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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병주의 라이벌로 읽는 한국사 (신병주, 한스미디어, 2026.)

Dog君 2026. 3. 19. 11:12

 

  '좋은 역사책 한 권만 추천해달라'는 부탁을 많이 받는 편입니다. 대체로 역사책에 이제 조금씩 관심을 가지기 시작하시는 분들이 이런 부탁을 하시죠. 그럴 때마다 저는 한결같이 '한 권만 읽을 생각은 하시지 말고, 여러 권 읽을 마음의 준비를 하시는 게 좋다'고 말씀드립니다. 역사라는 거대한 세계를 책 한 권으로 이해하는 것은 가능하지도 않을 뿐더러, 책 한 권만 읽었을 때의 위험성도 적지 않으니까요.

 

  하지만 최근 들어서 다른 생각이 들기 시작했습니다. 그 질문을 하시는 분이 그걸 몰라서 저한테 그렇게 묻지는 않으셨을 거잖습니까. 그러니까 아마도 그 질문은, '어떤 책으로 시작하는게 좋을까요'라는 의미였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듭니다. 역사책은 다른 분야에 비해 진입장벽이 비교적 높기 때문에, 어떤 책으로 시작을 해야 보다 쉽고 편하게 역사의 세계에 들어갈 수 있는지를 궁금해 하신 걸테죠.

 

  그렇다면 이번에 읽은 『신병주의 라이벌로 읽는 한국사』가 그 질문에 대한 대답이 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 책은 한국사에 등장하는 다양한 주체들(사람이건 세력이건)을 '(서로 대립하는) 라이벌'의 관계로 배치하여 각각의 주체가 가진 특성을 간명하게 드러냅니다. 김유신과 계백, 김춘추와 연개소문, 왕건과 견훤과 궁예, 고려와 거란 등의 대립을 통해서는 당대 국가의 운명이 어떻게 엇갈렸는지를 이해할 수 있고, 이방원과 정도전, 김상헌과 최명길, 서인과 남인 등의 라이벌 관계를 통해서는 당대의 정치적 경합과 타협이 어떤 식으로 전개되었는지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어떤 것을 설명할 때 그와 반대되는 것을 견주었을 때 설명이 더 선명해지는 것처럼, 역사 속의 인물과 세력을 설명할 때도 라이벌 구도는 유용합니다.

 

  물론 라이벌 구도로 역사를 설명하는 것이 마냥 장점은 아닙니다. 역사를 설명할 때 라이벌 구도에만 갇힐 경우 자칫 이분법이나 흑백논리에 빠지기 십상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이 책이 아주 새로운 이야기나 관점보다는 다소 오래된 통설通說에 주로 기대고 있다는 점 역시 유의할 부분입니다. 하지만 애초에 이 책을 고른 이유가, 역사의 거대한 바다로 나가기 위한 첫 걸음이었음을 생각하면 이러한 점이 큰 흠은 아닌 것 같습니다. 이 책 너머에 더 많은 이야기가 있다는 사실을 독자가 자각하기만 한다면 말이죠.

 

  이제 막 역사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한 독자에게, 역사라는 거대한 바다를 여행할 수 있는 첫 번째 배를 찾고 있는 분에게, 이 책을 권해드립니다. 이 책 다음에 다른 배로 꼭 옮겨 타야 한다는 점을 꼭 유념하시구요.

 

  원효의 불교 대중화 노력으로, 가난하고 무식한 사람들까지 '나무아미타불(南無阿彌陀佛)'을 입에 올리며 부처의 존재를 널리 알게 되었다. 나무아미타불은 '아미나부처님께 귀의합니다'라는 뜻으로, 사후에 극락세계에 왕생(往生)할 것을 기원하는 것이다. 원효가 탄생한 마을 이름을 불지촌이라 하고, 절 이름을 초개사라 하고 스스로 원효(元曉)라 일컬은 것은, 모두 불일(佛日)을 처음으로 빛나게 했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일연 스님도 《삼국유사》에서 "원효란 말도 또한 우리말이니 그 당시의 사람은 모두 우리말로써 새벽이라 했다"고 평하고 있다. (52쪽.)

 

  조광조는 어려서부터 행실이 바르고 아이답지 않게 근엄하며 남의 실수를 용서하지 않는 엄격성을 보였다. 보통 사람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뜻을 높이 세우고 학문에 열중했다. 사람들은 '광인(狂人)' 또는 '화태(禍胎, 화의 근원)'라고 할 정도였다. 그는 관직에 나가서도 함부로 말하지 않고 관대(冠帶)를 벗지 않으며, 종일토록 단정하게 앉아서 빈객을 대하는 것처럼 하였다. 언제나 완벽한 자세로 임했던 조광조의 모습은 훗날 엄격한 원칙주의자의 길을 걸어가는 바탕이 되었다고 여겨진다.
  《어우야담》에는 조광조가 "거울을 볼 때마다 매양 '이 얼굴이 어찌 남자의 길상(吉相)이겠는가?'라고 탄식하였다"고 한 기록이 있다. 자신의 외모가 너무 수려해서 오히려 걱정했다는 뜻이다. (187쪽.)

 

  당시 격렬했던 모습은 《인조실록》에도 기록되어 있다.
  최명길이 마침내 국서(國書)를 가지고 비국에 물러가 앉아 다시 수정을 가하였는데, 예조판서 김상헌이 밖에서 들어와 그 글을 보고는 통곡하면서 찢어 버리고, 인하여 입대(入對)하기를 청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명분이 일단 정해진 뒤에는 적이 반드시 우리에게 군신의 의리를 요구할 것이니, 성을 나가는 일을 면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리고 한번 성문을 나서게 되면 또한 북쪽으로 행차하게 되는 치욕을 면하기 어려울 것이니, 신하가 전하를 위하는 계책이 잘못되었습니다. (…) 신 또한 어찌 감히 망령되게 소견을 진달하겠습니까. 국서를 찢어 이미 죽을죄를 범하였으니, 먼저 신을 주벌하고 다시 더 깊이 생각하소서." (242쪽.)

 

교정. 1판 1쇄

75쪽 : 문단 사이 띄우기 수정

137쪽 : 첫 번째 문단 사이 띄우기 수정

203쪽 밑에서3줄 : 세자궁 의문의 -> 세자궁에 의문의

265쪽 밑에서4줄 : 밀집 -> 밀짚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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