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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화기 한국 커피역사 이야기 (김시현·윤여태, 피아리스, 2021.)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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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화기 한국 커피역사 이야기 (김시현·윤여태, 피아리스, 2021.)

Dog君 2026. 2. 15. 21:51

 

  한국 커피의 초기 역사에서 가장 풍부하게 문헌을 인용한 책이라고 생각합니다. 많은 참고가 되겠습니다.

 

  동북아 3국 중 제일 먼저 커피를 만난 국가는 일본이었다. 일본은 1641년~1859년까지 나가사키의 데지마(出島)를 통해 네덜란드인과 교류하고 있었는데 18세기에 이르러 바로 그곳을 통해 커피를 접하게 되었다. (...)
  현재까지 밝혀진 일본에서의 커피에 대한 최초의 기록은 시즈키 타다오(志筑忠雄:1760~1806)라는 난학자가 1782년에 저술한 『만국관규(万国管窺)』라는 책에 남아 있다. 그는 이 책을 통해 "네덜란드 사람들이 항상 복용하고 있는 커피라는 것은 그 모양이 콩처럼 생겼으며 맛이 있다고 한다."고 기록하여 그들의 음식문화 중 하나로 커피를 소개하고 있다. (18쪽.)

 

  (...) 중국에서 커피에 관한 의미 있는 기록은 아편전쟁 이전에 발행된 『광동통지(廣東通志)』(1822)에 등장한다.(각주13)
  (...) 1839년에 마카오에서 출판된 '중영문사전(中英文辭典)'은 서양인 가정에서 일하던 중국인들이 지식을 위해 구비했을 것으로 추측되는데 이 책에서 서양식 찬구(饌具)들을 다음과 같이 열거하고 있다.

  如 吉時杯(Custard cup), 三鞭酒杯(Champagne glass), 紅酒杯(Claret glass); 食品如咖啡(coffee) 等

  (각주13) 『광동통지(廣東通志)』는 광동성 내의 사적, 기후, 풍속, 수리, 인물 예술문화 등을 기록하여 발행된 책으로 1535년 초판이 발행되었으며 그 후 몇 차례 증보 수정을 거친다. 위 기록이 등장한 책은 1818년 착수되어 1822년 완성된 제 6차 수정본이다. (23쪽.)

 

  한편 『벽위신편』은 1848년에 완성되었으나 한 번으로 저술을 마치지 않고 1879년 이후까지 내용을 추가하고 수정하기를 계속하여다. 그리하여 『벽위신편』의 본문에는 저자가 새로운 정보를 얻을 때마다 자필로 써넣은 주석들이 많이 남아 있다.
  (...)
  바로 이러한 과정을 거쳐서 그는 마침내 이 책 제2권 「이국전기(異國傳記)」 중 여송(呂宋) 즉 현재의 필리핀 지방을 설명하는 과정에서 『영환지략』을 인용하여 '커피'에 대해 기술하게 된다.

 

  『영환지략』에 따르면 스페인이 습격해 빼앗아 주인이 되었기에 그 나라를 소여송(小呂宋)이라 하고 본국은 대여송(大呂宋)이라고 한다. 명사(明史)에 따르면 스페인은 프랑스에 인접한 땅으로 그들과 문화가 비슷하다. 필리핀에서 담배와 커피―커피는 편두(扁豆)와 비슷하며 청흑색(靑黑色)으로 볶고 끓이는데 맛은 쓰고 향은 차와 비슷하다. 서양인들은 차 대신 음용하며 혹은 연유를 첨가하여 마시는 것이다.―카카오―과일 이름으로  즉 약료 중 가자(訶子)이다. 서양인들은 또한 차 대신 마신다.―가 생산된다. 또한 땅이 비옥하여 벼가 잘 자라고, 오곡이 풍부하다. - 『벽위신편(闢衛新編)』 제2권 「이국전기(異國傳記)」 여송(呂宋) 머리주석(頭註) (45쪽.)

 

  이러한 용품들이 무엇이었는지는 제4대 조선교구장으로 1856년 조선에 입국한 시메옹 프랑수아 베르뇌(Siméon-François Berneux:1814~1866, 한국명:장경일(張敬一))가 파리외방전교회 소속 신부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파악해 볼 수 있다. 여기서 주목해 볼 것이 바로 그의 요청 물품 중에 커피가 들어있다는 사실이다.
  (...)
  커피가 포함된 이러한 물품들을 반입해 달라는 위 요청에 대한 답은 파리신학교 장상인 루세이(Rouseille)에게 보낸 1861년 9월 7일자 서한에 등장한다. 베르뇌는 이 서한에서 이들의 짐과 요청한 짐들을 반입하는 문제 때문에 걱정이 많았으나 그의 집에 무사히 도착하였다고 적고 있다. 이는 지금까지 밝혀진 한반도에 커피가 들어온 최초의 기록인 셈이다.
  이후 베르뇌는 1861년 9월 30일 서한에서는 50리브르(약25kg), 1863년 11월 24일과 1965년 12월 4일자 서한에서는 각각 50카티스(catis:약30kg)와 100리브르(약50kg)의 커피를 요청한다. (61~62쪽.)

 

  (...) 정관헌은 어떤 용도로 쓰였을까?
  첫째 어진(御眞)을 봉안하는 장소로의 활용이다. 1900년 어진을 봉안하고 있던 선원전(璿源殿)에 화재가 발생하자(『고종실록』 고종 37년(1900) 10월 14일) 불타버린 어진을 새로 모사하기 위해서 각처에 있던 어진을 덕수궁으로 옮겨 오게 되었다. 모사는 착수 후 한 달 이내에 완성되었는데 이때 태조(太祖) 이성계(李成桂: 1335~1408)의 어진을 봉안할 장소로 정관헌이 선택되어 일시적으로 경운당(慶運堂)이라는 이름으로 불렸다.(『각사등록(各司謄錄)』 「궁내부래문(宮內府來文)」 1901년 2월 24일)
  고종의 어진(御眞)과 순종의 예진(睿眞)을 그리는 장소로도 채택되기도 하였고(『승정원일기』 고종 38년(1901년) 12월 13일) 태극전(太極殿)과 중화전(重華殿)에 봉안했던 어진(御眞)을 이봉(移封)하기도 하였다.(『승정원일기』 순종 2년(1908년) 11월 18일)
  다음으로 진찬(進饌)의 장소로 활용된 예가 있다.
  진찬이란 궁중의 잔치로 국가의 큰 경사를 맞이하여 거행되는 궁중연회를 말하는데 『고종실록』 고종 38년(1901년) 6월 28일 기록에 따르면 정관헌에서 명헌태후(明憲太后:1831~1904)에게 진찬을 행하였다. 명헌태후는 조선 제24대 임금 헌종(憲宗)의 계비(繼妃)로 이때의 진찬은 그녀의 칠순을 기념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 무렵 궁중연회의 사례를 보면, 외국사절을 접대할 때는 다과를 제공하였다. 반면 명헌태후의 진찬에서는 고종이 즐겼다는 커피는 물론 케이크조차 나타나지 않고 있다. 이는 그때까지 황실 내부의 의례가 시대의 변화에 큰 영향을 받지 않고 전통을 고수하였음을 보여준다. (...)
  마지막으로 휴식처로서 기능한 경우다.
  (...)
  이는 황량하게 변해버린 정관헌에서 고종과 영친왕(英親王:1897~1970)이 함께 휴식을 취했던 일을 회상하는 기사로 정관헌이 고종의 휴식처로 사용되었음을 말해주고 있다.
  (...)
  한편 대한제국 시기의 많은 화재 속에 살아남았던 정관헌은 일제강점기의 궁궐 파괴와 한국전쟁에서도 살아남았다. 덕수궁이 사적으로 지정된 것은 1962년의 일이었다. 이전까지 덕수궁 속의 중화전이나 함녕전 등 궁궐 속에서도 위계가 높았던 다른 건물에 비해 덜 중요하게 여겨지며 한때 내부 기둥 사이를 유리문으로 막아 덕수궁을 찾은 관람객들을 위해 차를 마시는 휴식처(喫茶室)로 활용되기도 하였다.
  이와 같은 복합적인 이유로 이후 "고종이 '정관헌'이라는 '다방'을 지어 커피를 즐겼다."(경향신문 1981년 10월 16일)는 말들이 생겨나게 되었으며, 오늘날까지 정관헌을 고종이 커피를 마시던 곳이라고 인식하게 된 것이다. (142~146쪽.)

 

  우리나라 근대적 다방의 효시는 후다미(二見)이다. 명동에 처음 생긴 다방이었던 후다미를 근대적 다방의 효시로 보는 이유는 식당과 겸업이 아닌 커피를 파는 것을 전업(專業)으로 하였기 때문이다. 『경성일보』 1927년 8월 21일 광고에 따르면 후다미를 티-룸이라고 명기하고 있다. 한편 지금까지 후다미의 개업년도가 1923년으로 알려져 있으나 동 광고에서 개점 1주년이라고 명기하고 있으므로 1926년에 개업한 것으로 추측된다. (203쪽.)

 

  일본과 돈의 가치가 같았던 우리나라의 경우에 커피 가격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1923년 8월 12일 『동아일보』 「월미도(月尾島)의 일야(一夜;하룻밤)」에 따르면 커피는 한 잔에 10전이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 커피 가격은 한동안 변화 없이 유지되었는데 『별건곤(別乾坤)』 제30호(1930)에서 이 같은 근거를 확인해 볼 수 있다.
  (...)
  『별건곤』의 기록은 10전인 커피 가격이 비싼 가격이 아닌 듯한 뉘앙스로 기술하고 있으나 『동아일보』 1925년 4월 1일 「토굴빈민-생활비 5전」을 통해 극빈자 하루 생활비가 5전이었음을 상기해 볼 때 그리 싼 가격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이후 1937년 중일전쟁이 발발하면서 전시경제정책의 일환으로 동년 9월에 시행된 '수출입품에 관한 임시조치에 관한 법률'에 의해서 3백종의 수입금제품(收入禁制品)이 규정되었다. 따라서 해외물자의 공급이 감소에 따라 물가가 등귀(騰貴)하여 소위 가격공정품(價格公定品)이 지정되는데 1939년에 이르러 '커피'도 그 품목에 들어가게 되었다.(『동아일보』 1939년 12월 12일) 이때 커피 가격은 25전이었다.(『매일신보』 1940년 11월 28일) 그러나 커피의 품귀현상이 계속되자 일부 커피점에서는 이보다 비싸게 팔아 폭리를 취하는 경우가 발생하였는데, 이에 따라 한 잔에 40전씩을 받아 단속, 처벌받는 사례도 생겨났다.(『동아일보』 1940년 6월 8일) 이어 25전이었던 가격은 1940년에는 18전으로 내리게 되었고,(『매일신보』 1940년 11월 28일) 1942년에는 12월까지 인하하기에 이르렀다. 이는 대용(對用) 커피의 보급에 따라 원가가 30%~50%까지 적어졌기 때문이었다.(『매일신보』 1942년 10월 30일) (253~25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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