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og君 Blues...
가짜 팔로 하는 포옹 (김중혁, 문학동네, 2015.) 본문
1. 사랑! 연애!
차양준은 카페 입구에 서서 계속 촬영 장면을 지켜보았다. 송미의 몸이 가렸다가 보였다가 했다. 송미의 몸과 얼굴을 보려고 일부러 서 있는 위치를 바꾸지는 않았다. 조명기와 마이크 사이로 송미의 얼굴이 나타났다. 송미는 눈을 감고 있었다. 고통스러워 보이기도 했고 웃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송미가 눈을 떠서 차양준을 보았다. 두 사람의 눈이 마주쳤다. 송미는 입을 반쯤 벌리고 신음을 내뱉으면서 차양준을 보고 있었다. 차양준은 고개를 돌려야 할지 계속 보고 있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송미가 차양준을 보면서 환하게 웃었다. 그 순간 차양준은 자신의 머릿속 한 부분이 하얗게 변하는 걸 느꼈다. 흐릿하고 커다랗던 하얀색은 조금씩 작아지더니 단단하게 응축되었다. 차양준은 송미의 탁구공이 자신의 머릿속으로 들어온 것이라고 생각했다. 탁구공은 격렬하고 빠르게 움직였다. 똑, 딱, 똑, 딱, 규칙적으로 움직이다가 머리에서 뒷덜미를 타고 내려와 차양준의 심장 속으로 들어갔다. 차양준은 자신의 가슴에 손을 대보았다. 금방이라도 튀어나와 다른 곳으로 옮겨갈 것처럼 탁구공이 손바닥을 두드리고 있었다. 차양준은 손바닥으로 가슴을 지그시 눌렀다. (<상황과 비율> 中, p. 44.)
“난 처음으로 면도하는 날, 어른이 된 것 같았어. 아빠가 면도 거품을 빌려줬는데, 그걸 턱에다 바르니까 막 간질간질하더라. 아빠가 그때 했던 말도 생각난다. 우영아, 면도할 때 왜 거품을 바르는 줄 알아? 내가 그랬지. 깨끗하게 면도하려는 거 아니에요? 아빠가 뭐랬는 줄 알아? 아이야. 거품을 바른 곳은 반드시 면도기로 밀어줘야 한다는 뜻이다. 희 거품이 남지 않게 하는거, 그게 책임인 거야. 남자는 책임질 줄 알아야 한다는 뜻이다. 알겠냐.” (<픽포켓> 中, p. 68.)
편의점에 가면 윈저 12년산이 가장 쌉니다. 아마 2만 원 조금 넘을 겁니다. 하루에 한 병씩 마시기엔 가격이 만만치 않습니다만, 어중간한 맥주를 마시고 취하지 않는 것보단 낫습니다. 전 이상하게 소주를 마셔도 잘 취하지 않습니다. 맥주나 소주를 마시면 계속 마시게 되니까 어느 순간부터 윈저를 마시게 됐습니다. 윈저 12년산을 마실 때도 있고, 임페리얼을 마실 때도 있습니다. 몇 년산이든 하루에 한 병, 더이상은 마시지 않았습니다. 마실 수 없었습니다. 그나마 다행이죠. 한 병을 다 마시면 쓰러져서 잠들었으니까요. 물은 타지 않았고, 커다란 물잔에 마셨습니다. 물을 타거나 작은 잔에 마시면 향수 냄새가 잘 나지 않습니다. 뚜껑을 돌릴 때가 참 지랄 같습니다. 딸깍 하는 소리와 함께 뚜껑의 봉인이 해제될 때, 아, 이제 이 술을 환불할 수는 없구나, 라는 생각이 들 때, 그때가 제일 괴로습니다. 여러분들도 아시겠지만, 뭔가 잘못된 일을 저지르고 있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지 않습니까? 물론 첫잔을 마시면 그런 생각은 다 휘발되어 날아가지만요. 혀와 입천장에 불을 붙이며 위스키가 식도를 타고 넘어갈 때 저는 망가질 준비가 되어 있다는 다짐을 하곤 했습니다. 술을 마시면 거절당했을 때의 장면만 무한 반복됩니다. 그 여자가 제 앞에서 무표정하게 했던 말, 표정, 손짓, 웃음, 그런 게 계속 생각납니다. 여자는 저를 비웃고, 한심하게 바라봅니다. 저는 점점 작아지고 여자는 점점 커집니다. 어쩌면 그 여자는 예의바르게 행동하고 차분하게 말했을지도 모릅니다. 저는 기억이 잘 나지 않습니다. 술을 마시면서 떠올린 장면이 실제 같고, 나머지는 모두 휘발됐습니다. 비웃는 소리가 점점 크게 들리니까 술 먹는 속도가 점점 빨라집니다. (<가짜 팔로 하는 포옹> 中, pp. 103~104.)
규호는 정윤이 가고 난 의자를 계속 보았다. 정윤이 누르고 있던 의자 등받이의 천이 아주 천천히 되살아나는 모습을 보고 있었다. 규호는 생맥주와 소주 한 병을 주문했다. 소주 두 잔 정도의 양을 생맥주에다 부었다. 의자 등받이의 천은 아직도 복구되는 중이었다. 규호는 소주잔에도 소주를 따랐다. 정윤이 앉아 있던 자리의 커피잔을 옆으로 치우고, 거기에 소주잔을 놓았다. 규호는 혼자 술을 마실 때면 늘 그러곤 했다. 거기 누가 있기라도 한 것처럼, 누가 있었으면 좋겠다는 마음으로, 그러곤 했다. 규호는 소주를 탄 생맥주를 마셨다. 의자의 천을 계속 보았다. 계속 보니 거기 누가 앉아 있는 것 같기도 했다. 어디선가 바람이 불어와서 땅콩 껍질이 허공에 날렸다. 자신의 몸도 공중을 붕 떠오르는 것 같았다. 규호는 양손으로 맥주잔을 꼭 쥐었다. (<가짜 팔로 하는 포옹> 中, p. 122.)
류영선은 강당 구석에서 기묘한 자세로 엎드려 있었다. 두 손을 모아 앞으로 뻗고 이마를 땅에 닿게 한 채 무릎 꿇고 있었다. 기도하는 자세처럼 보이기도 했고, 요가의 한 동작처럼 보이기도 했다. 정민철은 다가가지 못한 채 멀리서 류영선을 보았다. (<뱀들이 있어> 中, pp. 144~145.)
휴대전화기 배터리가 9퍼센트 남아 있을 때, 나는 그녀에게 내가 만든 애플리케이션을 보여주었다. 혹시 모를 비상사태, 만에 하나라도 갑자기 전화 신호가 잡힐 때를 대비해서 배터리를 아껴야했지만 나는 희망을 믿지 않았다. 갑자기 전화 신호가 잡히면 어디로 전화를 해야 할까, 생각하고 고민하다 9퍼센트의 시간을 다 소비해버리고 말겠지. 그녀는 4년의 기록을 재미있어했다. 출시가 되었다면 자신도 반드시 샀을 거라는 말도 덧붙였다. (<보트가 가는 곳> 中, p. 219.)
사랑을 시작하는 사람들의 설렘에는 앞날에 대한 기대가 들어있다. 설레며 고백하는 사람은 앞에 앉은 사람과 겪게 될 수많은 경험을 짐작하고 떠올리며 미리 행복해한다. 막연한 기대는 꿈꾸는 사람의 특권이다. 다가올 시간을 가늠해보는 일, 행복이라는 덩어리의 무게를 미리 재어보는 일, 그게 사랑의 시작일 것이다. 내가 만들었던 4년 일기 애플리케이션 역시 사랑하려는 사람들, 꿈 꾸려는 사람들을 위한 것이었다. 애플리케이션을 만들 때는 그런 생각을 하지 못했다. 내가 만든 애플리케이션의 ‘편리’가 누군가에게는 ‘사랑’일 수도 있음을 이제는 알게 됐다. 그녀를 만난 다음 나는 꿈을 꾸기 시작했고, 미래에 대한 막연한 기대를 가지기 시작했다.
꿈이나 미래 같은 단어들은 한입에 먹기엔 버거운, 세상에서 가장 큰 복숭아 같다. 일반 베어 물면 달콤한 즙이 새어나오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덩어리에 압도당하고 만다. 달콤하던 즙은 점점 시큼한 맛으로 변하고, 복숭아는 점점 더 커지는 것 같다. 며칠 동안 그녀와 함께 걷고 함께 멈춰 서고, 울다가 때로는 웃기도 하고, 잠들었다가 서로 껴안고, 입을 맞추고, 잠들었다가, 또 일어나서 걸어가던 어느 순간, 그녀의 옆모습을 보면서 죽음을 떠올렸다. 이제 어쩔 수 없이 나는 그녀의 죽음에 영향을 받을 것이고, 그녀는 나의 죽음에 영향을 받을 것이다. 그 사실을 깨닫자마자 모든 시간이 아득하게 느껴졌다. (<보트가 가는 곳> 中, pp. 222~223.)
(전략) 여자 운전자는 건너편에서 오는 자동차가 없다는 것을 확인하고 핸들을 돌렸다. 신호등은 다시 현수의 편이었다. 자동차가 움직이는 순간 보행자 신호로 바뀌었다. 현수는 파란불을 보면서 발을 내디뎠다. 자동차는 부드럽게 반원을 그리며 현수 가까이로 왔다. 빨리 유턴을 해야 한다는 운전자의 마음은 많은 것을 보지 모샇게 하는 법이다. 현수가 서 있는 위치는 운전자의 심리적 사각지대였고, 운전자가 무방비 상태로 들어설 지옥문이었다. 현수는 천천히 움직였다. 여자는 현수를 보지 못하고 마지막 유턴 과정에서 액셀러레이터를 밟았다. 현수는 자동차가 움직일 수 이쓴ㄴ 방향을 미리 읽고 있었다. 자동차의 크기와 유턴 시작 지점을 알면 어디쯤에서 자신과 만날지 정확히 예측할 수 있었다. 대부분의 보험단들은 자동차의 측면에 부딪친다. 대장도 그걸 강조했다. 현수는 그러지 않을 생각이었다. 측면에 부딪쳐봤자 단순한 타박상에 그칠 것이다. 현수는 할 수 있다면 자신을 모조리 분리시키고 싶었다. 나사들을 하나씩 풀어서 모든 부품들을 늘어놓고 처음부터 다시 짜맞추고 싶었다. 그럴 수 있다면 그러고 싶었다. 다시 짜맞출 수 없대도 일단 해체하고 싶었다. 삐걱거리는 육체를, 가누기 힘들 정도로 무거워진 심장을 부숴버리고 싶었다. 고통이 자신을 새롭게 만들어줄 것 같았다. 어마어마한 고통이 폭설처럼 다가와 누추한 모든 마음을 덮어줄 것 같았다. 모든 게 텅 비길 원했다. 현수는 끔직한 고통을 바랐다. 죽고 싶은 마음은 없었지만 되돌릴 수 없는 고통이길 바랐다. 현수에게 자동차가 다가왔다. (<힘과 가속도의 법칙> 中, pp. 260~2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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