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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비평 152호 (역사비평사, 2025.) 본문

잡冊나부랭이

역사비평 152호 (역사비평사, 2025.)

Dog君 2026. 2. 19. 14:38

 

  눈길이 가는대로 고개를 끄덕여가며 논문을 읽어가다가 아래 부분에서 잠깐 책장을 멈췄습니다. 미국의 주류담론에 대한 저항의 아이콘이었던 무하마드 알리 역시 말년에 이르러 결국에는 기성 체제에 포섭되어 여전히 존재하고 있는 미국의 인종주의적 차별과 편견을 은폐하고 미국의 국민주의에 기여하게 되었다는 내용인데요, 이 부분이 제가 평소부터 갖고 있던 어떤 문제의식을 자극했기 때문입니다.

 

  논문의 전체적인 논지에 적극 공감하면서도, 글쎄요, 결론에서 제시한 이런 식의 비판은 너무 근본주의적이지 않나 싶습니다. 이 논문처럼 기성 체제와 무하마드 알리의 '화해'를 '기성 체제로의 포섭'으로 볼 수도 있지만 또한 기성 체제가 그 저항 담론이 기성 체제를 변화시켰다고 볼 수도 있지 않을까요. 물이 펄펄 끓어넘치지 않더라도, 섭씨1도의 물과 섭씨99도의 물을 같다고 말할 수는 없으니까요. 무하마드 알리가 끝끝내 저항자로 남아있는 세상과 무하마드 알리의 정신을 (심지어는 주류와 권력조차도) 공공연하게 표명할 수 있는 세상 중에서 어느 쪽이 좀 더 나은 세상인지는 분명합니다. 모든 저항의 궁극적인 목표는 저항하는 그 자체가 아니라, 한 사회의 주류가 되어 세상을 바꾸는 것임을 생각하면 더더욱 그러합니다.

 

  선수생활 말년 이미 신경계통의 이상 증세를 가지고 있었던 알리는 1984년에 파킨슨병 진단을 받으며 2016년에 사망하기까지 오랜 투병생활에 들어갔다. 그가 오랜만에 대중 앞에 모습을 드러낸 것은 1996년 애틀랜타 올림픽 개막식 최종 성화주자로서였다. 병색이 완연한 알리의 30여 년 만의 올림픽 복귀에 관하여 얼론은 알리가 미국과 끝내 '화해'하였다고 평가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화해'는 알리가 주도했다기보다는 냉전의 최종적 승리를 계기로 고조된 국민주의가 이제는 병자로서 더는 주류사회에 위협이 되지 않는 알리를 포용함으로써 그 정당성을 과시하려 했기 때문이었다. 2005년 백악관에서 냉전을 본격화한 대통령 해리 트루먼(Harry S. Truman)이 제정한 자유의 메달(Medal of Freedom)을 알리에게 수여한 것은, 탈냉전기 국민주의의 포용성을 확인하는 상징적 의식으로 여겨졌다. 그러나 이러한 화해는 주류사회가 처음 그를 대면했을 때처럼 자신이 원했던 방식으로 알리를 규정하고자 한 것이었으며, 국민주의로 상징되는 거대한 사회 구조 속에서 이에 맞섰던 한 개인이 가진 작용력의 한계 역시 보여주는 것이었다. 이러한 '화해'와 알리에 대한 '위생처리'의 과정을 거치며 2005년에 그의 저항을 기리며 세워진 무함마드 알리 센터는 미국적 대의의 실현을 위한 오랜 진통을 극복하고 인종평등 사회가 도래한 것을 자축하는 하나의 국민주의적 상징물이 되었다. 인종차별 반대에 앞장섰던 흑인 미식축구선수 짐 브라운(Jim Brown)은 1974년 알리가 반역자의 낙인을 벗고 포먼과 대결하게 되었을 때 이미 그가 "기성 체제"의 한 부분이 되어버리는 이러한 불길한 결말을 예견하였다. 그러나 미국의 주류사회가 알리와 화해를 주장하는 동안 알리가 싸웠던 인종적 편견과 차별은 여전히 재생산되고 있으며, 전 지구적인 식민주의의 역사는 반복되고 있다. 과거와의 화해가 이를 통해 재구성된 국민주의를 통해 누가 이득을 보고 있는지 가늠하기는 어렵지 않을 것이다. (김정욱, 「복싱과 정치의 만남―냉전 국민주의에 맞선 저항자 무함마드 알리」, 327~32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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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포츠가 애초부터 남성의 전유물인 것처럼 시작되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근대 올림픽을 창설한 피에르 드 쿠베르탱은 여성의 스포츠 활동을 "비미학적"인 것으로 보고 올림픽 참가를 반대하기도 했으며, 스포츠에서 여성의 역할을 참여자가 아닌 관람객이나 월계관을 씌워주는 시상식 도우미로만 인식했다. 여성은 1900년에 열린 제2회 올림픽에서 처음으로 참가할 수 있었고 이 똫나 테니스, 승마, 골프와 같은 일부 종목에만 참여가 허용되었다. 이후에도 신체를 '아름답게' 보여주는 체조나 피겨스케이팅은 여성에게 '적합한' 종목이고 3,000미터 달리기나 신체를 '험하게' 쓰는 격렬한 스포츠는 여성이 참여해선 안 될 것으로 간주되었다. 장거리 경주에서 여성 참여가 금지됐던 것은 "여성의 탈진한 모습이 비윤리적"이란 이유에서였다. 여기에는 여성이 장거리를 달리면 임신·출산을 위한 자궁에 문제가 생길 수도 있다는 당시의 잘못된 의학적 통념도 있었다. 1967년 보스턴 마라톤대회에서 캐서린 스위처가 그녀를 달리지 못하게 하려는 심판 및 관계자의 제지를 뚫고 완주한 순간은 역사적 사진으로 남아 있다. 이른바 '여성성'에 부합하지 않는다고 여겨졌던 육상, 농구, 축구, 복싱, 레슬링 등과 같은 종목에 여성이 참가할 수 있게 된 것은 정말 긴 시간이 흐른 뒤였다. 한 예로 1900년에 올림픽 정식 종목이 된 축구는 1996년이 되어서야 올림픽에서 여성의 참여 길이 열렸다. (조은성, 「젠더로 보는 냉전의 스포츠―올림픽 경쟁과 북한 여성 선수들에 대한 남한의 언론 보도」, 280~281쪽.)

 

  요컨대 1950~60년대 한국사학계는 '후진성'을 극복하고 '근대화'를 달성하려는 연구 방향을 확립하였다. 특히 조선 후기 사회와 실학에 대한 연구는 '근대'라는 보편적 발전 모델을 전제로 한국 사회 내에서 발전적 요소를 발굴하려는 중욯나 시도로 자리 잡았다. 이러한 연구 흐름은 1960년대 시대구분론의 본격화로 이어졌으며, 그 과정에서 분단과 전쟁을 겪으면서 남한 역사학에서 실종된 마르크스주의 역사학이 재등장하기도 하였다. 이와 같은 '발전주의'는 그 자체로 특정한 이념 지형 위에 구축된 역사 인식의 틀로 기능했다. 역사에서 발전 단계의 표준화·도식화, 즉 '원시-고대-중세-근대-현대라는 선형적 시간질서'가 전제되며, 역사는 마치 필연적이고 일직선적인 진보의 경로를 따라야 하는 것처럼 재구성되었다. 이는 '과학화'라는 이름 아래 특정한 국가 정체성과 역사 목적론을 재생산하는 부작용을 낳기도 하였다. (홍선이, 「1950~60년대 한국사학계의 복합적 '후진성' 인식과 '과학화' 모색」, 35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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