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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발독재와 박정희시대 (이병천, 창비, 2003.)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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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발독재와 박정희시대 (이병천, 창비, 2003.)

Dog君 2012. 2. 27. 00:10


1. 박정희. 정말 쉽지 않다. 남자이름인지 여자이름인지 헷갈리기도 하거니와 (박정희와 육영수의 결혼식에서는 신랑 육영수군과 신부 박정희양...이라고 소개되었다는 재미없는 일화가 있다;;;) 그가 남긴 유산의 영향이 작지 않기 때문이다. ㅅㅂ 졸라게 뜨거운 감자다 이거지.

2-1. 박정희시대에 대한 접근법은 크게 정치경제적 접근과 사회문화적 접근으로 나눠볼 수 있다. 전자의 것이 어려운 정치철학이나 난무하는 표와 그래프를 사용하는 방식이라면 후자는 박정희가 집권 내내 의지했던 물리력과 독재이데올로기의 퇴행적 성격을 밝히는 것으로 정리된다.

2-2. 이 책은 양쪽 모두에서 쟁점을 물고 늘어진다는 점에서 그 폭이 매우 넓다. 폭만 넓으면 깊이가 얕아지기 마련인데 마땅히 그런 것 같지도 않다. 선언적인 수준에서만 사용되어오던 '개발독재'라는 개념을 이론적으로 구체화하려는 시도나 흔히 정태적으로만 판단되어오던 박정희시대를 연대기적으로 혹은 동태적으로 분석하려는 시도들이 돋보여서 읽는 내내 재미와 긴장이 삼선짬뽕처럼 어우러져 있더라.

3. 책의 내용을 거의 대부분 지지하고 동의한다는 전제 하에서 이야기를 나누자면...

4-1. 사실 나는 '개발독재'라는 말이 갖는 선명함은 참 좋지만 그것이 두고 있는 몇가지 전제들에 대해 다소 회의적이다. 이런 이야기를 할 때 '제도'나 '정책'과 같은 단어들을 많이 사용하면 할수록 (찬성이든 반대든) 논의에서 국가권력이 갖는 규정력이 강해지게 마련이다. 결국 박정희시대의 유산이라는 결과는 박정희시대의 정책 혹은 제도가 원인이라는 이야기가 되는데 이런 식으로 논리가 만들어지는거, 나 솔직히 불안하다.

4-2. 국가권력이 충분한 합리성을 갖출 수만 있다면 정치경제 역시 합리적으로 운영될 것이라는 결론이 도출될거라는 우려 때문이다. 예컨대 모든 경제활동을 시장에 맡겨버리자는 극단적인 시장만능주의(이런걸 '신자유주의'라고도 하지?)에 대응하기 위해 정부권력을 강화하자는 이야기가 나올 것 같단 말이지. 당연히 이렇게 되면 보다 통일적이고 전일적으로 권력을 행사할 수 있는 운영방식이 더 합리적인 것이 될테고... 그러면 그 과정에서 정치권력의 정당성 여부는 별달리 중요치 않게 될 것 같고...

4-3. 이런 식으로 생각이 연쇄하다보면 결국 박정희시대에 대한 애초의 문제의식이 이상한 방향으로 가버리는거 아닐까. 물론 그 어딘가에 탈출구가 있긴하겠지만 아직 그것을 찾지 못한 쪼렙대학원생인지라...

4-4. 그 외에도 인간 개개인의 삶과 역사적 현실은 국가권력이 아닌 다른 미시적 관계들에 의해 규정받는 측면이 더 크다고 생각하는 평소의 세계관도 한 몫 하는 것 같다만은...

5. 내가 현대사를 공부하면서 계속 정책시행과정상의 우연적 요소나 한국정부의 좌충우돌, 정책 형성의 점진성에 천착하는 것도 사실은 이런 생각이 밑바탕에 깔려있다. 나는 어떤식으로든 국가권력의 절대성을 허물어버리고 싶고 그것만으로 우리의 모든 삶이 규정당하고 그것만 바꾸면 모든 것이 다 바뀔거라는 생각을 바꾸고 싶다. 구체적인 삶과 현실은 훨씬 더 복잡한 맥락에 의해 규정당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6. 박정희시대에 대한 사회문화적 논의에서 주목할 것은 '파시즘'이라는 용어에 관련된 논의들이다. 쉽게쉽게 '박정희시대는 파시즘적이었다'고 말할 수는 있지만 '박정희시대는 파시즘이었다'라고 말하면 문제는 좀 달라질 수 있다. 후자의 맥락에서 '파시즘'이라는 단어는 엄정성이 요구되는 학문적 개념이 되기 때문이다.

7-1. 그 당시 국민(민중)들이 보여주었던 수동적이고 암묵적인 행동양식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하는 문제 역시 졸라게 뜨거운 감자.

  그런데 파시즘체제 안에서 이 정상적 일상인들이 보여준 체제친화적 태도가 민중의 주체적이고 능동적인 동의에서 나온 것인지 아니면 파시스트 집권층의 성공적인 통치에서 나온 조작적인 결실인지...(후략) (p. 386.)

7-2. 개인적으로는 그 체제친화적 태도가 일정정도는 능동성을 갖추고 있다고 생각하는 편이지만 그렇다고 그것이 위의 인용문처럼 정확히 구분될 수 있는 건인에 대해서는 좀 회의적이다. 되려 저런 식으로 계속 논의의 구도를 굳히게 되면 우리는 죽을 때까지 '민중을 적으로 돌리고 현실권력에 복무하는 논의' vs '역사적 현실을 무시하는 악마론적 사고방식'이라는 감정싸움에서 벗어나기 힘들다.

7-3. 그런 점에서 그 직후에 이어지는 이 부분이 참 인상깊었다.

  황병주는 농민이 박정희체제에 전일적으로 포섭되었다기보다는 정확한 손익계산의 원칙에 따라 자신의 이익을 극대화하는 "기회주의"에 더 경도되어 있었다는 점을 지적한다. (p. 388.)

8. 뭐 어쨌든... 박정희시대, 현대사를 전공으로 삼은 내게는 죽을 때까지 뜯어먹어도 여전히 고깃점이 남아있을 거대한 갈비살 같은 존재다. 아 그리고 올해는 박정희의 맏딸이 유력한 주자로 거론되고 있는 대선이 있는 해이다. 우리는 여전히 박정희의 망령과 싸우고 있고 그 싸움에서 이기기 위해서라도 박정희시대에 대해서 우리는 여전히 졸라게 시끄럽게 떠들 필요가 있다. (이런 식으로 다 된 밥에 코 빠뜨리고 재 뿌리고 급기야 밥상까지 엎어버리는 민X통X당의 행태가 계속된다면... 아 ㅅㅂ)

  지금 이 시점에서 박정희시대를 조망한다는 것은, 승하한 군주의 공과를 따지는 이조시대 사관의 임무가 아니라, 오늘날의 우리를 만든 그 생체권력이 우리의 몸과 마음에 깊이 각인해놓은 '바이오코드'를 찾아내어 청산하는 치유적(therapeutic) 과제가 되어야 할 것이다. (p. 3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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