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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진기행 (김승옥, 문학동네, 2004.)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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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진기행 (김승옥, 문학동네, 2004.)

Dog君 2013. 6. 24. 15:34



1-1. 이 책을 산 이유는 두 가지다. 우연히 발견한 (문학동네 출판사에서 직접 운영하는 것으로 추정되는) 카페에서 무척 저렴한 가격으로 이 책을 팔고 있었기 때문이 첫번째이고, 고교 시절 문학 문제집에서 읽었지만 그 출처는 잊어버리고 말았던 몇몇 문장들이 김승옥의 소설 '서울 1964년 겨울'의 첫머리임을 우연히 알게 된 것이 두번째이다. 그리고 읽다보니 '누이를 이해하기 위하여'도 언젠가 인상깊게 읽었지만 그 출처를 잊어버렸던 문장들이었음이 기억났다.


2-1. 고교 시절, 나의 환상은 '서울'과 '어른'에 있었다. TV를 통해서, 혹은 몇 년에 한 번 정도 서울의 친척집에 갈 일이 있을 때에만 제한적으로 보고 들었던 '서울'은 (내가 살던 지방 중소도시에는 없는) 다양한 물건들과 사람들과 분위기들이 있는 곳이었다. 나는 '서울'에서는 모든 것이 다 가능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2-2. 그리고 중학교를 마치고 고등학교로 넘어가던 그 겨울에, 고등학교라는 새로운 단계로 접어드는 것에 대한 불안감 속에서도 나에게 묘한 흥분감을 준 것은, 나도 이제 3년만 있으면 '어른'이 된다는 사실이었다. 내게 '어른'이란, 삼겹살집에 가서 혼자서 삼겹살에 소주를 먹을 수 있는 존재였고, 술을 마시고 밤늦게 돌아다녀도 잔소리 하는 사람이 없는 그런 존재였다.


2-3. '서울 1964년 겨울'의 초두에 등장하는, "오뎅과 군참새와 세 가지 종류의 술 등을 팔고 있고, 얼어붙은 거리를 휩쓸며 부는 차가운 바람이 펄럭거리게 하는 포장을 들치고 안으로 들어서게 되어 있고, 그 안에 들어서면 카바이트 불의 길쭉한 불꽃이 바람에 흔들리고 있고, 염색한 군용 잠바를 입고 있는 중년 사내가 술을 따르고 안주를 구워주고 있는 그러한 선술집"은 '서울'과 '어른'의 환상이 만나는 지점이었다. 특히 "군참새"가 더 그랬다. 나는 '서울 사는 어른들은 술안주로 참새를 구워먹는구나' 했다. 그것이 꽤나 인상 깊었다.


3. 책이 나온 해를 2004년으로 적었는데, 이 책은 김승옥이 발표했던 글들을 묶어서 1998년에 내놓은 것이고, 2004년은 2판이 나온 해이다.


 (전략) 우리가 구경꾼들을 헤치고 들어갔을 때, 반장이 순경과 노파에게,

  "이분이 파묻어주시기로 됐습니다."

 하고 아버지를 소개했다.

  아버지는 묵묵히 시체를 내려다보고만 서 있었다. 노파가,

  "잘 부탁합니다......"

 하고 말끝을 맺지 못하며 아버지에게 공손히 고개를 숙였다.

  "저놈이 어디로 갔는가 했더니...... 글쎄 하필...... 빨갱이가 되어서...... 저 꼴로 돌아와서...... 폐를 끼쳐서 미안합니다."

  노파는 아버지에게 다시 한번 고개를 숙였다. 나무로 짠 관이 준비되어 있었다. 아버지는 새끼로 대충 시체의 염을 하고 그것이 끝나자 시체를 관 속으로 집어넣었다. 형 친구 중의 하나가 아버지를 도왔다. 관 뚜껑을 닫기 전에 노파는 관 옆에 쭈그리고 앉아서 시체의 누런 얼굴을 손바닥으로 하염없이 쓸어주고 있었다. 노파의 가죽만 빼빼 남은 손이 느리게나마 쉬지 않고 움직였고, 그러고 있는 노파의 눈은 무겁게 감겨져 있었다. 반듯이 누운 시체 위에 관 모서리의 그림자와 바람이 하느적거리고 있었다. <건(乾)> 中 (pp. 71~72.)


  누이는 도시로 갔었다. 어머니와 내가 누이를 도시로 보냈었다. 그리고 며칠 전 갑자기, 거진 이 년 만에 이곳으로 다시 돌아왔었다. 누이가 도시에 가 있던 그 이 년 동안 나는 얼마나 지금 우리 앞에서 지상을 포옹하고 있는 이 자연현상들에게 누이의 평안을 빌었던가. 그러나 도시에서는 항상 엉뚱한 일이 일어나는 모양이었다. 어떠한 일들이 누이를 할퀴고 지나갔었을까, 어떠한 일들이 누이를 빨아먹고 갔었을까, 어떠한 일들이 누이를 찢고 갔었을까, 어떠한 일들이 누이에게 저런 침묵을 떠맡기고 갔었을까. 누이는 도시에서의 이야기를 나와 어머니의 간절한 요청에도 불구하고 한마디 하려 들지 않았었다. 우리는 누이가 지니고 왔던 작은 보따리를 헤쳐보았다. 그러나 헌옷 몇 벌과 두어 가지의 화장도구를 발견할 수 있을 뿐이었다. 그걸로써는 누이에게 침묵을 만들어준 이 년의 내용을 측량해볼 길이 없었다. 누이의 침묵은 무엇엔가의 항거의 표시였다. 우리를 향한 항거였을까, 도시를 향한 항거였을까. 그렇지만 우리를 향한 것이라면 그것은 분명 누이에게 잘못이 있는 것이다. 침묵으로써가 아니라 높은 목소리로 누이는 우리를 질책했어야 하는 것이다. 높은 목소리로 질책하는 방법이 침묵의 질책보다 더 서툴렀다는 것을 결국 도시에서 배워왔단 말인가? <누이를 이해하기 위하여> 中 (pp. 127~128.)


 (전략) 영이는 내게 카드를 주지 않은 녀석의 여동생, 내 구멍난 양말과 그 구멍으로 내민 시꺼먼 발뒤꿈치를 본 그 예쁜 여자다. 언젠가, 그날 내 뒤꿈치를 보았느냐고 물었더니 그 여자는 고개를 끄덕이며 그래서 내가 좋아졌단다. 부잣집 아가씨들에겐 이해하기 곤란한 취미가 있다. 마치 옛 제국들엔 이해하기 어려운 풍부한 기호(嗜好)가 있었듯이 말이다. 부잣집 아가씨들에겐 이해하기 곤란한 취미가 있다는 생각도 이젠 고정관념 중의 하나이다. 그날 만일 내가 천연스럽게 발뒤꿈치를 보이며 계단을 올라갔다고 하면 내가 그렇게 좋아졌을리가 없었을 텐데, 창피해서 후닥닥 올라가버리는 데서 자기로부터 점수를 땄다는 거다. 프라이드가 있다는 것은 참 좋아 보인다고도 덧붙였다. 프라이드, 제기랄 프라이드라니, 후닥닥 계단을 뛰어올라가는 데 프라이드란다. 프라이드라면 그 반대일 텐데 말이다. 그 여자가 처음부터 내가 좋았던 게 그래서 확실해졌다. 무조건 좋아지게 된 이유는 항상 모순을 포함하고 있는 거니까. 단테가 들려준 이야기 - 지옥에 가서 가장 고통스러운 형벌을 받고 있는 사람에게 당신이 지은 죄는 무엇이냐고 단테가 물었더니 자기는 지상에 있을 때 프라이드가 강했다는 죄로 이렇게 가장 심한 고통을 겪고 있다고 대답하더라는 얘기를 내가 들려주었더니, 영이는 만일 자기가 하나님이라면 프라이드를 잃어버리고 살아온 놈들을 지옥의 불구덩이 속에 집어넣어버리겠다는 거다. 영이의 좋은 점이야말로 어쩌면 그거다. 그렇지만 저 사관학교 생도들의 프라이드는 난 질색이다. 멋있는 유니폼을 입고 꼿꼿이 걸어갈 수 있다고 뻐기는 놈들 말이다. 누구나 멋있는 옷을 입으면 꼿꼿이 걸어가게 되는 법이다. 옷을 입고 있는 사람 자체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데 유니폼만 믿고 으스댄다. 어쩌면 유니폼에다가 자기를 때려박았을 거다. 으스대야 할 건 사람을 꾸겨넣은 유니폼 자신일 거다. <확인해본 열다섯 개의 고정관념> 中 (pp. 148~149.)


  그는 어쩌다가 내가 만화를 그리기 시작했나 하고 자신의 이력을 검토해보기 시작했다. 이른바 일류대학을 지망했다가 실패하자, '나만 열심히 하면 어느 대학이고 어떠랴' 하고 들어간 정원 미달의 어느 삼류대학 사회학과를 마치고, 입대하여 훈련을 마치자 떨어진 게 정훈(政訓)이었고 정훈에서 어쩌다가 맡은 게 군내 신문 편집이었고 그리고 어쩌다가 보니까 거기에서 만화를 그리고 있었고 제대하여 취직할 데를 찾던 중 어느 회사의 굉장한 경쟁률의 입사시험에 응시했다가 떨어지고 그러나 거기에서 함께 응시했다가 함께 미역국을 먹은 여자와 사랑하게 되어 사랑하는 이를 위해서는 모험이라도 불사하겠다는 각오로 군대에 있을 때의 어설픈 경험으로써 대학 동창 하나가 기자로 들어가 있는 신문에 그 친구의 소개로 만화를 연재하게 되었고, 밥값이 생기자 그 여자와 결혼식은 빼어버린 부부가 되어, 한 지붕 밑에 여러 세대가 살고 있는 이 집의 방 한 칸을 세내어 들고 오늘에 이르렀음. <차나 한잔> 中 (p. 217.)


  1964년 겨울을 서울에서 지냈던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 수 있겠지만, 밤이 되면 거리에 나타나는 선술집 - 오뎅과 군참새와 세 가지 종류의 술 등을 팔고 있고, 얼어붙은 거리를 휩쓸며 부는 차가운 바람이 펄럭거리게 하는 포장을 들치고 안으로 들어서게 되어 있고, 그 안에 들어서면 카바이트 불의 길쭉한 불꽃이 바람에 흔들리고 있고, 염색한 군용 잠바를 입고 있는 중년 사내가 술을 따르고 안주를 구워주고 있는 그러한 선술집에서, 그날 밤, 우리 세 사람은 우연히 만났다. 우리 세 사람이란 나와 도수 높은 안경을 쓴 안(安)이라는 대학원 학생과 정체는 알 수 없지만 요컨대 가난뱅이라는 것만은 분명하여 그의 정체를 알고 싶다는 생각은 조금도 나지 않는 서른대여섯 살짜리 사내를 말한다. <서울 1964년 겨울> 中 (p. 258.)


  "화투라도 사다가 놉시다". 헤어지기 전에 내가 말했지만,

  "난 아주 피곤합니다. 하시고 싶으면 두 분이나 하세요"라고 안은 말하고 나서 자기의 방으로 들어가버렸다.

  "나도 피곤해 죽겠습니다. 안녕히 주무세요"라고 나는 아저씨에게 말하고 나서 내 방으로 들어갔다. 숙박계엔 거짓 이름, 거짓 주소, 거짓 나이, 거짓 직업을 쓰고 나서 사환이 가져다놓은 자리끼를 마시고 나는 이불을 뒤집어썼다. 나는 꿈도 안 꾸고 잘 잤다.

  다음날 아침 일찍이 안이 나를 깨웠다.

  "그 양반, 역시 죽어버렸습니다." 안이 내 귀에 입을 대고 그렇게 속삭였다.

  "예?" 나는 잠이 깨끗이 깨어버렸다.

  "방금 그 방에 들어가보았는데 역시 죽어버렸습니다."

  "역시......" 나는 말했다. "사람들이 알고 있습니까?"

  "아직까진 아무도 모르는 것 같습니다. 우린 빨리 도망해버리는 게 시끄럽지 않을 것 같습니다."

  "자살이지요?"

  "물론 그것이겠죠."

  나는 급하게 옷을 주워입었다. 개미 한 마리가 방바닥을 내 발이 있는 쪽으로 기어오고 있었다. 그 개미가 내 발을 붙잡으려고 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들어서 나는 얼른 자리를 옮겨 디디었다. <서울 1964년 겨울> 中 (pp. 284~2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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