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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차 (제이슨 히켈, 아를, 2024.)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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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차 (제이슨 히켈, 아를, 2024.)

Dog君 2026. 2. 27. 10:26

 

  '격차'라는 직관적인 제목에서 이미 지구적 불평등을 정조준하겠다는 의도를 선명하게 드러냅니다. 사실 지구적 불평등을 체감하는 것은 그다지 어렵지 않습니다. 질병과 기아에 시달리는 비서구의 참상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면서 이들을 돕기 위한 기부를 호소하는 광고를 TV와 유튜브 등을 통해 쉽게 접하기 때문입니다. 즉각적인 비극 앞에서 발현되는 선의를 비하해서는 절대 안 된다고 생각하지만 과연 그것이 진짜 해법인지는 차분히 따져볼 문제입니다. 수십년동안 〈We are the world〉를 불렀지만 질병과 빈곤은 전혀 줄어들지 않았으니까요.

 

  이에 대해 『격차』는 서구 선진국이 비서구 후진국의 부와 자원을 수탈하는 구조가 엄존하는 한 불평등은 결코 해소될 수 없다고 지적합니다. 서구의 원조보다 훨씬 더 큰 액수가 비서구에서 서구로 이동하는 '구조' 하에서, 비서구의 빈곤을 완화하기 위한 NGO의 원조나 개별 시민의 기부를 강조하는 것은 되려 그 '구조'를 은폐하는 데 복무하기 십상이라는 거죠. 여기서 말하는 '구조'의 여러 측면 중 하나는 국가 간 채무입니다. 부패한 독재자의 사리사욕 때문이건 서구가 반강제적으로 떠안긴 것이건, 장기간의 복리효과 때문에 비서구는 원금보다 훨씬 많은 돈을 상환하고도 여전히 채무에 허덕이게 된다는 겁니다. 덕분에 비서구가 스스로 자립할 수 있는 경제 체제를 건설하거나 자국의 취약한 사업을 보호하는 것은 무한히 지연되구요. 비서구의 채무 상환이 중단될라치면 즉각 서구는 국제통화기금 등의 기구를 통해 비서구의 경제에 직접 개입하여 국가 경제의 최우선 목표를 채무 상환에 두게끔 강제하기도 합니다. 이렇게 비서구의 자립 기반 마련은 더욱 요원한 일이 되지요. (이러한 지적은 로리 파슨스의 『재앙의 지리학』과도 상통합니다. 이 책은 (탄소 배출로 대표되는) 기후불평등의 원인이 글로벌 경제의 구조적 문제에 있다고 지적하고 이러한 탄소식민주의carbon colonialism 체제는 제로웨이스트나 쓰레기분리배출 등의 개인적 실천만으로는 극복될 수 없는 것이라고 지적했습니다.)

 

  한국현대사를 공부하는 사람으로서 『격차』에 참고 사례를 더하자면 1950년대를 전후한 미국의 대한원조를 꼽을 수 있겠습니다. 당시 미국의 대한원조는 당장의 현상유지를 위한 소비재 중심이었기 때문에 인프라를 구축하고 생산재를 확충하는 등 경제의 질적 성장을 위한 토대 마련과는 거리가 멀었다는 것이 여러 연구자들의 공통된 지적입니다. 서구가 원조를 매개로 비서구에게 종속적 경제구조를 강요한다는 이 책의 지적과 맞닿죠. 하지만 한국의 사례가 이 책의 근거로 마냥 적당한 것은 아닙니다. 책에서는 1960년대 이후 비서구의 성장 시도(책에서는 이를 두고 '발전주의'라는 표현을 씁니다.)들이 서구의 개입에 의해 좌절된 경우들을 예로 들었지만, 한국은 이에 해당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에 대해 "다수의 동아시아국가들"은 "서구의 이익에 큰 위협이 되지 않았"기 때문에 서구의 개입이 없었다고 짤막하게 언급합니다만(192~193쪽) 그보다는 좀 더 길게 저자의 견해를 들어보고 싶기도 합니다.

 

  물론 이러한 질문은 이 책의 본래 의도에서는 한참 벗어난 것입니다. 이 책이 문제삼는 것은 현실에 존재하는 불평등의 역사적 연원을 찾고 설명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 책은 후반부에서 부조리한 현실을 바꾸기 위한 해법들을 제시합니다. 전반부에서 특히 강조했던 국가 채무에 대해서는 물가인상률을 크게 상회하지 않는 선에서 이자율을 제한하고, 경제 성장을 저해하는 변제 의무에 대해 채무불이행을 선언할 수 있는 권리가 부여되어야 하며, 상황에 따라서는 적극적인 탕감 조치도 있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이러한 주장은 '주빌리은행'의 사례처럼 개인의 채무에 대해서도 비슷하게 적용할 수 있습니다.) 세계은행 같은 국제금융기구의 의사결정구조를 재조정할 수 있는 실질적인 해법도 제시합니다. 또한 이 책은 독자 개인에게도 실천의 여지가 있다고 말합니다. 여기서는 과거와 같은 방식의 계속된 '성장'은 어느 순간 중단될 수밖에 없다는 점을 받아들이는 것이 핵심입니다. 광고 등을 통해 과다하게 자극된 소비를 줄이고, 노동 시간 또한 함께 줄여 일자리를 나누는 공존의 생활방식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이렇게만 보면 이 책의 제안이 비현실적이고 복고적인 목가주의처럼 느껴질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불평등으로 인한 사회적 갈등이 점점 극단화되고 있고 기후위기가 초래하는 재난 또한 우리의 삶을 직접 위협하는 상황에서 지금처럼 계속 '성장'만 좇다가는 정말로 모든 것이 붕괴하는 지경에 이를지도 모릅니다.(여섯번째 대멸종?!) 이런 상황에서조차 '세상은 원래 그런거야...'하는 소리나 주워섬기는 것이야말로 진짜 한가한 일인지도 모르겠습니다.

 

  (...) 애초에 에이즈 환자들은 왜 죽어가고 있었는가? 나중에 나는 이것이 제약 회사들이 자사가 특허를 가진 약품에 대한 복제약을 스와질란드가 수입하지 못하도록 막아서 생명을 살릴 수 있는 약품의 가격이 감당 못할 정도로 높았던 것이 한 요인이었음을 알게 되었다. 왜 농민들이 땅에서 나오는 소출로 생계를 꾸릴 수 없었는가? 나는 이것이 보조금을 받아 생산된 미국과 유럽연합의 농산물이 스와질란드 농가를 낮은 가격으로 치고 들어온 것과 관련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왜 스와질란드 정부는 기본적인 사회 서비스를 제공하지 못했는가? 나는 이것이 스와질란드 정부가 막대한 대외 채무에 짓눌려 있고, 그로 인해 사회적 지출을 줄여 그 돈을 부채 상환에 먼저 쓰도록 서구 은행들로부터 강요받고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더 파고들수록 스와질란드에서 빈곤이 도무지 사라지지 않는 이유가 스와질란드 바깥에 있는 문제들과 크게 관련되어 있음을 알 수 있었다. 글로벌 경제 시스템이 스와질란드 같은 나라들로서는 유의미한 발전과 개발을 하기가 거의 불가능한 방식으로 조직되어 있다는 것이 점차 분명해졌다. 이런 사실들에 나는 충격을 받았다. 하지만 미국이나 호주에서 때대로 현장을 방문하러 오는 월드비전 관리자들에게 이야기하자 그들은 내가 언급한 내용들이 너무 '정치적'이라고 했다. 제약 회사의 특허, 교역 규칙, 대외 채무 같은 이슈를 생각하는 것은 월드비전이 할 일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관리자들은 우리가 이러한 이슈를 제기하기 시작하면 1년도 못 가서 후원금이 끊기게 될 거라고 말했다. 특허, 교역, 부채와 같은 글로벌 경제 시스템이 우리의 후원자들, 즉 우리에게 후원금을 기부해서 우리가 이 일을 할 수 있게 해주는 사람들을 부유하게 만들어주지 않았는가? 그러니 그런 이슈들에 대해서는 입을 다무는 게 나았다. 배를 흔드는 일은 하지 말고, 아동 결연 프로그램 같은 것에 계속 집중하는 것이 현명한 일일 터였다. (35~36쪽.)

 

  핵심은 간단하다. 원조 예산은 글로벌 남부가 구조적으로 겪는 손실과 자본 유출에 비하면 우스꽝스러울 정도로 작다. 원조가 사람들의 삶을 더 낫게 만드는 방향으로 작동하는 경우도 있지만, 공여국 자체가 일으킨 피해를 보상하기에는 어림도 없다. 그러한 피해 중에는 원조 어젠다를 운영하는 바로 그 집단들이 일으키는 것도 있다. 예를 들어, 세계은행은 글로벌 남부 국가들의 부채에서 이윤을 얻는다. 게이츠 재단은 생명을 구하는 의약품과 필수적인 테크놀로지를 막대한 특허 비용으로 묶어두는 지적재산권 체계에서 이득을 얻는다. 보노는 글로벌 남부 국가들에서 돈을 빼내가는 조세 피난처 시스템에서 이득을 얻어왔다.
  원조 자체에 반대하자는 말이 아니다. 원조 담론이 더 큰 그림을 보는 데서 멀어지게 만든다는 점을 지적하려는 것이다. 원조 담론은 오늘날 글로벌 남부에서 적극적으로 궁핍화를 일으키고 유의미한 발전을 방해하고 있는 수탈의 패턴을 가린다. 자선 패러다임은 실제 이슈들을 흐릿하게 하고, 사실은 그와 반대인데도 마치 서구가 글로벌 남부를 '발전시키고' 있는 것처럼 보이게 한다. 부유한 국가들은 가난한 국가들을 발전시키고 있지 않다. 거꾸로 가난한 국가들이 부유한 국가들을 발전시키고 있으며 15세기 말 이래로 내내 그랬다. 이런 면에서, 원조 내러티브는 단순히 빈곤의 실제 원인을 잘못 이해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원인과 결과를 거꾸로 뒤바꿔놓고 있다. (57~59쪽.)

 

  나는 이것을 빈곤에 대한 '좋은 소식 내러티브'라고 부르고자 한다. 마음이 편해지는 이야기이며, 날마다 뉴스에 등장하는 우울한 이야기들과 대조되는 반가운 이야기다. 한 발 물러서서 보니 상황이 생각만큼 나쁘지는 않았고 큰 틀에서 세상이 점점 더 나아지고 있다고 생각할 수 있다는 것은 즐거운 일이다. 이것은 우리의 문명을 긍정해주고 진보에 대해 우리가 가지고 있는 가장 깊고 강력한 개념을 확증해주는 이야기다.
  또한 이것은 강력한 정치적 도구이기도 하다. '좋은 소식 내러티브'는 글로벌 경제 시스템이 올바른 경로 위에 있다고 믿게 한다. 이 내러티브는 이 세상에서 고통을 없애고 싶다면 급진적인 변화를 삼가고 현질서를 유지해야 한다고 말한다. 현재의 분배 질서를 유지하는 데 이해관계가 걸려 있는 사람(가령, 글로벌 상위 1%)에게는 '좋은 소식 내러티브'가 정말로 유용할 것이다. (...) (65~66쪽.)

 

  라틴아메리카에서 온 금은은 다 어디에 쓰였을까? 일부는 유럽 국가들의 군사력 증강에 들어갔고, 이는 유럽 국가들이 세계의 나머지에 대해 정치적 우위를 확고히 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하지만 대부분은 중국 및 인도와의 교역에 들어갔다. 은은 유럽이 내놓을 수 있는 산품 중 동양 국가들이 실제로 원하는 몇 안 되는 품목이었다. 그래서 은이 없으면 유럽은 심각한 무역 적자를 겪을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되었다면 유럽 경제는 계속 정체 상태에 머물렀을 것이다. 그런데 은으로 교역을 지속할 수 있게 되자 유럽은 토지 집약적 산품과 천연자원을 해외에서 수입해올 수 있었다. 토지가 부족한 유럽으로서는 매우 중대한 이득이었다. 이것을 '생태적 횡재'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자연에 의존해야 하는 자원이 외부에서 들어오면서 유럽이 그들의 자연적 한계를 넘어 경제를 성장시킬 수 있게 되었다는 의미에서다. 이를 통해 유럽은 1800년경이면 중국과 인도를 따라잡고 더 나아가 추월할 수 있게 되었다. 중국과 인도는 과도한 생태적 압박에 놓여 있던 유럽에 그 압박을 풀어주는 역할을 해주었다. 유럽은 토지 집약적인 생산을 해외로 돌리면서 자국 노동력을 직물 공장처럼 자본 집약적 산업 쪽으로 재배치할 수 있었는데, 다른 나라들은 누릴 수 없는 사치였다.
  유럽이 이러한 구조에서 이득을 얻는 동안 라틴아메리카는 막대한 고통을 겪었다. 유럽 사람들이 오기 전에는 멕시코에는 원주민 인구가 3000만 명에 달했고 안데스 지역에도 비슷한 숫자의 원주민이 있었다. 또 중앙아메리카에도 1300만 명 정도가 있었던 것으로 추산된다. 자료마다 차이는 있지만 연구자들은 1492년에 라틴아메리카 지역에 총 5000만~1억 명이 살고 있었으리라고 본다. 그런데 1600년대 중반 무렵에 이곳 인구는 350만 명으로 급감해 있었다. 약 95%가 목숨을 잃은 것이다. (109~110쪽.)

 

  서구는 이 막대한 공짜 노동력에서 얼마나 많은 이득을 얻었을까? 미국 하나만 보더라도 1619년부터 노예제가 폐지된 1865년까지 총 222,505,049,000시간어치의 강제 노동력을 얻은 것으로 추산된다. 미국의 최저 임금에 약간의 이자율을 쳐서 계산하면 오늘날 돈으로 97조 달러에 해당한다. 미국만 계산한 것인데도 이 정도다 2013년에 카리브해 연안의 14개 국가가 법무법인 레이 데이Leigh Day의 대리를 받아 영국을 상대로 노예 노동에 대한 국가 배상 소송을 진행했다. 배상액을 얼마 요구했는지는 공개하지 않았지만, 이들은 1834년에 영국이 노예제를 폐지하면서 노예 소유주들에게 재산[노예] 손실에 대한 보상금으로 2000만 파운드를 지급했음을 언급했다(한편, 당시에 보상은 노예 소유주들에게만 이뤄졌고 노예들에게는 보상이 이뤄지지 않았다). 그 금액은 오늘날 3000억 달러에 해당한다. 그리고 이 숫자는 노예의 가격만 반영한 것이고 노예가 평생에 걸쳐 생산한 것의 총 가치와 그들이 견뎌야 했던 트라우마, 그리고 1834년 이전에 수세기 동안 일하고 죽은 수십만 명의 비용은 포함되지 않은 것이다.
  하지만 유럽이 노예 경제에서 끌어낸 진짜 이득은 아프리카인과 아메리카 원주민의 신체에서 강제로 추출해낸 가치만이 아니었다. 사탕수수와 면화 플랜테이션은 신대륙에서 은에 이어 또 하나의 '생태적 횡재'를 유럽에 제공했다. 설탕은 영국에서 총 소비 칼로리의 22%를 차지하게 되는데, 이로써 국내 농업 생산의 필요가 줄어서 농업 노동력을 산업 쪽으로 돌릴 수 있었다. 신대륙의 면화는 유럽 산업혁명의 핵심 자원을 유럽의 토지나 노동력에 부담을 가하거나 식량 생산에 써야 할 토지를 면화 쪽으로 전용하지 않고도 확보할 수 있게 해주었다. 여기에 목재 수입까지 더하면, 영국 하나만 해도 신대륙으로부터 생산적인 토지를 2500만~3000만 에이커가량 얻은 것이나 마찬가지였는데, 이는 영국 내 경작 가능한 토지 전체의 2배가 추가로 생긴 격이었다. 노예 노동력으로 생산한 신대륙산 수입품은 유럽의 빠른 경제 발전에 단일 요인으로는 가장 큰 요인 중 하나였고, 영국이 풍부한 석탄 광맥으로 얻을 수 있었던 에너지 횡재보다 더 중요한 요인이었다. 노예 노동력과 식민지의 땅을 생산에 사용할 수 있다는 생태적 횡재가 없었다면 유럽은 그들의 경제 역량을 산업화 쪽에 집중시킬 수 없었을 것이다. (111~113쪽.)

 

  (...) 서구인의 상상에서 아프리카의 전형적인 이미지는 부패한 독재자에 의해 고통받는 대륙이다. 여기에는 아프리카 사람들은 서구 스타일의 민주주의의 가치를 알기에는 너무 '원시적'이라는 가정이 깔려 있다. 하지만 식민주의 시기가 끝난 이래 아프리카 사람들이 민주주의를 일구기 위해 내내 노력했지만 서구에 의해 적극적으로 가로막혔다는 것이 더 정확한 진실이다. 아프리카에서 독재가 지속된 것은 대체로 서구의 개입 때문이었지 아프리카 사람들이 민주주의의 가치를 몰라서가 아니었다. 서구 열강은 진정한 독립을 이루려는 아프리카 사람들의 시도를 수없이 좌절시켰다. 이러한 사실은 서구가 민주주의와 대중 주권의 횃불이라는 일반적인 이미지에 의구심을 갖게 한다. (173~174쪽.)

 

  은행 입장에서 제3세계 부채 위기는 완전한 재앙이었다. 기본적인 자유시장 이론에 따르면, 빌려간 사람이 돈을 갚지 못할 때 손실은 빌려준 사람이 져야 한다. 이것은 빌려준 사람이 애초에 지기로 한 리스크다. 하지만 월가는 제3세계 부채에 너무나 많이 투자했기 때문에 자신들이 손실을 흡수할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랬다가는 붕괴할 것이 거의 확실했다. 그래서 그런 일이 일어나게 두지 않기로 했고, 자신들이 무너지면 전체 금융 시스템이 무너질 것이고 신용 시장이 말라버릴 것이며 글로벌 경제가 불황의 나선을 타게 될 것이라고 주장하면서 자신들을 구제하라고 미국 정부를 설득하는 일에 착수했다.
  그리고 그들은 정확히 원하는 것을 얻었다. 미국 정부가 개입해 멕시코 같은 나라들이 부채를 갚도록 압력을 가함으로써 은행을 구제한 것이다. 부채를 갚으라고 압력을 넣는 것은 국제통화기금의 목적을 바꾸어서 달성할 수 있었다. 원래 국제통화기금은 국제수지 불균형 문제를 겪고 있는 국가들에 국제통화기금 자체가 가진 자금으로 대출해주기 위해 세워진 기구였다. 그 나라들이 정부 지출을 지속할 수 있게 해서 또다시 대공황으로 치닫는 것을 막기 위한 것이었다. 이것은 산업화된 국가들이 어려운 시기에 가라앉지 않도록 부양해야 한다는 존 메이너드 케인스의 개념에 입각한 계획이었다. 하지만 이제 G7 국가들은 국제통화기금을 완전히 다른 목적으로 사용하고자 했다. 글로벌 남부 국가들이 국내 프로그램에 정부 지출을 멈추고 그 돈을 서구 은행에 부채를 상환하는 데 사용하게 한다는 것이었다. 다른 말로, 이제 국제통화기금은 빚 갚으라고 독촉하는 글로벌 빚쟁이 역할을 할 예정이었다. 당신의 자동차를 압류하는 집행관처럼 말이다. 차이점이라면, 국제통화기금이 훨씬 더 강력하다는 것뿐이었다. 국제통화기금 임무의 근본적인 전환은 이 시기에 자크 드 라로지에르 총재를 비롯한 국제통화기금 고위층이 케인스주의적 철학을 지지하던 사람들을 체계적으로 몰아내고 그 자리를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기에 더 친화적인 사람들로 채운 덕분에 이루어질 수 있었다. (207~208쪽.)

 

  1950년대부터 1970년대까지 서구 열강은 글로벌 남부에서 발전주의가 부상하지 못하게 하기 위해 고전했다. 그때는 이를 달성하려면 매번 건건이 쿠데타 지원과 은밀한 개입을 해야 했다. 그런데 부채 위기는 그러한 문제를 일거에 해결해주었다.
  구조조정 프로그램은 시카고학파가 칠레에서 실험한 것과 거의 동일한 정책이었는데, 폭력을 통해서가 아니라 빚을 통해 강제되었다. 빚은 신자유주의를 전 세계에 밀어붙이는 강력한 메커니즘이었다. 또한 미국이 매우 위협적이라고 본 발전주의 어젠다를 되돌려 없애는 데도 강력한 메커니즘이었고 과거에 사용했던 쿠데타보다 더 강력한 수단이었다. 독재자나 고문실처럼 알려지면 당황스러울 불편한 요소도 없었다. 구조조정 프로그램의 획기적인 점은 글로벌 남부 국가들이 자발적으로 수행하는 것처럼 보인다는 데 있었다. 그들 스스로 이 프로그램을 받아들여 부채 부담에서 벗어나기로 선택한 것처럼 보이는 것이다. 하지만 사실은 전혀 자발적이지 않았다. (211쪽.)

 

  헥셔-올린-새뮤얼슨 모델은 너무나 합리적으로 봉니다. 아니, 자명하게 옳은 논리로 보인다. 하지만 이 이론은 글로벌 불평등을 자연스러운 것으로 만들어버림으로써 해로운 영향을 미친다. 이 모델은 각 국가가 생산 요소의 특정한 부존량을 자연적으로 가지고 있다고 가정한다. 우리가 부유한 나라들은 자연적으로 자본이 비교적 풍부하고 가난한 나라들은 자연적으로 싼 노동력이 비교적 풍부하다고, 마치 신이 별자리에 새겨놓은 운명처럼 원래부터 그렇게 되어 있었다고 생각하게 만드는 것이다. 하지만 생산 요소의 부존량은 별자리에 새겨져 있지 않으며, 우리는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해봐야 한다. 애초에 왜 가난한 나라에서는 노동력이 그렇게 싸고 애초에 왜 부유한 나라에서는 자본이 그렇게 풍부한가? (251~252쪽.)

 

  부채 탕감을 더 일반적인 관점에서 접근할 수도 있다. 많은 개도국이 지고 있는 막대한 부채 부담은 사실 순전히 이자 더미다. 가령, 어느 국가가 1980년에 50억 달러를 10% 이자로 대출받은 후 매년 5억 달러를 상환했다면 2000년까지 총 100억 달러를 상환했겠지만, 단지 복리의 무지막지한 힘 때문에 여전히 갚아야 할 돈이 더 많이 남아 있게 된다. 이에 비추어볼 때, 우리는 경제 발전 정도가 일정 선 이하인 국가가 채권자의 인플레 손실을 상쇄시킬 수 있을 정도의 이자율(가령 연 2~3%)로 원금을 이미 상환했다면 남은 부채를 탕감받을 자격이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현재의 부채를 좀 더 감당할 수 있도록 소급적으로 금리 상한을 설정하는 것과 같다.
  어떤 접근을 선택하든, 부채 탕감에 구조조정 조건을 달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그러지 않으면 얼핏 보기에는 해롭지 않아 보이는 구조조정이 채권자들의 원격 권력 행사를 가능하게 하는 기제로 작동하게 될 것이다. 사실, 개발 차관에 대해서는 처음부터 구조조정 조건을 없애는 것이 현명할 것이다. 이는 개도국이 관세, 보조금, 자본 통제, 사회적 지출, 경제를 관리하고 빈곤을 줄이는 데 필수적인 여러 일들을 결정할 주권을 유지한 채로 자금을 이용할 수 있게 하려면 꼭 필요한 일이다. (339~340쪽.)

 

  이와 같은 변화는 성장의 압력에서 우리를 상당히 자유롭게 해줄 수 있다. 하지만 우리의 목적이 단지 경제의 팽창을 멈추는 데서만 그치는 것이 아님을 기억해야 한다. 우리는 소비의 전체 규모가 지속가능한 수준 안으로 들어올 수 있도록 소비를 적극적으로 줄여야 하고 특히 부유한 나라에서 그렇게 해야 한다. 그러려면 창조적인 사고가 필요하다.
  (...)
  하지만 일자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생산과 소비를 줄이면 실업 위기가 오지 않을까? 좋은 질문이고 당연히 이 문제를 진지하게 생각해야 한다. 결국 우리의 정치인들은 고용 지표가 올라가기를 원하기 때문에 더 많은 경제 성장을 촉구하게 된다. (...) 하지만 경제 활동의 규모를 줄이면서 동시에 모든 이가 유의미한 일을 하게 할 수 있는 창조적인 방법들이 존재한다. 나와 있는 것 중 핵심적인 제안 하나는 노동 시간을 줄이는 것이다. (...) 노동을 덜 한다는 말은 육아와 노인 돌봄을 기업에 아웃소싱하지 않고 직접 하는 데 더 많은 시간을 쓴다는 말이고, 먹을 것을 직접 재배한다는 말이고, 조리, 청소, 정원 가꾸기 등을 직접 한다는 말이다. 이웃과 관계를 맺을 기회도 생기는데, 그럼으로써 각자의 기술과 소유물을 나누고 공유할 수 있는 가능성도 창출된다. (384~38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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