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og君 Blues...
감춰진 역사, 아시아의 한국전쟁 (테사 모리스-스즈키 외, 한국학중앙연구원출판부, 2025.) 본문

역사책에 관심이 있는 분이시라면 한국전쟁을 바라보는 방법이 한 가지로 고정되어 있지 않다는 사실 정도는 잘 아실 겁니다. 전통주의, 수정주의, 신수정주의로 대표되는 관점의 변화에, 구술사의 연구방법과 미시적 접근법까지 더해지면서 한국전쟁에 대한 우리의 이해는 점점 더 깊어지는 중입니다.
그리고 약간 덜 알려진 감이 있습니다만, 한국전쟁 연구는 좀 더 다양한 국가를 포괄하는 쪽으로도 확장되고 있습니다. 종래 한국전쟁은 남한과 북한, 그리고 미국, 소련, 중국을 중심으로 설명되었습니다만 최근에는 중국 내 조선족의 반응이나 자본주의 진영 내 유럽국가에 미친 영향 등 한국전쟁에 연루되었던 다양한 국가들로 시야를 넓혀가는 중입니다. 이러한 최근의 연구경향은 한국전쟁이 우리가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넓은 범위를 아우르는 사건이었음을 말해줍니다.
테사 모리스-스즈키와 여러 연구자들이 함께 쓴 『감춰진 역사, 아시아의 한국전쟁』 역시 이런 경향의 연장선에 있습니다. 지난 2018년에 Rowman & Littlefield Publishers에서 나온 『The Korean War in Asia: A Hidden History』를 번역한 것으로, 저도 오래 전부터 눈여겨보던 책이었습니다. (영어라서 안 읽었죠 모...)
이 책에는 우리가 그간 알지 못했던, 한국전쟁에 연루된 다양한 국가의 이야기들이 담겨 있습니다. 일본인 포로 마쓰시타 가즈토시(松下一珍)의 이야기부터 몽골의 북한에 대한 군사 지원, 한국전쟁 당시 오키나와의 동향, 국민당 출신 중국인 첩보원의 활동 등 하나 같이 독자의 흥미를 끌기에 충분한 사례들입니다. 물론 이런 사례 몇 가지를 더 안다고 해서 우리가 아는 한국전쟁이 근본적으로 뒤바뀌지는 않겠습니다만 또한 이런 사례들이 우리의 이해를 더 풍성하고 도톰하게 만들어주는 것도 분명한 사실입니다. 이런 점에서 보면 그간 우리가 잘 알지 못했던 한국전쟁의 다양한 측면들을 더 많이 알고 싶은 분이라면, 이 책을 그냥 넘기시면 안 될 것 같습니다. ^^
다만 (역자도 지적하는 것처럼) 이 책에 실린 논문들의 완성도가 아주 균질하지는 않다는 점은 지적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각각의 소재들이야 대단히 흥미롭습니다만 일부 논문은 한정적인 사료, 특히 증언과 회고록에 지나치게 의존하여 쓰인 탓에 어디 가서 마음 편히 인용하기에는 다소 껄끄럽게 느껴집니다. (충분한 교차검토가 이뤄지지 않은 것 같아 보이니까요.)
한국전쟁이 발발한 지 약 3개월 반 후인 1950년 10월 3일, 아리야마와 그가 지휘하는 함선 MS06은 시모노세키로 가라는 명령을 받았다. 처음에는 쓰시마 해협에서 기뢰 제거 작업을 수행하는 임무로, 한국으로 병력과 물자를 수송하는 일본 선박을 보호하기 위해 파견된다는 말을 들었다. 그러나 곧 그들의 임무가 훨씬 더 위험한 임무라는 것이 밝혀졌다. 유엔군은 원산에서 북한군 전선 뒤로 상륙을 계획하고 있었지만, 한반도의 대부분을 장악하고 있던 북한군은 주요 항구를 보호하기 위해 수중 기뢰로 장벽을 구축했다. 전쟁 당시 미 해군이 동아시아 해역에 배치한 소해함은 단 10척에 불과했다. 당시 일본은 공식적으로 완전히 무장 해제된 상태였고 유엔 회원국이 아니었으며, 자국 헌법에 따라 어떤 식으로든 한국전쟁에 직접 관여해서는 안 되었다. 그러나 미 해군의 버크(Arleigh Burke) 제독이 일본 해상보안청장 오쿠보 다케오(大久保武雄)에게 일본의 소해정과 승조원들을 한국 해역에 머물던 미 해군의 소해함대에 합류시키라고 지시했다. 당시 요시다 일본 총리는 철저한 비밀유지를 조건으로 동의했고, 아리야마가 지휘하는 함선을 포함해 총 54척의 소해정이 한국전쟁에 투입되었다.
이에 놀란 소해정 승조원들은 이러한 재배치에 단호하게 반대했다. 아리야마 미키오도 일본이 다시 전쟁에 휘말릴 위험이 있고 자신의 지휘하에 있는 승조원들이 위험에 처할 수 있어 개탄을 금치 못했다. 그와 승조원들은 하선(下船)하여 명령에 따르지 않겠다고 저항했지만, 결국은 마지못해 다시 소해정에 탑승했다. 설득 과정에서 그들은 이 임무가 일본을 공산주의로부터 구하는 데 도움이 될 뿐만 아니라 일본 해군의 자존심과 명예를 회복하는 데도 도움이 될 것이라고 들었고, 이 임무에 참여한 인원들만 새롭게 만들어질 일본 해군에 들어갈 수 있다는 암시를 받았다.
(...) 인천항, 군산항, 진남포항 앞바다 등에서 일본이 수행한 주요 기뢰 제거 작전은 연말까지도 이어졌고, 일부 일본 소해정들은 1952년 중반까지도 한국 해역에 머물렀다. 약 1,200명의 일본 승조원이 기뢰 제거 임무에 참여했는데, 거의 대부분이 일본제국 출신이었으며, 이들 중 상당수는 전후 일본 해상자위대의 핵심 요원이 되었다. (테사 모리스-스즈키, 「강 건너 불? 한국전쟁과 일본」, 32~36쪽.)
정확한 숫자는 알 수 없지만 대규모의 일본인 기술자와 군사 지원 인력이 해운, 인양 등의 여러 회사를 통해 모집되어 주한유엔군사령부에서 일했는데, 1953년 1월 『아사히신문』 기자가 인천 인근 미군 기지에 고용된 일본인 47명을 인터뷰하는 데 성공했다. 일부는 전황에 따라 이리저리 옮겨 다니며 길게는 2년 동안 한국에 머물고 있었다. 1950년대 초반 기준으로 급여는 괜찮았지만 생활 조건은 열악했다. 노동자들은 박스와 빈 드럼통(임시난로로 사용됨)이 있는 막사에서 숙식을 해결했다. 기자가 이들 노동자 중 한 명으로부터 입수한 정보에 따르면, 주한미군에 고용된 일본인의 수는 이승만 대통령의 한국인 고용 압력으로 인해 급격히 감소하고 있었지만, 여전히 "부산 앞바다의 선박에는 (일본인 기술자 및 군수 지원 노동자) 수천 명이 있었다"고 한다. 한국전쟁에 일본군이 참전하고 있다는 북한과 소련의 주장은 부분적으로는 일본계 미국인 니세이(2세) 부대가 주둔하면서 일어난 논란이었지만, 여기에 제시된 증거는 그들의 주장이 전적으로 실체가 없는 것은 아님을 시사한다. (테사 모리스-스즈키, 「강 건너 불? 한국전쟁과 일본」, 45쪽.)
(...) 전쟁은 재일조선인 사회를 둘로 갈라놓았다. 친남한 단체인 민단이 남한 측에서 싸울 자원병을 모집하는 동안 친북 성향의 재일조선통일민주전선(약칭 민전)은 일본 좌익과 협력하여 일본에서 한반도로 향하는 미군/유엔군의 운송 및 물자 수송을 막기 위한 은밀한 방해 공작을 벌였다. (...)
그런데 조선인 사회 일각의 반전 활동은 생각지도 못한 결과를 초래했다. 일본의 전쟁 개입에 대해서는 기억되는 일이 거의 없지만 불편한 측면 중 하나는 다수 일본인 중 일부에서 소수 조선인 중 특히 좌익적 견해를 표명한 조선인을 향한 의심이 고조되었다는 사실이다. 1950년 12월 26일, 오카자키 가쓰오(岡崎勝男) 관방장관은 일본 정부가 한국의 이승만 정권과 "일본 내 조선인 극좌분자를 고국으로 강제 송환하는 데 합의"했다고 발표했다. 이 발언은 일본 언론에 널리 보도되고 의회에서 광범위하게 논의되며 재일조선인 사회의 대규모 시위를 불러일으켰다. 이듬해 1월 중의원 위원회에서 오하시 다케오(大橋武夫) 일본 외무상은 조선인 송환 문제를 일본 정부와 SCAP이 논의 중이지만 '불온분자'를 송환한다는 것에는 양측이 모두 동의했다고 밝혔다. 결과적으로 이 계획이 실행에 옮겨지지는 않았지만, 사보타주 또는 관련 행위에 가담한 혐의로 체포된 수많은 조선인들이 구치소로 보내져 한국으로의 추방을 기다렸다. 특히나 이승만 정부가 공산주의자로 의심되는 이들을 바라보는 관점에서 보면, 이들의 운명은 매우 불확실한 상태에 놓일 게 분명했다. 에필로그에서 살펴보겠지만, 이 사건은 이후 재일조선인의 미래에 큰 영향을 미쳤다. (테사 모리스-스즈키, 「강 건너 불? 한국전쟁과 일본」, 47~49쪽.)
한국전쟁은 만주 산업의 공간적 분포에도 변화를 가져왔다. 1950년대 초 만주의 산업 분포는 주로 이전 시기 이 지역에 대한 일본의 집중 투자에 의해 이루어졌는데,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주로 남만주의 주요 도시들에 집중되었다. 이러한 산업 인프라의 공간적 분포 패턴은 한국전쟁 중 남만주가 유엔군의 폭격 범위 안에 위치하고 있었기 때문에 중국의 안보에 위협이 되었다. 한국전쟁 발발 후 중국 당국이 일부 인프라를 남만주에서 북만주로 이전한 것도 이러한 이유 때문이었다. 중국 정부는 북만주의 하얼빈(哈爾濱)과 치치하얼(齊齊哈爾)에 중공업과 군사 인프라를, 지린(吉林)에 화학공업을 유치했고, 자무쓰(佳木斯)와 무단장(牡丹江)에는 면방직 공장, 아마 공장, 고무 공장들을 다시 지었다. 1950년 말까지 남만주에 있던 총 26개의 주요 공장을 북만주 헤이룽장성으로 이전했다. 여기에는 군수산업 10개 공장과 기계산업 9개 공장, 방직산업 3개 공장, 고무산업 2개 공장이 포함되었다. 이 중 12개 공장은 하얼빈에, 6개 공장은 치치하얼에 배치되었다. 실제로 새로 건설된 공장들은 거의 모두 이 북만주에 집중되었다. 물론 이러한 정책이 정부가 남만주의 산업 발전에 소홀했다는 의미는 아니었다. 1952년 이후 미국의 폭격 위협이 줄어들자 정부는 남만주 산업에 더 많은 투자를 시작했다.
이러한 산업 이전은 만주에서 중공업의 전반적인 발전으로 이어졌다. 〈표 1〉에서 볼 수 있듯이 1949년에서 1952년 사이에 랴오닝성의 총산업 생산량에서 중공업이 차지하는 비중이 급격히 증가했다. 이러한 증가의 이유는 정부가 지린성과 헤이룽장성 등의 북만주에 댛나 중공업 인프라 개발에 많은 투자를 했지만, 이 기간 동안 랴오닝성이 여전히 실제 산업 생산량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안산의 제철소, 푸순의 노천 탄광, 다롄과 뤼순(旅顺)의 화학 공장 등 랴오닝성의 중공업 확장 확충이 이 지역의 산업 생산량을 끌어올렸다. 한편 지린성과 헤이룽장성의 중공업 비중은 소폭 하락했지만, 이 두 지역의 총생산량이 이 기간 동안 두 배 증가했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
한국전쟁 기간 동안 중국 정부가 내세운 정치 의제는 만주를 전쟁 수행을 위한 산업 구조로 만드는 것이었다. 전쟁 수행을 지원하기 위해 사회를 급속히 산업화하려는 전략에 따라, 이러한 정치적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모든 가용 자원이 동원되었다. 군수산업을 근간으로 한 만주 사회는 필연적으로 경제 활동 전 분야에 대한 국가 개입이 증대했고, 그것이 이 지역의 산업과 인프라의 성격을 구성했다. 만주 지역의 경제 인프라는 비교적 잘 구축되었지만, 중국 정부는 전쟁 수요와 직접 관련된 산업에 대한 정부의 투자와 통제를 강화하여 이 지역의 산업 발전을 적극적으로 추진했다. (모 티안, 「한국전쟁이 만주 사회에 미친 경제적·사회적·인적 영향」, 69~73쪽.)
몽골의 대북 지원은 상당 부분 인도주의적 성격이 강했다. 유목국가인 몽골은 가축과 축산물을 공급하는 데 최적의 국가였다. 몽골 정부는 1951년부터 1955년까지 10만 마리의 가축을 한반도에 보냇으며, 북한으로 보낸 막대한 양의 축산물까지 고려하면 대북 지원에 사용된 가축의 수는 훨씬 더 많다. 예를 들어 몽골 정부는 1953년에 양 5만 마리, 염소 2만 마리, 소 500마리를 보내기로 했다. 처음에 북한 정부는 이 동물들을 산 채로 받기를 원했지만 나중에는 고기와 가죽으로 받기로 결정하고 몽골 정부에 가죽 가공까지 요청했다. 이는 식량과 가죽에 대한 당장의 수요를 충족시키기 위한 것이기도 했지만, 가죽을 신속하게 가공할 산업적 능력이 부족했기 때문이기도 했다.
몽골에서 한국으로 보낸 말과 여타 가축의 대량 육로 수송에 관한 이야기는 1950년대만 해도 전쟁에서 살아 있는 동물의 역할을 얼마나 소홀히 다뤘는지를 잘 보여준다. (앞으로 살펴보겠지만) 기병대는 현대식 무기 앞에서 무력했지만 말은 장비 수송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고, 다른 가축들은 계속 이동해야 하는 병사들의 식량과 의복 공급원으로서 필수적이었다. 기축 수송은 몽골(공여국), 북한(수혜국), 중국(수송 중개국) 간의 외교 관계에 기여했을 뿐만 아니라 이들 국가 간의 인적 교류도 증가시켰다. (리 나랑고아, 「분열된 나라에서 분단된 나라로: 몽골이 치른 한국전쟁」, 93~94쪽.)
한국전쟁은 같은 대의를 따르는 몽골인들을 하나로 모았지만 이후 오랜 기간 동안 분리되는 데도 영향을 미쳤다. 중화인민공화국은 한국전쟁을 승리라고 보면서 주권 국가로서의 자신감을 심어준 반면 소련은 한국전쟁에서 중국의 역할에 대해 미온적으로 지원하면서 두 사회주의 거인 사이의 간극이 벌어졌다. 중국은 언젠가 몽골이 중국에 편입되기를 바라며 몽골과 긴밀한 관계를 맺기를 원했지만, 소련은 몽골에 대한 통제를 강화하며 이를 거부했다. 1950년대 말부터 중국과 소련의 국교가 단절되면서 몽골과 내몽골 사이의 국경도 폐쇄되었다. 국경 양쪽의 주민들은 같은 사회주의 정치이념을 공유했지만, 국경이 다시 개방된 1980년대 후반까지도 여전히 서로 '냉전' 상태에 놓여 있었다. 남북한의 통일을 위한 전쟁으로 여겨졌던 한국전쟁은 아이러니하게도 한반도의 분단을 더욱 고착화했을 뿐만 아니라 동북아시아 사회주의 전선의 분열을 심화시켰고, 결국 몽골의 분단으로 이어졌다. (리 나랑고아, 「분열된 나라에서 분단된 나라로: 몽골이 치른 한국전쟁」, 118쪽.)
미군은 일부 중화민국 출신 중국인들을 비전투 역할에 장기간 고용했다. 이들을 고용한 주된 이유는 1950년 말부터 유엔군에 사로잡힌 수많은 중국어 구사 포로들을 처리하기 위해서였다. 만다린어에 대한 전문 지식이 부족하고 대규모 포로들과 의사소통을 해야 하는 상황에 직면한 미국은 중화민국에 도움을 요청할 수밖에 없었다. 맥아더 사령부는 대규모로 계속해 유입되는 중국인 포로들을 처리하고 신문을 지원하기 위해 중화민국에 영어를 구사하고 읽을 수 있는 중국어 전문가를 요청했다. (...)
처음으로 파견된 18명의 통역관은 중화민국 육군에서 11명, 해군에서 3명, 공군 및 외교부에서 각각 2명씩 선발했다. 이들은 중국인민지원군 포로들에게 자신이 타이완 출신이라는 사실을 밝히지 않겠다고 서약했다. 반면에 이들은 국민당에 도움이 될 만한 중국인민지원군 관련 정보를 제공했다. 국민당원이자 중화민국 육군 장교였던 궈정(郭靜)은 정치적 목적을 위해 포로들에게 자신의 신분을 드러낸 것으로 알려졌다. 궈정은 도쿄의 한 군사 시설에서 미국 신문팀의 일원으로서 중국어 통역관으로 일하던 중 미군 세 명으로 구성된 팀과 함께 류빙장(劉炳章)이라는 중국인민지원군 포로에 대한 정보 수집 신문에 참여하게 되었다. 류빙장은 한때 중화민국 육군의 중견 장교이자 국민당원이었으며, 1951년 2월 부산포로수용소에서 도쿄 인근 기지로 이송되어 4개월 동안 거의 매일 집중 신문을 받았다. 신문 기간이 끝날 무렵 궈정은 류빙장에게 자신이 국민당원임을 비밀리에 밝히고 쑨원(孫文)의 『삼민주의(三民主義)』 사본을 건네주며 다른 포로들에게 그 사상을 전파해 달라고 부탁하고, 수용소 내 반공주의자들을 역심히 조직하면 결국 타이완으로 가는 목표를 이룰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캐서린 처치먼, 「중화민국이 한국전쟁에서 승리한 방법」, 131~132쪽.)
한국전쟁은 미국 정부가 류큐열도의 군사적 통제 필요성을 검토하는 데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 동아시아에서 공산주의의 위협이 증가함에 따라 미국은 일본과의 평화조약에서 오키나와에 대한 영구적 지배권을 확보하고자 했다. 오키나와는 미국의 태평양 '방위선'의 연결을 확보하기 위한 전략적 요충지였다. 당시 국무장관 고문이던 덜레스(John F. Dulles)는 평화조약의 설계자였는데, 이 조약에는 류큐열도에 대한 "일체의 행정·입법·사법권"을 미국이 갖는다고 규정한 제3조가 포함되어 있었다. NSC 68과 NSC 60/1에 큰 영향을 받은 샌프란시스코 평화조약은 오키나와의 민간인을 통치할 수 있는 특별 권한을 미군에게 부여했다. (...) 사실 미국의 입장에서 오키나와는 일본과 평화조약이 체결된 이후에도 미국의 완전한 통제하에 남아 있어야만 하는 곳이었다.
오키나와는 한국전쟁 당시 미군의 핵심 기지였다. 북한군이 남한을 침략한 지 3일 만에 오키나와에 주둔하고 있던 B-29 중형 폭격기 부대가 한반도 상공에서 폭격 임무를 개시했다. 당시 오키나와에는 폭격기가 이륙할 수 있는 일본 열도에서 유일한 활주로가 가데나 비행장에 있었기 때문에 미군은 오키나와의 다른 비행장인 후텐마 비행장과 요미탄 비행장 등을 확장하는 등 기존 기지를 확장하고 새로운 기지를 건설하는 데 많은 자원을 투입하기 시작했다. 또한 1950년 7월에는 제19폭격기전대를 괌에서 오키나와로, 제22폭격기전대를 미국에서 오키나와로 재배치하는 등 오키나와의 공군력을 강화했다. 1950년 8월에는 제307폭격기전대도 미국에서 오키나와로 재배치됐다. 이 모든 부대가 한국전쟁에 참전했으며 1950년 말까지 오키나와에 주둔한 미 공군은 한반도 상공에 3,284회 출격해 2만 4,914.9톤의 폭탄을 투하했다. 미 육군 제29보병연대(일명 '투나인'으로 불림)는 1949년 5월 1일 오키나와 누푼자(登川) 기지에서 재편성되어 일부 대대가 1950년 7월 한국에 배치되었으며 연대 본부는 오키나와에 전쟁 내내 주둔했다. 마지막으로 미 제7함대 타격대가 1950년 6월 오키나와에 전진 기지를 설치하기도 했지만 주요 작전을 벌인 후 철수했다.
오키나와 사회의 군국주의화는 1950년대와 1960년대에도 지속되었지만 가장 급격한 변화를 겪은 것은 한국전쟁 기간 중이었다. 1950년 미국 의회는 오키나와 재건을 위해 5,000만 달러의 예산을 승인했다. 일본 기업들은 미국 및 필리핀 기업들과 함께 오키나와의 여러 사업 계획 추진을 위해 현장을 조사하고 입찰서를 제출했다. (...) 이들 기업이 직접 고용한 4,800여 명의 오키나와 주민과 더불어 기지 건설 과정에서 일본 본토의 일본인뿐만 아니라 필리핀과 중국인 노동자, 미국인 공사업자 등 많은 외국인들이 섬으로 유입되면서 지역 주민의 물질적·사회적 생활이 변화되었다.
(...)
오키나와의 신규 미군 기지 건설과 기존 기지의 확장은 지역 주민이 소유한 토지에서 이루어졌으며, 한국전쟁으로 인한 기지 건설 붐 때문에 오키나와 주민 소요의 토지가 강제로 수용되는 일이 급격히 많아졌다. (...)
오키나와에 미군이 주둔하기 시작하면서 전후 오키나와가 처했던 심각한 사회경제적 상황이 더욱 악화되었다. 아시아태평양전쟁 이후, 특히 한국전쟁 발발 이후 미군은 신규 기지 건설을 위해 대규모로 토지를 몰수했다. 경작지의 감소는 류큐열도 내에 가난과 정치적 긴장이 지속되는 원인이 되었다. 농작물의 감소는 오키나와의 식량 공급 감소를 의미했고, 지역 사회는 외국 원조에 더욱 의존하게 되었다. (...)
한국전쟁으로 오키나와 주둔 공군의 병력 수는 기존보다 세 배나 늘어났다. 섬의 풍경도 바뀌었다. 가데나 비행장에서 나하시 사이에 있는 여러 미군 시설들 때문에 '하나로 이어진 미군 기지'가 되어버렸다. (...) 군사 시설의 건설로 군사기지로서 이 섬의 군사력은 강화되었고, 그 결과 오키나와는 아시아에서 공산군과 충돌하면서 잠재적 표적이 되었다. (페드로 이아코벨리, 「오키나와를 휩쓴 제3차 세계대전의 공포」, 177~183쪽.)
제3차 세계대전 발발에 대한 예상은 미국 주도 블록 내에서도 실질적인 공포를 불러일으켰다. 일본과 오키나와에서 제3차 세계대전에 대한 공포는 한국전쟁과 밀접한 관련이 있었다. 일본인과 오키나와 주민들은 모두 한반도를 넘어서는 전쟁 확대의 위험성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일부 관측통들은 소련이나 중국이 전쟁에 전면적으로 개입하게 되면 일본을 포함한 전 세계로 전쟁이 확대되고 핵무기가 사용될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 (페드로 이아코벨리, 「오키나와를 휩쓴 제3차 세계대전의 공포」, 185쪽.)
야마다 젠지로는 수많은 중국인 포로 그룹이 한국 장교 한 명과 중국 국민당 장교 두 명이 포함된 교관들로부터 훈련을 받고, 몸에 새겨진 반공 구호가 새로운 문신으로 감춰지는 것을 목격했다. (...)
이 프로그램을 둘러싼 비밀주의는 첩보 임무의 본질적인 특성일 뿐만 아니라 전쟁포로를 스파이로 모집하는 것이 제네바협약을 심각하게 위반하는 행위였기 때문에 불가피했다.(오늘날까지도 여전히 비밀로 유지되고 있다) (...)
일본 내에서 한국전쟁 포로들을 신문하고 훈련시켰다고 야마다가 주장했을 때 그의 주장은 일본 주류 언론에 의해 대부분 무시되었다. 그러나 수십 년이 지난 후, 이 이야기는 첩보 계획에 참여했다가 살아남은 소수의 전직 포로들의 증언을 통해 확인되었다.(7장 참조) 미국이나 일본 정부는 이러한 포로 이송과 스파이 프로그램의 존재를 공식적으로 인정한 적이 없으며, 이와 관련된 미국 문서도 공개된 적이 없다. 일본 정부가 일본 영토에 한국전쟁 포로가 있다는 사실을 어느 정도 알고 있었는지는 아직까지 알려진 바가 없다. (테사 모리스-스즈키, 「미국, 일본, 한국에서의 첩보 전쟁」, 280~281쪽.)
교정. 초판 1쇄
33쪽 7줄 : 어떤 식으로 든 -> 어떤 식으로든
142쪽 6줄 : 사고방식에 -> 사고방식이
186쪽 6줄 : 거츠(Clifford Geertz)가 -> 기어츠(Clifford Geertz)가
'잡冊나부랭이' 카테고리의 다른 글
| 커피 이토록 역사적인 음료 (진용선, 틈새책방, 2025.) (0) | 2025.12.19 |
|---|---|
| 역사문제연구 57호 (역사문제연구소, 2025.) (0) | 2025.12.07 |
| 수학의 숲을 걷다 (송용진, 블랙피쉬, 2025.) (0) | 2025.11.03 |
| 식민지의 일상, 지배와 균열 (공제욱·정근식 편, 문화과학사, 2006.) 한번더 (0) | 2025.11.02 |
| 진주 죽이기 (김경현, 곰단지, 2024.) (0) | 2025.10.31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