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og君 Blues...
'역사 속 여자, ○○하다' 시리즈 (푸른역사, 2026.) 본문

1권 : 여자, 기록을 가로채다 (장지연·윤민경)
2권 : 여자, 기어이 욕망하다 (황향주·이민정·장지연)
3권 : 여자, 조용히 살지 않기로 하다 (윤민경·한보람)
4권 : 여자, 생존 전쟁을 치르다 (이아리·권혁은)
이 시리즈는 7명의 필자가 쓴 9개의 주제, 4권의 책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구성만 들어서는 거질巨帙의 세트나 벽돌책일 것 같지만 각각의 책은 100여 쪽 남짓한 문고판 정도에 본문 편집도 시원시원하기 때문에 분량이 많을 거라는 걱정을 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여러 흥미로운 소재를 딱딱하지 않은 문체로 다룬 덕분에 오히려 여느 책보다 훨씬 편하게 읽히는 편입니다. 그런 덕분인지 요 며칠 제 타임라인에는 이 책에 대한 상찬이 가득합니다. 제 감상도 크게 다르지 않아서, 기획부터 편집까지의 만듦새는 물론이고 주제를 고르고 이야기로 다듬어내는 개별 필자의 안목과 글솜씨에도 찬사를 아끼고 싶지 않습니다.
그 중에서도 가장 먼저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글들의 응집력입니다. 무려 7명의 필자가 참여했음에도 각 글들이 산만하게 흩어지지 않고 높은 응집력을 유지하며 시리즈의 완성도를 높이고 있습니다. 아마도 이는 이 시리즈의 기획의도(문제의식)가 그만큼 확고하기 때문일 겁니다. 이 시리즈의 문제의식은 제목에서 이미 강하게 드러납니다. '여자, ○○하다'라는 능동형 표현에서 오랜 시간 피동형으로만 묘사되었던 비주체적 존재가 아니라 능동적으로 욕망하고 결정하는 주체적 존재로서의 여성에 주목하겠다는 마음가짐이 강하게 느껴지거든요. 그러다보니 각 주제의 제목들도 하나같이 '의절하다', '복수하다' 등 능동성과 적극성을 강조하는 표현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마음가짐은 특히 전근대에서 두드러지는데요, 대부분 남성에 의해서 쓰여진 전근대의 기록(사료)의 특성상 그 안에서 여성의 능동성을 읽어내는 작업은 표피로 드러난 의미 뿐만 아니라 행간에 숨겨진 내용들까지 읽어내는 섬세한 독해가 되어야만 합니다. 이러한 섬세한 독해가 확고한 문제의식이 없으면 불가능하다는 점은 두말하면 입만 아픕니다.
이 '확고한 문제의식'은 이 시리즈의 방법론적 성취와도 연결됩니다. 역사란 언제나 사료를 통해서 우리 앞에 현현顯現하기에, 원칙적으로 우리는 사료(기록)를 남길 '권력'을 가진 이의 관점을 통해서만 역사에 접근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원칙'은 종종 '기존의 사료는 승자가 만든 것이기에, 모든 역사는 승자의 것일 수밖에 없다'는 식의 극단적인 회의론으로 이어지기도 하지요. 하지만 역사학자가 주어진 사료(의 관점)에 갇혀서 기계적으로만 사료를 읽을 정도로 멍청하지는 않습니다. 주어진 사료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는 것은 역사학 연구에서 기본 중의 기본이거든요. (이걸 '사료비판'이라고 하지요.)
이 시리즈는 기존의 사료에서 직접 드러나지 않는 여성의 목소리를 읽어내기 위해 사료를 매우 적극적으로 독해합니다. 대표적인 예로는 1권의 「여자, 기억하다」를 들 수 있습니다. 이 글의 방법론적 성취는 이 시리즈의 백미라 할만합니다. 이 글은 『고려사』에 등장하는 고려 절부 조씨나 재상의 아내들 이야기처럼 『고려사』의 (아마도 가부장 남성이었을) 저자가 알기 어려운 내용들이 전언의 형태로 기록되어 있다는 점에 주목합니다. 이 이야기들을 들려준 것은 분명 여성들일텐데, 이는 기록을 남길 권력이 없는 여성들이 구전의 형식으로 자신의 경험과 생각을 기록으로 남길 수 있었음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다른 이의 손을 빌린 기록이라 해도 그 속에서 이들의 경험과 기록을 읽어내는 것이 얼마든지 가능하다는 겁니다. 같은 저자의 「여자, 수절하다」 역시 비슷한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 글은 조선시대의 열녀 풍조와 이를 다룬 사대부 남성의 기록 속에서 당대의 여성이 처했던 조건과 그들의 선택을 읽어냅니다. '정절을 지키기 위해' 자살까지 한다고 해서 열녀로 추앙받을 확률이 딱히 큰 것도 아닌데 왜 여성들은 자결을 택했을까요. 당대의 사대부 남성들은 이를 온전히 이해하지 못했지만 이 글은 과부에게 만연했던 당대의 성폭력과, 개가 이후 사회적 지위가 점점 열악해질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원인을 찾습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정절을 추앙하는 문화는 여성의 선택에 도덕적 정당성까지 부여할 수 있었죠. 그러니 조선 후기의 열녀 현상은, 개별 여성들이 '열녀'(와 정조 등등의) 담론에 대해 '지키면서 거스르는' 전략을 취했음을 보여줍니다. (이러한 적극적인 독해는 이 두 글을 쓴 저자 장지연의 전작인 『한문이 말하지 못한 한국사』에서 이미 단초가 보였습니다. 이 책은 조선시대 여성이 생산했던 송사 관련 비한문 문서에, 여성이 스스로의 사회적 지위의 열악성을 어필하기 위한 목적도 있다고 해석합니다. 이 역시도 여성 담론을 '지키면서 거스르는' 사례라고 볼 수 있겠지요.)
여성을 온전한 주체로 이해하지 못했던 사대부 남성 중심의 질서는, 여성이 기존의 질서를 '지키며 거스르는' 능동적 전략을 취하는 순간부터 당황하고 균열하기 시작합니다. 3권의 「여자, 복수하다」는 산송 사건에 연루된 여성들의 처분을 두고 조선의 사법체제가 얼마나 난처해했는지를 보여줍니다. 무덤을 파헤친 사건에서, 여성이 그런 일을 했을리가(혹은 할 수 있을리가) 없으니 이를 돕거나 지시했을 남자 자손이 있을 것이 틀림없다며 이를 찾아오라고 한 관찰사의 지시는 한 편의 블랙코미디처럼 느껴집니다. (진심으로, 조선시대 배경의 단막 블랙코미디 대본으로 쓸 수 있을 거 같습니다!) 어쩌면 이 책의 방법론적 성취는 궁극적으로는 기존 지배 질서를 어떻게 균열낼 수 있는가에 대한 실천적 지침으로까지 이어질 수 있겠다 싶습니다.
이런 때문인지 이 시리즈가 말미에 이르러 개별 주체의 능동성을 넘어 투쟁과 연대로까지 이어지는 것은 의미심장합니다. 지난 수천 년의 역사를 돌이켜보면 젠더 질서란 늘상 남성에게 압도적으로 기울어져 있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여성이 자신의 능동성과 주체성을 발휘하는 과정은 소수자로서 스스로의 위치를 자각하고, 이를 넘어서기 위해 함께 투쟁하고 연대하는 과정이었습니다. 4권의 「여자, 회사 가다」는 노동시장에 진입한 여성의 이야기에 그치지 않고 그 안에서 자신의 존엄을 찾기 위해 분투했고 또 그에 연대했던 이들의 이야기입니다. 그런 분투와 연대가 있었기에 지금 우리가 누리는 이런 정도(물론 이것도 여전히 최선의 상태는 아니지만!)의 평등을 누릴 수 있는 거겠죠.
이 시리즈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칭찬이 가능하겠습니다만, 저는 이러한 방법론적 성취가 가장 마음에 듭니다. 그간 많은 역사학자들이 '결을 거스르는 독해'라느니 '두터운 묘사'라느니 하면서 사료의 행간에 숨은 의미를 찾기 위해 분투해 왔습니다. 저는 이 시리즈에 실린 모든 글이 그러한 고민들의 구체적인 결과물처럼 보입니다. 학부 초년생을 대상으로 하는 '사료독해방법론' 같은 강의가 있다면 이 책이 더없이 좋은 교과서가 될 것 같습니다.
제 깜냥이 못되어 두서너 글만 언급하긴 했지만 마음 같아서는 여기에 실린 글 하나하나에 대해서 모두 코멘트를 붙이고 싶습니다. 그런 정도로 재미있고 뜻깊은 책입니다. 제 역사책 추천 리스트의 젠더 부문이 오랜 정체를 끝내고 드디어 업데이트되겠네요.
조씨의 일이 중국 조정에 알려지기만 한다면 대서특필될 것이며, 그러면 '주려'에 정표하게 될 것이다! 특히 여기에서 '문려'가 아니라 '주려'라는 점을 주목하자. 중국의 수많은 효자, 충신, 열녀들은 가문의 영광이다. 하지만 조씨 같은 사례는 그 집안만이 아니라 고려라는 지역의 영광까지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자신은 바로 그런 바른 풍속을 지닌 고려인으로 자부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이것이 이곡의 욕망이었다. (...) (1권, 「여자, 기억하다」, 51쪽.)
《고려사》에는 규방에서나 알 법한 일이 어떻게 알려졌나 싶은 기록들이 꽤 있다. 앞에서 말한 "재상 중에 마누라를 무서워하여" 같은 것이 대표적이다. 또한 충렬왕과 공주가 함께 들어오는 것을 보며 기뻐한 노인들의 이야기처럼 어떻게 이런 이야기들이 알려지고 실렸을까 궁금해지는 것들이 꽤 있다. 여기에서는 바로 이런 기록들이 절부 조씨 같은 전쟁 생존자, 특히 성비 때문에 많을 수 밖에 없었던 여성들이 남긴 이야기일 것이라 추정한다.
절부 조씨의 이야기는 이곡과 같은 당대 유명인을 매료시켰다. 1298년 시골에서 태어난 이곡으로서는 결코 알 수 없는 정보이기 때문이다. 이곡을 매료시킨 이런 이야기들이 이곡과 같은 이들을 경유해 《고려사》에까지 실리지 않았을까. 이동과 통신이 제한적인 시대일수록 기록자를 경유한 구전 지식의 전달 가능성을 고민해 봐야 한다. 그런 점에서 전근대 여성 대부분이 직접 기록을 남기지 못했다고 하여, 그들의 목소리 찾기를 섣부르게 포기해서는 안 된다.
그녀들은 기억되기를 원했다. (...)
그들은 기억하고 말했다. 그 말이 모두 휘발되지 않았다.
어머니, 할머니, 이웃의 아주머니가 들려주던 이야기를 기억하며 그 힘을 가늠해 본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다른 이들의 렌즈를 통과해 만들어진 기록을 헤집고 들어가 그녀들의 기억을 찾아내 구성해 내려는 의지와 방법론이다. (1권, 「여자, 기억하다」, 73~75쪽.)
(...) 사실 이건창의 관심은 가련 자체에 있지 않았다. 가련이라는 인물을 천한 기생마저 네 편 내 편 갈라야 했던 당쟁의 심각성을 보여 주는 하나의 삽화로 삼은 것이다. 〈가련전〉의 장면 장면이 한 편의 블랙코미디처럼 읽히는 것도 그 때문이다. 〈가련전〉에서 남이은 기생과 마주 앉아 당론을 즐기는 이들로, 노론은 제멋대로 권력을 부리며서 자기네를 비판했다는 이유로 기생마저 잡아 죽이려 한 이들로 그려진다.
이쯤 되면 예상했겠지만 이건창의 당색은 남인도, 노론도 아닌 소론이다. 그의 집안은 명문가였으나 18세기 영조 연간 조상들이 역모로 처벌받으면서 타격을 입었다. (...) 조선 당쟁에 대한 이건창의 시각이 유달리 비판적인 것도 이러한 가정사의 영향이 없지 않다. 요컨대 〈가련전〉을 독해할 때에는 정치적으로 패배한 소론의 일원으로서 이건창이 보는 당쟁에 대한 과장과 비판, 남인·노론에 대한 부정적 시선과 소론에 대한 에두른 옹호가 기저에 놓여 있음을 고려해야 한다. 그 결과 역설적으로 가련은 〈가련전〉의 주연이되 조연이 될 수밖에 없었다. (1권, 「여자, 기억되다」, 96~97쪽.)
어쩌면 안정궁주는 왕박의 처지를 간파하고 간통의 전 과정을 영악하게 주도했던 것일지도 모른다. 남편이 자신의 부정을 고발하며 자멸의 길로 뛰어들지는 못할 것이라는 자신감으로, 그리고 무슨 잘못을 하든 숙부인 명종과 할머니 공예태후가 자신을 비호해 줄 것이라는 믿음으로, 권력의 정점에서 태어나 그 권력 구조를 지탱하는 핵심축으로 살아온 그녀는 본능적으로 권력 관계를 파악했고, 이를 활용하는 영민함을 발휘했을 것이다. (2권, 「여자, 바람피다」, 68쪽.)
조 귀인이 주술을 이용하는 방법은 단순하지 않았다. 저주가 사람을 해치는 범죄라는 당시의 인식을 십분 활용하여 경쟁자를 제거하기도 하고, 주술의 실제적인 효과를 믿는 심리를 이용하여 타인이 자신을 믿고 의지하게 만들기도 했다. 비록 자신을 멸망의 길로 이끌었지만, 마지막에는 복수와 욕망을 실현하기 위해 저주를 감행했다. 여러 방식으로 주술을 이용한 조씨의 모습은 무엇을 의미할까? 그녀가 조선 남성들의 기준에서 유식하고 교양 있는 여성상은 아니었을 것이다. 터부시되던 무속신앙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모습은 조 귀인을 재앙의 결정체, 악녀로 규정하게 만들었다.
공식 기록에서 확인되는 '악녀 조 귀인'은 유학 이념에 충실한 남성과 무속신앙에 기대는 여성이라는 조선의 젠더화된 구조 속에서 형성된 것이다. 비합리적이고 충동적이며 욕망에 사로자힌 비도덕적인 여성이 선택하는 저주라는 수단은 조선의 상층 남성들이 좀처럼 가까이하지 않는 것이었다. 그러나 인조의 사레에서 확인되듯, 사실 그들도 현실에서는 무속신앙의 힘을 인정했다. 다만 그것을 공식적으로 표하지 않을 뿐이었다. 이들의 고아하고 절제된 이미지는 조 귀인 같은 여성들이 대신 무속과 저주를 수행하며 지켜 준 것일 수도 있다. 이러한 양상은 비단 조 귀인에게서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었다. 그 이전에도 이후에도 저주하는 여성이 악'녀'화된 사례는 흔하게 관찰된다. 그리고 이 구조화된 클리셰는 현재까지도 진행형이다. (2권, 「여자, 저주하다」, 123~124쪽.)
열녀가 되면 자신을 기리는 수많은 글을 통해 불멸의 존재로 재탄생할 수 있다. 자손이 없어도 자신의 무덤을 지역 사람들이 때마다 찾아주며 훌륭한 위인이 된 자신을 기억해 준다. 박씨처럼 남편과 함께 묻힌 경우라면, 완벽하게 이상적인 한 쌍의 부부를 완성하며 영원의 세계에서 함께한다. 멋지지 않은가?
그러나 조선의 사대부 남성은 여성에게 이렇나 명예욕이 존재한다는 점을 이해하기 어려웠던 듯하다. (...) (2권, 「여자, 수절하다」, 149쪽.)
살 만한 집안에는 열녀가 많지 않은 데 비해, 가난한 집안에서 열녀가 나오는 경우가 많다. 딱히 정려가 되는 명예를 노렸다고 하기도 어려운 것이, 그런 계층이 정려를 받을 확률은 1~2퍼센트에 불과했다. 그렇다면 도대체 저 하층의 여성들은 왜 자살을 하는 것인가? 사대부 남성들은 이해할 수 없었다.
하층 여성은 왜 자살했을까? 여기에서 생각해 볼 지점은 당대의 만연한 성폭력 문화다. (...)
요즘으로 따지면 납치 강간이라고 할 법한 범죄이지만, 당대에는 과부에 대한 이 같은 성폭력이 그리 이상하게 여겨지지도 않았고, 관에서도 제대로 보호해 주지 않았다는 것이다.
과부 보쌈만 있었던 것이 아니다. 부잣집이나 권세가에서 인물이 반반한 과부를 억지로 첩으로 삼으려 한 이야기도 흔하다. 하층 여성일수록 이러한 성폭력에 노출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성적 자기 결정권을 보호받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향랑 역시 비슷하다. 그녀는 남편에게 소박맞은 후 개가하고 싶지 않았다. 무슨 이유로 그렇게도 극렬하게 개가하고 싶어 하지 않았는지는 알 수 없다. 사대부들이 상찬하듯 정절의식이 있어서 그랬을 수도 있고, 새로운 결혼에 대한 불안함 때문에 그랬을 수도 있다. 혹은 그냥 결혼이 싫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중요한 점은 아버지도, 숙부도, 시부모도 그녀의 선택을 인정해 주지 않고 무작정 개가시키려고만 했다는 것이다. '결혼하지 않을 자유' 따위는 꿈꿀 수도 없는 상황. 갈 곳도, 기댈 곳도 없어진 그녀의 자살은 선택할 수 있는 것이 없는 절망에서 비롯했던 것 아닐까. (2권, 「여자, 수절하다」, 165~166쪽.)
하층 여성들의 열녀 현상은 성폭력에 대한 저항의 의지, 자신들의 주체성을 천명하고자 한 의지의 표출로도 읽을 수 있지 않을까? 여성의 정절을 추앙하는 문화 속에서 자신의 행위에 도덕적 가치를 부여받을 수 있게 되자, 이들은 더욱 과감히 이를 결행한다. 이는 한편으로는 조선이라는 국가권력이 부여한 규범에 예속되는 과정이었으나, 동시에 그러한 종속을 통해 주체로 성장하는 과정이기도 했다. 그렇게 하층의 여성들까지 권력의 규범에 예속되었을 때 역설적으로 그들은 주체가 되었고, 그 권력의 규범은 모순에 빠지며 더 이상 유지될 수 없었다. 이를테면 이런 것이다. 하층민까지 타고난 천성이 이미 완벽하게 도덕적이라면, 그들이 하층민으로 머물러야 하는 이유가 어디에 있는가?
조선 후기의 열녀 현상과 열녀 담론은 권력 체제의 균열이 일어나는 지점들을 보여 준다. 열녀 담론이 주인공들의 자결 동기를 정확히 담아 내지 못하고 있음을 직시하며 현상과 담론을 면밀히 읽으며, 사대부 남성들의 진정한 우려가 무엇이었는지 우리는 다시 질문해야 한다. (2권, 「여자, 수절하다」, 169쪽.)
장씨 부인의 친정인 옥산 장씨 집안, 시가인 순흥 안씨 집안, 외가인 광주 이씨 집안 모두 당색으로는 남인이었다. 장씨 부인은 어려서부터 중년에 이르기까지 친정과 시가, 외가의 남성들이 정치활동을 하다가 크고 작은 고초를 겪는 것을 지근거리에서 보아 왔다. 여성이라고 그저 곁에서 지켜보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장씨 부인은 다른 명문가 여성들과 마찬가지로 같은 집안이라는 운명공동체의 일원으로서 풍파를 함께 겪어 내야 했다. 이러한 맥락을 고려한다면 장씨 부인의 아들과 손자가 남인에서 노론으로 전향한 것은 단순한 정치적 신념의 수정을 넘어서는 행위였다. 그것은 조상 대대로 지켜 왔던 가치를 부정하는 일, 즉 불효와도 직결된 문제였다.
게다가 당색을 바꾸면서 인근의 남인 인사들과 대립하게 된 것은 향후 지역 사회의 외면과 압박을 일상적으로 경험해야 한다는 의미였다. 당장 후손의 혼사는 어찌할 것인가. 어떤 남인 명문가가 노론으로 변절하여 집이 부서질 뻔했다고 소문난 집안과 혼인을 약속하겠는가. 무형의 것이지만 그간 어렵사리 지키며 쌓아 왔던 가격家格 실추의 대가는 만만치 않은 것이었다. (3권, 「여자, 의절하다」, 39~40쪽.)
당연히도 사회는 여성이 산송의 당사자가 될 것을 기대하지 않았다. 그런데 그런 사회의 기대는 아랑곳하지 않고 거침없이 '마이 웨이'를 한 여성들이 나타났다. 노씨와 조씨 집안 과부며느리들처럼, 그녀들은 사회가 기대하지도 않은 행동을 기어이 해 냈다. (...)
(...) 세상이 그녀를 행위 주체자로 보고 싶어 하지 않았음은 확실하다. 사건을 보고받은 관찰사는 곧바로 그녀가 아닌 남자 자손을 찾으라고 명령했다. 관찰사의 견해로는 무덤을 파헤치는 일은 여자들이 할 만한 일이 아니었다. 그러니 곁에서 도왔을 가까운 남성 친척을 찾아오라는 것이었다. (...)
(...) 여성들은 산송에서 범인으로 지목될 자격도 없었다.
두 과부며느리, 그녀들 때문에 조사관과 관찰사가 난감해졌다. 조목조목 따져 주장한 끝에 자신들이 실제 범인임은 인정받았으나 여성이라서 적용할 법률도 고르기 힘들었기 때문이다.
"부녀자라 어찌 처벌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 사건을 재판한 관찰사가 그녀들의 처분을 어찌해야 할지 정하지 못하고 법부에 질품한 이유였다. 남성의 영역에 난데없이 침범한 과부들 때문에 국가는 곤란해졌다. (3권, 「여자, 복수하다」, 108~110쪽.)
진고개의 '오모니'들을 바라보는 못마땅한 시선은 이렇게 애꿎은 조선인 가정을 향하게 되었다. 조선인 가정에서 너무 하대하니까 일본인 가정까지 일하러 가지 않겠느냐는 말이었다. 그리하여 1920년대 중반부터 조선인 언론들은 '남의 집 살이 하는 부인'들을 아껴 주어야 하며, 하대해서는 안 된다는 이야기를 하지 시작하였다.
1930년대 중반 '어멈의 대우를 개선해 주자'는 논의는 더욱 구체적인 주장으로 발전하였다. 당시 여운형이 사장으로 있던 민족지 《조선중앙일보》의 1934년 8월 26일자 논설 한 편은 "하고 많은 말 중에 '어멈'이라고 부르지 맙시다. 부르는 사람은 교양 없어 보이고, 듣는 사람은 기분이 나쁩니다!"라는 제목을 달고 있었다. 1930년대 초까지도 집안일을 도맡아 해 주는 여성 가사노동자를 '어멈'이라 부르는 경우가 많았는데, 이것이 하인을 하대하여 부르는 호칭이라는 지적이었다. '어멈' 호칭의 대안으로 제시된 말은 다름 아닌 '식모食母'였다. 이후 한국에서 가사노동자를 부르는 말은 점차 '식모'로 자리 잡아 갔다. 이듬해 4월에는 "식모에게도 한 달에 한 번 노는 날을 주자"고 식모의 휴가를 논하는 논설이 다시 한번 《조선중앙일보》 지면을 장식하였다.
조선 여인들의 일본인 집 식모살이는 일제 식민지배의 정치적·경제적 결과물이었다. 조선인 식모들은 언어와 관습이 낯선 일본인 집에서 새로운 고충과 민족 차별을 맞닥뜨려야 했다. 하지만 그것은 전근대적 위계 관계를 벗어나 조금이라도 더 나은 급료와 노동조건을 찾아가려는 당대 여성들의 선택이기도 했다. 1930년대 가사노동자를 존중해 주는 말로서 제시된 '식모'라는 호칭은 반세기가 채 지나기도 전에 한국 사회의 편견에 의해 멸칭으로 전락했다. 그러나 식모가 파출부로, 다시 가사도우미로 바뀌어 가는 동안에도 가사노동자들이 스스로의 노동조건과 지위를 개선하려는 노력은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다. (4권, 「여자, 식모 살다」, 55~57쪽.)
농가의 경제적 몰락이 가속화하면서 식모살이를 위해 상경하는 여성들의 수는 계속해서 증가하고 있었다. 당시 경제학자의 추계에 따르면 1925~1930년에만 대략 20만 명이 이농했으며, 1930~1935년 사이에는 대략 30만 명, 1935~1940년 간에는 약 110만 명이 농촌을 떠난 것으로 추정되었다. 이들중 남성 다수는 해외로 유출되었고 여성들은 서울을 비롯한 도시로 와 식모 수요를 뒷받침하였던 것이다.
1930년 《조선국세조사朝鮮國勢調査》는 상세한 직업 통계를 전국 단위로 확인할 수 있는 최초의 자료이다. 이에 따르면 '가사 사용인'으로 분류된 사람은 전국에 12만 877명이 있었다. 이는 직업을 가지고 있던 976만 5,514명 중 농경 종사자가 75퍼센트를 넘는 상황에서 비농업직 단일 직업으로는 첫손에 꼽힐 만한 규모였다. 10년 뒤인 1940년 국세조사에서 가사 사용인 수는 17만 2,813명으로, 1930년 대비 약 43퍼센트 증가하였다. 이러한 통계는 앞서 언급한 이농 현상이 실제로 도시 내 식모 노동력 공급으로 이어졌음을 보여 주는 것이다.
요컨대 당대 언론이 요란하게 떠들었던 '식모 전성기'는 조선 농가의 대규모 경제적 몰락과 극심해져 가는 실업난이라는 어두운 이면을 배경으로 이루어진 것이었다. (4권, 「여자, 식모 살다」, 66~67쪽.)
그녀가 대자보를 붙일 때 그것을 찢으려는 이들을 막아선 학생들, 대학본부와 학과의 외면 속에서도 먼저 진상조사단을 꾸렸던 학내 단체들, 끝없는 법정투쟁을 함께하며 곁을 지켰던 활동가들, 멀리서 연대의 목소리를 보내 온 시민들. 그들이 있었기에 단 한 장의 대자보가 시대를 움직일 수 있었다. 첫걸음은 어려웠지만, 여성들은 곧 달리기 시작했다. 그후로 30년, 아직 달리기는 멈추지 않았다. (...) (4권, 「여자, 회사 가다」, 138쪽.)
교정.
3권 32쪽 밑에서9줄 : 안동었다는 -> 안동이었다는
3권 78쪽 밑에서4줄 : 상태+를 -> 상태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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