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og君 Blues...
조선의 갈림길 (길윤형, 서해문집, 2025.) 본문

10년쯤 전의 일입니다. 어느 학술대회에서 권위 있는 독립운동사 연구자께서 '이제 조선망국사朝鮮亡國史를 쓸 때가 되었다'는 말씀을 하신 적이 있습니다. 광복이 되고 벌써 70년이 넘었으니, 이제는 망국의 역사를 차분히 이야기할 수 있는 여유와 거리감이 충분히 확보되었다는 취지였죠. 그 당시 저는 그게 말처럼 쉽겠는가 하는 생각이었습니다. '조선이 어떻게 망했는지를 알아보자'에서 소박하게 시작했다가 '망할만하니까 망했다'를 거쳐 '이러니까 식민지가 되는게 마땅하다'로까지 이어지는 자연스러운 플로우 때문이었죠. '뉴라이트' 사관이 거의 항상 식민지미화론으로 빠져드는 것이 바로 이런 플로우 덕분이고, 이는 또한 격렬한 이분법적 정치구도로 빨려들어가기 십상입니다. 이런 상황을 아는 제게 망국의 역사를 차분히 돌아보는 것은 참으로 요원한 일처럼 느껴졌습니다.
한겨레신문의 동명 연재를 책으로 엮어낸 『조선의 갈림길』은 그런 제게 최선의 답변처럼 느껴집니다. 『나는 조선인 가미카제다』, 『아베는 누구인가』 같은 통찰력 가득한 역사책을 써낸 저자답게 『조선의 갈림길』 또한 과거에 대한 꼼꼼한 연구부터 현실을 위한 성찰에 이르기까지 유려하게 이어집니다.
물론 목차만 봐서는 이 책이 별달리 새로워 보이지 않을 수 있습니다. 강화도조약부터 한일병합에 이르는 일련의 과정은 이미 중고등학교 역사 시간에 배웠던 것들이니까요. 사건의 발생 순서나 주도세력의 정치적 지향까지 기계적으로 외우느라고, 안 그래도 나라 망하는 이야기라 재미없는 것을 더 재미없게 공부했던 기억이 누구에게나 있을 겁니다. 하지만 이 책의 백미는 이미 알고 있는 사실도 새삼스럽게 보이게끔 하는, 확고한 문제의식에 있습니다. 이 책의 질문을 요약하자면, '식민지라는 최악의 결과에 이르지 않기 위해 조선(우리)은 무엇을 해야 했는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질문은 '망할 수밖에 없었다'는 체념이나 '망하는게 당연했다'는 괴상한 미화와는 다릅니다. 그보다는 '다시 망하지 않기 위해 지금 우리가 해야 하는(혹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가'라는 실천적인 질문이라고 하겠습니다. 저널리스트의 현실인식과 연구자의 문제의식이 만나서 산출할 수 있는 생산적 화두라고 해도 되겠네요.
* 이러한 문제의식은 작가의 전작인 『26일동안의 광복』과도 비슷해 보입니다. 저희 서평집에서도 쓴 것처럼, 저는 『26일동안의 광복』이, 당대의 역사에 대한 탄식에만 그치지 않고 다른 결과를 만들 수 있었던 실낱 같은 가능성을 찾기 위한 지적 분투의 결과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결말에서 저자가 독자에게 던지는 제언은 무척이나 도발적입니다. 한국과 일본 사이의, 주권침탈과 식민지배로 이어지는 역사를 깊게 다룬 저자는 결말에 이르러서는 "역사적 정념을 버려야 한다"(462쪽)라고 말합니다. 어두운 역사는 그것대로 직시하면서도 또한 작금의 우리 앞에 놓인 현실적 과제를 위해서는 일본과 동반자가 되어야 한다고 말이죠. 건설적인 한일관계를 위해서라도 강제동원과 전쟁범죄 등 과거사에 대한 공식적인 사과가 반드시 선행되어야 한다는 것이 제 지론입니다만 일본 정부의 공식 사과가 너무나 요원한 일이 되어버린 지금 상황에서 (그리고 시간이 가면 갈수록 그 가능성은 점점 줄어들겠죠) 그에만 매달리는 것도 마냥 현명한 일은 아닐 수 있겠지요. 하지만 이처럼 대담한 제언 앞에서, 역사학 연구를 업으로 삼은 저는 절로 생각이 많아질 수밖에 없고 일단은 판단을 유보하게 됩니다. 책을 다 읽은지 몇 주가 지난 지금도 그러하구요. 만약 다시 몇 달이 더 지난 미래에 제 생각이 바뀐다면 그건 틀림없이 이 책 때문일 겁니다. (물론 안 바뀔 수도 있습니다 ㅋ;;)
여러분의 생각은 어떠십니까. (제 공감 여부와는 상관 없이) 저는 더 많은 사람이 이 화두에 대해 차분히 고민해보면 좋겠습니다. 그런 고민들이 더 많이 쌓였을 때 한일관계와 동아시아 정세 또한 그만큼 더 성숙해지고 진일보하리라 믿습니다.
한 차례 반란을 진압한 고종은 머뭇거리지 않고 개방을 향해 나아갔다. 조미수호통상조약을 체결하기 위한 교섭은 1882년 3~4월 톈진에서 조선과 미국이 아닌 청과 미국 사이에서 이뤄졌다. 미국의 전권대표인 로버트 슈펠트Robert Shufeldt(1822~1895) 제독과 협의에 나선 이는 청의 이홍장이었다. 조선은 톈진에 파견된 영선사 김윤식을 통해 자신들의 뜻을 전달하는 데 머물렀다. 하지만 조약문에 조선이 자신들의 속방이라는 사실을 명시하려는 청의 주장은 미국의 반대로 관철되지 못했다. (...)
조약은 5월 22일 제물포 화도진에서 조인되었다. (...) 청이 대신 협상을 진행한 탓에 조선의 주권은 심각하게 훼손됐지만, 강화도조약 때와 달리 10~30퍼센트의 관세 자주권을 확보할 수 있었다. 미국이 관대한 조건으로 통상조약을 체결할 것이라는 하여장의 설득은 사실이었다.
조선의 주권이 훼손된 대가로 유리한 협상 결과를 손에 넣었다는 이 '묘한' 결과를 두고 조선의 의견은 둘로 나뉘었다. 김홍집·김윤식 등 실무 관료들은 지금처럼 '종주국인 청의 도움을 받으면서 실리를 추구하는 점진적 변화를 시도해야 한다'(온건개화파)고 생각했다. 일본의 선진문물을 둘러보고 온 뒤 끓어오르던 피를 감당하지 못했던 김옥균·박영효 등 젊은 혁명가들은 '청을 배제하고 자주를 추구해야 한다'(급진개화파)고 맞섰다. 이들 외에 '개방 자체가 잘못'(위정척사파)이라는 유생들의 의견 역시 만만치 않았다. 쇄국을 고집하는 대원군과 개방을 추진하던 고종과 명성황후 사이의 '권력 대립', 청·일 등 외세의 '패권 대립' 등 다양한 차원의 힘겨루기가 동시다발적으로 이어지고 있었다. 이 가운데 어느 한 군데에서라도 사달이 난다면, 자칫 나라를 거덜 낼 수 있는 거대한 싸움으로 확대될 수 있었다. (71~72쪽.)
개화당과 사대당의 의견이 크게 달랐던 것은 청의 간섭에 대한 감수성만이 아니었다. 그보다 더 크고 본질적인 대립은 조선이 대등한 '교린 상대'로 여겨 온 일본과 어떤 관계를 구축할 것인지를 둘러싸고 발생했다. 온건개화파들은 강화도조약 이후 관세 자주권을 회복하려는 조선의 절박한 노력에 냉담한 태도를 보이고, 임오군란 때 조선이 도무지 감당할 수 없는 가혹한 배상금을 고집한 일본의 태도에 분노하고 있었다.
개화당은 전혀 다르게 생각했다. 이들은 변화된 일본의 발전상에서 조선의 미래를 찾으려 했다. (...) (95~96쪽.)
(...) 조선 중립론이 나오던 때는 톈진조약으로 통해 청·일의 타협이 이뤄지며 한반도 정세가 비교적 안정된 기간(*1885~1894)이었다. 조선이 제힘으로 개혁을 시도할 수 있었던 사실상 '마지막 기회'였다. 이영훈 전 서울대 교수가 "일본이 다시 밀려들기 이전, 국체를 보전하고 강화함에 황금같이 소중했던 그 기간에 고종은 뭘 했냐"라고 쏘아붙였던 바로 그때였다.
이헌창 고려대 경제학과 명예교수의 연구를 보면, 1900년대 일본의 국내총생산은 조선의 5배, 재정 규모는 50배였따. 한 나라의 재정 규모는 곧 그 나라의 '국가 능력'으로 바꿔 이해해도 큰 무리가 없다. 조선의 전체적인 경제력은 일본의 5분의 1 수준이었지만, 국가 능력은 일본의 50분의 1에 불과했던 것이다. 조선은 일본의 약 2퍼센트 정도 능력밖에 갖추지 못한 한심한 국가였다.
결국 국가가 세금을 잘 거두고 집행하는 능력을 키울 수 있도록 화폐·세제·재정·금융 등 여러 분야의 개혁을 동시다발적으로 추진해 이 차이를 메워야 했다. 물론 이는 나라를 전면적으로 뜯어고치는 대규모 개혁을 추진해 본 경험과 지식이 없던 조선엔 쉽지 않은 도전이었을 것이다.
경험이나 지식 부족보다 더 본질적인 문제는 '정치적 의지'였다. 임오군란·갑신정변 이후 청·일이 톈진조약을 통해 잠정적 협조 체제를 구축하자 소란하던 한반도 정세는 비로소 안정을 찾는다. 고종과 명성황후가 간절히 원했던 바로 그 평화였다. 이들은 "황금 같이 소중했던 그 기간"을 국가를 개혁하는 데 활용하는 대신 악화(당오전)를 찍어 내고, 파렴치한 매관매직을 일삼는 등 본인의 배를 불리는 데 허비했다. 나라는 큰 위기에 맞닥뜨려 휘청이고 있는데 '기득권'이 보장되는 현실에 안주하면서 국가 발전을 위한 개혁을 시도조차 하지 않은 것이다. (...)
이 무렵 고종과 명성황후의 사치가 얼마나 심각했는지 보여 주는 실증적 연구가 있따. 이영훈은 2011년 논문 〈대한제국기 황실재정의 기초와 성격〉에서 궁중에 식재료를 공급하는 역할을 맡고 있던 명례궁의 수입·지출 기록(1792~1906년의 예산 기록이 존재)을 분석했다. 이영훈에 따르면, 황현이 비판하는 시기에 해당하는 1892~1893년 물가 상승률을 반영한 명례궁의 '실질 수입'은 40여 년 전(1853~1854년)보다 3.8배 증가했다. 이 수입 증가분의 대부분(88.2퍼센트)은 돈(錢)으로 지급된 왕실의 내하內下(전입금)로부터 나왔다. 왕실이 예전보다 명례궁에 네 배 가까이 많은 예산을 내려보냈다는 뜻이다. 이렇게 풍족해진 예산으로 고종과 명성황후는 마음껏 먹고 마실 수 있었다.
그렇다면 이 돈은 어디서 나왔을까. 흥미롭게도 왕실리 명례궁에 돈(錢)을 쏟아붓기 시작한 1882년은 악화인 당오전이 발행되기 시작한 해와 겹친다. 왕실의 내하는 다름 아닌 이 당오전으로 지급됐다고 단정할 수 있다. 1882년 3만 8100냥이던 내하는 1887~1888년 연간 50만 냥을 넘었고, 1891년 다시 급증해 1894년에는 270만 냥 이상의 거액이 됐다. 결국, 물가 상승을 유발해 서민의 고혈을 빠는 악화를 마구 찍어 명례궁으로 내려보내고 그 돈으로 왕실이 흥청거린 것이다. (128~132쪽.)
오토리 역시 진심이긴 마찬가지였다. 그는 '많은 병력이 필요없다'는 자신의 의견에 귀 기울이지 않는 무쓰에게 17일 다시 전문을 보내 "한성 근방은 현재 아주 조용하고 평온한 상태이니 사실상 많은 호위병이 필요하지 않다"라고 강조했다. 이어 청국 공사관에서도 "아산에 있는 청국군을 철수시킬 테니, 우리 나라 군대도 동시에 철수시켜 줄 것을 희망한다"는 뜻을 전해 왔다면서 청·일의 동시 철군을 위한 협의에 응해도 좋을지 물었다.
'온건파'인 이토 히로부미 총리의 생각도 비슷했다. 그 역시 이번 일로 청과 전면 전쟁을 벌여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13일 오전 임시 각의를 열어 청·일이 협력해 "신속히 반란을 진압"하고, 이후 "양국이 약간 명의 상설위원을 둬" 공동으로 조선의 내정 개혁을 추진하는 안을 제출했다. 청의 '압도적 우위'가 이어져온 조선 내 힘의 균형을 일단 50 대 50으로 맞추겠다는 구상이었다. 청이 이 제안을 받아들였다면, 두 나라는 전쟁을 벌이는 대신 함께 손잡고 조선의 내정 개혁을 시도했을지 모른다.
13일 열린 각의에서 '청·일이 각각 몇 명의 상설위원을 파견해 공동으로 조선의 내정 개혁을 추진한다'는 이토의 안에 "각료들은 모두 찬성"한다는 의견을 밝혔다. 이토는 바로 그날 왕봉조와 접촉했다. (...)
이토가 처음엔 "병력을 남겨 두자"는 뜻을 밝혔다가, 왕봉조의 강력한 주장을 받아들여 "난이 수습되면 철병된 뒤 협의"하자며 한발 물러났음을 알 수 있다. 이 말은 "사건이 진정되면 곧 철수한다"는 톈진조약의 틀 안에서 사태를 수습하는 쪽으로 합의가 이뤄졌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외교를 통해 문제를 해결하려는 합리적 타협안이었다.
한반도의 운명을 가르는 이 중차대한 '역사의 갈림길'에서 '면도날' 무쓰가 개입했다. 무쓰는 15일 다시 열린 각의에서 이토가 제시한 청·일 공동 개혁안에 "청과 협의를 시작해 그 결국을 볼 때까지 목하 조선 땅(韓地)에 파견된 군대는 철수시키지 않는다.", "청이 우리 의견에 찬동하지 않을 때는 제국 정부가 혼자 힘으로 조선이 정치 개혁을 하도록 노력한다"라는 내용을 추가할 것을 주장해 관철시켰다. 이토와 왕봉조의 앞선 합의에 따른다면 전주화약으로 동학농민군이 사실상 진압됐으니 두 나라는 협의를 거쳐 군대를 빼야 했다. 이에 견줘 무쓰의 안을 받아들이게 되면, 청·일이 협의를 진행해 조선의 내정 개혁 등에 대해 일본이 만족할 만한 결과가 나올 때까지 철군을 해선 안 됐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상대가 이 제안을 거절한다면, 일본은 "최후의 결심"을 하고 무력을 써서라도 청을 배제한 채 혼자 힘으로 조선 개혁을 추진해야 했다. 청을 몰아낸 뒤 자신들의 맘대로 조선을 뜯어고치겠다는, 무도하기 이를 데 없는 주장이었다. (...) (162~164쪽.)
일본에 가담해 고종을 포로로 잡아들이는 이 끔찍한 일을 저지른 '일본당'의 속내를 엿볼 수 있는 자료는 많지 않다. 다만, 유길준이 석 달 뒤인 10월 말 보빙사의 일원으로 도쿄를 방문해 무쓰와 마주 앉았을 때 쏟아 낸 말이 눈길을 끈다. "조선인에겐 세 가지 부끄러움이 있소. 스스로 개혁하지 못해 귀국의 권박勸迫을 받으니 본국 인민에게 부끄러운 것이 하나이고, 세계 만국에 부끄러운 것이 둘이고, 천하 후세에 부끄러운 것이 셋이오." 며칠 뒤 이토 히로부미 총리와 만남에선 할 말이 있다고 청한 뒤 일어나 큰소리로 '조선 독립 만세'를 외쳤다.
외세에 붙어서라도 개혁을 추진하려 했던 유길준의 절박한 마음을 2025년을 살아가는 한국인이 온전히 이해하긴 쉽지 않은 일이다. 어찌 됐든 주사위는 던져졌고, 조선의 개혁 세력은 이제 막 시작된 갑오개혁을 반드시 성공시켜야 했다. (180~181쪽.)
(...) 1894년 12월 17일 출범한 개혁 내각은 김홍집(갑오개혁파·총리대신)과 박영효(갑신정변파·내부대신)라는 두 인물을 투톱으로 내세운 이질적 세력의 연합체였다. 두 세력은 애초 물과 기름처럼 한데 어우러지기 힘든 관계였다. 갑오개혁파인 김홍집·김윤식(외무대신)·어윤중(탁지대신) 등은 1880년대엔 친청파였던 조정 중신들로, 실무 능력이 뛰어나 일본 공사관으로부터 "일을 성사시킬 재능이 있는 인물들"이라는 호평을 받고 있었다. 이에 맞선 박영효·서광범(법부대신) 등 갑신정변파는 뿌리부터 '친일파'들로 혁명에 실패한 뒤 10여 년 넘게 조선의 현실정치에서 떨어져 망명 생활을 하고 있었다. 개혁을 성공시키려는 이노우에의 강한 영향력에 눌려 한솥밥을 먹고는 있지만, 진심으로 한 덩어리가 되기엔 여러모로 어려움이 많았다. 김홍집이 보수적 실무 관료라면, 박영효는 열정적 혁명가였다. (206쪽.)
조선이 19세기 말~20세기 초 약육강식의 국제 질서 속에서 살아남으려면 쉽지 않은 과제인 내정 개혁에 성공해야 했다. 그러기 위해선 좋든 싫든 고종과 개혁 세력의 연대가 필수적이었다. 이 둘이 혼연일체가 돼 조선을 근대국가로 탈바꿈시키기 위한 합리적 의사결정 시스템을 만들어 내야 했다. 하지만 명성황후의 끔찍한 죽음으로 인해 고종과 조선 최고의 관료들이던 김홍집·어윤중·김윤식·유길준 등은 불구대천의 원수가 됐다. 둘 사이의 타협 가능성이 사라지며 조선의 운명은 더 위태로워졌다.
(...)
일본이 입은 피해는 당장 눈에 보이진 않았지만 더 본질적이고 끔찍했다. 이 사건을 계기로 현장에서 감당하기 힘든 일을 저지르면, 정부에선 이를 뒤늦게 추인하는 일본 특유의 병폐가 시작됐다. 일본은 이 '변태적 속성'을 다스리지 못해 만주사변-중일전쟁-태평양전쟁에 잇따라 휩쓸리며 끝내 파멸하고 만다. (218~219쪽.)
김홍집은 망국의 위기에 직면해 있던 1880~1890년대 조선이 배출해 낸 '최고의 인재'였다. 그런 의미에서 그의 죽음은 곧 조선이라는 국가의 총체적 실패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훗날 유길준의 회고에 따르면, 김홍집은 1894년 7월 일본군이 경복궁을 침탈했을 때 죽으려 했고, 1895년 10월 명성황후가 살해됐을 때 다시 세상을 등지려 했다. 하지만 고귀한 이상을 추구하며 스스로 목숨을 끊는 안이한 선택 대신, 구체적 현실 속에서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에 최선을 다하려 했다. 그것은 일본과 협력해 조선을 개혁해가는 더럽고 고통스러운 길이었다.
김홍집과 같은 꿈을 꾸며 노심초사했던 이들도 비참한 최후를 맞았다. 어윤중·정병하는 잔인하게 살해됐고, 김윤식은 유배를 떠나야 했다. 재빨리 몸을 피한 이들도 있었다. 고종은 "도망친 죄인 유길준·조희연·장박·권형진·이두황·우범선·이범래·이진호 등을 잡아들이라"고 명령했다. 이들은 일본으로 기약 없는 망명길을 떠나게 된다. 허무하게 사라진 일류 인사들의 빈자리를 채운 것은 고종에 대한 충성심만을 앞세우는 이류·삼류였다. 그런 의미에서 '고종의 승리'가 반드시 '조선의 이익'으로 연결된 것은 아니었다. (238쪽.)
안타깝게도 고종이 그린 조선의 미래는 군주와 내각·의회 등 근대적 국가기구가 서로 견제·협력하면서 주요 의사결정을 내리는 입헌군주국가가 아니었다. 그가 꿈꾼 것은 왕이 그 어떤 제도적 속박도 받지 않고 사실상 무한대의 군주권을 행사하는 전제군주국가의 건설이었다.
자신의 권한 회복을 위해 고종이 가장 먼저 취한 조처는 갑오개혁 때 '왕실 사무'와 '정부 사무'를 엄격히 분리하기 위해 만든 '궁내부'의 덩치를 키우는 것이었다. 커진 궁내부가 심혈을 기울인 업무는 세금 징수였다. 궁내부는 1896년 5월부터 고종의 칙명을 내세워 각종 잡세를 걷기 시작한다. 세금 징수 업무는 갑오개혁 때 탁지부 업무로 일원화됐지만, 이를 간단히 무시한 것이다. 하라는 1896년 8월 15일 전문에서 "궁정의 비용이 부족하다는 구실로 삼아 궁내부에서 여러 잡세를 징수하고 있다. 그 세소의 수가 70여 개로 늘어나" 일본과도 마찰을 빚고 있다고 전했다. 고종이 이렇게 악착같이 돈을 모아야 했던 것은 명성황후의 제사(삭망제)와 장례 비용 등에 쓸 돈을 마련하기 위해서였다. 이 무렵 《주한일본공사관기록》을 보면, 고종이 1897년 8월 궁내부 경비 가운데 1만여 원을 절에 공양료로 선불해 관리들의 월급을 주지 못했다는 기록도 확인할 수 있다.
고종의 폭주를 보며 모두가 절망했다. (...) (260쪽.)
그 직후인 28일부터 11월 2일까지 '관민공동회'가 열렸다. 종로 운종가 네거리 대회장인 가로 30피트, 세로 60피트(약 가로 9미터, 세로 18미터)짜리 대형 천막이 설치되고, 태극기가 걸렸다. 행사장 주변에 친 목책 안엔 약 4000명이 질서 있게 자리를 잡았다. 28일 오후 1시 집회를 시작해 윤치호를 대회장으로 선출했다. 29일 오후 2시에 시작한 이틀째 행사엔 박정양 등 고관들도 대거 참석했다. (...)
이 회의에서 11개 결의안을 채택해 '헌의 6조'라 이름 붙은 6개안을 고종에게 제출했다. 내용은 관리와 백성이 힘을 합쳐 전제황권專制皇權을 굳건히 한다, 광산·철도·석탄·산림 및 차관·차병借兵은 각 부 대신과 중추원 의장이 합동해 서명·날인한다, 세금은 모두 탁지부에서 관할한다, 중대 범죄는 공판을 진행하고 피고가 자복한 뒤 형을 시행한다, 칙임관은 대황제 폐하가 정부에 자문해 과반수의 찬성에 따라 임명한다, 규정을 실제 시행한다였다. 훗날 을사늑약을 강요하는 이토 히로부미 앞에서 졸도한 한규설(1856~1930) 중추원 의장은 감격에 겨워 "금일의 관민협회는 (조선) 500년 초유의 일"이라며 "부강의 기초가 금일에 정해졌으니 국가를 위해 만세를 부르자"라고 말했다. 박정양 역시 "금일 관민이 합동하려 6조를 협의해서 안정하게 정하니 관민합심(관민이 한마음임을)을 가히 알 수 있다"라고 말했다.
《독립신문》 역시 이날 광경에 대해 "회중에서 차례로 연설하여 공의하고 여섯 가지 강령만 적어서 회중에 가부 취결하매 시원임(전현직) 대신들이 다 '가可' 자를 쓰고 연설도 했다"라고 적었다. 이렇게 관민의 뜻이 하나로 묶였으니 이제 대한제국의 최고 권력자인 고종이 결단해야 했다. (...)
이어 형식적 자문기구였던 중추원의 권한을 강화해 '사실상의 의회'로 만들기 위한 관제 개정 작업이 마무리됐다. 11월 2일 개정·반포된 〈중추원 관제〉(칙령 36호)에 따라 중추원은 법률·칙령의 제·개정과 폐지, 의정부에서 임금에게 상주하는 모든 안건, 중추원에서 임시 건의하는 사항 등에 대한 심의 권한을 갖게 됐다. 또 의정부와 중추원 간에 의견이 다를 때는 "서로 협의해 타당가결한 뒤 시행"하도록 해 사실상 '거부권'도 행사할 수 있었다. 중추원 의관(50명)의 선출 방식도 파격적이었다. 절반은 정부가 군주에게 추천하고, 나머지는 독립협회가 27세 이상 가운데 투표를 통해 뽑게 했다. (...)
그로부터 8개월이 지난 1899년 8월 17일 우리나라 최초 헌법이라 할 수 있는 〈대한국국제〉가 반포됐다. 개혁 세력과 벌인 처절한 권력투쟁에서 최종 승리를 거둔 것은 고종이었다. 〈대한국국제〉에 따르면, "대한제국의 정체는 만세토록 불변할 전제정치"(2조)라고 정해졌고, "대한국 대황제는 무한한 군권을 지니고 있"(3조)으며 "대한국 신민이 대황제가 지니고 있는 군권을 침손侵損하는 행위가 있으면 이미 행했건 행하지 않았건 막론하고 신민의 도리를 잃은 자로 인정한다"(4조)는 내용도 들어갔다. 또 고종이 대한제국의 모든 육·해군을 통솔하고(5조), 모든 법률을 제·개정하며, 그 반포와 집행을 명하는(6조) 권한을 갖는다는 내용도 명기됐다.
(...) 고종은 자기 살을 에어 내어 나라 전체를 살리는 개혁을 감당할 수 있는 인물이 아니었다. 독립협회의 개혁 시도가 끝내 실패하며, 대한제국의 마지막 '희망의 불꽃'도 꺼지고 만다. 이제 망국으로 가는 수레바퀴가 본격적으로 돌아가기 시작한다. (292~299쪽.)
불행하게도 전쟁은 만주로 확대됐다. 러시아의 애초 예상과 달리 의화단은 한창 부설 공사가 진행 중이던 동청철도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제국을 동서로 잇는 대동맥이 위험에 빠졌으니, 강경 대응에 나설 수밖에 없었다. 러시아의 '이인자'인 세르게이 비테 재무상은 7월 8일 니콜라이 2세에게 '철도 보호'를 위해 군대를 파견해 달라고 요청했다. 바로 다음 날 만주에 군대를 파견하라는 명령이 내려졌다.
러시아는 1896년 6월 3일 조인된 러·청 비밀동맹조약에 따라 일본의 침략에서 청을 보호할 의무가 있었다. 청 역시 이 조약에 따라 국내에서 발생하는 여러 공격에서 러시아의 철도를 지켜야만 했다. 하지만 청은 6월 21일 러시아를 포함한 열강에 선전포고를 한 상태였다. 러시아군이 만주에 진입하면 불가피하게 러청전쟁이 시작될 수밖에 없었다. 러시아는 이후 잔인하고 과감한 군사작전에 나서 10월 2일 만주 전역을 손아귀에 넣게 된다. (315쪽.)
이즈볼스키는 조선 중립화에 대한 일본의 반응을 떠보는 동시에 본국을 향한 설득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마침내 '고go 사인'이 떨어진 것은 1900년이 마무리되기 직전이었다. 블라디미르 람스도로프 외무대신은 12월 30일 이즈볼스키에게 "한국 중립화 조건에 관해서 이토 공작과 신중히 교섭에 착수할 것을 폐하의 허가를 얻어 귀하에게 일임한다"는 뜻을 전했다.
이즈볼스키가 다시 가토를 찾아간 것은 1901년 1월 7일이었다. 이때 일본이 러시아의 중립화 제안을 받아들였다면, 대한제국은 망국의 서글픈 길을 가는 대신 러·일 사이의 '중립적 완충지대'로 아슬아슬하게 목숨을 유지했을지 모른다. 이것이 갑신정변, 갑오개혁, 만민공동회 등 국가를 바로 세우기 위한 모든 개혁에 실패한 대한제국이 운 좋게 얻게 된 사실상 '마지막 기회'였다. (...)
가토는 제안을 접수만 한 채 답변을 보류했다. (...) 이튿날 찾아온 하야시에게 의견을 물었다. 답은 정해져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 제안은 절대 거부해야 한다. 러시아가 만주 방면에서 활동을 시작한 오늘과 같은 때에 조선의 처치와 관련해 러시아 쪽이 어떤 형태로든 (일본과) 타협하기 원한다면 그 본심이 어디에 있는지 명확히 알 수 있다." 대한제국을 러·일 사이 완충지대라는 성격을 갖는 '중립국'으로 만들면, 러시아는 더 이상 일본을 신경 쓰지 않고 만주에서 자유롭게 행동할 수 있었다. 이에 비해 일본은 장래에 한반도에서 무슨 일이 벌어진다 해도 개입할 수 없게 되는 위험을 감수해야 했다. 러시아가 만주를 쥔 상태에서 한반도를 중립화하자는 것은 일본엔 손해일 뿐 득이 될 게 없는 얘기였다. 청국 공사 부임을 앞두고 외무성에 얼굴을 내밀던 고무라도 같은 의견이었다. (...)
결국 일본이 원한 것은 한반도를 중립화해 얻을 수 있는 1.5 대 0.5의 '기울어진 타협'이 아닌 '0 대 0'(러시아의 만주 철군과 조선의 현상 유지) 혹은 '1 대 1'(만한교환)의 '완벽한 균형'이었다. (...) (346~347쪽.)
나라가 왜 이런 꼴이 되고 말았을까. 1876년 강화도조약 이후 우리에겐 30여 년이란 시간이 있었다. 왕 혼자 모든 것을 결정하는 '전제군주제'를 버리고, 근대국가에 걸맞은 합리적 의사 결정 시스템을 갖추는 '정치 개혁'을 서둘러야 했다. 그래야 유능한 인재들이 합리적 절차에 따라 올바른 정책을 세우고 이를 꾸준하고 힘 있게 추진해 나갈 수 있었다. 이를 위해 갑신정변, 갑오개혁, 독립협회의 의회 개설 등 여러 의미 있는 시도가 이어졌다. 이 모든 노력이 절대군주권을 놓지 않으려는 고종의 반대로 실패했다. 결국 조선·대한제국은 자신의 힘으로 정치 개혁을 완수하지 못한 경직된 국가로 남았다. (419쪽.)
마지막으로, 지나친 역사적 정념을 버려야 한다. 트럼프 대통령의 폭주로 미국 중심의 일극 체제가 사실상 무너지면서 우리와 가치를 공유하는 이웃들과 연대·협력을 강화하는 게 한국 외교의 가장 중요한 과제가 됐다. 일본, 유럽연합, 아세안, 오스트레일리아 등 여러 협력 상대를 꼽을 수 있겠지만 가장 중요한 동반자는 '가장 가까운 이웃'인 일본일 수밖에 없다.
한·일 관계에 대해 한국인이 품고 있는 불만을 말하자면 아마 한도 끝도 없을 것이다. (...) 한국이 중시하는 강제동원 피해자 배상 문제에 대해서도 윤석열 전 대통령이 2023년 3월 '일방적 양보안'을 내놓았지만, 일본은 지금까지 '성의 있는 호응 조처'를 내놓지 않고 있다. 아마 영원히 내놓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미국의 패권국의 책무를 걷어차고 지금처럼 이기적 횡포를 이어간다면, 불과 몇년 안에 그동안 인류가 만들어 온 가치과 국제 규범이 사라진 '약육강식의 시대'가 도래할지 모른다. 상황이 이렇게 됐을 때 같은 미국의 동맹이고, 자유무역 질서를 통해 발전해 왔으며, '가치를 공유'하는 한·일은 좋든 싫든 서로에게 소중한 비빌 언덕이 된다.
(...) 일본 내 대표적 한국 연구자인 기미야 다다시木宮正史 도쿄대 교수는 이런 변화를 언급하며 한·일 관계가 변했다는 분석을 내놓고 있다. 상대가 마음에 안 든다고 영토를 떼어 다른 곳으로 옮겨 갈 수 없는 이상, 숙명처럼 서로의 존재를 받아들이고 우호적 관계 구축을 위해 노력해야 한다.
갑신정변의 주역이던 서재필은 《회고 갑신정변》에서 김옥균이 입에 담았다는 비전을 소개하고 있다. "그는 늘 우리에게 말하기를, 일본이 동방의 영국 노릇을 하려 하니, 우리는 우리나라를 아시아의 프랑스로 만들어야 한다고 했다." 망국의 갈림길 앞에 섰던 고종은 일본에 종속되는 한·일 협력의 길을 택할 수 없었지만, 이미 대등한 관계를 이뤄 낸 대한민국의 선택은 다를 수 있다. 우리는 역사를 직시하면서도, 미래를 지향해야 한다. (462~464쪽.)
교정. 초판 1쇄
14쪽 6줄 : 윤치호(1965~1945) -> 윤치호(1865~1945)
36쪽 7줄 : 오세창(1864~1853) -> 오세창(1864~1953)
54쪽 9줄 : 1891년 -> 1871년
61쪽 12줄 : 사에지마 -> 사메지마
79쪽 10줄 : 윤응렬 -> 윤웅렬
94쪽 소제목 : 당오전이이냐 -> 당오전이냐
105쪽 밑에서8줄 : 윤응렬 -> 윤웅렬
108쪽 밑에서3줄 : 텐진 -> 톈진
111쪽 11줄 : Nikolai Matiunine -> Nikolai Matiunine (띄어쓰기 두 칸)
129쪽 밑에서7줄 : 본질 문제는 -> 본질적인 문제는
174쪽 11줄 : reformes -> reforms https://db.history.go.kr/joseon/level.do?levelId=jh_004r_0060_2340
181쪽 밑에서2줄 : 갑오개혁을 반드시 성공해야 했다 -> 갑오개혁에 반드시 성공해야 했다 or 갑오개혁을 반드시 성공시켜야 했다
199쪽 밑에서7줄 : 일본은 긴 고심 -> 일본은 긴 고심 (띄어쓰기 두 칸)
208쪽 밑에서3줄 : 월리엄 -> 윌리엄
209쪽 밑에서8줄 : 이주희李周會 등이 이번 훈련대에 입위入衛하는 -> 이주회李周會 등이 이번 훈련대에 입위入衛하는 (한자의 글꼴크기도 함께)
213쪽 밑에서11줄 : 지급하겠다는 '온건한 -> 지급하겠다는 '온건한 (띄어쓰기 두 칸)
216쪽 밑에서8줄 : 구니토모 시케아키國友重章 -> 구니토모 시게아키國友重章 (한자의 글꼴크기도 함께)
221쪽 6줄 : 시폐이예르 -> 시페이에르
230쪽 밑에서8줄 : 간고艱苦를 (한자의 글꼴크기)
231쪽 밑에서11줄 : '마지막 선비' (작은따옴표 앞뒤 바뀜)
232쪽 밑에서11줄 : 향악 -> 향약
242쪽 밑에서5줄 : 시페이예르 -> 시페이에르
277쪽 8줄 : 지존至尊을 (한자의 글꼴크기)
289쪽 5줄 : 공흥식 -> 공홍식
297쪽 밑에서3줄 : 양흥묵 -> 양홍묵
320쪽 3줄 : 람스도로프 -> 람스도르프
322쪽 2줄, 3줄, 5줄, 6줄, 13줄 : 구니모토 -> 구니토모
322쪽 11줄 : 후미마로文麿 (한자의 글꼴크기)
324쪽 3줄, 9줄, 밑에서6줄 : 구니모토 -> 구니토모
327쪽 8줄 : 내담內談 (한자의 글꼴크기)
331쪽 4줄 : 현현영운과 -> 현영운과
335쪽 9줄 : 이스볼스키 -> 이즈볼스키
343쪽 밑에서11줄 : 포루砲砦 -> 포루(砲砦)
362쪽 밑에서8줄 : 람스도로프 -> 람스도르프
364쪽 밑에서9줄 : 람스도로프 -> 람스도르프
364쪽 밑에서3줄 : 람스토도프 -> 람스도르프
365쪽 6줄 : 람스도로프 -> 람스도르프
369쪽 밑에서2줄 : 람스도로프 -> 람스도르프
379쪽 밑에서2줄 : Vladimir Vonlyarlyarsky -> Vladimir Vonlyarlyarsky (띄어쓰기 두 칸)
388쪽 밑에서1줄 : 람스도로프 -> 람스도르프
390쪽 6줄, 밑에서10줄 : 람스도로프 -> 람스도르프
390쪽 밑에서7줄 : 알렉셰예프 -> 알렉세예프
399쪽 밑에서4줄 : 페테르부그크 -> 페테르부르크
410쪽 10줄 : 람스도로프 -> 람스도르프
415쪽 7줄 : 받아들인"다고(1조) -> 받아들인"(1조)다고
423쪽 5줄 : 대권大權을 (한자의 글꼴크기)
435쪽 밑에서3줄 : 월리엄 -> 윌리엄
463쪽 밑에서12줄 : 기미아 다다시 -> 기미야 다다시
472쪽 2줄 : 하기의 안 -> 하기의 난
489쪽 밑에서3줄 : 《국역 야관파천》 -> 《국역 매천야록》
490쪽 밑에서10줄 : 재구상함 -> 재구성함
490쪽 밑에서6줄 : 제구상함 -> 재구성함
500쪽 10줄 : 사리(私利)만을 -> 사리私利만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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