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og君 Blues...
내 심장을 쏴라 (정유정, 은행나무, 2009.) 본문
1. 나도 도망치고 싶다고. 꼭 패러글라이딩 아니어도 되고, 보트 안 타도 되니까 도망치고 싶다고.
질질 끄는 발소리가 엘리베이터 밖으로 멀어졌다. 통 밖은 고요해졌다. 고요한 만큼 불안했다. 불안한 만큼 안달이 났다. 머릿속의 갈등은 점점 격렬해졌다. 차라리 자수해버릴까. 그랬다간 꼼짝없이 이발사한테 끌려갈 텐데. 내친 김에 세탁장까지 가? 거기라면 숨을 곳이 있을까? 불현듯 집채만 한 세탁기에 내던져져 세제를 뒤집어쓰고 휙휙 도는 내 몸뚱이가 떠올랐다. 뜨거운 물을 쏟아부어 헹구고, 고속회전으로 비틀어 짜고, 압착해서 고열 소독하면 물똥이...... (p. 39.)
놈이 내게 말을 걸어온 건 고등학교 2학년 가을이었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지 두어 달쯤 됐을 때였다. 처음엔 놈의 말을 알아듣지 못했다. 봄날의 바람처럼 미약한 소리였기 때문이다. 강물이 흐르는 소리처럼 들릴 때도 있었다. 먼 역에서 들려오는 기차소리 같기도 했다. 흥얼대는 노랫소리였던 적도 있고, 기분 좋은 웃음소리였던 적도 있다. 심오하지만 이해는 할 수 없는 철학자의 장광설로 들리기도 했다.
나는 그 소리들이 귓속에서 들려온다는 걸 깨달았다. 집중해서 들어본 결과, 무얼 말하고 있는지도 눈치로 알아차리게 됐다. 시간이 흐르면서 우린 상대의 언어를 익혔고 마침내 말을 트게 되었다.
'수명아.'
놈이 내 이름을 불러주던 순간을 잊지 못한다. 오한처럼 밀려들던 수줍은 기쁨을 기억한다. 너, 내 이름을 아는구나. (pp. 49~50.)
"류승민 군."
렉터 박사는 뒷짐을 지며 승민 앞에 섰다. 승민은 대답 대신 왼발을 위로 쳐들고 방금 깎은 발톱들을 검토했다. 렉터 박사는 양 발꿈치를 들어 올렸더가 방바닥을 치듯이 내려놓았다. 구두 뒤축이 '딱' 소리를 냈다.
"자네 엄마는 어른과 이야기할 땐 발이 아니라 얼굴을 들러고 가르치지 않았나?"
승민도 손톱깎이로 반대편 엄지발톱을 '딱' 소리 나게 잘라냈다. 발톱 조각이 렉터 박사의 반들반들한 구두코로 튀었다.
"엄마가 수상한 사람한테는 얼굴 보여주지 말라던데. 이를테면 사람 장사를 하는 알대머리라든가."
렉터 박사의 알대머리에 자줏빛 핏대들이 툭툭 불거졌다. 열선이 과열된 전기스토브를 보는 기분이었다. 그는 입술을 거의 벌리지 않고 물었다.
"좀 전에 재미난 일을 벌였다지?"
"아아. 어떤 여자가 시켜서."
"그럴 리가 있나. 내 병원에 그런 일을 시키는 사람은 없어."
"자필 확인서."
승민은 발바닥 및에서 윤보라의 확인서를 빼 들고 살랑살랑 흔들었다. 최기훈은 어금니를 물고 자기 발치를 내려다봤다. 화가 났다기보다 재미있어 하는 기색이었다.
"류승민 군, 내 병원에서 그런 일이 다시 일어나지 않았으면 좋겠네만."
"시키는데 안 하면 경고를 주던데." (pp. 176~177.)
문간에서 최기훈을 돌아봤다.
"난 점쟁이가 아냐. 가족도, 본인도 말하지 않는 걸 나 혼자 알 길은 없어."
"승민이가 여기 갇힌 이유도 알고 있잖아요."
"이수명, 난......"
최기훈은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 늘 무표정하던 그의 얼굴이 조금 흐트러져 있었다. 뭔가 답답해하는 표정이었다.
"네가 뭘 잘못 알고 있는 모양인데, 난......"
"정신병동에는 두 부류의 인간이 잇어요. 미쳐서 갇힌 자와 갇혀서 미쳐가는 자."
최기훈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내 눈을 피하지 못하도록 꽉 붙들었다.
"승민이가 어느 쪽이닞, 최 선생님은 잘 알아요. 그게 내가 아는 진실이에요." (p. 213.)
보트는 수면을 치고 오르는 새처럼 앞으로 튕겨 나갔다. 상류를 향해 전속력으로 질주하기 시작했다. 속도계의 바늘이 바르르 떨며 적색 선을 넘어갔다. 35노트, 38노트, 40노트. 숨이 가빠왔다. 흉통이 오고 있었다. 신경절을 타고 심장을 향해 번지는 뜨거운 압통, 자작나무 숲에서 느꼈던 그 통증이었다. 수위는 비교조차 할 수 없었다. 흉벽에 쩍쩍 금이 가는 느낌이었다. 균열의 핵심부에서는 낯선 것이 펄떡거렸다. 금방이라도 가슴을 부수고 튀어오를 것처럼 억세게 요동쳤다. 나는 더 견딜 수 없었다. 무엇이든 해야 했다. 하다못해 고함이라도 질러야 했다.
"비켜!"
왜 하필 '비켜' 였던가. 모르겠다. 그 순간 내 몸을 꿰뚫었던 것이 무언지만 안다. 통쾌함이었다. 해방감이었다. 깨달음이었다. 내 심장도 승민처럼 살아 있었다. 흉곽 속에서 아프게 요동하고 있는 것은 분명 내 심장이었다. 보트 한 대가 왼편을 스쳐갔다. 나는 핸들을 잡은 채 일어섰다. 앞 유리 밖으로 머리를 내 밀고 내 안에서 들끓는 것들을 토해냈다. 추격자들을 향해, 드넓은 호수를 향해, 수리 희망병원 501호를 향해, 내가 떠나온 세상을 향해. (p. 2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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