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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51년, 안음현 살인사건 (이상호, 푸른역사, 2021.) 본문

잡冊나부랭이

1751년, 안음현 살인사건 (이상호, 푸른역사, 2021.)

Dog君 2026. 2. 13. 21:15

 

  1751년 여름 안음현(지금의 함양군 안의면)에서 발생한 기찰군관 두 명에 대한 살인사건을 추적합니다. 사건이 비교적 단순한 것에 비해 기록은 꽤 상세하고, 그러면서도 서술이 스피디하고 분량도 많지 않기 때문에 읽는 재미가 참 좋은 책입니다.

 

  방송에서도 말씀드린 것처럼, 이 책의 관심은 살인사건의 전모를 밝히는 것에만 있지는 않습니다. 이 책은 살인사건의 진실을 따라가면서 동시에 조선시대의 형사사건 조사 절차도 충실하게 설명합니다. 저자는 조선시대 형사 절차의 가장 중요한 목표가 '억울함이 없도록 하는 것'이었다고 말합니다. 피해자에게 억울함이 남지 않도록 정확하고 엄정하게 수사하는 것은 당연하고 용의자 역시 억울하게 죄를 뒤집어쓰는 일이 없도록 하려고 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목표 아래 수사 과정에서 수사관의 주관성이 개입하지 않도록 부검과 신문 과정은 복수의 담당자가 두 차례 이상 반복하여 진행하도록 했고, 다양한 '과학수사'의 방법도 동원되었습니다. 자백을 얻기 위한 신체형 역시 매우 세분화된 기준에 따라 엄격하게 집행되었습니다. 그러니까 현장조사관의 '감'으로 용의자를 대충 지목한 뒤에 무지막지하게 때려서 무조건 자백부터 강요하는 일은 일어나기 어려웠다는 것입니다.

 

  물론 이러한 원칙이 지켜졌다고 해서 그게 오늘날의 사법절차와 비슷한 수준일리는 없습니다. 당시의 시대적 한계 때문에 결국에는 자백이 가장 중요한 증거가 될 수밖에 없었기에 용의자의 자백을 이끌어내기 위해서는 가혹한 신체형이 동반되었겠죠. 『가짜 남편 만들기』와 『유유의 귀향, 조선의 상속』에서 한 집안이 풍비박산이 났던 것만 봐도 알 수 있죠. 저자 역시도 조선시대의 신문 과정에서 신중하게 세분화된 신문의 절차가 완전히 엄수되었으리라고 보지 않구요.

 

  하지만 저자는 다른 이야기 또한 덧붙입니다. 위와 같은 당대의 한계를 무시할 수는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착오를 최소화하기 위한 나름의 노력은 분명히 있었다는 것입니다. 부검과 신문 과정에서 객관성을 확보하기 위한 제도적 절차가 분명히 규정되어 있었고 '과학수사'를 위한 법의학서도 지속적으로 버전업되었기 때문입니다. 이는 오항녕의 『유성룡인가, 정철인가』과도 상통하는 부분입니다. 여기서 오항녕은 기축옥사는 국왕이 직접 주도하는 친국으로 시작했지만 거의 전 과정에 정승과 양사가 줄곧 함께 참여했기 때문에 특정한 개인의 주관과 감정에 따라 진행될 수도 없었다고 지적한 바 있죠.

 

  방송에서 들으셨겠습니다만, 저희 두 사람의 해석도 대략 이 지점에서 갈렸습니다. 어떻게든 자백을 받아내는 것에 수사의 초점이 맞춰진 탓에 가혹한 신체형에 거의 의존했던 당대의 참혹한 현실이 이 책의 한켠에 있다면, 수사관의 주관성을 최소화하고 가능한 선에서 과학수사를 하려고 하는 등 당대의 한계를 최소화하기 위한 노력들 또한 이 책의 한켠에 있습니다. 공존하기 힘들어 보이는 두 가지 모습이 공존하고 있었던 것이 조선이라는 나라의 진짜 모습이겠죠. 그렇다면 여러분의 생각은 어떠십니까?

 

  (...) 물론 조선시대가 현대에 비해 인권에 대한 기준이 낮았고, 오랜 역사적 발전 과정에서 축적된 사법시스템이 없었던 것도 사실이다. 그렇다고 조선이 지방관이 자기 마음대로 범인을 특정하고, 중형을 멋대로 집행할 수 있는 허술한 나라도 아니었다. 억울한 죽음과 그로 인한 2차 피해를 막으려는 조선의 국가시스템을 구체적인 사례를 통해 살펴보아야 하는 이유다. 이 같은 관점 아래 이 책은 조선시대 사법시스템의 존재와 그것의 적용 여부를 안음현 살인사건의 처리 과정에서 살펴보려 했다. (...) (7쪽.)

 

  (...) 유교 이념을 기반으로 성립된 조선에서는 범죄 정책에도 독특한 철학이 있었다. 관리를 선발하는 과거시험은 이념적으로 '개인의 도덕적 수양을 바탕으로 타인을 도덕적으로 교화시킬 수 있는 인물'을 뽑는 것이었다. 물론 과거시험의 현실이 이러한 이념을 실현시키는 장이 되지 못한 것은 분명하지만, 조선시대에 과거시험을 통과했다는 것은 수신修身을 완성한 후 치인治人의 자격을 가진 사람에게 주어지는 명예라고 생각했다.
  이러한 생각은 그대로 이상적인 지방관의 표상으로도 이어졌다. 좋은 지방관은 자신의 도덕성을 바탕으로 지역을 도덕적으로 교화하는 인물이었다. 이는 공자가 "송사를 심리한다면 나도 다른 이와 같이 결단하겠지만, 나는 반드시 사람들로 하여금 쟁송이 일어나지 않도록 할 것이다"라고 말한 것에서 연유했다. 송사를 통해 백성들을 심판하는 것이 중요한 게 아니라, 백성들을 도덕적으로 교화하여 소송 자체가 필요 없도록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는 의미다. 유학은 최소한 이념적으로라도 교화를 통해 범죄가 없는 사회를 꿈꾸었다.
  이 때문에 관료에 대한 평가도 범죄가 발생한 후 이를 잘 처리하는 사람보다는 범죄가 일어나지 않도록 교화하는 사람을 더 높게 평가했다. (42~43쪽.)

 

  (...) 조선시대 검시에서도 전문성과 객관성은 비껴갈 수 없는 황금률이었다. 이 가운데 검시의 객관성을 대변하는 가장 중요한 인물들이 바로 시친들이었다. 또한 피살자들의 입장을 대변할 수 있는 그들의 이웃인 절린과 민간 영역 대표인 권농이 참가했는데, 이날은 정귀봉과 변옥경이 그 역할을 수행했다.
  이와 더불어 검시 전문가의 참여가 필수적이다. 수령을 보좌하는 호장이나 기관, 장교, 형방과 같은 아전들은 수령이 수사 책임자이기 때문에 수사진의 일원으로 참여했다. 수령이 지휘하고 있는 사건의 수사와 용의자 체포 및 압송, 사건의 기록 등이 이들의 일이었다. 그리고 검시 전문인들로는 의생과 율관, 오작인 등이 있었다.
  그런데 이 가운데 정말 중요한 사람은 오작인이었다. 의생이나 율관이 의료지식과 법률지식으로 보좌했다면, 오작인은 직접 시신을 만지면서 검시를 진행하는 일을 맡았다. 원칙적으로 검시는 지방관의 일이었지만, 지방관이 직접 시신을 닦고 상처 크기를 재며 사망 원인을 찾을 수는 없었다. 수령의 손과 발이 되어 줄 사람이 필요했는데, 그들이 바로 오작인이었다. 시신을 직접 만지고 시신을 매장하는 등 일반인들이 기피하는 일을 맡아서 하다 보니 오작인은 검시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들이었지만 신분은 대부분 천인들이었다.
  이 때문에 특별하게 오작인을 전문인으로 키우는 과정이나 자격 같은 것이 갖추어져 있지는 않았던 듯하다. 사건이 많이 발생하는 관아에서는 관아에 소속된 오작인을 두고 있는데, 《증수무원록》에 따르면 이들은 감옥을 지키는 쇄장鎖匠과 같은 부류로 취급되었다. 다시 말해 관청에 소속된 아전이나 관노들 가운데 가장 낮은 사람이 감옥을 지키기도 하고, 살인사건이 나면 오작인 역할도 했던 것으로 보인다. 물론 이러한 일들을 많이 하다 보면, 일정 정도 전문성을 획득한 사람들이 나올 수 있었을 것이다. 이 때문에 조선 후기가 되면 말단이지만 관직의 형태를 갖춘 오작사령이 등장하기도 했다. 그러나 지역에서는 관노 가운데 시신을 옮기거나 염을 해주는 일을 맡은 사람이 하거나, 그렇지 않으면 지역에서 천한 일을 하는 살마들에게 자연스럽게 그 일이 맡겨진 것으로 보인다. 이 때문에 요령 없는 오작인들의 보고로 인해 검시 보고서가 엉망으로 되는 경우도 종종 있을 정도였다.
  (...)
  참검인들이 반드시 지켜야 할 원칙들도 있었다. 실제 참검인들도 그러한 규정을 지키면서 검시를 할 수 있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구성했다. 모두 짐작할 수 있듯, 가장 중요한 원칙은 검시 이전에 검시 대상이 되는 사람과 가까운 관인이나 친인, 그리고 법술에 능한 사람을 만나지 않아야 한다는 점이었다. 행여 감정적으로 검시를 하거나, 뇌물에 연루되어 부화되동하는 일, 그리고 법술에 능한 사람들에게 속임을 당하는 일 등을 막기 위함이었다. 이 때문에 참검인들은 함께 움직여야 했고 잠시라도 그 자리에서 이탈할 수 없도록 했다. 심지어 이들은 검시를 할 동안 타인을 만나지도 않고 뇌물도 받지 않겠다는 서약까지 하는 경우도 있었다. 검시가 끝난 후에는 검시 관련 서류인 〈검시장식〉에서 수결을 함으로써, 그 검시의 객관성을 확인해 주었다. (69~71쪽.)

 

  조선시대의 살인사건은 역모와 강상綱常을 범한 죄 다음으로 중범죄였다. 살인죄는 정상을 참작할 만한 사정이 없다면 사형으로 처벌했다. 살인범에 대한 사형, 곧 사람의 목숨을 빼앗는 형에 대해서는 오직 국왕이 최종적으로 확인해서 처결을 명할 수 있었다. 이를 원론적으로 설명하면, 살인사건은 왕이 직접 조사해서 처결을 내려야 할 정도로 엄중한 범죄였다는 의미다. 이 때문에 살인사건의 경우 왕명을 받은 관리(지방의 경우 지방관)가 직접 사건을 조사해야 했고, 수사 과정과 신문, 검시 결과 등을 비롯한 모든 내용들은 반드시 조정까지 보고해야 했다.
  특히 살인사건은 사람의 목숨과 관계된 일이어서 '억울함'이 발생하지 않도록 하는 데 조사의 초점을 둬야 했다. '억울함을 풀어 준다'는 의미는 피살자의 억울함을 풀어 준다는 의미가 1차적이지만, 동시에 진범이 잘못 확정되었을 때 발생할 수 있는 또 다른 억울한 피해자가 없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기도 했다. 따라서 진범을 확정하는 과정 역시 신중에 신중을 기하도록 함으로써, 억울한 피해자가 발생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 노력했다. 지방관은 억울하게 죽은 이의 '억울함'을 풀어 주면서, 동시에 또 다른 '억울한 죽음'이 없도록 해야 하는 1차 책임자였다. (97~98쪽.)

 

  (...) 모두 잘 알고 있는 것처럼, 조선시대 인권 개념은 신문을 받는 용의자까지 대상으로 하기에는 부족하기 이를 데 없었다. 근 30~40년 전만 해도, 자유민주주의를 표방하는 국가에서 공권력에 의한 고문으로 죽는 사람이 발생할 정도였으니, 조선시대에는 오죽했을까? 신문 과정에서 용의자를 고통스럽게 해서 자백을 받아 내는 일은 이미 오래된 관습이었다.
  원래 자백을 받아 내는 일은 형을 집행할 수 있는 당위를 확보하기 위한 것이다. 스스로 죄를 시인해야, 그에 합당한 벌을 부여할 수 있다는 인식에 따른 것이다. "네 죄를 네가 알렷다"라는 말에는 범인이 벌을 받는 이유를 인정하라는 의미가 담겨 있다. 유학적 도덕률에 따라 죄를 인정하고, 그에 대한 벌을 당당히 받아야 한다는 원칙론도 함께 적용된다. 이 때문에 자백은 수사 및 조사 과정에서 얻어 내야 할 최종 목표가 되었다. 그러다 보니 자백을 받아 내려는 노력이 다른 어떤 것보다 우선되었고, 이는 결국 자백을 받아 내기 위한 방법을 폭넓게 인정하는 결과로 이어졌다. (104~105쪽.)

 

  신문 과정에서 억울한 죽음이 발생하지 않아야 한다는 이념은 단순하게 장을 작게 만드는 데에서만 그치지 않았다. 신장으로 타격할 수 있는 신체 부위도 정해져 있었고, 한 번 신문에서 최대한 때릴 수 있는 횟수와, 고문을 사용해서 신문을 할 수 있는 주기도 정해져 있었다. 《대명률》에서는 신장의 지름이 작은 쪽을 활용해서 엉덩이와 넓적다리 부분을 나누어 칠 수 있도록 규정되어 있다. 그러나 《경국대전》은 타격 부위를 엄격하게 규정하여 "하단으로 무릎 아래를 치되, 정강이에는 이르지 못한다"라고 규정했다. 따라서 주로 종아리 부분만 때릴 수 있었다. 엉덩이 부위를 타격하다가 장기 등이 파열되거나 과다출혈 등으로 사망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경국대전》에는 고문을 위해 때릴 수 있는 횟수도 정해져 있었다. 종아리 부분만 때리더라도, 한 번 신문할 때 30대 이상 칠 수 없었고 신장을 사용해서 진행하는 신문은 하루 3회로 제한했다. 하루에 한 번, 그리고 그 한 번도 30대 이상을 때리지 못하도록 한 것이다. 또 이렇게 신장을 사용하여 신문하고 나면, 그다음 신장을 사용하는 신문은 3일 뒤에 가능하도록 했다. 3일간 상처가 나을 수 있는 시간을 준 것이다. 적어도 법에서만큼은 고문을 동반한 신문에서 사람이 죽지 않을 최소한의 방법까지 구체적으로 규정한 것이다. (109~111쪽.)

 

  복검은 살인사건을 대하는 조선의 철학이 잘 드러나 있는 절차다. 검시를 최소 두 번 이상 진행함으로써, 사인을 교차 확인하려 한 제도다. 이를 통해 조사의 객관성을 확보하고, 한 차례의 검시만으로는 놓칠 수 있는 단서들을 찾을 수 있도록 했다. 복검은 세종 때부터 왕명으로 시행한 절차로, 이후 조선시대 살인사건 조사의 원칙이 되었다.
  (...)
  특히 복검은 검시를 두 번'만' 하라는 규정이 아니라, 최소 두 번 이상은 '해야 한다'는 규정이다. 관할 지역 수령의 최초 조사와 대등한 위치에 있는 인근 지역 수령의 2차 조사 결과가 동일해야 객관적인 조사가 이루어졌다고 판단할 수 있었다. 이 때문에 초검과 복검의 결론에 차이가 있거나 검시 결과가 정확하지 않다고 판단되면, 감영에서 또 다른 검시관이나 차사원을 선임해 보앴다. 따라서 조사가 행여 부적합하다고 판단되면 복검 과정이 2~3차례 더 진행되는 경우도 있었다. 그만큼 조선시대 관리들은 사인을 정확하게 밝혀내기 위해 신중에 신중을 더해 검시를 진행해야 했다. 특히 이렇게 초동수사 과정에서 진행한 1차 검시 결과와 복검을 통해서 나온 2차 검시 결과는 최종적으로 감사가 보고서로 작성하여 조정에까지 올려야 하기 때문에, 경상감사로서는 절차적 정당성을 확보하고 검시 결과에 대한 다른 해석 가능성을 최대한 없에야 했다. (143~145쪽.)

 

  범인을 확정하는 단계 역시 제2의 억울한 피해자를 만들지 않기 위해 신중에 신중을 기해야 했다. 범인이 잘못 특정되거나 모함으로 살인 누명을 쓴다면 또 다른 억울한 죽음을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유에서 검시를 두 번 이상 하도록 한 것처럼, 신문을 통해 범인을 확정하는 과정도 몇 단계의 절차를 통해 객관성과 정당성을 확보하려 했다. 복검 제도가 죽은 이의 억울함을 낱낱이 밝히는 일이었다면, 동추同推에서 고복考覆으로 이어지는 신문절차는 살인사건 조사 과정에서 억울한 죽음을 만들지 않기 위한 조치였다.
  (...)
  동추는 일반인에게는 잘 알려져 있지 않은 조선의 형사절차 가운데 하나다. 조선시대에는 형사사건을 심리할 때 동추는 복검만큼이나 중요했다. 동추란 중형, 특히 곤장으로 때리는 장형 이상의 형이 예상되는 범죄에 대해서는 반드시 관리 두 명이 '함께 신문[同推]'하도록 규정된 제도였다. (...) 범인을 확정하는 과정에서 반드시 그 사건에 대한 선입견을 갖지 않는 관리가 함께 신문함으로써, 신문의 객관성을 확보하고 자칫 억울한 사람을 범인으로 규정할 가능성을 낮추려 했다. (147~149쪽.)

 

  이처럼 동추는 중대 범죄로 예상되는 사건에서는 '필수 과정'이었다. 그런데 문제는 동추가 중범죄를 대상으로 하기 때문에 취조 과정에서의 인권은 그리 중요한 고려 대상이 아니었다는 점이다. 특히 동추는 범인을 확정하는 과정이었기 때문에 최종적으로 범죄를 행한 사람이 자기 범행을 시인하는 '자백'이 다른 어떤 신문에서보다 중요했다. 본인 스스로 인정하지 않은 범죄에 대해 죽음으로 다스리는 것은 왕도정치를 행하는 군주의 자세가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동추에서도 신장이 난무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 보니 《경국대전》에서 규정된 신장의 크기나 타격 위치, 그리고 하루에 때릴 수 있는 횟수와 기일 등을 정확하게 지키는 것은 현실적으로 어려웠다. 동추관의 입장에서는 그러한 규정을 지키면서 자기 지역을 버려 두고 동추만 하고 있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게다가 이 사건의 경우 안음현감이 두 차례의 신문을 통해 자백에 가까운 진술을 받아 낸 상황이기 때문에 이 둘의 인권을 고려하기보다는 살인사건의 범인으로 특정하고 주범과 공범을 확인하는 과정이었을 것이다. 다른 신문에 비해 고문의 강도가 높았을 것으로 추정되는 이유다. (153~154쪽.)

 

  이와 같은 살인사건 조사와 처리 원칙은 '억울함'을 푸는 데 있었다. 앞에서 보았던 것처럼 '억울함을 푼다'는 것은 두 가지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하나는 원통하게 죽은 사람의 억울함을 풀어 주는 것이고, 또 다른 하나는 그 과정에서 또다른 '억울한 희생자'를 만들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 원칙은 형사사건을 처리하는 데 있어서 예나 지금이나 변하지 않는 황금률이다. 그러나 이 황금률은 과학적 한계나 시대·문화적 한계로 인해 무너질 때도 있었고, 동시에 조사의 미진함이나 조사관의 무능함 때문에 올바로 시행되지 못할 때도 많았다. 조선은 전자에 대해서는 어쩔 수 없는 한계를 가지고 있었지만, 적어도 후자에 있어서는 그러한 일이 없도록 다양한 정책들을 통해 시스템으로 작동할 수 있도록 만들어 왔다. 게다가 전자의 경우에는 시대적 한계가 분명했음에 불구하고, 당시 과학적 지식을 총동원하여 법의학서를 만들고, 이를 기반으로 한 발달된 형사처리 준칙을 제공하려 노력했다는 점 역시 눈여겨봐야 할 대목이다. (180~18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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