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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해 (찰스 킹, 사계절, 2026.)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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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해 (찰스 킹, 사계절, 2026.)

Dog君 2026. 2. 23. 08:08

 

  사실 흑해는 한국인에게 그다지 친숙한 지명은 아닙니다. 크림 전쟁이나 러시아 흑해 함대의 수병 반란 정도를 제외하면 역사 시간에 중요하게 배웠던 것 같지도 않습니다. 하지만 서로는 동유럽, 북으로는 우크라이나, 동으로는 러시아와 중앙아시아 각국, 남으로는 튀르키예와 면한 흑해는 서구의 역사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결코 작지 않습니다. 유럽과 아시아를 잇는 관문 역할을 하며 동서교역의 요충이었고, 특히 근대 이후로는 지정학적 중요성이 새삼 부각되기도 했습니다. 이런 때문인지 흑해는 상반된 두 세력(혹은 정체성)이 충돌하는 불연속적 접경의 이미지로 대표되곤 합니다. 기독교와 이슬람의 접경이자 유럽과 아시아의 접경, 뭐 이런 식이죠.

 

  흑해 일대의 수천 년 역사를 살핀 찰스 킹의 『흑해』는 이러한 관념에서 벗어나 흑해의 정체성은 다양한 문화들이 혼재되고 중첩된 연속성에 있다고 말합니다. 흑해에 대해 최초의 역사적 기록을 남긴 그리스·로마인들에게 흑해는 거친 풍랑과 미지의 '야만인'이 사는 두려움의 공간이었습니다. 이들이 흑해를 라틴어로 '환대하는 바다'라는 의미의 '폰투스 에욱시누스Pontus Euxinus'로 (역설적으로) 부른 것에는 이런 마음이 반영되어 있습니다. 이어 흑해를 무대로 활동했던 이탈리아인들은 '마레 마조레Mare Maggiore'(이탈리아어 '큰 바다'), 튀르크인은 '카라 데니즈Kara Deniz'(튀르크어 '검은 바다'), 러시아인은 '초르노예 모레Chernoe More'(러시아어 '검은 바다')로 각각 불렀다는 사실은, 이 바다의 수천 년 역사에 얼마나 많은 문화와 정체성이 켜켜이 쌓여 있는지를 보여줍니다. 저자가 이들 이름을 각 장의 제목으로 붙인 의도도 아마 여기에 있겠죠.

 

  다만 온라인상에 보이는 이 책의 서평들은 너무 눈여겨 보시지 않기를 권합니다. 이들 서평은 하나 같이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을 함께 언급하는데, 글쎄요... 이 책에서 러-우 전쟁에 대한 직접적인 통찰을 찾으려 애쓰는 것은 영 어색해 보입니다. (출판사에서 마케팅 포인트로 잡는 거야 충분히 납득이 되지만요.) 러시아가 스텝 지역을 넘어 흑해 연안에 진출한 것은 흑해 전체의 역사에서 볼 때 그다지 오래지 않은 일이기도 하거니와 그 이후에 대해 이 책이 할애한 분량도 특별히 많지 않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이 책은 말미에서 흑해 특유의 다문화적 정체성에 따라 국가적·민족적 갈등은 점차 감소할 것이라고 낙관합니다. 이 책이 처음 나왔던 2005년만 해도 지금 같은 수준의 갈등을 예측하기는 어려웠겠죠. (미래를 예측하는 건 역사학자의 일이 아니니까요.)

 

  이 책은 당장의 성찰을 직접적으로 떠먹여주는 한 쪽짜리 보고서라기보다는 낯선 공간과 폭넓은 시간 속으로 떠나는 두툼한 여행 안내서로 받아들이는 것이 더 좋겠습니다. 낯선 인명과 지명들 때문에 처음에는 좀체 책장이 나아가지 않지만 흑해에 두툼하게 쌓인 역사적 지층을 한겹씩 발굴하는 마음으로 읽다 보면 어느새 흑해의 오랜 역사를 항해하는 유람선에 탄 듯한 느낌을 받게 될 겁니다. 뭐, 그러다 보면 흑해를 둘러싸고 벌어지는 여러 사건들의 오랜 배경과 연원도 부수적으로 자연스럽게 습득할 수 있겠지요.

 

  이 책은 흑해 주변 민족들의 역사와 문화, 정치를 하나로 엮어내고, 유럽 동남쪽 변경 지역에 대한 오래된 지적 지도를 되살리려는 시도이다. 단기 20세기라는 비교적 짧은 기간을 제외하면, 동유럽―적어도 대문자 E 두 개를 쓰는 그런 종류의 동유럽Eastern Europe―은 대부분의 사람이 유럽 대륙의 동쪽 끝을 생각하는 방식이 아니었다. 발트해에서 흑해에 이르는 그 영토는 한때 공통된 이념과 비슷한 국내 정치 구조, 대체로 일치하는 대외 정책을 가지고 있었다. (...) 다시 말해 유럽 동쪽의 역사는 동유럽이라고 불리는 어떤 장소의 이야기가 아니다.
  1990년대에 들어서면서 동질적인 동유럽이라는 개념은 동등하게 이질적인 동남유럽이라는 관념으로 대체됐다. 이곳은 서로 적대적인 종교와 문화가 시간을 초월해서 접촉하는 지대이자 진짜 유럽과 또 다른 무언가 사이의 이행 구역으로 여겨졌다. (...)
  하지만 역사의 긴 흐름을 놓고 보면, 흑해 주변 지역―즉 광의의 동남유럽이라고 부를 수 있으며 구식 용어를 쓰자면 근동 지역―이 유럽이나 유라시아의 다른 어느 지역보다 더 불안정했다거나, 종족 정체성을 더 깊이 느꼈다거나, 토지와 관습, 종교 문제로 더 분열됐다고 주장하기는 어렵다. 실제로 많은 시대에 이 지역은 훨씬 더 그랬다. 이 바다의 역사를 관통하는 이야기가 있다면 그것은 갈등과 폭력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며, 특히 양립할 수 없는 '문명들' 사이의 단층대를 규정한다고 여기는 그런 종류의 이야기와는 거리가 멀다. (...)
  이 책의 후반부 상당 부분은 민족이라는 사상이 이전까지는 낯선 개념이었던 세계로 어떻게 밀려들어 왔는지에 관한 내용이다. 그 세계에서는 통상 직업, 종교, 또는 단순한 지리적 조건―예컨대 연안 출신인지 내륙 출신인지, 이 마을 출신인지 저 마을 출신인지―같은 다른 결속의 축들이 지배적이었다(그리고 이런 범주들조차 거의 고정되어 있지 않던 곳이다). 이 책은 아이들이 조부모 세대에게는 이상하게 보였을 방식으로 어떻게 자신을 규정하게 됐는지, 그리고 사람들이 어떻게 혼재되고 중첩된 정체성을 동질적이고 민족적인 정체성으로 바꿔나갔는지를 다룬다. 또한 이 책은 한때 의미 있는 지리적 공간으로 존재했을지도 모를 장소가 수 세기에 걸쳐 어떻게 점진적으로 해체됐는지, 바다를 가로지르는 인간관계의 연결망이 유럽과 유라시아의 정치적, 경제적, 전략적 환경 변화와 보조를 맞춰 어떻게 형성되고 사라지고 다시 형성됐는지를 보여준다. 이것은 지리적 고고학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에 대한 실험이다. 그 목적은 20세기 후반 공산주의와 탈공산주의의 얇은 지층 아래 묻혀 있던 잊힌 관계망과 정교한 인간관계를 발굴하는 것이다. 이 작업의 중심에는 바다가 자리한다. (29~32쪽.)

 

  물고기는 풍부했고, 여러 지역, 특히 크림반도와 북쪽 해안을 연결하는 지협 양쪽의 얕은 바다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소금 덕분에 에게해로 가는 여행에서 어획물을 보존할 수 있었다. 가다랑어와 참치는 통째로 염장하거나 토막 내서 절인 것 모두 큰 인기를 끌었다. 기원전 1세기 로마에서는 폰투스산 염장 생선 한 항아리가 일꾼을 하루 고용하는 비용과 맞먹을 정도였다. 비록 플리니우스가 불평했듯이 그런 진미들은 심한 방귀를 유발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었지만 말이다.
  (...)
  흑해의 활발한 상업은 이오니아 본토 도시들과 그 식민지의 활력뿐만 아니라 그리스 정착민들과 비그리스계 원주민들 간의 공생관계에도 의존했다. 지중해 정착민들과 여행자들에게 흑해 원주민들이 '야만인들barbarians', 즉 그리스어로 말하지 않는 사람들이었던 것은 분명하지만, 적어도 오늘날 그 형용사가 함의하는 의미에서처럼 반드시 야만스럽다고 여겨지지는 않았다. 다른 변경 지역에서와 마찬가지로 폰토스 그리스인들은 그들이 마주친 종족들의 문화에 적응하고 심지어 그것을 받아들이는 자신들만의 방식을 찾아냈다. 이는 부분적으로 '그리스다움'이라는 개념 자체의 유동성 때문이었고, 동시에 장기간의 지속적인 상호작용을 통한 문화 집단들 간의 자연스러운 관습의 교환 때문이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일종의 혼종 문명이 발달했는데, 러시아 학자 미하일 로스토체프Mikhail Rostobtzeff가 "종족 집단community of race"이라고 부른 이것은 연안과 내륙의 예술 형식, 생활 양식, 심지어 언어까지 융합된 형태였다. 시간이 흘러감에 따라 고전기 아테네의 시인과 극작가가 상상했던 '그리스인'과 '야만인' 사이의 명확한 문화적 경계선은 실로 매우 흐릿해졌다. (73~75쪽.)

 

  기원전 1세기의 정복은 문자 그대로나 비유적으로나 흑해를 로마 세계로 편입시켰다. 미트리다테스에 대한 승리는 로마의 국경을 동쪽으로는 유프라테스강까지, 북쪽으로는 스키타이인의 땅까지 확장했다. 새로운 영토를 획득하면서 공화국의 세금과 공물 수입이 연간 두 배 이상 증가했고, 두 세기 동안 지역 통치자들 간의 전쟁으로 시달렸던 지역들은 어느 정도 질서를 회복했다. 배들은 해적에 대한 두려움 없이 바다를 건널 수 있게 됐으며, 해안선을 통제했던 지역의 권력자들은 이제 로마공화국, 후에는 로마제국의 종주권 아래에 놓이게 됐다. (99쪽.)

 

  마르코 폴로가 도착했을 때 흑해는 이미 중국의 뽕나무 숲에서 마르세유Marseilles의 비단 상점까지, 노브로로드Novgorod와 키예프의 시장에서 타브리즈Tavriz의 바자르까지 뻗어나가는 경제망의 중심이었다. 흑해는 주요 국제 교통로의 교차점에 자리하고 있었다. '비단길'은 중국에서 중앙아시아를 거쳐 카스피해를 건너 볼가강으로, 그다음 육로로 돈강을 거쳐 아조프해와 크림반도의 항구들로 이어졌다. 또는 남쪽 길로는 중앙아시아와 페르시아를 거쳐 아르메니아를 통해 트라페준타 항구로 연결됐다. 북쪽의 강들은 폴란드와 러시아의 거쳐 발트해까지 교통로를 제공했는데, 이는 한 때 지중해로 호박을 가져다준 고대무역로였지만 이제는 비단, 모피, 동물 가죽을 북유럽의 성장하는 도시들로 운반했다. 제조품, 특히 직물은 중부 유럽에 도착해 유라시아 스텝 전역으로 퍼져나갔다. 곡물과 향신료는 반대 방향으로 흘러 중부 유럽으로 들어가거나 보스포루스해협을 통해 에게해로 나갔다.
  사람들이 이 바다를 부르는 이름은 이런 무역 관계를 반영했다. 일부 초기 아랍 지도는 페르시아에서 아나톨리아를 가로질러온 상인들이 짐을 내리는 항구의 이름을 따서 이곳을 바흐르 알타라바준다bahr al-Tarabazunda, 즉 트라페준타해라고 표기했다. 폴란드인들은 이곳을 마레 레오니움mare Leonium, 즉 르부프Lwów해라고 불렀다. 그 내륙 상업 도시는 서북쪽으로 수백 킬로미터 떨어진 폴란드 갈리치아Galicia에 있었지만 말이다. 중세 이탈리아 도시국가들에서 새로 몰려온 선원과 상인은 이 바다를 간단히 일 마레 마조레il mare maggiore, 즉 큰 바다라고 불렀다. 상인은 제노바나 베네치아에서 여정을 시작해 지중해를 절반쯤 가로질러 해협을 통과하고 흑해를 건너면, 결국 다른 이탈리아인, 필시 아는 사람과 포도주를 한잔 나눌 수도 있었다. 유럽 수입상이 중국 비단이나 인도 향신료를 흑해까지 가져올 수 있다면 거의 집에 다 온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수출상이 포도주나 면직물을 그곳까지 운반할 수 있다면 이미 팔린 것이나 다름없었다. 중세 상회들이 알아낸 바와 같이, 상품을 흑해까지 가져갈 수 있다면 세계 어디든 갈 수 있었다. (156~158쪽.)

 

  1400년대 초에 이르면 오스만인은 자체 해군을 바다에 출동시킬 수 있게 됐다. 오스만인은 갈리폴리Gallipoli에 조선소를 설치하고 에게해 연안 공동체의 경험을 활용해서 함선을 건조했다. 곧 오스만 해군은 에게해의 이탈리아 영토를 지배하게 됐고, 여기에는 추가적인 공격을 개시할 수 있는 전략적 섬들도 포함됐다. 해군력이 강화되면서 오스만 전략가들이 오랫동안 꿈꿔온 콘스탄티노폴리스 정복이 가능해졌다. 갈리폴리의 조선소에서 오스만인은 다르다넬스해협을 장악했고, 이미 1390년대에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보스포루스해협 위쪽에 요새를 건설하여 흑해로의 접근을 제한했다. 1452년에 해협 맞은편에 두 번째 요새를 건설하면서 완전한 통제가 가능해졌기에, 오스만 함선은 약해진 비잔티움인의 방해를 받지 않고 두 해협을 모두 통과할 수 있었다.
  1453년 봄, 포위망이 조여들었다. 술탄 메흐메트 2세는 트라키아에서 출발하여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진군하라고 군대에 명했다. 이제 보스포루스해협에서 함선들이 항구를 점령하려 시도했지만, 비잔티움인은 해상의 쇠사슬이라는 오래된 기술에 의존해서 이를 물리쳤다. 그러자 술탄은 함선을 수레에 실어 도시 북쪽 고지대를 넘어 끌고 가서 쇠사슬 안쪽 깊숙한 금각만으로 진격시키라고 명령했다. 항구가 오스만 함선들로 가득 차고 적군의 병사들이 도시 성벽 틈새로 쏟아져 들어오면서, 비잔티움인은 곧 제압됐다. 메흐메트 2세는 5월 29일 의기양양하게 도시로 입성했다. 술탄은 병사들에게 도시를 약탈하도록 허용했지만, 특별 칙령으로 조선공은 해치지 말라고 명령했다. 조선공은 이제 술탄의 해군을 위해 일하게 될 예정이었고, 이 해군은 머지않아 흑해를 향해 첫 대규모 원정에 나설 것이었다. (192~193쪽.)

 

  코사크의 비정규 해군의 출현은 오스만과 흑해 간의 관계에 큰 변화를 가져왔다. 16세기 중반까지 흑해와 그 연안에 대한 오스만의 전략적 통제는 당연해 보였다. 이따금씩 속국들이 반항을 하고, 특히 카프카즈 지역에서는 때때로 해안선 통제가 유명무실하기도 했으며, 고지대는 더 말할 것도 없었다. 그럼에도 오스만은 한동안 흑해를 자신의 바다라고 말할 수 있었다. 오스만은 다뉴브강과 해협을 통한 유일한 주요 접근로를 장악했다. 서쪽과 남쪽 해안 전체가 제국의 속주였다. 북쪽은 동맹을 맺은 무슬림 국가와 척박한 스텝 지대라는 장벽으로 보호됐다. 따라서 바다에 대한 오스만의 전략적 관점은 주로 방어적인 것이었다. 제국의 정책은 접근로를 차단하고 해안 요새를 강력하게 유지하며 평평하고 광활한 땅 다슈트Dasht를 가능한 한 무주공산으로 유지하는 데 중점을 두었다. 오스만은 나중에 1300년대와 1400년대에 거둔 놀라운 성과를 회고하면서, 이를 술탄의 영토와 이슬람 세계를 확장하려는 헌신으로 설명했다. 그러나 북쪽에서는 이러한 팽창 이념이 두드러지지 않았다. 이유는 간단했다. 흑해에서 오스만은 매우 좋은 거래를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코사크가 등장하면서 모든 것이 변하기 시작했다. 바다와 북부 스텝은 이제 불안 요소가 됐고, 오스만이 보기에 이 광대한 유직와 바다는 평정하는 데 이전보다 훨씬 더 많은 에너지를 요구했다. 흑해는 더 이상 내해, 즉 제국의 일부로 간주될 수 있는 땅으로 사방이 둘러싸인 물길이 아니었다. 이제 변경이 된 것이다. 1600년대 후반까지 북쪽에서 세력을 키워가던 러시아는 이처럼 변화된 상황이 자신에게 유리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닫기 시작했다. (240~241쪽.)

 

  바다가 점차 유럽 세력권으로 편입되기 시작한 것은 바다와 스텝 사이의 전략적 관계가 변화하면서부터였다. 바다를 평화롭게 유지하고 북부 스텝을 무주공산으로 두는 것은 콘스탄티노폴리스 함락 이후 오스만제국의 안보를 지키는 두 가지 필수 조건이었다. 대부분의 외국 선박의 흑해 진입을 통제하고 연안의 속국과 안정적인 관계를 유지할 수 있는 한, 오스만은 바다의 부에 대한 사실상의 독점권을 유지했다. 그리고 유목민과 타타르인 습격대가 가로지르는 유라시아 스텝은 북방 세력의 야망을 견제하는 자연적 장벽이었다. 러시아에서는 이러한 필수 조건이 정반대였다. 코사크의 해상 습격이 보여주었듯이, 오스만은 북부 해안에서의 조직적인 공격에 취약했지만, 러시아는 바다에 도달하기 위해 먼저 자국 남부 변경의 척박한 초원 지대를 가로질러야 했다. 코사크, 농민, 노가이 유목민이 이동하며 거주할 뿐, 상당 부분은 아무도 살지 않는 스텝은 오랫동안 골칫거리였다. 러시아와 폴란드 작가가 모두 '황야'라고 부른 바로 이곳에서 타타르인 무리가 기독교인 마을로 내려와 약탈품과 사람들을 끌고 갔다. 이곳은 도적과 무법자의 땅이자, 더 북쪽의 지주 밑에서 일하는 데 지친 불만 가득한 농민들의 피난처였다.
  이반 뇌제(재위 1533~1584) 치세부터 표트르 대체Petr I(재위 1689~1725) 치세까지 러시아 국가 정책의 핵심은 스텝을 명확하고 통제 가능한 것으로 만들려는 노력, 다시 말해 변경을 경계로 만들려는 노력이었다. 그러나 이 계획은 러시아를 타타르인칸과, 나아가 오스만제국과 직접적인 경쟁 관계에 놓이게 했다. 다소간 방어적인 국가 안보 정책으로 시작된 것이 18세기 동안 팽창 이념으로 발전했다. 먼저 표트르 치세에, 그다음 예카테리나 대제Ekaterina II(재위 1762~1796) 치세에 러시아는 제국의 이념을 받아들였는데, 여기에는 계몽사상에 나타나는 문명화라는 사명의 합리주의와 서유럽의 제국 세력을 오랫동안 사로잡았던 정복 욕망이 뒤섞여 있었다. 스텝을 통제하려는 추진력은 바다를 정복하려는 압력이 됐고, 나아가 로마의 계승자라는 러시아의 자기 인식이 최고조에 달하면서, 해협을 장악하고 되살린 비잔티움의 왕좌에 러시아 군주를 올려놓으려는 구상으로 나아갔다. 새로운 제국은 무지몽매한 남쪽에 문명을 전하는 자가 돼서, 흑해를 가로질러 지중해로 뻗어나가 콘스탄티누스의 유산을 장악하려 했다. 다양한 변형 속에서도 이러한 전략적 목표는 제1차 세계대전의 혼란 속에서 러시아와 오스만제국 모두가 종말을 맞을 때까지 러시아 외교 정책의 방향을 규정했다. (245~247쪽.)

 

  전쟁과 이를 종결시킨 파리 조약은 흑해에서 한 시대가 끝났음을 의미했다. 전략적 측면에서 이 전쟁은 서유럽 열강들이 오스만을 돕기 위해 개입할 수 있으며, 러시아를 비롯한 어떤 나라도 제국의 약점을 부당하게 이용하지 못하게 막겠다는 의지가 있음을 보여주었다. 다뉴브강과 해협의 지위는 이제 그 어느 때보다 국제법의 문제가 됐고, 단순히 북부와 남부 해안에서 마주하는 두 제국 사이 세력 균형의 부산물이 아니게 됐다. 다뉴브강 하구의 통제권은 공식적으로 오스만에 반환됐지만, 항해의 자유를 보장하기 위해 국제 위원회가 만들어졌다. 바다와 해협은 러시아와 오스만 국기를 포함하여 어떤 국기를 게양한 군함도 항해할 수 없는 출입 금지 구역으로 선포됐으며, 연합국이 이 조항을 보장하기로 했다. 이 전쟁은 또한 이 지역에서 범선들이 맞붙은 마지막 주요 해전이기도 했다. 1780년대 존 폴 존스가 목격했던 장면이 한 시대의 시작을 알리는 여는 괄호였다면 이것은 닫는 괄호였다. 아무리 일방적인 전투였어도 시노프 해전은 전열함들이 조우한 마지막 전투였고, 이 전투에서 러시아와 오스만 모두 해군이 거의 소멸했다. 이후 전쟁을 끝낸 두 나라는 백지상태에서 군대를 재건해야 했다. 이 백지 위에 두 나라 모두 1870년대까지 증기 동력, 프로펠러 추진 선박으로 이루어진 장갑 해군을 구축할 계획을 그리기 시작할 것이었다. (320쪽.)

 

  세바스토폴을 황폐화한 전쟁으로 흑해가 유럽의 일부가 되는 여정은 끝이 났다. 크림 전쟁 후 흑해에는 더 이상 디드로가 1750년대에 붙인 '아시아'라는 수식어를 쓸 수 없었다. 이제 그 바다는 유럽 강대국이 협상하고 싸우는 전리품이었다. 무역은 국제 선박에 개방됐는데, 처음에는 러시아 편의치적 국기 아래서, 그다음에는 오스트리아, 영국, 프랑스 및 다른 나라 국기 아래서였다. 전략적 관점에서, 단일 제국이 위협을 가하는 것은 더 이상 주된 걱정거리가 아니었다. 오스만의 패권은 17세기부터 쇠퇴했고, 시노프 때처럼 러시아가 남쪽으로 돌진할 수 있는 능력은 이제 파리 조약이 연안 순양함보다 큰 군함을 금지하면서 막혔다. 러시아는 결국 중립 조항을 거부하고 19세기 마지막 러시아-튀르크 전쟁에서 서부와 동부 해안 양쪽에서 오스만을 포위하려 했다. 하지만 그것이 러시아가 품은 야망의 정점이었다. 어떤 제국이나 국가도 바다를 완전히 장악하지 못하도록 보장하는 것이 유럽 열강의 흔들리지 않는 정책이 됐고, 이를 뒷받침하기 위해 조약과 국제기구가 마련됐다. (325~326쪽.)

 

  흑해와 유럽의 연결은 개인의 정체성을 재구성하고 문화적·정치적 공동체의 경계를 다시 그을 만큼 극도로 강력한 두 가지 관념이 유입되는 통로가 됐다. 그것은 동질적 민족 개념과 패권 국가 개념이었다. 두 개념 모두 이 지역에 상당히 늦게 들어왔다. (...)
  (...)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날 무렵 제국이라는 선택지는 사라졌다. 이제 바다 대부분은 새로운 행위자, 즉 자신의 정치적·경제적·전략적 목표를 위해 바다의 부를 전유하려는 근대 국가가 둘러쌌다. 바다는 더 이상 단순히 제국적 욕망의 대상이 아니었다. 이제 바다는 경쟁하는 국가 건설 기획의 일부였다. 처음에는 루마니아와 불가리아, 곧이어 소련과 튀르키예, 그리고 20세기 말에는 조지아와 우크라이나의 기획이 되었다. 해안선, 물, 바다 밑 땅, 그리고 바닷속 물고기는 모두 새로운 국가의 영역이자, 동시에 새로운 국가가 대표하는 역사적 민족들의 신성한 유산이라고 주장됐다. 시인과 역사가는 곧 이런저런 민족 집단의 항해에 대한 소명을 발견하거나 발명하는 작업에 착수했다.
  20세기 후반에 바다를 소유하겠다는 이상은 소련식 공산주의든 국가 건설 민족주의든, 개발 이념으로 더욱 강화되었다. 바다는 국가의 모든 가용 기술을 동원해서 착취해야 할 자원이 됐다. 산업시설이 해안을 따라 들어섰다. 항구도시는 면적과 인구 모두 팽창했다. 상업 어선들이 바다의 수확물을 거두기 위해 파견됐다. 개발은 해안선은 별모시켰고 제2차 세계대전 후에도 여전히 연안 국가들의 가장 가난한 지역에 속했던 곳에―공산주의자와 민족주의자 모두의 표현으로―진정한 '혁명적 변화'를 가져왔다. (...) (327~32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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