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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씨의 입문 (황정은, 창비, 2012.)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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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씨의 입문 (황정은, 창비, 2012.)

Dog君 2014. 9. 6. 09:51



1. 결국 작가는 한 사람이니까, 한 사람에게 너무 많은 다양성을 기대할 수는 없겠지만은, 읽다 보면 어딘지 모르게 친숙한 이야기들이 반복되는 것 같은 느낌이 자꾸 든다. 아니, 작가의 게으름에서 비롯한 자기복제...라는 뜻이 아니라, 그래도 같은 작가의 책 서너권을 연이어 읽었을 때 느낄 수 있는 그 작가만의 특별한 세계 같은 것이 감지된다...라는 뜻입니다.


  야노 씨와는 봄부터 가을까지 만났다. 봄부터 가을까지 빠짐없이 만났다. 야노씨는 은백색 테에 둥글고 맑은 유리를 끼워넣은 안경을 끼고 타박타박 걸어다녔다. 다도를 배운 듯 단정한 자세로 앉는 사람이었다. 어느날 가치관이 맞지 않네요,라는 말을 듣고 헤어졌다. 어떤 면에서 가치관이 맞지 않는다는 것인지 자세한 내용도 듣지 못했다. 가치관이 맞지 않으면 안되는 것인가요, 묻고 싶은 것도 묻지 못하고 헤어졌다. 마시던 차를 다 마시고 찻집 앞에서 조심해 가세요, 인사했다. 그뒤로 어떻게 살고 있는지 소식조차 들은 적 없다. 어떤 면에서 가치관이 맞지 않았는지는 지금도 모르겠다. 그런 걸 생각해도 모를 정도로 섬세하지 못했기 때문에 헤어졌는지도 모르겠다.

  야노 씨는 잘 있을까.

  잘 살아 있거나 잘 죽었을까.

  살아 있다면 다도를 가르치듯 단정한 자세로 앉아서 우리는 역시 가치관이 맞지 않네요,라고 누군가에게 말하거나 하고 있을까. 야노 씨.

  보고 싶어요.

  나 떨어지고 있어요.

  무척 쓸쓸하답니다. <낙하하다> 中  (pp. 71~72.)


  나쁘고 나쁘고 나쁠 뿐이라서 나쁨에 대한 기준이랄 것도 애매하고 무감각해졌다. 목숨에 관한 가능성이라는 것도 도무지 비좁기가 이를 데 없었다. 되게 걷어차여 죽게 된 일생 이후로도 던져지거나 머리에 무언가를 맞거나 병에 걸리거나 먹지 못할 것을 먹고 병을 앓다 죽었다. 한 차례 일생을 마치고 되살아난다고 몸까지 멀쩡해지는 건 아니었다. 죽기 직전에 얻은 상처나 통증이 사라지지 않고 남아 엎드려 지냈다. 언제나 목이 마르고 배고팠다. 등이나 가슴 부근의 느낌이 짜증스러워 혀로 핥으면 죽은 털이 목을 메울 듯 가득 묻어나왔다. 뼈가 뒤틀리고 머리의 형태도 울퉁불퉁해졌다. 죽고 살기를 거듭할수록 깡마르고 험악한 몰골이 되어갔다. 최근 재수없고 불길하게 생긴 것들이 늘어나 부근의 이미지 가치가 떨어진다며 적극적으로 이 몸을 해코지하려는 인간들을 피해다니는 일도 고단했다. 깨끗한 물이나 배불리 마시고 앞뒤 경계 없이 하루라도 푹 잤으면 싶었으나 그런 날은 좀처럼 오지 않았다. <묘씨생猫氏生> 中  (pp. 125~126.)


  (전략) 어느 틈엔가 사람들이 잔뜩 모여 있었다. 머리에 띠를 두른 사람 노란색으로 투쟁이라고 적힌 조끼를 입은 사람 확성기를 든 사람 들이 구청 주변에 팻말을 늘어놓고 분주하게 무언가를 준비하고 있었다. 오늘 여기서 무슨 일 있느냐고 누이가 내게 물었으나 내가 알 리 없었다. 속속 사람들이 도착하고 카메라도 나타났다. 삽시간에 상당히 많은 수의 사람들이 모여 집회가 시작되었다. 노점상연합 공무원노조 철거민연합이라고 적힌 현수막 세 개가 올라가고 바위처럼 살아가보자는 노래가 시작되는 상황을 어리둥절해서 지켜보았다. 매년 하는데 올해엔 사람이 적네, 속옷공장 사장도 그쪽을 바라보며 말했다.

  깜짝 놀랐다.

  집회를 매년 저렇게 매년 하나요?

  내가 묻자 무슨 말이냐는 듯 그가 나를 보았다.

  아니 바자회를. <양산 펴기> 中 (pp. 142~143.)


  백년이 지났다고 해도 놀라지 않을 것이다. 개수구멍 없는 개수대가 설치된 외양간이 딸린 집, 이 집으로 든 것, 사실을 말하자면 석 달 정도 되었을 뿐이지만 사실은 벌써 백년 정도는 흘러가버렸는지도 모르겠다. 수도꼭지로부터는 녹물 한 방울 떨어지지 않았다. 어딘가 먼 곳에서 물을 끌어올리는 소리도 들리지 않고, 뿌리 깊이 얼어 있었다. 기온이 계속 떨어지고 있었다. 강풍이 불고 한 차례 진눈깨비가 내린 뒤로 물이 끊기고 대기가 얼어붙었다. 텔레비전 뉴스를 통해 이례적이고도 이시적인 현상이라는 보도가 있었지만 이례는 상례가 되었고 일시는 영속이 된 듯했다. 수도권 기온이 영하 37도로 떨어졌다는 보도를 들은 뒤로 전기도 끊겨 더는 뉴스를 들을 수 없었다. 그는 방에 불을 피워두었다. 장판을 뜯어내고 시멘트 바닥에 모닥불을 지폈다. 지난 한 달간 그 불은 꺼진 적이 없었다. 바닥이 그을렸다거나 벽에 그을음이 뱄다는 항의를 나중에 듣는다고 해도 어쩔 수 없다고 그는 생각했다. 손해를 보았다,라는 항의를 들어도 어쩔 수 없었다. 그는 그 방에서 벽에 번져가는 그을음을 바라보거나 항상성 없는 불꽃의 형태를 지켜보거나 곡식을 끓여 먹었다. 오후엔 외투에 달린 털모자 속으로 깊이 머리를 감추고 땔감을 주우며 집 주변을 돌아다녔다. <뼈 도둑> 中 (pp. 193~1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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