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og君 Blues...
커피 세계사 + 한국 가배사 (이길상, 푸른역사, 2021.) 본문

이제 슬슬 그만 읽고, 뭔가를 쓸 때가 되었습니다. 이미 많은 글과 책이 나왔지만 저 나름대로 몇 자 보태볼까 싶습니다.
초기 커피하우스에 제공된 커피 원두는 유대인들이 주도하던 네덜란드 동인도회사를 통해 암스테르담에 들어온 제품이었다. 1640년 서유럽 최초로 암스테르담 상인이 예멘의 모카에 커피를 주문하기 시작했고, 이후 동인도회사를 통해 보급되었다. 커피가 아직은 일상의 음료가 아니라 일종의 약품으로 취급되던 때였다. (61쪽.)
1651년에 동인도회사 포수로 입사하였다가 바타비아에 도착한 이후 서기 임무를 맡았던 하멜은 조선에서의 13년 억류생활 끝에 1666년 일본을 거쳐 고향으로 돌아가서 《하멜표류기》를 발간했다. (...) 이 시기 동아시아를 방문했던 하멜을 비롯한 네덜란드 상인들의 기록에서 커피 이야기가 나오지 않는 것으로 보아 17세기 중엽까지 네덜란드에는 아직 일반인들에게 커피 문화가 전파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지금의 뉴욕이 네덜란드령 뉴암스테르담이었던 시기인 1624~1664년 사이에 뉴암스테르담 지역에서도 커피를 마셨다는 기록이 없는 것을 보면, 네덜란드인들이 무역상품으로서의 커피에는 관심이 있었지만, 음료로서의 커피에는 큰 관심이 없었다는 추측이 가능하다. 기록에 의하면 네덜란드 동인도회사가 예멘의 모카항에서 커피를 암스테르담으로 최초로 보낸 것은 1640년이었고, 모카 커피가 암스테르담항으로 정기적으로 수출되기 시작한 것은 1663년이었다. 이 당시 네덜란드 동인도회사의 커피 수입은 직접 소비하는 것보다는 커피하우스 열풍이 불던 영국이나 프랑스로 수출하는 것이 더 큰 목적이었다.
네덜란드가 제1차 세계대전 직전까지 한동안 1인당 커피 소비량에서 세계 최고 수준이었다는 사실, 1820년 즈음에는 세계 커피 소비량의 절반인 10만 톤 정도를 네덜란드가 공급했다는 사실 등을 생각하면 네덜란드인들의 커피 소비가 언제 시작되었고 언제 급증하였는지가 명확하지 않다는 것은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다. 17세기에 유럽 지역에서 커피가 유행하자 커피 씨앗을 아랍으로부터 동남아시아와 중남미 지역으로 옮겨 심는 데 가장 관심이 많았던 나라도 네덜란드였다는 점에서 더욱 그렇다. 1700년경에 인구 20만 명 정도였던 암스테르담에 카페가 32개뿐이었다는 것을 보면 네덜란드인의 커피 소비는 18세기 중반 이후에 시작된 것이 분명하다. 유럽의 커피 역사를 상세하게 서술하였던 야콥도 네덜란드에서의 카페 탄생이나 커피 소비 문화에 대해서 언급하지 않은 것을 보면, 네덜란드는 커피의 역사에서 여러 가지로 수수께끼인 나라다.
한국의 1933년 신문 기록에도 1924년 조사를 기초로 세계 각국의 1인당 연간 커피 소비량이 소개되었는데, 이 기록에서도 네덜란드인들은 1년에 11.86파운드를 소비하여 스웨덴인(15.83파운드), 덴마크인(14.90파운드), 노르웨이인(12.96파운드)에 이어 세계 4위로, 미국인(10.31파운드), 프랑스인(9.56파운드)보다 많은 양의 커피를 마신 것으로 나와 있다. 물론 서양 제일의 차의 나라 영국에서는 0.71파운드, 동양 제일의 차의 나라 중국에서는 0.01파운드의 커피만을 소비하고 있었다.(《중앙일보》 1933년 4월 3일자. 가배珈琲 이야기). (68~70쪽.)
파리에서의 카페 유행과 커피의 대중화, 그리고 프랑스 식민지에서의 커피 새산량 증가는 동시에 이루어졌다. 그래서 18세기 중여베는 프랑스인들이 마시는 모든 커피는 식민지로부터 들여오는 커피로 충당할 정도가 되었다. 예멘의 커피 무역을 독점하던 경쟁국 네덜란드 상인들에게 더 이상 의존할 필요가 없었다. 부르봉섬에서는 커피 생산량의 과다로 재배 지역의 제한을 고려해야 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넘치는 커피는 좀 더 맛있는 커피에 대한 기대감을 불러 일으켰다. 오랜 관습이었던 볶은 커피를 물과 함께 끓이는 방식에서 벗어나, 커피 가루를 넣은 양말 모양의 천에 끓인 물을 부어서 추출하는 방식을 고안해 낸 것이 18세기 초 프랑스인들이었다. 이 방식은 훗날 드립식과 퍼콜레이터percolator 방식으로 발전하였다. (103~104쪽.)
시민들은 국가가 독점하는 커피보다는 거래가 자유로운 커피 대용품을 찾기 시작하였다. 말린 무화과, 보리, 밀, 옥수수 등이 등장하였고, 가장 인기가 있었던 커피 대용품은 치커리였다. 훗날 나폴레옹의 대륙봉쇄령 시절 프랑스에서도 유행했던 바로 그 치커리 커피였다. 문제는 국가가 커피 사업 독점을 통해 벌어들이는 수입보다 불법 커피 유통을 막기 위해 투자해야 하는 지출이 더 많았다는 사실이다. 대왕 칭호를 받은 절대군주였음에도 이미 생활음료로 자리 잡게 된 커피의 소비를 막거나, 커피를 통해 국가 재정을 풍족하게 하는 유효한 방법을 찾지는 못하였다. (118쪽.)
프랑스 시민들에게 값싼 커피를 무한정 제공할 것 같았던 카리브해의 생도밍그는 흑인 노예들의 차지가 되었고, 프랑스인들이 커피를 처음으로 옮겨 심었던 마르티니크는 영국이 차지하였다. 프랑스는 식민지와 더불어 값싸고 맛있는 커피를 잃었다. 프랑스는 식민지로부터 쉽게 가져오던 커피 대신 네덜란드가 공급하는 자바 커피나 영국이 1802년에 네덜란드를 물리치고 식민지화한 실론에서 생산하는 커피를 비싼 값에 마셔야 했다.
(...)
나폴레옹의 선택은 섬나라 영국의 완전한 고립이었다. 나폴레옹은 1806년 군대를 이끌고 프로이센의 베를린에 입성하여 대륙봉쇄령을 선포하였다. 유럽 대륙의 모든 나라로 하여금 영국 배의 입항 금지, 영국과의 무역 금지, 그리고 점령 지역 내 영국인의 억류와 영국 재산 몰수를 시행하도록 강요하였다. (...)
그러나 과학의 힘으로 발명을 할 수도 없고, 완벽한 대체품을 발견할 수도 없는 것이 있었다. 비로 커피였다. 일찍이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대왕이 커피 소비를 억제하기 위한 각종 정책을 펼쳤지만 밀수입과 밀거래에 따른 가격 상승만 초래하였고, 간접적으로 커피 대용품 시장을 활성화시킨 바 있었다. 그때 커피를 대신할 수 있는 것으로 밀, 보리, 무화과, 옥수수 그리고 치커리 등이 등장하였다. (...)
많은 커피 대용품 중에서 치커리가 가장 성공적이었다. 야콥의 표현대로 나폴레옹은 '치커리와 동맹'을 체결하였다. 적대국이었던 프로이센에서 성공을 거두었던 치커리를 커피 대용품으로 지지하였다. 처커리 뿌리를 말려서 가루를 만들고, 이것을 우려서 만드는 음료의 맛과 향이 커피를 따라갈 수는 없었지만, 영국을 이기기 위해 기꺼이 마셔야 했다.
(...) 커피의 경우 영국 전체의 소비량은 연 100만 파운드 정도였는데 재고는 그것의 1,000배에 달하였다. 18세기 중반부터 커피 대신 차를 마시는 문화에 빠져 있었던 영국에서는 커피 재고가 나날이 쌓여 갔다. 반면 2,000개가 넘는 카페에 시민들이 넘치던 파리 시내에는 커피 향조차 남아 있지 않았다. 1813년 즈음에 런던에서 40실링 정도 하는 커피가 함부르크에서는 500실링에 거래되는 지경에 이르렀다. (...) (133~137쪽.)
19세기 후반부터 20세기 초반 사이 거의 1세대 만에 세계 커피 생산에서 브라질의 독점적 지위를 가능하게 하였던 것은 1869년 실론섬에서 시작된 커피 녹병의 확산도 하나의 배경이었다. 1815년 나폴레옹 전쟁 중에 영국은 네덜란드가 지배하고 있던 실론섬의 해안 지역을 빼앗은 후, 독립 왕국이었던 칸디왕조를 무너뜨리고 섬 전체를 점령하였다. 섬에 널려 있어 커피 농장에 피해를 주는 코끼리들을 제거하고, 숲을 정리한 후, 인도의 남동해안 마드라스 지역에 거주하던 타밀족을 이주시켰다. 노동자들은 영국 동인도회사에 많은 빚을 지고 있었다. 이들의 노동력에 의해 반세기 정도 융성하였던 커피 재배가 녹병으로 무너진 것이다. 헤밀리아 바스타트릭스Hemileia Vastatrix라는 곰팡이균에 의해 초래된 커피잎 녹병leaf rust은 1880년대 중반 실론의 커피 농장을 대부분 초도화시켰다. 커피나무가 사라진 자리에 차나무가 등장하였다. 유명한 실론티가 등장한 것이다.
실론에서 시작된 녹병은 커피를 재배하고 있던 인도, 수마트라, 자바 등으로 번졌다. 녹병에 약한 아라비카종 중심이었던 이 지역 커피 산업이 망가졌다. 녹병 이전에 세계 커피 소비량의 3분의 1 이상을 차지하던 것이 20세기 초에 이르러서는 20분의 1 정도로 축소되었다. 동인도 커피 경작의 몰락은 서서히, 그러나 폭발적으로 브라질과 중남미 커피의 시장 독점을 가져왔다. (153쪽.)
1941년 12월 7일 일본의 진주만 습격으로 미국의 참전이 본격화되면서 커피 가격은 다시 불안해졌다. 군의 커피 수요 증가 그리고 선박을 이용한 커피 이동의 불안감이 합해져 커피 시장의 미래가 더욱 불투명해졌다. 이는 커피 가격의 급등으로 이어질 조짐을 보였다. 미국이 선택한 것은 일반인에 대한 커피 배급제와 묽은 커피였다. 1942년 11월에 시작된 커피 배급제는 유럽에서 전세가 연합국에 유리하게 전개되기 시작한 1943년 7월까지 유지되었다.
전쟁 기간 동안 익숙해진 묽은 커피를 마시는 습관은 전쟁 이후까지 지속되었다. 미국인들이 마시는 묽은 커피라는 의미의 '아메리카노'가 탄생하였다. (...) (171~172쪽.)
베르뇌 신부는 1866년 병인박해 때 체포되어 순교할 때까지 10년 정도 조선에 머물렀고, 조선의 선교 상황을 보고하거나 필요 물품을 요청하는 서신을 파리나 홍콩으로 자주 보냈고 답글을 받았다. 베르뇌 주교가 홍콩이나 파리에 구입을 요청한 물품 목록에는 주로 선교활동에 필요한 성물이나 조선에서 구입하기 어려운 물품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
남아 있는 그의 서신 자료 중 파리외방전교회 극동 대표부의 리부아 신부에게 보낸 1860년 3월 6일 자 서신의 요청 물품 목록에 보면 커피 40리브르, 흑설탕 100리브르가 포함되어 있다. 리브르libre는 당시 프랑스인들이 파운드(lb, 약0.45킬로그램)를 나타내는 단위였다.
(...)
이때 요청한 물품들은 이듬해인 철종 12년(1861) 4월에 백령도, 정확하게는 백령도 북방에 있는 무인도 월내도를 통해 입국한 랑드르 신부, 조안노 신부, 리델 신부, 칼레 신부 편에 한양의 베르뇌 주교에게 전달되었다.
네 신부가 한양에 도착한 것은 1861년 4월 7일 새벽 5시경이었다. 베르뇌 신부가 물품을 요청한 지 정확하게 '1년 1개월 1일' 만이었다. (...) (183~185쪽.)
초기 끽다점에는 '뽀이'라고 불리는 남자 종업원들이 서비스를 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그러다 어느 시점에서 '여뽀이'라고 불리는 여자 직원이 등장하기 시작하였다. 근대적인 직업이 등장하며 직업에 남녀 구분이 생겨났고, 일자리의 대부분은 남성들 차지가 되었다. 여성이 이런 남성 영역화된 직업에 뛰어들면 그 직책 앞에 '여'라는 접두사를 붙이기 시작하였는데 그 초기 모습을 보여 주는 것이 '여뽀이'였다.
일본에서 차를 파는 킷사텐에 이어 등장한 것이 카페였다. 당시 일본어 신문에는 '카페에―カフェー'로 표기되었고, 한글 신문에는 보통 '카페' 또는 '카페―'로 표기되었다. 일본 카페에 여급이 등장한 것은 마츠야마 세이산이 1911년 3월에 오픈한 '카페 프랭탕'이었다. 우리나라의 경우에는 1918년 10월 1일 대구역 신축과 함께 역사 안에 문을 연 끽다점에서 여자를 급사로 채용했다는 기사가 《부산일보》(1918년 10월 6일 자)에 게재된 것을 보면, 1910년대 중후반 어느 시점부터 '여뽀이'가 등장하기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대구역 끽다점은 봉래당 주인인 일본인 타마무라玉村가 경영하였다. 서울이나 대구 이외에도 부산에 등장한 '카페 에비스'(《부산일보》 1916년 1월 15일 자) 등에서 여급을 채용하여 영업을 하는 새로운 풍조는 급격하게 확산되기 시작하였다. (211~212쪽.)
(...) 일찍이 《중앙일보》 기자 이상호李相昊는 신문사를 사직하고 종로2정목 동아백화점 앞에다 '본아미'라는 끽다점을 열어 1932년 5월 22일에 개업하는 등 카페 개업 열기는 식을 줄 몰랐다. 본아미에서는 1933년 11월에 이상의 친구인 화가 구본웅의 개인전이 열리기도 하였다(《동아일보》 1933년 11월 19일). (232쪽.)
커피를 좋아하던 시인 이상이 북촌 한가운데서 '제비다방'을 연 것도 이즈음이었다. 이상은 20대 초반까지 통인동 154-10번지(현재 '이상의 집'과 복원된 '제비다방'이 있는 장소) 큰아버지 집에서 살았다. 양아버지였던 큰아버지가 1932년에 세상을 떠나면서 이상에게도 약간의 유산을 남겼고, 유산을 받은 이상이 1933년 7월에 종로1가 청진동의 한 건물에 전세를 내 문을 연 다방이 바로 제비다방이었다. 이 다방을 드나들었던 이상의 지인 김기림, 이헌구, 구본웅, 박태원 등의 기억에 의하면, 건축가였던 이상은 통유리를 통해 거리와 소통이 가능한 모던한 모습으로 건물을 꾸미고, 벽에는 그가 좋아하던 프랑스 소설가 주르 뢰나르Jules Renard의 에피그램epigram 액자 몇 개를 걸었다.
(...)
이상의 절친이며 나혜석의 제자이기도 했던 화가 구본웅의 아들이 증언한 바에 의하면 제비다방은 종로1가 33번지에 있었다. 작가 김용범의 추론에 의하면 '제비다방'이라는 이름은 주르 뢰나르의 책 《박물지Histoires naturelles》(1896)에 실린 제비 이야기, 그리고 이를 표현한 화가 피에르 보나르Pierre Bonnard(1867~1947)의 제비 삽화에서 유래했을 가능성이 매우 크다. (...) (233~235쪽.)
커피와 다방의 부활을 가져온 결정적 계기는 국내 커피 산업의 출범이었다. 1968년 1월에 설립된 동서식품은 같은 해 8월 커피 공장을 짓기 위한 차관 도입을 신청하였다. 그러나 외자도입심의위원회는 커피가 아직은 소비를 억제해야 하는 특정 외래품에 속한다는 이유로 차관 승인을 보류하였다. 그러나 같은 해 11월 4일 심의위원회는 커피 공장 설립을 위한 차관 150만 달러 유치를 승인하였다. 승인 신청서에는 인스턴트커피 300톤, 커피 373톤을 생산하는 공장을 짓겠다는 것과, 원료는 브라질로부터 원두 100만 달러 분량을 수입하겠다는 계획이 들어 있었다.(《동아일보》 1968년 11월 4일).
이 승인에 따라 동서식품은 외자 유치에 나섰고, 이듬해인 1969년 8월 이스라엘의 '엘리테'라는 기업이 100만 달러를 투자하여 커피 공장을 설립하기 위한 계약을 체결하였다. 인천 공장은 1970년 3월에 착공하여 8월에 준공하였고, 맥스웰하우스 커피를 생산하는 미국 제너럴푸드사와 공장 설립이 한창이던 같은 해 6월 제조 기술 도입 계약을 체결하였다. 국내 생산 커피 제1호인 맥스웰하우스 레귤러 그라운드 커피가 첫 발매를 시작한 것은 1970년 9월이었고 곧이어 인스턴트커피도 생산을 시작하였다. (317~318쪽.)
한국의 바리스타 1세대를 상징하는 인물 네 사람을 지칭하는 '1서3박'이 등장하였다. 모두 일본에서 커피를 공부한 이들이었다. 신촌 콜롬비아의 서정달, 이대 앞 다도원의 박원준, 커피 맛을 찾아 세계를 주유한 것으로 유명해 마도로스 박이라 불리던 박상홍, 강릉 보헤미안의 박이추가 그들이다. 재일조선인 박이추는 한국으로 돌아와 몇 년간 젖소를 키우며 살던 중 커피 공부를 하겠다는 생각에 다시 일본으로 돌아갔다. 일본 커피 연구소에서 본격적으로 커피 로스팅, 블렌딩, 드립 등을 배운 후 귀국하여 서울에 원두커피 전문점을 차린 것이 혜화동의 '가배 보헤미안'이었다. 박원준이 그의 스승이기도 하다.
1990년대의 시작과 함께 이들 바리스타 1세대의 영향을 받은 2세대 바리스타들이 등장하였다. 대학로에 '클럽에스프레소'를 차린 마은식, 대구에 '커피명가'를 오픈한 안명규, 그리고 포항에 '아라비카'를 차린 권영대 등이다. 이들은 지금도 지역을 대표하는 커피 로스터들이다. 그러나 인스턴트커피가 지배하는 땅에서 커피 전문점 문화는 쉽게 확대되지는 못하였다. (328~329쪽.)
교정. 초판 1쇄
211쪽 밑에서2줄 : カべエー -> カフェー : 원사료를 확인해봐야겠지만 히라가나와 가타가나가 섞여서 표기된 것은 좀 어색해보인다. 현대식 표기를 따르자면 'エ'도 작게 표기하는게 옳다. 물론 원사료에 이렇게 표기되어 있을 가능성도 있다.
307쪽 13줄 : Archille -> Achille
333쪽 5줄 : 강산애 -> 강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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