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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읍 김동수 가옥

Dog君 2010. 7. 20. 22:23
1. 강릉 선교장과 함께 조선시대 사대부 가옥의 전형적인 특성을 가장 잘 보존하고 있는 정읍 김동수 가옥. 왜 이름이 '김동수 가옥'이냐는 문제제기도 꽤 많이 있지만 여기서 할 얘기는 아닌 것 같으니 일단 그건 pASS. 지난 주말에 지도교수님과 대학원 동학들과 함께 갔던 답사에서 방문했는데 기억이 생생할 때 정리해두련다.


2-1. 김동수 가옥에 들어서기 전 먼저 눈에 띄는 것은 문 밖의 호지집이다. 호지집은 호외(戶外)집이라고도 하는데, 집을 가지지 못한 가난한 소작농들이 살던 집이다. 많은 블로그들에는 (심지어는 그 곳 안내표지판에도!) 노비들이 살던 집이라고 써놨는데 전부 다 개뻥이다. 조선시대에는 주인네 대문 바로 밖에 사는 노비들은 존재하지 않았다. 솔거노비는 주인과 같은 집에서 사는 애들이고 외거노비는 주인과 아예 다른 동네에서 독립된 가호를 유지했다. 호지집이라고 이름을 달아놓은 것은 전국에서 이 곳만이 유일하지만 이와 유사한 형태는 안동 하회마을 등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대가집을 둘러싼 이러한 초가집들은 사대부의 입장에서는 도적이나 외적의 침입을 지연시키는 방어선 역할을 하기도 했다는 사실.

2-2. 기왕 초가집 얘기가 나와서 말인데 새마을운동 시기의 지붕개량사업은 통일벼의 보급과 관련이 있다. 통일벼는 기존의 품종에 비해 수확량이 월등히 많았다는 사실은 이미 주지의 사실. 근데 이게 알곡이 많이 달리는 통에 볏단이 길지 않다는 치명적인 단점이 있었다. 볏단이 길지 않으니 이걸로 초가지붕을 이을 수가 없었고 이는 농민들이 통일벼 재배를 기피하는 하나의 원인이 되었다. (물론 최악의 밥맛도 한몫했다) 온 농촌의 초가지붕이 죄다 석면덩어리 슬레이트로 바뀐건 이런 사정이 있었다는 거.


3-1. 이제 대문. 대문 옆의 나무로 된 창살문은 환기를 위한 창...이라고 블로그에들 써있는데 그 역시도 다 개뻥이고 외부 침입자를 감시하기 위한 것이다. 한옥 대문 양 옆의 행랑채는 본디 노비들이 기거하는 곳으로, 노비들은 이곳에 기거하면서 외부를 감시하는 한편 대문에서 객을 맞는 역할을 수행하기도 했다. '줄행랑치다'라는 우리말 표현도 길게 이어진 행랑채에서 부리나케 달려오는 노비들의 모습에서 따온 것이니 알아두시길.

3-2. 무슨 대단한 외적이 침입해오는 것도 아닌데 외부 감시용 창을 만들 필요가 뭐 있냐고 하실지 모르나 그거 모르시는 말씀. 전통적으로 마을이 산과 개천을 끼고 있는 지리적 요건과 지주계급이었던 양반의 사회적 위치 때문에 이 정도 대가집은 언제나 도적들의 습격의 대상이었다. 실제로 현재까지 남은 양반 가옥이 몇 되지 않는 것은 근현대의 혼란기를 거치며 많은 가옥들이 하층민의 분노의 대상으로 지목되어 불탄 때문이다. 김동수 가옥 역시 대문 밖에 마름쇠를 뿌리고 거두는 것으로 하루를 열고 닫았다 한다.


4-1. 대문 안의 행랑채는 요래 생겼다. 마루를 통하지 않고 바로 대문으로 나갈 수 있게 만든 것을 보니 영락없는 노비 방이다.


4-2. 대문과 사랑채 사이에 다시 담과 작은 문이 있다. 이런 담과 문이 남은 것은 전국에서도 이곳이 유일하다 한다. 다른 집에서는 다들 헐어버렸다고 한다. (그러니까 원래는 다들 있었다는 말이다) 이 각도는 행랑에서 나온 노비의 시선에서 찍은 것인데 노비는 이 각도에서 대문의 손님이 누구인지 사랑채로 조용히 신호를 보내고 사랑채에 기거하는 남자 주인은 그를 보고 객을 돌려보내거나 맞이하거나 했다.

4-3. 사진으로 미처 담지는 못했는데 이 공간에는 행랑채 말고도 객이 타고 온 가마나 말을 보관해두는 공간도 있다.


5-1. 집안의 남자들이 기거했던 사랑채. 전통적인 한옥은 크게 행랑채, 사랑채, 안채로 구분된다. 행랑채는 앞서 말한 것처럼 노비가 생활하는 공간이고 사랑채는 남자들이, 안채는 여자들이 살던 곳이다. 사랑채는 안채보다 바깥에 위치해서 남자들이 기거하며 객을 맞이하고 그 집안의 바깥일을 돌보던 곳이다.


5-2. 궁이나 절, 사당 같은 고건축물을 자주 찾았던 사람이라면 기둥이 사각인 것이 이채롭게 느껴질 것이다. 그러나 둥근 기둥은 궁이나 절, 사당처럼 공적인 성격이 강했던 건물에서나 쓸 수 있었던 것이지 사가私家에서는 기둥을 네모지게 하는 것이 법도였다. 나무로 지어 기와만 올린다고 다 한옥이 아니다. 어디가서 전원주택 짓는답시고 기둥을 둥글게 하는 졸부가 있거들랑 호되게 혼내줄 일이다.


5-3. 또 하나 이채로운 것은 집을 지으면서 그 높이가 마당과 별반 차이가 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으례 대가집이면 집을 마당에서 높이 올려짓는 것이 상례이건만 이 집은 어찌된 일인지 집이 높지가 않다. 그냥 방에서 창 열고 노비들 불렀다가는 눈높이도 별 차이 안 날 판이다. 어쩌면 이 집 사람들은 천한 노비들에게 일을 시키면서도 그들에게 군림하기 보다는 한없이 몸을 낮추는 겸양을 실천하고자 했는지도 모를 일이다.


5-4. 담장을 넘지 않는 낮은 굴뚝 역시 그네들의 겸양이 묻어나는 듯 하다. 물론 굴뚝에서 나는 연기로 해충을 막자는 의도도 있겠지만 그보다는 끼니 거르는 소작농들 보기에 민망하여 밥짓는 연기가 담장을 넘지 않게 하려는 마음이다. 이웃을 배려할줄 몰라 사방 100리 안에 굶는 집이 있으면 만석꾼이 못 된다 했던가. 명가로 유명한 경주 최씨 집안에도 굴뚝이 이리 낮단다. 부자는 많은데 명가는 적은 이 나라 졸부들이 좀 배워야 된다.


6-1. 드디어 이 집의 메인, 안채다. 안채는 집안의 여성들이 생활하는 곳으로 집의 가장 깊숙한 곳에 위치한다. 행랑채와 사랑채로 가로막혀 외부에서는 전혀 보이지 않으니 그 집에서는 가장 내밀한 곳이다. 김동수 가옥의 안채는 마치 데칼코마니 마냥 정확하게 좌우대칭을 이루고 있다...고 말하고 싶지만 사실 잘 따지고 보면 꼭 그렇지도 않다.


6-2. 왼쪽은 시어머니를 위한 공간. 그래서 왼쪽의 부엌에는 차려놓은 음식이 식기 전에 방에 들여놓을 수 있도록 부엌과 방을 잇는 작은 쪽문이 있다. 허허 이 효심 보게요.


6-3. 며느리가 쓰는 오른쪽 방 바깥쪽에는 작은 툇마루가 딸려있다. 아니 사람도 없는 이 구석진 곳에 이 쓸데없어 뵈는 조그만 툇마루는 왜 만들어놨는고 하니...


6-4. 잘 보면 안채와 사랑채를 잇는 작은 통로가 있다. 남녀가 생활하는 공간이 서로 분리되어 있으니 부부지간이라 해도 쉬이 보기 힘든 것이 사대부가의 지엄한 법도 아니겠는가. 하지만 그렇게만 살았다가는 인류는 진작에 멸종되고 말았을 터, 그래서 어느 집에든 사랑채와 안채를 잇는 작은 통로를 두어 젊은 부부가 금슬을 다질 수 있는 길을 열어놓았다. 달도 어두운 어느 밤, 낮 동안 점잔을 빼던 젊은 남편은 아마 이 통로를 통해 제 각시를 만나러 갔을 것이다. 위에 저 툇마루, 서방님 맞던 곳이다.

7. 모두에 김동수 가옥은 전통 사대부 가옥의 전형적인 특징을 품고 있다고 했으니 내가 언급했던 거의 모든 점들은 다른 가옥들에서도 응당 발견할 수 있는 것이다. 고건축물 보며 사람들 앞에서 이빨 까고 싶으신 양반들이라면 위에 말했던 저런 것들에만 주목해도 1시간 정도는 넉넉히 연설하실 수 있으니 잘 참고하셔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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