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og君 Blues...
나의 삼촌 브루스 리 (천명관, 예담, 2012.) 본문
1. 희곡으로 시작해서 사극을 거쳐 신파극으로 끝난다. 그러다보니 뭔가 내용이 균질하지 않다는 느낌이 들어서 좀 거시기한 면도 있다. 특히 막판에 신파극으로 흘러가는 건 좀 마음에 걸린다. (근데 또 한편으로 그게 저자의 의도 같기도 하다.)
2. 정작 이렇게 말은 했지만, 내 감성도 그냥 흔하디 흔한 감성이라서 눈물이 왈칵 났고, 사람 많은데서 갑자기 훌쩍거리는 거 쪽팔려서 혼났다.
기아 혼다에서 나온 기어 삼단짜리 오십 시시 오토바이! 삼촌은 일주일을 굶은 끝에 그렇게 생전 처음 자신이 원하는 것을 손에 넣게 되었다. 아버지가 오토바이 대금을 치르고 삼촌에게 열쇠를 건네주었을 때, 그는 보는 이의 가슴을 짠하게 할 만큼 감격에 겨워했다. 어린 시절, 떼를 쓰거나 응석을 부릴 대상이 부재했던 이들은 결코 꿈을 가질 수 없다. 자신의 꿈을 받아줄 이가 이 세상에 아무도 없는데 무슨 꿈을 꿀 수 있을까? 그러므로 아이들의 '뗑깡'을 받아주는 것은 그 자체만으로도 충분히 가치 있는 일이 터, 삼촌이 그토록 감격에 겨워한 것은 단지 오토바이를 손에 넣었기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자신이 떼를 쓸 때 그것을 받아줄 사람이 이 세상 어딘가에 존재한다는 걸 처음으로 확인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삼촌은 그동안 어디서 오토바이 타는 법을 배웠는지 새 오토바이를 능숙하게 다뤘다. 그는 한사코 걸어가겠다는 아버지를 뒷자리에 태우고 나를 앞에 태워 집으로 돌아왔다. 오십 시시 빨간색 오토바이는 생각보다 힘이 좋아 소리도 경쾌하게 플라타너스 가로수가 늘어선 길을 달려갔다. 그날 삼촌은 생전 처음으로 아버지에게 응석 아닌 응석을 부렸다.
― 혀, 혀, 혀, 형님!
삼촌은 잔뜩 겁을 집어먹어 자신의 허리를 꽉 껴안고 있는 아버지를 불렀다.
― 왜?
― 고, 고, 고, 고마워요.
― 뭐라고?
아버지는 귓전을 스치는 바람소리에 삼촌의 말을 못 알아들은 모양이었다. 잠시 후, 삼촌은 고개를 돌리고 다시 크게 소리를 질러다.
― 이, 이, 이담에 도, 돈 많이 벌어서 펴, 펴, 편하게 모실게요!
― 이놈아, 나도 자식이 둘이나 있는데 왜 네가 나를 모셔?
이번엔 제대로 알아들었다. 아버지는 퉁명스럽게 말을 받으면서도 기분이 좋았는지 주름진 얼굴에선 흐뭇한 미소가 떠나지 않았다. 오토바이는 큰 길을 벗어나 코스모스가 피어 있는 마을길로 접어들었다. 누렇게 벼가 익어가는 너른 벌판 위로 하늘 가득 잠자리 떼가 날고 있었다. (1권, pp. 54~55.)
숲 한가운데 이소룡이 서 있었다. 그는 위통을 벗은 채 목인춘을 상대로 혼자 수기(手技)를 하고 있었는데 그 모습이 안개에 휩싸여 더욱 신비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손으로 나무를 칠 때마다 목탁을 칠 때처럼 경쾌한 소리가 났고 근육이 살아 있는 뱀처럼 눈앞에서 꿈틀거렸다. 삼촌은 놀란 눈을 크게 뜨고 한동안 이소룡이 수련하는 모습을 지켜보기만 했다. 이것은 필시 꿈이겠지? 삼촌은 자신의 팔뚝을 힘껏 꼬집어보았다. 아팠다! 그렇다면 지금 자신이 보고 있는 것은 현실이란 말인가? 그런데 어떻게 죽은 이소룡이 여기에 나타날 수 있지? 그런 생각을 하는 와중에도 삼촌은 이소룡의 손동작을 유심히 지켜보았는데 칼판장이 자신에게 가르쳐준 것과는 전혀 딴판이었다. 동작은 더욱 빠르고 강했으며 놀랄 만큼 정교하고 복잡해 팔이 꼬이지 않는 게 신기할 정도였다. 그제야 비로소 삼촌은 칼판장이 자신에게 가르쳐준 영춘권이 모두 사기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런 그에게 엉터리 무술을 배우느라 한 달에 만 원씩 갖다 바쳤으니! 삼촌은 자신도 모르게 칼판장에게 욕을 했다. (1권, p. 208.)
― 삼촌.
삼촌이 막 버스에 오르려는 순간, 나는 삼촌을 불렀다.
― 왜?
나는 잠시 쳐다보다 입을 열었다.
― 삼촌이 뭐가 됐든 되고 싶다고 했잖아?
― 그, 그런데?
― 삼촌은 나한테 그냥 삼촌이야. 뭐가 될 필요도 없어. 난 이소룡도 필요 없으니까 그냥 삼촌이면 돼.
그때 나는 왜 삼촌에게 그런 감상적인 얘길 꺼냈을까? 삼촌은 주춤하며 나를 바라보다 빙그레 웃으며 머리를 쓸어주었다. 그리고 차 안으로 뛰어올라가며 말했다.
― 그, 그, 그래도 그냥 삼촌보다는 이, 이, 이소룡 삼촌이 낫잖아.
삼촌이 올라타자마자 버스가 문을 닫고 출발했다. 삼촌은 자리를 찾으며 두리번거리다가 밖에 서 있는 나를 발견하고 손을 흔들어주었다. 나도 마주 손을 흔들었는데 이상하게 자꾸만 눈물이 날 것 같았다. 그래서 하늘을 쳐다보았다. 그리고 다시 고개를 내렸을 때 버스는 막 터미널을 벗어나고 있었다. 버스가 멀리 사라질 때까지 나는 자꾸 하늘을 올려다보며 그 자리에 서서 손을 흔들었다. (1권, pp. 244~245.)
그날 나는 왜 뒤늦게 그녀를 찾아갔을까? 우리의 관계는 이미 오래전에 끝났는데 혹시 마음속에 무슨 미련이라도 남았던 걸까? 그녀를 찾아간 건 그저 얼굴이나 한 번 보고 잘 지내라는 작별인사라도 하고 싶은 마음에서였다고 스스로 핑계했지만 더 정직하게 말하자면 군대에 가는 극적인 상황을 이용해 그녀의 마음을 한 오라기라도 얻어보고 싶은 미련 때문이었을 것이다. 나는 수업을 하는 경희와 학생들을 창문 너머로 훔쳐보며 스스로 부끄러웠다. 그들은 자신을 바꾸기 위해, 그리고 나아가 이 세상을 바꾸기 위해 좁은 하꼬방에서 발버둥을 치고 있는데 나는 유치한 사랑의 감정으로 음험한 샛꾼처럼 어두운 골목을 서성거리고 있을 뿐이었다. 그대로 돌아설까 몇 번 망설이긴 했지만 그런 부끄러운 감정은 끝내 그녀를 만나고 싶은 마음을 이기지 못했다. 나는 추위도 잊은 채 창문 아래 쭈그리고 앉아 수업이 끝나기만을 기다렸다. 얼마나 지났을까, 마침내 수업이 끝났는지 학생들이 우르르 몰려나오는 기척에 나는 재빨리 골목 끝으로 몸을 숨겼다. 그들의 발자국 소리가 멀어지고 잠시 후, 경희가 밖으로 나왔다. 나는 반가운 마음에 담 뒤에서 나와 경희에게 다가가려고 했다. (2권, pp. 36~37.)
이제 이야기는 완전히 끝난 것인가? 나는 사라져가는 버스를 바라보며 울컥 목이 메었다. 경희의 위태로운 삶의 행로는 버스보다도 더 빠르게 내게서 멀어져가고 있었지만 내가 따라갈 수 있는 곳은 버스터미널까지였다. 그 사실에 나는 무력감을 느꼈다. 언젠가 우리는 다시 만날 수 있을까? 만난다면 그곳은 어디일까? 인천의 어느 공단 뒷골목, 그리고 강원도 전방의 쓸쓸한 버스터미널, 그리고 그 다음은? 언젠가 우리는 이날에 대해 이야기할지도 모른다. 우리가 술을 마셨던 장소가 삼겹살집이었는지 순댓국집이었는지 기억조차 희미해진 먼 훗날, 이미 오래전에 소실되어 버린 사랑의 감정을 기억해 내려고 애쓰며, 우리는 다시 술을 마시고 아무렇지도 않게 웃으며 싱거운 농담을 주고받을 수 있을까? 나는 한없는 허전함과 상실감에 귀대시간도 잊은 채 눈덮인 거리를 오랫동안 이리저리 헤매다녔다. (2권, pp.82~83.)
마 사장은 회한이 가득한 눈으로 삼촌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 꿈이 현실이 되고 나면 그것은 더 이상 꿈이 아니야. 꿈을 꾸는 동안에는 그 꿈이 너무 간절하지만 막상 그것을 이루고 나면 별 게 아니란 걸 깨닫게 되거든. 그러니까 꿈을 이루지 못하는 창피한 일이 아니야. 정말 창피한 건 더 이상 꿈을 꿀 수 없게 되는 거야. 그 때 내가 원한 건 네가 계속 꿈을 꿀 수 있게 해주는 거였어. 그래서 너를 홍콩에 보내줬던 거야.
그리고 마 사장은 잔을 들어 남은 술을 마저 입에 털어 넣었다. (2권, pp.107~108.)
(전략) 삼촌은 모아둔 노역대금으로 산 카스텔라 빵 다섯 개와 안티푸라민 뚜껑을 맞바꾸었다. 이에 감방 동료들은 그깟 연고 뚜껑을 카스텔라 다섯 개씩이나 주고 바꾸다니 제정신이 아니라고 놀렸지만 간호사의 얼굴이 그려진 작은 연고 뚜껑은 삼촌에게 부드러운 카스텔라보다 열 배, 스무 배 더 소중하고 달콘한 것이었다. (2권, p. 345.)
그런데도 불구하고 왜 누군가는 그 구원 없는 실패담을 읽는 걸까요? 그것은 불행을 즐기는 변태적인 가학취미일까요? 아니면 그래도 자신의 인생이 살 만하다는 위안을 얻기 위해서일까요? 나는 사람들이 소설을 읽는 이유가 실패에도 불구하고 계속 살아가야 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속에 구원의 길이 보이든 안 보이든 말입니다. 만일 손에 들고 있는 책이 좋은 소설이라면 독자들은 책을 읽는 동안 불행에 빠진 사람이 자기 혼자만이 아니라는 것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또한 그 불행과 실패 속에서도 여전히 구원을 꿈꾸며 꾸역꾸역 살아가는 사람이 자기 혼자만이 아니라는 사실 또한 깨닫게 될 것입니다. (2권, p. 371. '작가의 말'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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