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og君 Blues...

아시아-태평양 전쟁 : 광기와 오만 (김휘찬, 한언, 2025.) 본문

잡冊나부랭이

아시아-태평양 전쟁 : 광기와 오만 (김휘찬, 한언, 2025.)

Dog君 2026. 2. 26. 08:22

 

  대학에서 강의를 합니다. (곧 개강 ㅠㅠ) 늘 첫 시간에는 '직관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것을 이해하는 것이, 대학에서 하는 공부'라는 말로 시작합니다. (역사만이 아니라 다른 모든 분야가 다 그렇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점에서 볼 때, 2차 대전 시기 세계적으로 팽배했던 불가해한 광기는 여전히 탐구할 부분이 많습니다. 수많은 연구자들이 저 나름의 방식으로 이 시기를 설명하려고 애썼고, 저 역시도 틈날 때마다 이에 대해 말씀을 드렸지요.

 

  얼핏 생각하면 일본이 전쟁의 광기에 휩싸이는 것은 결코 필연이 아니었습니다. 동아시아에서 가장 성공적으로 근대화에 성공했고, 이에 따라 서양의 합리주의와 계몽주의적 세계관에도 가장 친연성이 강했습니다. 다이쇼 데모크라시처럼 민주주의에 대한 자각도 결코 늦지 않았구요. 저자는 군 장교 출신이라고 하는데요, 어쩌면 저자는 그런 이력 때문에라도 이 문제에 대해 더 치열하게 고민을 하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군인 출신이 쓰는 전쟁사는 자칫 전쟁을 '한 번쯤 해볼만한 일'이나 영웅 서사의 대향연으로 미화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전쟁 상황을 자세하게 묘사할 수 있다는 장점에 매몰된 나머지 전쟁의 비인간성에 대해서는 둔감해지는 상황 말이죠. 하지만 김휘찬의 『아시아-태평양 전쟁 : 광기와 오만』은 각 전투의 상황을 치밀하게 묘사하면서도 전쟁 자체의 역사적 성격에 대한 고민 역시 빼놓지 않습니다. 200쪽 남짓으로 그다지 많지 않은 분량에 이런 정도의 상세함과 치열함이 공존할 수 있다는 것이 놀랍습니다.

 

  이 책을 10대 시절의 저에게 권해주고 싶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역덕이라 전쟁의 상세한 전개과정에 대해 호기심이 많았던 저의 지적 호기심을 만족시켜주면서도 전쟁에 대해 근본적으로 성찰해 줄 수 있는 기회까지 주니까요. 주변에 10대 때의 저 같은 사람이 있다면, 혹은 그런 이들과 함께 할 일이 많으시다면, 이 책 한 번 권해보시면 어떻겠습니까.

 

  이 2·26 사건으로 황도파가 몰락하면서 일본 육군 내부의 파벌 다툼은 통제파의 승리로 막을 내렸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통제파와 황도파가 단순히 국가통치 이념에서만 다른 것이 아니라, 향후 군사전략에 대해서도 뚜렷한 이견을 보였다는 점이었지요. 황도파는 최대의 적으로 공산주의와 소련을 지목한 반면, 통제파는 미국과 영국 등 서구 열강을 주요 적으로 상정했습니다. 더구나 통제파는 황도파와 달리 중국에 대해서도 강경한 입장을 고수했습니다.
  즉, 2·26 사건은 일본 육군 내부에서 파벌 구조가 정리된 것은 물론, 향후 군사전략의 방향성까지 결정지은 중대한 사건이었습니다. 더구나 군 내부의 엄청난 쿠데타를 계기로 군부는 단순한 국가 무력의 상징이자 군대가 아닌, 국내 최고의 정치적 집단으로 성장해 군국주의의 길로 빠르게 접어들게 되었지요. (32쪽.)

 

  무다구치 연대가 자신의 명령도 없이 갑자기 중국군을 공격했다는 소식을 들은 여단장 가와베 마사카즈河辺正三 소장은 분노에 차 현장으로 달려갔습니다. 그러나 막상 현장에 도착한 그는 아무 말 없이, 그저 묵묵히 무다구치의 지휘를 지켜보았습니다. 개인적인 분노도 있었겠지만, 이미 벌어진 일에 대한 일종의 체념이었을 것입니다. 무다구치와의 개인적 친분이 영향을 미쳤을 가능성도 전혀 배제할 수 없지요. (...)
  이런 군의 명령계통을 무시하는 행위는 단지 무다구치만의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루거우차오 현지에서 중국군과의 충돌 소식이 전해졌을 때, 총리대신 고노에 후미마로近衛文麿 또한 뚜렷한 리더십을 보여주지 못했습니다. 중국에 대한 대응은 피할 수 없다고 여겼으나, 사태가 전면전으로 번지는 것만은 원치 않았던 그의 신중한 성격이 그대로 드러난 결과였습니다. 그는 중국으로의 파병은 늘려 가면서도, 한편으로는 "사태를 확전시키지 말라"는 지시를 내리는 등 갈팡질팡한 모습을 보였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바로 그 리더십의 틈을 파고든 군부 강경 세력이었습니다. 특히 육군 내부에는 은근히 현지 관동군이 더욱 거세게 움직이기를 바라는 장교들까지 있었지요. 이미 군 내부에는 중국과의 개전을 바라는 목소리가 적지 않았던 것입니다.
  결국 고노에 총리의 외교적 수습과 확전 자제 지침에도 불구하고, 현지 군 지휘관들의 독단과 군부 내부의 강경론자들의 압박으로 사태는 점차 악화되었습니다. 루거우차오의 사건 이후 중국군과의 교전은 계속 이어졌고, 일본은 베이핑北平(현 베이징)과 톈진을 비롯한 중국 북부의 주요 도시에 하나둘 진주하기 시작했지요. (...) (37~38쪽.)

 

  당시 일본군은 기형적인 이중 체제를 유지하고 있었습니다. 예를 들어 육군은 육군대신(장관)의 지휘를 받는 육군성과 참모총장의 지휘를 받는 참모본부로 나뉘어 있었습니다. 군정을 담당하는 육군성은 총리의 지시를 받는 내각의 일원이었으나, 군령을 담당하는 참모본부는 천황의 직속 기관이었습니다. 해군도 마찬가지였습니다. 해군대신 지휘는 받는 해군성과 군령부 총장의 지휘를 받는 군령부로 나뉘어 있었습니다. 이렇듯 육군 참모본부와 해군 군령부는 천황의 직속 기관으로, 의회나 정부의 견제를 전혀 받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총리의 명령을 거부하는 것은 물론, 예산이 삭감되면 정치인들을 은근히 협박하기도 했습니다.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는 초헌법적 기관, 그것이 바로 통수부였습니다. (55~56쪽.)

 

  사이판이 함락되면서 일본이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는 그나마 희박한 확률마저 완전히 0퍼센트가 되어버렸지요. 『일본은 왜 더 큰 전쟁으로 나아갔을까』의 저자 가토 요코에 따르면, "사이판 함락으로 인해 일본이 전쟁에서 패배할 것은 이미 100퍼센트 확실해졌다"라고 지적합니다. 그럼에도 일본은 사이판 함락 이후에도 약 1년을 더 버텼습니다. 왜 이런 무모한 전쟁을 1년간이나 수많은 인명을 갈아 넣으며 지속했느냐는 비판에 대해 일본은 의미 없는 전장에 몰아넣은 수많은 자국의 젊은이들에게 제대로 된 설명을 내놓지 못하고 있습니다. (180쪽.)

 

  그런데 승리를 거두었음에도, 승리자인 미군을 찜찜하게 만든 사건이 있었습니다. 구리타 함대가 공격을 포기하고 돌아가던 오전 10시경, 일본의 제로센 전투기 1기가 미군 함대에 날아들었습니다. 자세히 보니 그 제로센에는 250kg 폭탄 한 발이 적재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뭔가 이상했습니다. 폭격을 위해서라면 폭격 코스에 진입해 폭격 임무를 수행해야 했지만, 어째서인지 이 제로센은 속력을 줄이지 않은 채 곧장 미군 항공모함 USS 세인트로USS St. Lo를 향해 날아왔습니다. 제로센은 세인트 로의 갑판을 뚫고 들어가 내부 격납고에서 폭발을 일으켰습니다. 이는 미드웨이 해전에서 일본군 항공모함이 당했던 것처럼 주변의 어뢰와 폭탄, 연료가 연쇄적으로 폭발하며 대규모 2차 폭발로 이어졌습니다. 세인트 로는 불길에 휩싸인 채 30분 뒤, 서서히 바닷속으로 가라앉기 시작했습니다.
  원래라면 조종사가 자신의 기체가 대공포탄에 맞아 살아 돌아갈 가망이 없다고 판단했을 경우, 그대로 적함에 들이받는 것은 일본군뿐만 아니라 미군도 해오던 '조종사의 마지막 공격'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제로센은 달랐습니다. 마치 처음부터 스스로가 폭탄인 듯 날아와 부딪쳤던 것입니다. 미군은 그 광경을 보고 알 수 없는 찜찜함을 느꼈고, 그것은 곧 공포와 확신으로 바뀌었습니다. 가미카제神風, 즉 '신의 바람'이라고 불린 일본의 자살 특공 공격이 시작된 것이었습니다. (202~203쪽.)

 

  여기서부터는 제 사견입니다만, 일본의 이러한 결전병기들을 보면서 저는 깊은 불쾌감을 느꼈습니다. 단순히 '인명을 경시했다'거나, '말도 안 되는 것'이라는 단순한 감정은 아니었습니다. 직접 다녀온 야스쿠니 신사의 박물관 유슈칸遊就館(유취관)이나 구레의 야마토 박물관에서는 실제로 가이텐, 오카, 후쿠류를 볼 수 있었지요. 그리고 그곳에서 제가 느낀 감정은 훨씬 더 복잡했습니다.
  (...)
  다만 오히려 더 위험하다고 느낀 것은 히로시마 옆 구레의 야마토 박물관에 전시된 가이텐이었습니다. 이곳은 가이텐과 같은 자폭병기의 희생을 지나치게 숙연하고 숭고한 것으로 포장하고 있다는 인상을 주었는데, 이는 현대 일본이 국가적 차원에서 행하고 있는 기만이라고 생각합니다. 1944년 사이판 함락 이후, 일본이 전쟁에서 승리할 가능성은 완전히 사라졌음에도 불구하고 일본은 식민지 조선인들뿐만 아니라 자국의 젊은 청년들까지 징집해 최전방으로 투입했습니다. 무려 1년 동안이나 그러한 희생을 강요했던 것이지요. 이는 '미군에게 일격을 가해, 조금이라도 유리한 위치에서 협상을 해야 한다'는 수뇌부의 의도가 반영된 결과였습니다.
  이미 패전이 확실한 상황에서, 그 일격이라는 명분 때문에 죽지 않아도 될 젊은 영혼들이 숱하게 희생되었습니다. 자폭 공격이 그랬고, 옥쇄명령이 그랬습니다. 이런 자폭 공격은 사실 한국전쟁 당시 전차가 없었던 국군이 인민군 전차를 상대로 수행했던 공격방식과도 유사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전황이 불리한 상황에서 자발적으로 이루어진 개인의 '영웅적 행위'였습니다. 그러나 태평양 전쟁에서 일본은 국가 단위로 자폭부대를 공식적으로 조직하고, 희망하지 않는 이들에게까지 자폭 공격을 강요했습니다. 더 나아가 국가와 군대뿐만 아니라, 당시 일본 사회마저도 젊은 이들에게 자폭을 강요했습니다. "모두가 미군과의 일전에 나가 가미카제로 산화하는데, 너는 비겁자다!"라는 논리로, 알게 모르게 주는 눈치도 엄청났습니다.
  저의 불편함은 바로 이런 점에서 비롯된 것 같습니다. 차라리 옛 대일본제국의 영광을 찬양하거나, 강력한 일본군을 재창설하자는 군국주의적 움직임이라면 이러한 불쾌감까지는 들지 않았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일본은 자국민을 지옥 같은 전장으로 내몰아 놓고도 이를 '공동체를 위한 군인들의 숭고한 희생'으로 포장하며, 정작 당시 수뇌부의 전쟁 책임에 대해서는 일언반구도 하지 않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되면 오히려 일본인들 사이에서도 '아주 힘들고 어려운 전재잉었다'는 인식이 퍼져 나가고, 더 나아가 일본 자신도 원자폭탄 등 전쟁의 피해자였다는 생각을 하게 될지도 모르지요. 그러나 일본인들 스스로는 깨어나, 무서운 전쟁을 일으켜 젊은이들을 죽음으로 내몰고도 그 책임을 전혀 지지 않고 있는 현재의 세태에 조금 더 관심을 기울여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210~212쪽.)

 

  이로써 일본은 포츠담 선언을 수락하고, 즉각 항복하는 안을 채택했습니다. 바로 여기에서, 힘들고 참혹했던 일본의 전쟁을 천황의 성스러운 결단 덕분에 끝낼 수 있었다는 신화가 만들어졌습니다. 전쟁을 일으킨 간악무도한 군부의 전횡을, 천황이 국민과 국가를 위해 모든 것을 걸고 성단을 내렸다는 것이었지요.
  그러나 이러한 주장과 달리 당시의 천황은 오늘날 우리가 떠올리는 단순한 '상징'이 아니었습니다. 당시 천황은 메이지 헌법 이래, 군 통수권을 가지고 있는 초헌법적인 존재였습니다. 실제로도 천황은 2·26 사건 등 많은 국내문제에 적극 개입했고, 전쟁 결정과 수행 과정에서도 많은 의견을 내비쳤습니다. 육군 참모총장 스기야마를 혼낸 일화나, 세부저인 작전이나 군의 배치에 대해서도 적극적으로 의견을 내고 군부의 보고를 받았습니다.
  (...) 종전 이후, 천황에게 전쟁 책임을 묻는 이는 아무도 없었습니다. 전쟁 책임은 일본 정부와 군부에 있으며, 입헌군주제의 상징적 존재인 천황은 그저 정부가 결정한 전쟁을 승인할 수밖에 없었다는 논리로 포장되었지요. 즉, 천황은 전쟁에 관해 의사결정의 능력도, 의사도 없었다는 주장입니다. (...)
  앞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이러한 설계는 일본인 스스로에게도 위험합니다. "군부, 그리고 도조 히데키라는 아주 나쁜 사람이 있었고, 그들 때문에 전쟁이 일어나 우리 일본 국민도 피해를 많이 입었다. 그리고 그 지옥 같은 전쟁에서, 천황 폐하의 성스러운 결단이 우리 모두를 구했다"라는 식의 스토리는 우리가 조금 더 조심스럽게, 신중하게 접근해야 할 문제입니다. 일본의 정치세력은 전쟁 이후에도 자신들의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해, 이렇게 '천황'이라는 존재 뒤에 숨어서 모든 전쟁 책임을 군부와 몇몇의 요인들에게 떠넘겼습니다. 그리고 이를 통해 전쟁 이후 자신들은 책임론에서 벗어나고자 했던 '설계'였다는 점을 우리는 잘 살펴봐야만 합니다. 그래야 전쟁 책임에서 천황을 배제하고 전쟁 이후의 정치공학적 설계를 지속해 온 일본의 실태를 제대로 파악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257~258쪽.)

 

  저는 개인적으로 한일관계에서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라는 말을 남발하는 것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 말이 지닌 메시지 때문이 아니라, 마치 그 표현이 일본과의 관계에서 전가의 보도처럼 악용되고 남용되는 현실이 안타깝기 때문입니다. 마치 무조건적으로 "일본은 악이고, 일본이 전쟁 중 벌인 모든 일은 모두 나쁘다. 그러니 일본 사람들 전체가 다 나쁘다"는 식의 민족주의적이고 과격한 주장에 논리로만 사용되는 것 같아 더욱 그렇습니다.
  책을 쓰면서 히로시마에서 살아남은 일본인들의 처참한 상황을 공부할 때면, "자업자득인데, 왜 그들의 처참함을 묘사하면서 걔들을 피해자로 묘사해?"라는 공격 아닌 공격을 받기도 했습니다. 제가 진정으로 전하고 싶은 메시지는, 그러한 고정관념을 내려놓고, 일본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고 이해해야 한다는 점입니다. 그래야만 일본과 싸워 이기든, 아니면 이웃 나라이자 협력자로 관계를 맺든 할 수 있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싶습니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일본인 스스로의 인식 전환도 분명히 필요합니다. "전쟁은 무조건 도조와 군부의 독재 때문이었어! 우리도 하고 싶지 않았어!"라는 간단한 명제로 자신들의 정당성을 설명해 버린다면, 진짜 뒤에 숨겨진 태평양 전쟁의 다양한 담론을 논의조차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일본인들 또한 국가에 의한 폭력에 노출되었고, 가미카제와 같은 자살공격을 강요받았고, 이길 수 없는 전쟁에서 무의미하게 희생되었습니다. 이러한 사실에 대한 자각과 책임이 없다면, 그저 "우리 일본인들도 많이 죽었다. 일본인들에게도 아주 힘든 전쟁이었다. 우리도 피해자다"라는 의식에 갇혀 과거 역사문제를 영영 해결하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269~270쪽.)

 

교정. 1판 1쇄

50쪽 5줄 : 견녀낼 -> 견뎌낼

55쪽 밑에서2줄 : 지휘는 받는 -> 지휘를 받는

70쪽 5줄 : 외교를 성공하도록 -> 외교에 성공하도록

195쪽 8줄 : 해협해 -> 해협에

221쪽 밑에서9줄 : 야카토 -> 야마토

270쪽 3줄 : 국가의 의한 -> 국가에 의한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