  무엇보다 언론의 보도는 시대상을 반영하기에 먼 훗날 당대를 연구하는 사료로 인용될 수 있으므로 신중히 처리해야 한다. (...) (「신중해야 할 역사 발굴 보도」, 47쪽.)

 

  (...) 강상호 선생은 필자의 독립유공자공적조서 작성과 신청을 시작으로 여러 차례의 보류와 추가입증을 거듭한 결과 2005년 11월 마침내 대통령 표창을 추서 받음으로써 독립운동의 공훈과 독립운동가로서 지위를 인정받게 되었다.
  참고로 필자가 이 칼럼을 쓸 때는 보훈행정의 주무부처는 국가보훈처였으나 2023년 국가보훈부로 승격되었다. 이와 관련해 한 마디 덧붙인다면, 강상호 선생에 대한 공훈 추서와 선생의 무덤 등 후일담에 관한 내용은 『진주이야기 100선』의 88번째 이야기에 자세히 적었다. 그리고 필자가 강상호 선생의 묘비를 세우게 된 사연은 김주완 작가의 김장하 선생 취재기 『줬으면 그만이지』(피플파워, 2023)를 참조하길 바란다. (「국가보훈처장에 대한 공개 질의」, 55~56쪽.)

 

  (...) 이 말이 낙후된 도시의 대명사로 인식된다는 자기피해적인 생각에 따라 진주시는 어느 해 그 입간판에서 천릿길을 도려내고 '충절의 고장'이라는 진부하고 특색 없는 말을 채워 넣었다가 이마저 완전히 철거했다. 솔직히 말해 우리나라에서 충절의 고장이 어디 한두 곳뿐인가. 그 바람에 진주는 진주만이 갖고 있던 독특하고 향수 어린 상징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과연 천릿길 진주가 낙후된 도시의 대명사라고 할 수 있을까. 사실상 진주는 경상남도의 도청이 일제의 식민지정책으로 진주를 떠나기 전만 해도 고려시대와 조선시대 내내 영남 인재의 절반이 진주에서 난다는 명성을 날렸던 역사, 문화, 군사, 행정의 큰 고을이었다. 진주는 임진왜란 3대 대첩지이며, 기생문화의 본고장이며, 농민항쟁과 인권운동의 시발점이며, 문화예술제가 탄생한 곳이다.
  그래서 천릿길 진주는 서울에서 진주까지의 머나먼 천릿길만 뜻하는 것이 아니고, 역사와 문화의 고장 진주를 바로 경남의 중심지로 만들어 주는 자랑스러운 길이기도 했다. 스스로 위상을 추락시키는 어리석음을 범하지 말자. (...) (「'천릿길 진주'가 어때서?」, 71쪽.)

 

  말로는 역사책을 펴냈다고 하지만 그 책이 과연 진정한 역사책인가 뜯어봐야 한다. 특히 근현대사 서술에서 지독한 편향성과 왜곡성은 한둘이 아니다.
  가장 심각한 문제는 현 사회의 모순을 직접적으로 규정하고 있는 근현대사 부분을 의도적으로 외면하거나 삭제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시대착오적인 반공이데올로기가 끓다 못해 넘치고 있다. 그 대표적인 실례를 1995년 발간된 『진주시사』에서 찾을 수 있다. 편찬위가 집필자와 상의 없이 일방적으로 결정해 등재 예정된 원고를 여과 없이 무조건 삭제한 것이다. 그 이유는 해방정국과 6·25전쟁에 있어 좌우익세력의 투쟁상황을 기술했다는 것이다.
  특히 알레르기 수준으로 기피하고 있는 또 하나의 문제는 일제하의 친일파에 대한 부분이다. 진주시 명석면에서 지난해 펴낸 『명석면사』는 근현대사를 기술함으로써 향토사 편찬에 모범을 보였다는 평가를 받고 있지만, 근현대사 부분 가운데 일제 고등계 형사와 관련된 내용이 삭제됨으로써 그 벽을 넘지 못하고 말았다. 이 때문에 최근 진주시 집현면에서 발간되는 향토사는 아예 역사 부분을 빼놓고 문화 부분만 집필해 『집현면지』란 이름을 붙였다.
  이러한 친일파와 '빨갱이'는 중앙사에서도 쟁점이 되는 정치적인 문제이지만 향토사는 중앙사보다 더한 문제까지 겹쳐 있다. 즉, 지역에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토착세력이 편찬과정에 깊숙이 개입해 편향되게 집필을 유도함으로써 특정한 역사적인 사실의 왜곡은 물론 문중 자랑이나 특정인 찬양을 하기도 한다. 게다가 역사의식이 전혀 갖추어져 있지 않은 집필자가 그들의 구색맞추기에 편승해 굴절된 애향심으로 향토사를 적절히 포장해 준다. 따라서 지연, 혈연, 학연 등의 고질적인 연고 관계와 무소신으로 일관된 집필 등으로 역사적인 사실의 왜곡은 물론 나아가 문중 및 계층 간의 위화감마저 조성하고 있는 것이다.
  (...)
  무엇보다 시·군사가 지방자치단체장의 업적용으로 졸속 추진된다는 점도 문제다. 이는 지자제가 부활된 1990년대 이후 더 심각해졌다. 생색내기용으로 발간되는 시·군사는 호화양장본으로 분량만 늘리고 있어서 시·군민의 혈세를 낭비하고 있다고밖에 볼 수 없다. 과연 향토사가 무엇인가. 지방사이며 동시에 한국사의 기초를 구성하는 구체적인 경험의 지역사이다. 식민사관에 젖은 기득권과 토착세력에 의해 자행되는 공공연한 역사왜곡은 막아야 한다. (「부끄러운 역사 못 담는 향토지는 가라!」, 75~77쪽.)

 

  엄밀한 의미에서 진주기생이라고 하면 절개, 예능, 학식, 미모 등을 빠짐없이 겸비한 전통기생을 말한다. 결코 술집 주모와 같은 부정적인 의미의 하류기생들이 아니었다. 요즘으로 따지면 영화나 TV에서 주목받는 배우나 탤런트가 그들이다.
  게다가 진주기생에게는 논개의 후예라는 자존심이 있었다. 진주기생의 경우 대한제국시대에 매국노의 유혹을 단호히 거절하거나 국채보상운동에 나서기도 했다. 일제강점기에는 진주에서 3·1운동에 암암리 참여했고, 수난받는 만주동포를 구제하기 위해 자선음악발표회를 열기도 했다.
  하지만 의기의 전통은 일제시대에 많이 달라진다. 의암별제가 중단되었고 교방문화는 저질적인 일제의 유곽문화와 섞였다. 그나마 진주기생들은 기생조합과 권번을 통해 겨우 유지되었지만, 일제의 통제로 이른바 창녀화의 길을 걷는 바람에 전통기생 전체가 사회적인 경시의 대상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진주기생」, 259쪽.)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존여비를 당연시하는 가부장적 봉건사회에서 기생에 대한 차별적인 대우는 여전해 몸과 성을 파는 그런 천한 여자로만 인식하는 경향이 만연했다. 기생의 악·가·무도 남성들의 술자리에서 흥을 돋우는 방편일 뿐 예술은 안중에도 없었다. 기생이 불러주는 노래를 권주가처럼 따라 부르고 기생이 따라주는 술을 최음제처럼 마시고 취하고 그녀들을 희롱했다. 그리고 발정난 남정네들의 궁극적인 목적은 풍악을 울리는 주연(酒宴)이 아니라 기생의 몸을 탐하는 것이었다. 이처럼 기생을 오로지 남성의 성적 노리개로만 취급하여 창기로만 보는 것이 당연시되었다.
  그런데 오늘날까지 은연중에 남은 그러한 인식은 대단히 문제가 있고 매우 잘못된 사고방식이 아닐 수 없다. 기생은 기예가 출중한 여인, 즉 예기(藝妓)로 봐야 한다. 역사적으로 조선 말 노비제가 폐지되어 지방관아에서 육성되던 교방의 관기가 해산되고 궁중음악을 담당했던 여악마저 대한제국 시기에 폐지됨으로써 예기의 전통이 단절되는 듯했다. 하지만 예기의 전통은 일제강점기 이후에도 오랫동안 남아이었다. 그러므로 악기와 가무에 능한 다채로운 예능과 더불어 시문과 서화에 능한 출중한 문재까지 겸비한 다재다능했던 여인으로서 기생을 말해야 한다. 몸만 파는 매춘부나 창녀로만 보기에는 그녀들의 보여준 수준 높은 예술적 재능과 고귀한 의로움은 절대 가볍지 않다. (「진주기생」, 264~265쪽.)

 

  2000년 의암별제는 정말 살맛 나는 축제의 한마당이었다. 의암별제를 관통하는 축제의 정신을 '민족과 여성' 및 '전통과 현대의 만남'으로 설정하고 이에 따라 프로그램을 기획, 편성했다. 2000년 의암별제는 아직 해결되지 않고 있는 민족과 여성문제로서 '정신대' 문제를 축제에 거론한 것이다. 그래서 '정대협' 간사의 초청강연회를 비롯해 독립영화 〈숨결〉을 진주성 야외공연장에서 야간상영했다.
  의암별제의 부대행사인 '논개락페스티벌'을 추진하면서 알게 된 여성 락밴드 '헤디마마'의 음악은 아직도 몽환적이다. 특히 진주의 락밴드 '노코드'가 의암별제의 무대에서 하드코어로 부른 〈진주난봉가〉는 의암별제가 추구하는 전통과 현대가 어떻게 만나는지 잘 보여주었다. 진주의 문화계는 이러한 의암별제의 축제성과 실험성을 우려하기 시작했다. (「의암별제」, 268~269쪽.)

 

  이를테면 논개를 양갓집 딸로 만들어 신분을 드높이는 이유에 대해 경상대 김수업 교수가 밝힌 의문도 일리가 있어 보입니다. 즉 2001년 발간한 김 교수의 저서 『논개』(지식산업사)에서 고귀한 핏줄이 아니라면 감히 의로운 일을 할 수 없다는 편견이 작용한 것은 아닌지 의문을 제기했습니다. 다시 말해 논개를 양갓집 딸로 보려면 그럴 만한 근거가 있어야 하는데 진주관기로 순국한 논개가 나라로부터 의기로 공인된 이후 350년 동안 양가의 딸이었다는 이야기가 없다가 갑자기 현대에 와서 믿을 만한 근거도 없이 어떻게 양반집안의 딸로 바꿀 수 있는지 의아스럽게 생각했습니다. 김 교수는 논개의 신분을 기생이 아닌 양갓집 신분으로 바꾸는 주장에는 '거룩한 일을 하는 사람은 핏줄이 고귀하다'라는 잘못된 생각이 깔려있다고 생각하며, 핏줄이 비천한 관기는 논개처럼 순국하면 안 되는 것일까라고 의문을 표시했습니다. (...) (「논개의 성씨는 무엇입니까?」, 364~365쪽.)

 

  예컨대 조선왕조실록이나 승정원일기 등에 논개 이름이나 그녀의 이야기가 기록되지 않았다고 해서 논개의 실존 자체를 부정한다면 그것이야말로 민중의 역사를 외면하고 역사적 상상력을 빈곤하게 만들 뿐만 아니라 논개의 죽음을 일종의 해프닝으로 보는 편협한 시각이 아닐까요? 처음에는 단순한 사건이었으나 많은 사람의 생가고가 이야기가 덧붙여져 공감대가 형성되고 나중에는 위대한 역사적 서사가 이루어졌기 대문에 오래도록 과거의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어 전승될 수 있었습니다. 이것이야말로 민중의 보편적인 이야기가 아닐까요? 조선시대는 물론 어느 시대건 간에 왕만 존재한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왜 그대께서는 민중의 역사와 그 배경이 되는 역사적 구전과 설화에는 얼굴을 돌리며 외면합니까? 어찌 보면 역사의 거대한 흐름도 민중의 이야기로 만들어진 극적인 서사가 있어야만 시작될 수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까요? 잘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논개의 죽음을 부정하다니!」, 434쪽.)

 

  논개의 죽음은 결코 국가나 윤리의 잣대로만 재단하기 어렵습니다. 꼭 그렇게만 보지 말고 그녀가 가진 인간 본성에 대한 사랑과 그러한 마음에서 나온 행동으로 봐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어느 누가 논개에게 왜장을 껴안고 죽으라고 강요한 것은 아닙니다. 그녀에게 윤리적 부채나 도덕적 의무가 있었던 것도 아닙니다. 아무도 논개에게 그것을 요구할 권리가 없습니다. 혹시 논개가 그러한 의무감이나 부담감으로 어쩔 수 없이 투신한 것이라면 정말 안타까운 일이지요. 만약 그게 아니라면 왜 그랬을까요? 답은 명확합니다. 바로 그녀는 자기 정신과 자기 몸의 주인으로서 스스로 결정해 죽음을 선택한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이제 그녀의 죽음을 둘러싸고 더는 자기 편의적으로 생각하여 함부로 해석하지 맙시다. (「논개의 죽음을 부정하다니!」, 449쪽.)

 

  광해군이 세자였을 대 그의 스승이던 유몽인은 임진왜란이 끝난 후 격전지를 순회한 적이 있습니다. 그는 전쟁의 참화를 당한 민중의 마음을 어루만지고 위안해줄 일화를 수집할 목적으로 민간에서 떠도는 이야기를 모아 야담집을 썼습니다. 그래서 『어우야담』에 수록된 논개 이야기는 그 행간에 깃든 은유적 표현과 함의를 잘 파악해서 읽어야 하는 것이고, 그 속에서 당대의 사회상과 그녀의 죽음에 대한 시대정신을 찾아야 하는 것입니다. 이를 결코 국수주의적 과대망상이나 잡스러운 요설로 볼 것이 아니라 잃어버린 우리 역사와 문화의 원형질을 찾아내 복원하는 과정으로 이해해야 할 것입니다. (「논개의 부활」, 465쪽.)

 

  사실 그녀의 신분은 관기였지만 약하거나 순하거나 위축되거나 길들지 않았습니다. 그녀가 어떤 남자를 좋아했든 어떤 남자를 따라왔든 어떤 남자의 애인이었든 어떤 남자의 첩이 되었든 모두가 자신의 선택이었습니다. 논개는 누구에게나 한없이 선한 천사나 성녀도 아니었고 표독스러운 독기만 남은 마녀도 광녀도 악녀도 창녀도 아니었습니다. 논개는 거대한 역사의 격랑에 의해 자신의 삶이 산산이 부서지고 유린당했지만, 겁에 질리지도 비루하지도 초라하지도 기회주의적이지도 무력하지도 공포에 사로잡혀 있지도 않았습니다. 비록 논개가 선택한 죽음은 자신의 삶을 송두리째 바꾸어놓았으나 그녀는 죽음을 위엄 있게 맞이했고 결과적으로 그녀를 불멸의 여인으로 만들었습니다. 이제 우리나라에서 논개를 모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게 되었습니다. (「논개의 부활」, 479~48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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