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og君 Blues...
국가의 역할 (장하준, 부키, 2006.) 본문
1. 경제 분야에서 '국가/시장'이라는 이분법은 정말 거의 1등급 횡성한우 사골 같은 거라서, 재탕삼탕을 넘어 한 삽십팔탕 정도쯤 해도 육수가 우러나오는 것 같다. 경제사를 예로 들면, 한국사에서는 국가 개입에 의한 경제성장이 과연 긍정적인 결과냐 아니냐가 주요 논쟁이고, 일본사에서는 일본이 이룩한 경제성장이 과연 국가에 의한 것이냐 시장에 의한 것이냐가 중요한 논쟁거리인 식이다.
2. 최근의 경제를 이야기하면서 신자유주의 이야기를 안 할 수가 없는데, '국가의 역할'이라는 제목에서도 살짝 냄새가 나는 것처럼, 저자인 장하준은 국가의 역할을 엄청나게 강조한다. 과거의 경제성장에서도 국가의 역할이 중요했고, 앞으로의 경제에도 국가의 역할이 중요하단 거다. 그래서 이 책의 내용도 크게 신자유주의 비판을 한 파트로 하고, 경제에 있어서 국가의 역할에 대한 강조를 나머지 한 파트로 한다. 구성 자체가 여러 논문을 묶어 놓은 것이라 그 두 파트가 잘게 쪼개져서 책 전체적으로 흩뿌려져 있기는 하지만 뭐 암튼 그 두 내용이라고 정리해도 큰 문제는 없을 것 같다.
3. 이 책에 따르면, 사실 '국가/시장'이라는 (대립적) 이분법 자체도 성립하기 어려운 것 같다. 경제에 있어서 시장의 역할을 강조하는 것조차도 국가의 정책 지향에 따라 결정되는 것인데다가, 애초에 '시장'이라고 하는 것 자체가 국가의 적극적인 정책이나 개입에 의해 가능한 것이기 때문이다. ('재산권' 같은 법적 권리도 그렇고, '시장 질서'라고 하는 것도 국가에 의해 만들어지고 지켜지는 것이니까.) 반대도 마찬가지인데, 국가에 의한 시장 개입의 대명사라고 할 수 있는 공기업도 시장 논리로부터 완전히 자유롭지 않고 말이다.
4. 신흥공업국의 경우에는 이게 좀 더 명확한데, 충분하게 시장이 성숙하지 않은 상태에서 유망한 산업에 자본을 투자하고, 경제주체 간의 갈등을 관리할 수 있는 것이 사실상 국가밖에 없다. 단지 시장논리만으로 움직이는 기업이, 장기적인 전망과 비전을 가지고 특정한 산업을 육성할 리가 없으니까. 내가 편한대로 예를 들자면 포항제철인 거지. 당시의 시장 상황으로 볼 때 성공할 가능성도 극히 낮고 거대한 자본이 투자되어야 하는 포항제철을 굳이굳이 지을 수 있었던 것은 국가밖에 없었고, 결과적으로 그 '도박'은 엄청난 효율성을 갖춘 공기업과, 그로부터 파생되는 엄청난 시장 효과들이었다.
5. 그래서 국가에게 중요한 것은 '기업가 정신'과 '비전'이다. 신자유주의자들은 시장의 변수를 완전히 파악하고 통제할 수 없는 것은 국가 역시 마찬가지이므로 국가에게 시장을 맡길 수 없다고 주장하지만, 그런 면에서 따지자면 파편화된 경제주체들은 훨씬 더 제한된 정보와 시야만을 가지고 있잖은가. 그렇기 때문에라도 여전히 국가의 역할은 중요한 것 같다.
6. ...라고, 책을 읽으면서 생각했는데, 마침 자원외교와 4대강으로 수십조원을 꼴아박은 지난 정권 이야기가 한창 뉴스거리가 되는 걸 보면서, 아 ㅅㅂ 국가의 역할이 이런 거였나 싶다. 그러니까 장하준의 주장은 결국 누가 국가를 운영하는가의 문제로 귀결된다. 그런데 이 문제에 대해서 이 책은 거의 아무런 대답도 내놓고 있지 못하다. (장하준에 대한 주된 비판 중 하나도 아마 거기 있을걸.) 하지만 어떻게 보면, 그 부분은 이 책의 범위를 넘어서는 것이기도 하다. 경제학 책에서 정치의 문제까지 다룰 순 없는 거 아이겠나.
7. 돌고 돌아서 문제는 다시 정치다. 어디서는 "바보야, 문제는 경제야."라고 했다지만, 생각해보면 문제는 경제가 아니고 정치다. 똑같은 시스템이지만, 대통령이 누구냐에 따라서 수십조가 허공으로 사라질 수도 있고, 반세기 넘게 철통 같이 폐쇄적이었던 나라의 한가운데 공단을 지어 경제와 평화의 두마리 토끼를 동시에 노릴 수도 있다. 이런 생각, 요새 뉴스 보면서 부쩍 많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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