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og君 Blues...
아버지 본문
1. 아버지에 대한 최초의 기억은 휘파람을 불며 골목 끝을 돌아오는 퇴근길 모습이다. 아버지에게 내가 뛰어 갔는지, 그런 나를 아버지가 나를 안아주었는지 전혀 기억이 나질 않고, 그냥 휘파람을 불며 골목 끝을 돌아오던 그 모습, 그 짧은 장면만 기억 난다.
2-1. 중학교 3학년 때였던 것 같다. 딱히 사춘기도 아니었고, 특별히 잘 하는 것도 없으며, 지금 와서 암만 생각해봐도 재미있는 추억 하나 없는 중학교 생활이었다. 학교를 마치고 집에 오니 어쩐 일로 아버지가 집 소파에 앉아 전화를 받고 계셨다. 전화통을 붙들고 하는 말이라고는 그저 "예... 예..." 뿐이었다. 어머니는 말 없이 굳은 얼굴로 옆에 앉아 계셨다.
2-2. 나는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방에 들어갔다. 아마도 컴퓨터를 켜고 게임을 했을 것이다. 그 날은 아버지가, 평생 만져보지도 못했던 액수 만큼의 부도를 맞은 날이었다. 아마 저녁도 먹었을 것이고 TV도 보았을텐데, 뭘 먹었는지 뭘 보았는지는 기억이 나질 않는다. 그리고 그 날 아버지가 한 명의 가장으로서 떠안아야 했을 절망과 좌절이 어느 정도의 크기였는지 나는 감히 상상조차 하지 못한다.
2-3. 소심하지만 또 그만큼 악착 같았던 아버지는 그 모든 것을 온전히 삼켜냈다. 그 날의 부도란, 아버지와 갑을관계에 있었던 (더 정확하게는 '갑'이었던) 내 친구의 아버지가 종적을 감출 정도로 큰 일이었지만 내 아비는 지박령이라도 된 듯 그 자리에 못박혀 서있었다. 아들들에게 그 모든 일들을 함구한 채로, 그 빚들을 모두 갚아내는데 15년 가까운 세월이 걸렸지만, 어쨌거나 내 아비는 아내와 함께 그 모든 일들을 모두 감당해냈다. 아무 것도 포기하지 않고, 자기가 지켜야 한다고 생각한 그 모든 것들을 지켜냈다.
3.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내 아비의 삶은 그다지 성공적인 삶은 아니었다. 가난한 좌익 전력자의 맏이로 태어나 의무교육만을 겨우 이수하고 쫓기듯이 하루하루에 내몰렸다. 그리고 그 하루하루들이란 항상 고단한 것이었다. 희망이고 뭐고 말하기 전에, 자식들이 꽤 큰 다음에도 겨우 하루 세끼 굶지 않고 밥 먹을 수 있다는 정도에도 감사하는 날들이었다.
4-1. 아버지의 통장에 대한 기억도 하나 남아있다. 오십 몇 만원이 찍혀 있었던 것 같다. 학교를 마친 후로, 단 하루도 빠짐없이 고단한 육체노동자였던 그가 받았던 한 달 품삯은 그 정도였다. 그리고 얼마 후, 아버지는 공장을 그만두고 집 구석에 기계 몇 대를 들여놓고 일을 시작했다. 그렇다고 해서 일이 편해졌다거나 수입이 딱히 나아진 것은 없었다. 마을 사람들은 기계 소리가 시끄럽다며 아버지에게 얼굴을 붉히기 일쑤였다. (우리 집이 마을 사람들과 썩 좋은 관계를 맺지 못했던 것은 아마도 그 때문일 것이다.)
4-2. 그래도 무척 감사할 일인 것은 그 이후로 사정이 계속 나아졌다는 사실이다. 올해로 스물세해째를 맞는 공장은, 지금은 번듯하게 성장하여 꽤나 모양이 난다. 나는 그 모든 것이 내 아버지와 어머니가 순전히 빈손에서 시작해서 이뤄놓은 것임을 잘 알고 있다.
5. 아버지가 다니시던 공장을 그만두시던 무렵인 것 같다. 아버지는 나를 데리고 집 앞의 야트막한 언덕에서 작은 나무가지들을 몇 개 끊어오시고는, 며칠 뒤 어느 바람 많이 불던 날에 얼레를 만들어주셨다. 톱으로 자르고, 사포로 문지르고, 잘 달군 연탄집게로 구멍을 뚫어 꽤나 멋진 얼레가 만들어졌다. 어려서부터 이것저것 만드는 것을 좋아했던 아버지의, 고이 포개 접어서 가슴 한 켠 어딘가에 접어두었을 재능과 꿈과 희망이 그 얼레에 녹아들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얼레를 받아들고 동네사방 뛰어다니던 아이의 함박웃음이 그의 보람이었을 것이다.
6. 소심하고 유약한 성격의 아버지에게 세상이란 분명 쉽지 않았을 것이다. (다른 사람이라고 해서 마땅히 더 쉬웠다는 말은 아니지만...) 어쨌거나 그는 그 모든 것들을 회피하지 않고 온전히 다 감내했다. 세상을 살아낸 그가 존경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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