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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畵나부랭이

난 그녀와 키스했다 (Toute premiere fois)

Dog君 2015. 8. 18. 15:40



1-1. 대중문화의 가장 중요한 미덕이 '다양성'이라지만, 작금의 대중문화가 얼마나 '다양'한지는 의문의 여지가 있다. (좀 많이 있다.) 특히 여름철 극장가라는게 대개 그런 식인데 헐리우드와 충무로에서 쏘아올린 블록버스터들이 전국에서 뻥뻥 터지다 보니까 어지간한 결심 아니고서는 그 틈에 낀 작은 영화들을 보기가 참 어렵다. 가장 많은 인구와 극장이 몰려있는 서울에서도 여전히 작은 영화를 보기란 쉽지가 않다.


1-2. 틈새는 중심이 아니라 변방에 있는 법이다.30만 남짓하는 인구의 작은 도시인 내 고향 진주는 아무래도 발전가능성이라고는 별달리 보이지 않는 작은 도시지만, 외려 그 덕에 거대 자본의 시야에서 벗어난 모양이다. 거대 자본이 비집고 들어와서는 수지타산 맞추기 어려워보이는 덕분인지, 최근 들어 진주에 작고 예쁜 가게들과 사람들과 움직임들이 많이 생겨나는 것 같다. (좋은 일이다.) 진주에 있는 '진주시민미디어센터'도 그런 맥락에서 이야기할 수 있을 것 같다. 살짝 여담을 섞자면, '진주시민미디어센터'라는 이름을 처음 들은 것이 한 10년쯤 전인 것 같은데 그 때 거기 활동가라는 분(어디 대학생이랬다)이랑 잠깐 이야기를 했던 적이 있다. 꽤 미인이셨는데, 머리는 까까머리를 하고 계시더라고... 음... 마 암튼 '인디씨네'라고, 진주시민미디어센터에서 운영하는 독립영화 전용상영관이 있다. 전부 해서 40석이고 금요일과 토요일에만 운영하지만, 그래도 이만하면 어디냐 싶다.


1-3. 원래는 '밀양아리랑'을 보려고 했는데, 어쩌다보니 이 영화까지 보게 됐다.




2. 결론부터 말하자면, 꽤 재미있다. 으레 프랑스 영화라고 하면 떠오르는 난해하고 까다롭고 어렵고 뭐 그런거 없다. 오픈마인드...까지도 아니고 그냥 보통 수준의 이해심 정도만 가지고 있으면 그냥 낄낄대면서 볼 수 있다. 물론 마지막 20분 정도는 영 아니올시다...였지만 그래도 전체적으로 평타 이상은 친다. 이성과 사랑에 빠진 동성애자라니, 이만하면 소재도 괜찮잖아?



3-1. 제레미와 앙투안은 성적 소수자이지만, 소수자이기 때문에 차별받거나 억울할 일이 없다. 제레미는 성공한 사업가이고 앙투안은 전도유망한 의사니까. '동성애자'라는 정체성과는 아무 상관 없이, 그들은 사회적으로는 충분히 존중받고 있으며 그 누구의 편견에도 시달리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게이인 제레미가 갑자기 여성과 사랑에 빠진다 해도, 그 서사는 정체성의 혼란과는 별 상관 없이 단지 보통의 연인들이 만나고 헤어지는 이야기처럼 흘러가는 것이다.


3-2. 그런 면에서 주인공인 제레미에 대한 부모의 반응, 좀 더 구체적으로는 "번지르르한 속물 결혼은 반대지만 용감한 게이 결혼은 찬성"이라는, 제레미의 어머니의 대사가 인상적이다. 그 대사를 들으며, '소수자가 된다는 것'이 어떤 면에서는 무척이나 속물적인 것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니까 제레미의 어머니에게 아들이 커밍아웃을 했고 그 결과 번듯한 남자와 결혼까지 하게 된 것은, 자신이 "번지르르한 속물"이 아니며 스스로가 넓은 이해심을 가진 사람임을 보여주는 중요한 증표인지도 모른다. (오히려 제레미의 누이는 그것때문에 역으로 박탈감을 느끼며 성장했다.)



3-3. '내가 소수자라고 말하는 것'과 '내가 소수자인 것'은 결코 같지 않다. 제 삶의 안락함은 하나도 포기하지 않으면서 소수자에 대한 '열린 자세' 혹은 '연대'를 말하는 것이 대체 얼마나 설득력이 있을까. 세상이라는 게 약간 제로섬 같은 느낌이 있어서, 내가 누리는 것은 대개 또다른 누군가가 손해본 딱 그만큼인 경우가 많다. 그러니까 내가 가진 것을 아무 것도 내어놓지/포기하지 않고서, 혹은 적어도 불편해하지도 않으면서 저절로 세상이 나아지는 것이 아니란 말이다.



4-1. 대한민국에서 정치가 소비되는 방식도 여기서 그다지 멀지 않은 것 같다. 아니, 좀 더 정확하게 고쳐쓰자면 "SNS에서 정치가 소비되는 방식이 여기서 그다지 멀지 않은 것 같다." 정치적으로도 올바를 뿐만 아니라 완벽한 사회진보를 위해 조금의 여지도 허용하지 않는(그래서 거기서 조금이라도 벗어나면 그게 누구든 수구보수꼴통과 아무 차이 없다는 지혜를 갈파하시는) 위대한 사상가들이 가득한 페이스북 타임라인에서, '정치'란 대체 무엇인가. 그것이 혹여 자기 지식수준과 사회의식을 과시하는 사회적 딸딸이는 아닐랑가 모르겠다.


4-2. 물론 한국 사회에서 지적으로든 사회적으로든 제대로 된 이야기와 토론은 여전히 부족하다. 허영이든 뭐든 '소수자'에 대한 관심은, 없는 것보다는 있는 것이 훨씬 낫다. 나도 알고, 전적으로 인정한다. 그렇기 때문에라도 계속 되물어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진보주의자인 당신은 당신 주변을 얼마나 진보시켰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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