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og君 Blues...

그 놈은 파업 중인 기자다 본문

잡事나부랭이

그 놈은 파업 중인 기자다

Dog君 2010. 7. 15. 16:36
1-1. 대학동기로 처음 만났으니 알고 지낸지 벌써 10년째다. 10년 전의 나는 온 세상을 다 바꿀 것 마냥 날뛰던 천둥벌거숭이였고 그 놈은 그런 나와 약간 친한, 하지만 내 생각에 대해서는 상당히 냉소적이었던 놈이었다. 지금에서야 말하는 거지만, 난 그 놈의 그런 자세가 좀 좆나많이 싫었다. (ㅋㅋㅋ)

1-2. 그 놈과 나는 본관이 같았는데 같은 것은 그 뿐, 살아온 환경도 가진 취미도 하고 있는 생각도 모두 달랐다. 모르지, 무의식적으로 그 놈이 가진 그런 배경이 좀 부러웠는지도. 어쨌든... 세세한 이야기를 다 하자면 신세한탄 혹은 폭로비방이 될지도 모르니 일단 이 정도로만.

2-1. 그다지 대단치 않은 서울4년제사립대 사학과를 나와서 먹고살길을 이리저리 찾던 녀석은 결국 남들 다 부러워하는 굴지의 방송국 기자가 되었다. (9시 뉴스에도 나오는 그 기자 말이다.)

2-2. 그래 뭐 굳이 숨길거 있나. KBS.

2-3. 그냥 기자도 아니고 KBS 기자씩이나 되었으니 풍기는 때깔은 한달에 고작 몇십만원을 손에 받아쥐는 나같은 대학원생의 그것에 비할 바가 아니다. 기자는'기자님'이라고도 불리지만 세상 어디 대학원생이 '대학원생님'이라고 불린다든?

2-4. 기자가 된 후 그 놈이 모처럼만에 학교에 온 것은 과학생회에서 주최한 멘토링행사 때문이었다. 후배들이 본받고 싶은 선배의 반열에까지 오른겐가.

3. 그렇게 만날 때마다 그는 권력의 방송장악이 뭐 어쩌고 무슨 프로그램의 폐지가 어쩌고 누구 사장 임명을 반대하고 어쩌고 하는 이야기로 혈압을 높이곤 했다. 좀 놀랐다. 이거... 10년 전이랑 완전 반대잖아.


4. KBS노조는 여차여차한 사정으로 파업에 돌입했다. 남들은 고액연봉자니 뭐니 시큰둥한듯 하지만 그런 생각들은 이들의 요구사항이 임금인상이나 노동조건 개선이 아닌 이상 근거가 좀 박약한 씨니컬함 아닌가 싶다.

5. 그 놈한테 투쟁기금을 모금한다는 문자가 드르륵 왔다. 여기저기 눈치껏 살펴보니 모든 지인에게 그런 문자를 보낸 것 같지는 않다. 파업한다는 놈이 그리 낯가림이 심해서 쓰겠나.

6. 딱히 토 안 달고 적으나마 돈을 좀 보내주었다. 잘 나가는 방송국 직원들의 파업에 똥구멍 찢어지게 가난한 대학원생이 돈을 보태야 한다는 사실이 어쩐지 좀 손해 많이 보는 느낌이 없는 것도 아니지만 나한테 아쉬운 소리는 안 하던 그 놈이 보낸 문자니까 무슨 이유든 있기야 있겠지 싶다.


7-1. 언젠가는 어떤 식으로든 파업은 끝날 것이다. 그리고 그 파업이 끝나면 그 녀석을 포함한 거의 모든 조합원들은 다시 폼나는 기자 딱지를 붙이고 일자리로 복귀할 것이다. 아마 나보다 더 많은 연봉을 받고 나보다 더 때깔나게 살겠지.

7-2. 그래서 돈이 아깝더거나 배가 아프다거나 하는 식의 말을 하고 싶지는 않다. 오히려 그래서 나는 그들이 더 잘해줬으면 좋겠다. 꼭 이겼으면 좋겠다. 우리들이 당신들에게 지지를 보내는 이유는, 당신들이 그동안 향유해왔던 지위와 명예, 그리고 그동안 철두철미하게 견지해왔던 약자에 대한 무관심과 조소(그리고 약간의 경멸도 포함한), 권력을 향한 노골적인 애널써킹에도 불구하고 당신들이 파업을 통해 지켜야 하는 그 가치가 세상 그 무엇보다 소중한 가치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8. 몇 푼 안 되는 돈이지만 좀 잘 해다오, ㅇㅇ아.

'잡事나부랭이' 카테고리의 다른 글

근황 6  (2) 2010.07.21
정읍 김동수 가옥  (2) 2010.07.20
근황 5  (0) 2010.06.24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대표팀  (0) 2010.06.23
Flying University of Transnational Humanities 후기  (0) 2010.06.17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