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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비들 (김중혁, 창비, 2010.)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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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비들 (김중혁, 창비, 2010.)

Dog君 2013. 3. 6. 21:03


1. 장편이면 좀 다를라나...했는데, 김중혁 소설은 여전히 엔딩이 기괴하다. ㅋ


2. 이제 본격적으로 학기 시작이니까 소설을 읽는 호사는 이제 당분간 끝.


  한 개의 점에 한 사람의 목숨이 묻혔다. 그걸 실감하기란 힘들었다. 목숨은 멀리서 보면 아주 작은 점에 불과했다. 나는 형의 죽음과 홍혜정의 죽음을 동시에 생각했다. 둘 모두 착한 사람이었다. 누군가를 해치려 한 적도 없었고, 모함한 적도 없었다. 내가 아는 한 자신의 성공을 위해 누군가를 밟고 일어선 적도 없었다. 하지만 두 사람의 죽음은 세상에 아무런 흔적도 남기지 못했다. 누군가 못으로 바위를 긁어 만든 낙서보다도 옅은 흔적이었다. 나는 착한 사람들이 죽으면 세상에 커다란 변화가 올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 사람들의 소멸 때문에 지구의 무게가 가벼워지거나, 그 사람들의 소멸 때문에 사람들의 마음이 무거워지거나, 하다못해 그 사람들의 소멸 때문에 며칠 동안 밥을 먹지 못하는 사람이라도 생길 줄 알았다. 며칠 동안은 슬픔이 자욱하게 세상을 뒤덮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모든 죽음이란 결국 작은 점일 뿐이었다. 멀리서 보면 작은 점이었고, 더 멀리서 보면 더 작은 점이었고, 더욱 멀리서 보면 너무 멀어서 보이지 않는 점일 뿐이었다. (pp. 80~81.)


  우리가 저녁을 기다리지 않았다면 어떻게 됐을까. 가끔 그 질문을 떠올려본다. 해가 완전히 사라지길 기다리지 않고 곧장 차를 타고 부대 바깥으로 달려나간 다음 순식간에 고리오 마을을 벗어나 세계의 끝까지 달려갔으면 어떻게 됐을까. 달려갈 수는 있었을까. 장장군은 결국 우리를 찾아냈을까. 찾아내서 내 뺨을 후려갈긴 다음 나를 죽여버렸을까. 그런 상상은 의미가 없다. 선택된 순간이 모여 시간이 되고, 그런 시간이 모여 역사가 된다. 그 순간의 선택이 바뀌면 수많은 일들이 일어난다. 일어난 일이 일어나지 않을 수도 있고, 일어나지 않아도 될 일이 일어날 수도 있다. 그것은 하나의 선택만 바꾸는 일이 아니라 하나의 선택으로 빚어질 수없이 많은 역사를 상상해내야 하는 일이다. 나는 그럴 능력이 없다. (p. 300.)


  (전략) 오래전에 들었던 홍혜정의 말이 기억났다. 자료를 수집하다보면 기존의 모든 자료를 배신하는 자료가 나타나는데, 그걸 어떻게 처리하는가로 연구자의 태도를 알 수 있다고 했다. 첫번째 유형의 연구자는 기존의 자료를 지키기 위해 새로운 자료를 버린다. 게으른 연구자다. 두번째 유형은 새로운 자료의 가능성을 믿고 기존의 자료를 버린다. 피곤한 스타일의 연구자다. 마지막 유형은 상반되는 자료를 그대로 놓아둔다. 자신의 논리가 어긋나고 부서지더라도 모든 가능성을 열어두고 싶어하는 것이다.

  나는 홍혜정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내가 만약 어떤 분야를 연구한다면 세번째 유형의 연구자가 되지 않을까 생각했다. 나는 서로 충돌했을 때 오류를 일으키는 두 개의 진실이 존재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나는 서로의 말이 거짓이라고 주장하는 두 사람의 말이 모두 사실일 수 있다고 생각한다.

  나는 세 사람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세 사람이 결국 다른 이야기를 하는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같은 사건을 이야기하고 있었지만 세 사람의 태도는 전혀 달랐고, 세 사람이 관심을 가지고 있는 부분도 전혀 달랐다. 나는 세 사람의 상반된 의견을 조합해서 객관적인 사실에 접근해야 했다. 세 사람은 같은 기억을 공유하고 있었지만 그걸 해석하는 방식이 달랐다. (pp. 343~3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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