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잃어버린 근대성들 (알렉산더 우드사이드, 너머북스, 2012.)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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잃어버린 근대성들 (알렉산더 우드사이드, 너머북스, 2012.)

Dog君 2015. 9. 2. 19:24



  제임스 팔레(James Palais, 1934~2006)라는 사람이 있다. 1950년대에 주한미군으로 근무했던 것을 인연으로 한국학 공부를 시작한 이래로 오랫동안 미국의 한국학계를 주도했고 존 던컨, 브루스 커밍스 같은 쟁쟁한 학자들을 길러내기도 했다. 사하라사막에 고비사막을 더하고 시베리아에 툰드라까지 곱한 수준으로 척박한 미국의 한국학계 사정을 생각하면, 그가 거둔 학문적 성과가 결코 적지 않다고 하겠다. 제임스 팔레가 했던 여러 주장 중 하나가 '한국은 역사적으로 노예제 국가'라는 건데, 이게 참 논쟁적인 주장이다. '노예제'라는 레토릭이 좀 자극적이기는 하지만 노비가 전체 생산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컸고 인구비율도 꽤 높았으며 귀족이나 양반층의 힘이 강해질수록 그 비율이 상승했던 것도 분명한 사실이니까 얼핏 들으면 맞는 말 같기는 하다. 하지만 그 주장은 곧바로 한국학계의 비판을 받았다. 지금이야 '노비'라고 하면 행랑채에 머물면서 집안일하고 논에 가서 일하는 정도의 이미지를 떠올리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솔거노비에 해당하는 거고, 주인과 독립된 가계와 생계를 유지한 외거노비는 사회경제적으로 볼 때 자소작농에 좀 더 가깝기 때문에 이 둘을 모두 '노비'로 퉁쳐버린 제임스 팔레의 주장은 다소 문제가 있기 때문이다.


  알렉산더 우드사이드가 '잃어버린 근대성들'에서 던지는 주장이 참 재미있다. 중국과 베트남, 한국에서 발견되는 과거제의 전통이 서구 근대에서 발견되는 능력 본위의 관료제 사회와 맞닿는 지점이 있다는 것이다. 사실 동아시아의 역사적 전통에서 뭔가 새로운 빛을 찾아보려는 서구 학계의 시도가 아주 새롭지는 않다. 60년대 이후 동아시아의 폭발적인 경제성장을 설명하기 위해 '유교'에서 뭔가 그 동력을 찾아보려고 했던 '유교 자본주의'론이라든지, 늦게는 아편전쟁까지 세계경제의 헤게모니를 동아시아가 쥐고 있었다는 캘리포니아 학파의 주장 같은 것들이 있었으니까.


  주장하는 사람의 문제의식은 이해하지만, 동아시아에 사는 사람 입장에서 그런 주장들을 막상 듣고 있자면 여러모로 김이 새는 것도 사실이다. 왜 자꾸 동아시아의 역사적 경험을 설명하는데 서구의 경험과 용어를 갖다 붙이는지도 잘 모르겠고(아 그놈의 '근대' 좀 없으면 뭐 어때서, 응?), 동아시아의 역사라는게 정말로 걔네들이 생각하는 그런 거였는지도 잘 모르겠다. 오히려 자기네들 보기에 좀 재미있어 보이니까 괜히 이것저것 수식어를 갖다 붙이는, 일종의 뒤집어진 오리엔탈리즘 아닌가 하는 의심까지 든다. 알렉산더 우드사이드의 주장도 비슷하다. 과거제의 전통이라는 것이 전무했던 서구의 입장에서야 과거제라는게 경탄의 대상일지 모르지만, 그 실상이 지금 우리가 말하는 '관료제'와 얼마나 떨어져 있는지를 아는 한국사람 입장에서는 일단 수긍하기가 어렵다. 아니, 수긍이 안 되는 정도가 아니라 아주 그냥 찹찹찹찹 다지는 수준으로 반박할 수도 있을 것 같다. 알렉산더 우드사이드가 한국사 전공자도 아니고, 그가 참고한 문헌도 대개가 영어로 출간된 2차 자료들 약간이었다고 하니 디테일에 얼마나 많은 구멍이 있을지 쉬이 짐작이 간다. 한국사의 디테일을 가지고 조목조목 반박하자면, 알렉산더 우드사이드가 그렇게 목놓아 주장했던 능력 본위의 사회가 어쩌고 관료제의 한계가 저쩌고 하는 이야기도 금방 빛이 바래고, 그러면 책의 결론도 자연스럽게 무너뜨릴 수 있다. 자 그러니까 이 책 이야기는 여기서 끝.


  ...이 당연히 아니지.


  아까 했던 제임스 팔레 이야기로 돌아가보자. 제임스 팔레의 노예제론을 반박하는 것은 쉽지만, 거기서 끝나면 그건 그냥 하나의 주장과 또 하나의 반박으로 이뤄진 가벼운 하나의 논쟁 정도로 끝나고 말겠지. 하지만 제임스 팔레의 노예제론을 통해 우리는 자연스럽게 '노예'와 '노비'의 차이가 무엇인지, 외거노비의 사회경제적 지위를 어떤 개념으로 정의할 것인지 등의 문제까지 고민하는 기회를 덤으로 얻을 수 있다. 어차피 지구별에 사는 지구인이라면, 한국의 역사적 경험이 다른 사회의 경험과 어떻게 다르고 비슷하고 같은지를 견줘보지 않을 수 없고, 그러자면 한국사의 경험을 어떤 개념으로 묶어낼지를 고민하지 않을 수 없다. 인도사학계가 '서벌턴'이라는 개념을 통해 인도사의 독특한 특징을 포착해 내고 트리컨티넨탈의 역사적 경험을 설명할 수 있는 길까지 열었던 것을 생각하면 되겠다. 그러니까 한국사 연구는 한편으로는 깊이깊이 파고 들어가면서 디테일을 보강하는 쪽울 지향하면서도, 또 다른 한편으로는 이걸 다른 경험들과 견줘보고 끼워맞출 수 있는 '모듈'로 만드는 작업도 필요하지 않을까.


  그러니까, 적어도 한국사를 공부하는 내게 있어서, 알렉산더 우드사이드의 주장을 반박하는 것에서 그냥 멈춘다면 그건 너무 무책임한 일이다. 한국사를 공부하는 사람이라면 응당 그 다음 질문까지 나가야 한다. "과거제에 기반한 능력 본위의 관료제 사회가 아니라면, 그럼 대체 뭐란 말인가?"라는 질문 말이다. 관료제 사회가 아니었다면, 세습귀족이 지배한 서구사회와 양반이 지배한 조선사회는 아무 차이가 없는 걸까.


  당연히 안 그렇다.


  조선의 지배엘리트가 의탁했던 지배이데올로기인 '유교'는 인간 개개인을 도덕의 실천주체로 보기 때문에 높은 덕성과 정치의식을 요구한다. '신'이라는 외부적 절대자에게서 권위를 빌어오는 서구의 그것과는 다르다. 그렇기 때문에 개인의 능력과 자질을 끊임없이 검증하기 위한 수단으로 과거제가 존속할 수 있었던 것이다. 백번 양보해서 과거제가 비록 허울뿐인 것이었다 하더라도, 과거제라는 제도 뒤에 숨어있는 그러한 사회적 전제는 동아시아의 주요한 특질 중 하나가 맞고, 그것을 어떻게 설명해 낼 것인지를 고민하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다.


  그런 점에서 알렉산더 우드사이드가 사용한, '관료제'라든지 '능력 본위의 사회' 같은 개념들은 "부적절하지만 불가피한inadequate and indispensable" 측면이 있다. 척박하기 그지 없는 미국의 한국학계 사정상 그 이상의 표현을 찾지 못했을테니까. 알렉산더 우드사이드의 주장을 생산적으로 받아내는 것은 한국학계의 몫이다. 다시 한 번 강조하건대 "네 말이 틀렸다"에서 끝나면 그건 무책임하다. 응당 "그게 아니라 이거다"라고까지 나가야 하고, "이거"가 무엇인지 설명할, 다음 책임은 한국학계에게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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