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og君 Blues...
조용한 전환 (후쿠시마 미노리, 교육공동체 벗, 2015.) 본문
1. 3.11은 나에게도 충격적인 사건이었다. 유학 가보겠답시고 되지도 않게 영단어를 끄적이던 때였는데, 내가 결국 영어 공부를 접고 유학 꿈까지 접었던 것에 3.11도 한몫했다고 할 수 있겠다. 오늘 죽을지 내일 죽을지 모르는데 이렇게 피똥싸면서 공부하는게 다 무슨 소용이람, 하는 생각이 들었거든.
그런데, 이번 지진 재해를 계기로, 저온세대로 불리는 청년 세대들 중 꽤 많은 사람들이 '지금이 아니면 할 수 없는 것'과 진검승부에 나섰다. 그들에게 공통적으로 보이는 점은, '언제 지진 재해가 일어날지 알 수 없다. 그러힉 때문에 하고 싶은 것을 하자'라는 발상의 전환이다. 거기에는 사회적 지위나 돈에 구애되지 않는 삶의 방식도 전제가 되어 있다. (p. 48.)
2-1. 그보다 꼭 10년 전에 일어났던 9.11이 (어이쿠 꼭 6개월 차이네;;) 우리가 그간 알아왔던 어떤 한 세계의 종언이었던 것처럼, 3.11 역시도 많은 것을 변화시켰다. 어떤 사람은 탈원전을 외쳤고, 또 어떤 사람은 개발시대의 종언을 말했으며, 또 어떤 사람은 국가의 무능함을 발견해냈다.
2-2. 그와 별개로, 일본 사회의 변화 그 자체도 퍽 흥미로운 탐구 대상이다. 예전에 읽었던 '한중일 인터넷 세대가 서로 미워하는 진짜 이유'처럼, 일본 사회와 한국 사회가 어딘지 모르게 닮은데가 있어서 일본 사회를 보면 한국 사회에 대한 의외의 통찰을 얻을 수 있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나는 3.11을 전후 70년의 사회 구조, 삶의 방식과의 결별로 보는데, 책에서 이야기하는 3.11은 2011년 3월 11일에 발생한 동일본대지진이라는 사건과 반드시 인과관계를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다. 이 책에서 다룬 청년들의 목소리와 실천들은 시간적으로는 2011년 이전에 시작된 것들이 많다. 그러니까 3.11 이전부터 일본의 청년들은 이 사회로부터 무언가 채워지지 않는 갈증 같은 것을 느껴 왔고, 조금씩 다른 사회, 다른 삶의 방식으로 이행하려 하고 있었는데, 그런 움직임이 마침 3.11을 만나면서 시대적, 사회적 맥락을 획득한 것 아닐까? (pp. 13~14.)
3. 사실 일본 사회의 변화, 특히 청년 세대의 변화를 다룬 책은 서가에 차고 넘친다. 이 책에서도 허다한 책들을 인용하고 있고... 사실 거기에 비하면 아직 한국 사회에 대해서는 조사의 깊이가 좀 얕지 않나 하는 생각도 있다. 한국의 세대론은 크게 두 가지 정도 갈래로 전유되는 것 같은데, 저임금과 고용불안에 시달리는 청년 세대의 열악한 삶에 대한 고발 하나와 보수정치세력이 노동계급을 갈라치기 위한 수단으로 써먹는 나머지 하나(임금피크제;;;).
4. 그러다보니 약간 답답한 게, 이 이야기들 속에서 청년은 늘 '(불쌍하니까 우리가 도와줘야 하는) 객체'로만 운위되는 것은 아닌가 하는 걱정이 살짝 든다는 것이지. 이렇게 이야기를 풀면 문제가 뭐냐면, 예컨대 '일베'를 그냥 잘못된 이데올로기에 현혹된 방구석 찌질이 정도로만 이야기하는 식이 되어서 진짜 해법과는 영 멀어지는 거 아닌가 싶은 거다. 아니 무슨 뭐 단체로 몽환약을 멕인게 아닌 이상은, 일베에 접속하고 글 쓰고 퍼나르고 하는 것도 결국에는 제 의지로 하는 일들 아니냔 말이다. 걔네들이 거기에 접속하고 글쓰고 퍼나르고 하는 이유가 대체 뭐냐고, 난 그게 궁금하단 말이다. 반대로, 저임금과 고용불안에 시달리는, 맨날 불쌍하게만 그리는 그 아이들은 그냥 절대빈곤선 바로 위에서 허덕이는 가난한 청년일 뿐이란 거냐. 설마 걔들은 아무런 생존 전략 없이 매일매일 눈물로 베갯닢을 적시며 살고만 있는 건가. 그럴리가 없잖아. (피식)
5. 상황이 바뀌었다면, 그 바뀐 상황에서 젊은이들이 선택하고 있는 건 대체 뭘까. 이 땅에 사는 젊은이들이 하루 24시간 내내 알바에 찌들어 패배감에만 젖어있지는 않을 거 아이냐. 걔네들이 저 나름대로 찾는 탈출구든 해방구든 뭐든 있을 거 아니냐. '야, 이게 너네들이 추구해야 될 세상이야, 이런게 해방이라고!'라고 꼰대들이 미리 정해놓은 해답이 아니라, 걔네들이 실제로 선택할 수 있고, 선택하고 있는 것들이 뭐냐고!!!...라는 궁금증에 이 책이 어느 정도 답을 주더라는 거. 그러니까 이 책에서 다루고 있는 취업활동, 결혼활동(취집), 제로엔하우스, 셰어하우스 등등의 일들은 지금 혹은 가까운 시일 내에 한국 사회에서도 발견될 수 있는 것들이고, 그래서 그것들을 한국 사회와 겹쳐 읽는 재미가 있다.
(전략) '좋은 학교 졸업 → 좋은 회사 취직 → 행복한 인생'이라는 라이프 사이클의 신화 역시 붕괴되었고, 이것을 대체할 만한 것은 아직 오지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 고이즈미 정부가 추진한 신자유주의적인 경제, 사회 정책은 격차사회를 불러왔고, 한 사람을 규정하는 모든 관계성은 돈을 매개로 한 것으로 한정되었다. 특히 청년들은 더더욱 '살기 힘든' 상황으로 내몰렸다. 때문에 피해 지역, 이른바 '비일상적 공간'만이 청년들에게 동기를 부여하고, 분발시키는 조선이 된 것이다. 그들에게 피해 지역이란, 사회, 개인 모두에게, 지금까지 존재해 왔던 것들이 완전히 붕괴된 '제로 지점', 말하자면 삶의 재출발 지점으로서 포착되었던 것은 아닐까? 피해 지역으로 향했던 청년들과 한순간 모든 것을잃어버린 피해 지역의 사람들은 같은 제로 지점을 공유했다고 할 수 있다. 이들은 더 이상 서로의 학력이나 사회적 지위 등 개인적인 속성을 묻지 않고 '순수한 관계성'을 구축해 나갈 수 있었다. "잘 알지도 못하는 누군가를 위해서 도쿄로부터 발걸음을 옮긴 것이, 지역 주민들을 기쁘게 해 준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나가이 씨의 이야기는 순수한 관계에 대한 기대를 잘 드러내 준다. (pp. 44~45.)
(전략) 셰어하우스에 사는 청년들에게서 관계성을 구축하려는 지향을 확인할 수 있다. 셰어하우스의 매력은 이미 만들어진 공간이나 관계성에 자신의 몸을 맡기는 게 아니라, 삶의 공간과 관계성을 그곳에서 처음 만난 동료들과 함께 만들어가는 것에 있다. 태어나서 자연적으로 형성된 관계로부터 해방된 공간 가운데 혹은 대등한 관계성 가운데에서만 얻을 수 있는 행복감, 안도감을 셰어하우스는 제공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지진 째 볼런티어 활동을 하던 청년들이 현지 사람들과의 교류에서 기대했던 점이기도 하다. (p. 100.)
6. 물론 저자는 이런 움직임들의 한계 역시 뚜렷히 인지하고 있다. 현실정치에 가닿지 못하는 한 찻잔 속의 태풍으로 멈추는 경우가 얼마나 많았는지, 이제는 굳이 입 아프게 더 말을 보태고 싶지도 않다. 하지만 저자는 그것마저도 우리의 선입견 때문은 아닐지 되묻는다. 작금의 일본 청년들이 하는 실천들은 '정치'를 운위하는 방식 자체를 바꾸고 더 나아가 '정치'라고 하는 것의 개념 자체를 흔들고 있는 것은 아닌지 물어보는 것이다. 그러니까 푸코가 우리 신체 하나하나가 정치의 실천되는 말초지점이라고 보았던 것처럼, 그냥 우리 하나하나가 대안적 정치를 실천하면 말단에서부터 정치와 권력은 균열하고 파열하는 것일테니까.
(전략) 그런데 관점을 바꾸어 보면, 그들 자신이 전혀 느끼지 못하고 하는 행동, 몸짓 그 자체가 후기 근대의 새로운 운동의 존재 방식을 구현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무기력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는 니트 청년들의 일상 행위를, 기성세대가 끝없이 추구해 왔던 '상류 지향'에 대한 거부이자 기존 사회에 대한 일종의 소극적인 저항으로 파악할 수 있지 않을까. (p. 134.)
7. 이러한 논리 흐름은 나에게는... 당연히 불만족스럽다. 미안하지만 청년들이 '정치'를 운위하는 방식은, 그냥 '방식'일 뿐이니까. 그 '방식'이 곧 내용을 말해주는 것은 아니니까. 그 '방식'에 어떤 '내용'이 담길지는 아무도 모르는 것이다. 뭔가 참신해보인다고 해서 그게 다 좋은 건 아니지 않을까. 인터넷의 하위문화적/탈권위적 성격이 '일베'의 중요한 뿌리 중 하나라고 보는 나로서는 인터넷 문화와 젊은이들에 대한 이런 시선이 그냥 또 하나의 낭만주의는 아닌가 싶어서, 영 마뜩찮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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