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og君 Blues...

디 마이너스 (손아람, 자음과 모음, 2014.)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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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 마이너스 (손아람, 자음과 모음, 2014.)

Dog君 2015. 9. 29. 18:36



1. 세상을 바꿀 수 있을 거라는 결기를 품었던 적이 잠깐 있었다. 얼마 안 되는 짧은 시간이었고 그 이후로 그보다 훨씬 긴 시간이 지났다. 그때 가졌던 결기도 조금씩 깎여나가고 지금은 남은 것이 얼마 안 되지만 그 중 얼마라도 남겨보려고 아둥바둥한다. 처음에는 '아이, 이게 뭐얔ㅋㅋ'하면서 손발 오그라드는 마음이었지만, 책장 덮을 즈음에는 울컥했다.


2. 어떤 사람은 (그때부터) 냉소적으로 비웃고, 또 어떤 사람은 그런 일도 있었던가 하는 눈으로 바라보지만, 그건 다 엄연히 있었던 일들이다. 희화화하지도 낭만화하지도 않은 채로 다른 사람의 글을 빌어 그날들을 돌아보고 싶었던 작은 욕심을, 추석날 고향에서 돌아오는 버스에서 채웠다. 후일담 문학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가까운 시절이지만, 내가 보고 겪었던 것들과도 많은 것이 겹쳤다. 내가 두고 온 것들과 나를 두고 간 것들이 떠오르는 시간이었다.


ps. 처음에 나오는 계보도는... 내가 아는 거랑은 좀 다른데? ^^


  새내기 환영회도 이 버들골에서 열렸다. 잔디밭에 원형으로 빙 둘러앉은 선배들은 새내기가 한 명씩 가운데로 나가 자기소개를 하면 "노래! 노래!"를 연호했다. 선곡은 뻔했다. 조용필, 김광석, 김현식. 세상의 가치 있는 문화는 모두 1980년대와 함께 사라진 것처럼. (p. 19.)


  나는 주체사상의 정서적 호소력이란 것에는 중독되지 않았지만 스타크래프트에는 단박에 중독됐다. 주체사상은 머릿속에서 부스러지 한 점 없이 밀려났다. 그날 밤 나는 일꾼을 착취해 무지막지한 해병대를 만들었고 전투 중에 마약을 주입하며 적을 피떡으로 으깨 물리쳤다. 12세 이상 '이용가'이며 국방부에서는 프로게이머를 특채로 뽑아가는 게임이다. 진우와 내가 기진맥진한 몸을 끌고 나왔을 때는 세 시간하고도 스무 시간이 더 지난 뒤였다. (후략) (p. 63.)


  논물 위로 하얀 오리들이 줄지어 떠다녔다. 입으로 해충을 잡아먹고 항문으로 비료를 뿌린다고 했다. 우리가 '논할머니'라고 부른 논주인이 허벅지까지 올라오는 고무장화를 나눠주었다. 우리는 장화를 당겨 신고 첨벙거리며 물속에 들어갔다. 벼 사이에 섞여 자라는 '피'라는 잡초를 솎아내는 게 해야 할 일이었다. 간단한 일이라는데 간단하지가 않았다. 피와 벼는 똑같이 생겨서 눈으로 구분할 수 없었다. 논할머니가 둘의 차이를 설명해주었다. 뉘어서 햇빛을 비스듬히 반사시키면 줄기를 따라 한 줄로 난 옅은 실금이 보이는데, 벼와 피는 이 실금의 색깔이 미묘하게 다르다는 것이었다. 논할머니가 시범을 보였다. 경수는 논할머니가 뽑아낸 피를 손에 들고 벼 줄기 옆에 슬쩍 대어보며 중얼거렸다.

  "혹시 내가 색맹인 거야?" (p. 71.)


  연합 사수대장은 전투 경험이 가장 풍부한 대석 형이 맡았다. 그는 대열 가운데로 나와 짧은 연설을 했다. 마치 군인처럼 말하고 있었다. 어깨에는 선배에게 물려받은 낡은 야구방망이를 걸친 채로. 그는 기숙사에서와는 전혀 다른 사람으로 보였다. 연설이 끝난 뒤 나는 그에게 다가가 불안을 고백했다.

  "난 이거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어."

  "여기 사수대로 태어난 사람이라도 있는 것 같아?"

  대석 형은 차갑게 대꾸했지만 곧 나를 안심시키는 말을 덧붙였다.

  "그냥 저지선에서 쇠파이프로 시간을 좀 벌어주다가 내 명령에 따라 도망치면 돼. 저번처럼 위험한 일은 아니야."

  "알았어. 그냥 휘두르기만 하면 되는 거지?"

  "횡스윙은 하지마. 옆사람이 맞을 수도 있으니까. 위에서 아래로 내리치기만 해. 도끼로 나무를 내리찍는 기분으로."

  말을 마치고 그는 내 어깨를 토닥였다. (pp. 162~163.)


  진압 개시 명령이 떨어졌다. 전경들은 열을 무너뜨리고 앞으로 튀어나왔다. 곤봉을 머리 위로 쳐들고 동시에 어지러운 함성을 내질렀다. 쇠파이프를 내려놓고 도망갈 수만 있다면, 등 뒤에서 대석 형도 응전 명령을 내렸다. 외마디였다. 죽여!

  대석 형이 앞장서서 야구방망이를 어깨 위로 들고 달려나갔다. 나는 쇠파이프를 마구 휘둘렀다. 거기에 무엇이 걸리는지는 상관이 없었다. 허공이든 방패든, 혹은 인간의 머리통이든. 방패를 때렸던 건 방패가 가장 가까웠기 때문이었다. 전경들은 엉덩이를 뒤로 빼고 낚싯대처럼 우리를 향해 방패를 내밀었다. 나는 적이 다가오지 않았으면 했다. 적이 다가오지 못하게 막아야 했다. 나는 적이 무서웠다. 적의 딱딱한 곤봉. 적의 날카로운 방패. 나를 집어삼키고 조각 낼 물건이라면 무엇이든지. 적도 내가 휘두른 쇠파이프가 무서웠을 것이다. 적도 내게 다가오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맞붙어야 했다.

  (중략)

  저림이 팔에서 어깨까지 올라왔다. 몇 분인지 몇십 분인지 모른다. 허공을 닥치는 대로 가르는 것만이 내가 할 수 있는 일이었다. 누군가 내 어깨를 거칠게 잡아챘고 나는 그의 머리통을 박살 낼 뻔했다. 진우였다.

  "뭐 해! 도망쳐!"

  그제야 귀와 눈이 소리와 빛을 되찾았다. 주변에 아군은 진우와 나 뿐이었다. 등을 보이고 내빼는 동료들의 모습이 멀리 보였다. 진우는 퇴각 명령을 듣지 못한 나를 구하려고 돌아온 것이었다. 쇠파이프를 땅에 내던지고 진우를 따라 헐레벌떡 뛰었다. 김우중의 정원을 가로지를 때처럼. 우리의 싸움은 8할이 뛰는 것이었다. 뒤돌아볼 용기가 나지 않았다. 뒤꿈치를 밟을 거리에서 누군가 곤봉을 들고 쫓아오고 있을까 봐. (pp .167~168.)


  진우가 구속되어 있던 동안 미쥬와 나는 드문드문 얼굴을 보았다. 사흘마다. 그러다 일주일마다. 우리 두 사람은 서로를 돌보기에는 너무 시급하고 절박한 마음의 상처에 각자 시달리고 있었다. 가까워지기는 어렵지만 멀어질 때는 가속이 붙는다. 그걸 굳이 숙려 기간이라고 불러야 할까? 미쥬가 부모님 집 근처 카페에서 낯설기 짝이 없는 방식으로 이별을 통보한 날은 우리가 한 달 가까이 얼굴을 못 본 때였다.

  "나 교환학생으로 핀란드에 갈 거야."

  담담한 목소리로. 사랑하는 사람이 아닌 옛 친구에게 근황을 설명하듯이. 명백하게 이별의 통보였다. 하지만 너무 낯설어서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했다.

  "어디?"

  "헬싱키 대학" (pp. 316~317.)


  졸업 마지막 학기에는 공강 시간의 대부분을 혼자 보냈다. 도서관에서 졸업논문을 썼고 쉬는 때는 인문대학의 연못 앞 벤치에 앉아 시간을 때웠다. (후략) (p. 495.)


  진우의 길은 나와 엇갈렸다. 평범한 세상으로 뛰쳐나간 건 나였다. 진우는 학생운동을 포기하기는커녕 전우의 시체처럼 사회 바깥까지 질질 끌고 나왔다. 사회진보연대에 들어간 진우는 지난 몇 년간 백혈병에 걸린 반도체 공장 노동자들의 편에 서서 삼성전자와 싸웠다. 화가 나면 선글라스를 벗어 들고 가늘게 뜬 한쪽 눈으로 섬뜩하게 째려보는 '애꾸눈'은 이미 경찰들 사이에서도 유명한 존재가 되었다.

  미쥬의 눈썰미가 옳았던 것이다. 미쥬는 우리 정파의 미래가 진우에게 걸렸다고 말했다. 진우는 우리 정파가 아니라 운동권의 미래를 어깨에 걸머졌다. 전우들은 싹 전멸하거나 전장 바깥으로 달아났고, 어둑한 PC방에서 밤새워 스타크래프트 하길 즐기던 창백한 얼굴의 공대생 한 명이 홀로 남았다. 그렇게 모두에게 잊힌 채로 그는 외로운 걸음을 뚜벅뚜벅 이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지나간 모든 일, 그 모든 일이 진우라는 상속인 한 명을 키워내기 위한 거대한 시험이었던 셈이다. 오직 진우만이 그 시험을 통과했다. 오직 진우만이.

  공학도인 진우가 삼성전자와 맞서 싸우는 동안, 인문학도인 나는 무얼 했는가? 나는 삼성전자를 위해 일했다. 해마다 달력의 행사처럼 백혈병 환자가 발생하는 반도체 공장에서 만들어진 물건을 열심히 세상에 알렸다. 세계의 부조리를 거칠게 꾸짖던 손으로 세계 최고의 제품을 칭찬하는 유려한 문구를 섰다. 그런 나에게 진우는 실망하지 않았다. 아이처럼 좋아했다.

  "그거 참 잘됐다. 너 우리 후원 좀 해줄래?"

  "삼성전자 홍보실 직원한테 돈을 받고 싶냐? 진심으로?"

  "삼성전자 홍보실에서 나온 돈으로 삼성전자의 목을 조르는 것만큼 의미 있는 일이 세상에 어디 있겠어, 안 그래?"

  한참 동안 넋 놓고 웃었다. 진우다운 발상이었다. 확답은 하지 않았다. (pp. 519~5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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