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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니스에서 죽다 (정찬, 문학과 지성사, 2003.)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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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니스에서 죽다 (정찬, 문학과 지성사, 2003.)

Dog君 2013. 3. 5. 20:31

  


1. 소설가 정찬을 따라가보겠다는 새해 결심의 첫걸음을 막 디뎠다.


2. 물론 이 소설은 이탈리아의 베니스와는 별 관련이 없다.


  만루장은 공설 운동장 뒷담 맞은편 길가에 있었다. 운동장 담 길을 오를 때 동네 아이들은 종종 신발을 벗고 도랑물 속을 걷곤 했는데, 건너편 만루장에서 흘러나오는 향긋한 내음에 코를 킁킁거렸다. 1960년대의 가난한 아이들에게 중국 음식은 호사였다. 값이 가장 싼 자장면도 보리투성이 밥에 비하면 정승 음식이었다.

  만루장에서 어머니가 주문한 것은 놀랍게도 탕수육이었다. 아이는 탕수육이라는 음식을 먹어본 적이 없었다. 먹어보기는커녕 들어본 적조차 없었다. 먹어본 적도 들어본 적도 없는 그 낯선 음식이 아이를 단번에 도취시켰다. 오묘한 형태와 빛깔에, 형언할 수 없는 향기에, 절미한 맛에 도취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것은 천상의 음식이었다. 이 세상에서 단 한 번 맛볼 수 있는. <은빛 동전> 中 (pp. 12~13.)


  (전략) 산장 안은 빛 한 점 없이 캄캄하고 추위에 책마저 볼 수 없으니 잠을 청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잠마저 막혀 있었다. 몸이 오들오들 떨리는데 잠이 오겠는가. 할 수 없이 촛불을 켜고 고개를 최소한 뺀 후 책을 집어 들었다. 그렇게 촛불을 켰다 끄기를 몇 차례 했을까. 시계를 보니 새벽 1시가 넘어 있었다. 소변이 마려웠다. 침낭에서 나가기 싫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몸을 잔뜩 웅크리고 산장 밖으로 막 나가는데, 내 눈은 부딪쳤다. 그것 부딪쳤다 해야 한다. 쏟아져내리는 별들의 빛과.

  광막한 우주 공간에서 별들의 빛은 느리게 흘러내리고 있었다. 나는 어떤 힘에 이끌리듯 밖으로 나갔다. 빛이 몸에 닿는 것을 느꼈다. 몸을 떨었다. 강렬한 정화의 느낌이 몸을 관통하고 있었다. 영혼이 무엇에 의해 씻기는 듯한 느낌이었다. 그것은 고통스러우면서도 달콤했다. 세상의 모든 길이 별빛 속으로 사라져가는 것을 나는 아득한 눈으로 보고 있었다. <적멸> 中 (p. 107.)


  "그 기억이 인간들에게 얼마나 많은 영향을 주는지 아십니까? 저는 천사의 영혼으로 25년 동안 인간들 속을 떠돌았습니다. 제 눈에 비친 인간의 모습들 중에서 가장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은 시간에 대한 그들의 태도였습니다. 그들은 시간을 끊임없이 토막 내고 있었습니다. 처음에는 그 까닭을 알 수 없었지요. 얼마 후 알게 된 저는 놀라움을 금할 수가 없었습니다. 인간들은 긴 시간을 견디지 못하더군요. 긴 시간 속으로 들어가면 어쩔 줄을 몰라 허둥거렸습니다. 그들에게 그것은 고통이자 공포였습니다. 그 고통과 공포에서 벗어나기 위해 시간을 끊임없이 토막내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놀랍게도 인간은 시간의 토막 속에서 살고 있었습니다. 토막이란 분리이며 망각입니다. 그들은 어제의 시간을 잊고 있었습니다. 어제의 시간을 잊음으로써 그 시간 속에서 숨쉬고 있는 어머니를 잊고 말았습니다. 어머니를 잊어버린 그들은 전율스럽게도 시간의 토막 속에서 웅크리고 앉아 어머니의 살을 뜯어먹고 있었습니다. 이 비극적 상황을 일깨우는 유일한 길은 기억입니다. 기억은 토막 난 시간을 이어주며 더 나아가 영원을 보여줍니다. 기억의 중요성은 여기에 있습니다. 모든 근원은 영원 속에서 숨쉬고 있으니까요. 시간 속을 유영하는 오디세우스의 모습이란 얼마나 장언하고 아름다운지 아십니까? 그 장엄함과 아름다움이란......" <죽음의 질문> 中 (pp. 178~179.)


  저녁 식사가 끝나자 자유 시간이 주어졌다. 학생들 대부분이 여관을 빠져나갔다. 나는 나가지 않았다. 나가고 싶은 마음이 조금도 없었다. 텅 빈 방에 웅크리고 앉아 내가 찍은 사진들을 생각했다. 사진이란 움직임이 정지된 시간의 토막이다. 이 시간의 토막들을 향해 나는 쉼없이 말을 걸었다. 무슨 대답을 듣고자 그토록 쉼없이 말을 걸었을까. 내가 알 수 없는 무수한 순간들이 지나가는 동안. <저문 시간> 中 (p. 195.)


  (전략) 논의 끝에 술 한잔 더 마시기로 합의했다. 한 시간 후쯤이면 승객의 수가 줄어들 것이라는 판단에서였다. 다시 지방으로 올라온 우리는 길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학림이라는 굵은 명조체 간판이 눈에 띄었다. <베니스에서 죽다> 中 (p. 213.)


  언어와 권력에의 천착을 멈춘 것은 1991년이었다. 10여 년의 세월은 그를 '관념의 작가'로 만들어놓았다. 어떤 선배 작가는 그의 소설을 읽으면서 자주 진저리를 쳤다고 했다. 독자를 위한 배려가 전혀 없는 것에 대한 질책이었다. 그의 정신 속에는 독자를 위한 공간이 들어갈 틈이 없었다. 그 자신이 유일한 독자였다. <섬진강> 中 (p. 309.)


  자본의 욕망은 빠름을 요구한다. 빠름이 낳은 것은 시간을 단축시키는 삶 시간에 의해 추적당하는 삶이다. 뒤를 돌아보는 자는 도태한다. 귀중한 본질은 과거에 있지 않다. 지금 여기에 있다. 디지털 리얼리즘은 사이버스페이스를 가상 현실로 생각하는 것을 단호하게 거부한다. 사이버스페이스야말로 디지털 리얼리스트에게 가장 생동하는 현실이다. 그들은 사이버스페이스라는 땅 위에서 노동하고, 수확을 거둔다. 과거는 들어갈 수 없는 땅이다. 들어갈 수 없는 땅은 땅이 아니다. 그들에게 과거란 부재의 세계다. 그러니 과거의 넋이 있을 턱이 없다. <섬진강> 中 (p. 3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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