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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과 기독교 (윤정란, 한울아카데미, 2015.)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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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과 기독교 (윤정란, 한울아카데미, 2015.)

Dog君 2016. 2. 1. 15:43



1-1. 책이 책인만큼 신앙고백을 먼저 해야 될 것 같다. 대대로 우리 집안은 불교든 기독교든 종교와는 무관하게 살아온 집안이었다. 사실은 무관한 정도도 아니고 의식적으로 거리를 두는 편에 가깝다. 할머니는 에이 교회쟁이들...하시면서 일주일 중에 하루를 교회에 꼬박꼬박 투자하는 것을 무척 못마땅해하셨고, 젊은 시절에 잠시 성경공부에 빠져들기도 했다는 아버지는 제사 안 지내는 것이나 '하나님 아버지' 같은 개념들에 대한 거부감을 끝내 접지 않으셨다. 그런 집안에서 자랐으니 나도 비슷하다. 성탄절 즈음해서 군것질거리 나눠준다는 말에 동네에 있던 교회에 잠시 기웃거렸던 정도를 제외하면 교회와 나는 대체로 무관하다. 음... '신앙고백'을 쓴다고 했는데 막상 쓰고 보니 이건 '신앙이 없다는 고백'이네.


1-2. 한편으로 나는 유신론자이기도 하다. 동양인의 우주관처럼 세상이 하나의 흐름 혹은 유동하는 기(氣)의 세계라는 점을 긍정하면서도 어딘가에 절대적인 존재 혹은 가치 같은 것이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을 막연하게나마 한다. 다만 그것에 의지하지 않을 뿐.


2-1. 목사인 김진호가 쓴 '시민 K, 교회를 나가다'라는 책은 "신자들이 교회를 떠나기 시작했다"라는 말을 인용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양희송이 쓴 '가나안 성도, 교회 밖 신앙'이라는 책도 그와 비슷하게 한국 기독교의 교회 이탈 현상과 한국 기독교의 위치를 비판적으로 분석하고 있다. 여의도순복음교회의 1년 헌금이 서울시예산을 넘니 안 넘니 하는 이야기가 나올 정도로 한국 기독교의 영향력은 어마어마하지만 또 그만큼 교회가 가진 이면도 크다. 하긴 이미 17년 전에 이미 이런 글이 나왔으니까.


기독교인임을 자처하는 내가 나라가 시끄러울 만큼 못된 짓을 한 인물이 나오기만 하면 "또 교인이군"하는 게 버릇이 되고 말았으니 정말이지 하느님께 민망할 따름이다. 좌우간 저 옛날 부천서에서 여대생 취조하는 데 희한한 도구를 사용한 문귀동 집사로부터 빨갱이 대통령을 막는답시고 바람을 일으키다 잡혀 들어가 오늘도 성전에 성전을 거듭하고 있는 권영해 장로라든가 소싯적부터 오로지 대통령이 되기만을 간구한 끝에 진짜로 대통령이 되어 끝내 나라를 부도 낸 김영삼 장로를 비롯, 국가적인 규모로 사고치는 인간 치고 교회 안 다니는 인물이 드무니 낸들 어쩌겠는가. (김규항, <교회 2> 中, 1999.)


이 분도 어마어마한 족적을 남기셨지.


2-2. 적어도 내가 본 바에 따르면, 교회 안 다니는 사람들 사이에서 기독교에 대한 반감은 생각보다 훨씬 강하다. 기본적으로 꽉 막힌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물론이고 교회 다니는 사람이라고 하면 애초부터 말을 섞지 않으려는 사람도 있다.


3. 한국 교회에 대한 반감이 이렇게 높다는 것은, 반대로 생각하면 그만큼 교회의 영향력이 크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불교나 유교와 달리 기독교는 불과 100여년전에 유입된 '신흥'종교다. 천주교처럼 직접 가서 배워온 것도 아니고 선교사들에 의해 외삽된 것이어서 기독교 수입에 대한 동기가 딱히 강한 것도 아니었다. 심지어 초기에 기독교가 널리 전파된 지역은 지금의 북한 지역이어서 지금의 남한과는 공간적으로도 차이가 있다. 그러니까 한반도 중부 이남 지역에 기독교가 강한 영향력을 누리게 된 것은 불과 수십년만에 일어난, 세계 기독교사에서도 엄청 이채로운 현상이다.


4. 전근대의 한국사회는 양반/귀족 계층이 지식과 이데올로기를 독점하고 향촌 지배력을 강하게 행사하는 것으로 유지된 사회였다. 그래서 다른 지식이나 사상체계가 비집고 들어올 틈이 적었다. 그 많은 민란이 있었음에도 그들 중 누구도 왕조를 엎어야 한다는 상상까지는 하지 못했던 것이 그 때문이었다. 그런데 그 틈이 서북 지역에 있었다. 저자가 보기에 서북 지역은 한반도에서 기독교가 뿌리내릴 수 있는 가장 비옥한 토양이었다.


  서북 지역은 다른 지역에 비해 신흥 상공인층이 빨리 출현했다. 이 신흥 상공인층이 기독교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임으로써 이 지역의 기독교 교세는 급속도로 확장되었다.

  이 지역의 이러한 특수성은 역사적인 배경과 관련이 깊다. 한반도에서 서북 지역은 오랫동안 단군과 기자의 땅으로서 한민족의 발상지이자 문명화의 전초기지로 인식되어왔다. 이러한 인식은 서북 지역민에게도 내재화되어 있었다. 그런데도 이 지역은 정치적·사회적으로 지속적인 차별을 받았다. 이 지역민들은 단군과 기자를 내세워 차별을 극복하려 했으나, 두터운 지역 차별의 경계를 넘지 못했다. 대체로 이 지역은 여말선초부터 조선 중기에 이르도록 향촌 질서를 체계화할 수 있는 사족이 형성되지 않았다. (중략) 사족의 입장에서 보면 이 지역의 문화는 낙후된 것이었다. 이러한 이유로 이 지역민들은 중앙 관직으로 진출하기 어려웠다. (중략) 청과의 관계가 호전되면서 이 지역민들은 무역업으로 상당한 자산을 축적했고, 18세기 중엽에는 경제력이 전국 최고 수준에 이르렀다. (중략) 경제력은 최고가 되었지만, 실제 권력을 잡지는 못했다. 유교적 시스템을 갖춘 조선 정부에 이들이 기대할 것은 더는 없었다.

  단군과 기자의 땅이라는 자부심과 경제적 번성에도 불구하고 지속적으로 가해지는 정치적 차별 때문에 이곳의 지역민들은 다른 지방에서 볼 수 없을 정도로 기독교를 받아들이는 데 적극적이었다. (pp. 32~33.)


  당시 독립협회가 지향했던 사상은 자주독립과 문명개화였다. 이를 위해 자유권, 독립권, 교육, 법, 진보, 개화 등 다양한 개념을 제시했다. 그러나 실제적으로는 사적인 이익을 추구하고 사유재산을 가질 수 있는 개인의 자유와 경제적 활동의 중요성에 대한 것이 시민사회가 지향하는 내용이었다. 이러한 자유와 독립을 확보하기 위한 방법으로 교육, 법, 진보, 개화 등을 제시했다. 서북 지역 기독교인들이 독립협회 활동에 적극적으로 호응한 것은 그동안 유교가 천시했던 상업을 그들이 재평가했기 때문이다. (중략) 이러한 경제적 활동을 하는 개인의 권리를 법적으로 보장받기 위해 독립협회에서는 생명, 자유, 재산에 관한 권리를 제시했다. 생명의 권리는 재산의 권리와 연결되어 있으며 재산의 권리는 산업 발달의 기초가 된다. (p. 42.)


5. 근대자본주의와 프로테스탄티즘을 묶어서 논한 막스 베버까지 갖다붙이면 서북 지역이 "동양의 예루살렘"이라는 별칭까지 얻을 정도였던 이유는 얼추 설명이 된다. 그런데 해방 이후 서북 지역에 소련군이 밀려들면서 사달이 났다. 개인의 자유로운 이익 추구와 자본 축적 지향은 사회주의의 이상과는 근본적으로 차이가 있었기 때문이다. 결국 신의주 학생 시위 사건이나 토지개혁 등을 거치면서 서북 지역의 기독교인들은 그렇게 빈손으로 월남했다.


6. 무일푼으로 월남한 기독교인들에게 획기적인 반전의 계기가 찾아온다. (이 책의 제목에도 나오는) 한국전쟁이었다. 미국 기독교계가 중심이 되어 모금한 구호물자들이 어마어마하게 밀려들었고 이것의 배분권을 가진 한국 기독교계는 자연스럽게 그에 상응하는 권력을 획득했다. 전쟁 직후에는 미국 복음주의자들과 함께 '전쟁고아 사업'에 뛰어들어 미국의 가치를 선전하고 한미관계 강화를 위한 역할을 수행했다. 한국전쟁으로 개박살이 난 후 오로지 미국대장만 바라볼 수밖에 없었던 남한정부의 입장에서 미국과의 관계에서 지렛대 역할을 맡은 기독교계는 결코 무시할 수 없는 파트너였다. 남로당원 출신에다가 쿠데타라는 비합법적 수단을 통해 권력을 쟁취했기에 권력기반이 취약했고 그 때문에 미국의 승인에 절절 맬 수밖에 없었던 박정희 정권은 더 말할 것도 없고.


  CWS가 모집한, 점검조차 불가능할 정도로 방대한 구호물자는 이들의 이러한 동정과 공산주의자들에 대한 분노에서 이루어졌다고 볼 수 있다. CWS의 구호 활동은 결국 전 세계 기독교인들을 반공 전선으로 결집하게 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던 것이다.

  그리고 CWS의 구호품은 한국인들을 자신의 지지 기반으로 만드는 데 중요한 자원이 되었다. CWS는 KNCC 재건위원회와 한국 교회 각 교파와의 긴밀한 협조 아래 사업을 전개했다. 1952년 1월 14일 KNCC는 각 교파 연합의 재건위원회를 조직해 교회 재건 운동을 전개했는데, KCWS의 적극적인 협력으로 운영될 수 있었다. 재건위원회는 교회 및 주일학교, 교육 및 문화, 사회 및 후생, 농촌, 경제 등 6개 부분에 걸쳐 재건 계획을 세우고 선교부와 각 교파의 협력을 얻어 활동을 벌여나갔다. (p. 86.)


  한국 전쟁고아 사업은 미국과 한국이 가족애에 바탕을 둔 혈맹적 관계를 구축하는 데 기여했다. 클라인은 이러한 냉전의 역사에 미국인들을 동참시킨 요인은 전쟁고아 후원과 입양 사업이었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사업은 미국의 가족적인 관계를 국경을 넘어 해외로 확대시켰으며, 이를 통해 미국과 동맹국 간의 관계는 가종적인 동맹 관계로 구축되었다고 설명한다. (중략)

  미국 복음주의를 성장시키는 데 가장 핵심적 역할을 한 인물은 그레이엄과 피어스이고, 단체로는 월드비전과 홀트 입양 프로그램, CCF 등이었다. (중략) 월드비전과 CCF는 미국인들이 한 달에 10달러를 기부해 한국 전쟁고아를 자녀처럼 돌보는 프로그램을 운영했다. 홀트 입양 프로그램은 한국의 전쟁고아를 미국으로 데리고 가서 부모·자녀 관계를 실제로 구현했다. (pp. 183~185.)


7. 간단히 말하자면, 한국에서 기독교가 성공할 수 있었던 힘은 한국전쟁이라는 사건 혹은 기독교라는 종교 그 자체가 아니라 한국전쟁으로부터 시작된 '미국과의 관계'에서 비롯된 셈이다. 한국사회에서 기독교란, 사회·문화적으로는 미국적 가치를 가장 가깝게 구현할 수 있는 방법이었고, 정치·경제적으로는 미국의 지원을 끌어낼 수 있는 수단이었다. 일견 꽉 막힌 것처럼 보이는 한국 기독교가 반공·승공 담론이나 가족계획사업 등에서만큼은 이상하리만치 '유연성'을 보였던 것도 미국과의 관계, 혹은 냉전구조라는 것을 이야기의 중심에 놓을 때 비로소 설명된다.


8-1. 대충 여기까지가 한국 기독교의 출생과 청소년기 정도에 해당한다. 출생과 성장의 비밀이 이러하다면, 어쩌면 한국 기독교의 위기는 교회 안에 있는 것이 아닌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교회가 성장한 것이 저 혼자 잘 해서 성장한 것이 아니듯, 교회가 가진 문제 역시 교회 혼자 키워온 문제가 아닐 것고 한국 교회의 문제란 대체로 한국 사회의 문제가 고스란히 반영된 결과일 것이다. 그러니까 교회는 그저 사회의 축소판일 뿐, 교회의 문제라는 것이 꼭 그것이 기독교 교회라서 문제가 생긴 것은 아니라는 말씀. 하긴, 교회가 썩은 딱 그만큼 절도 썩었고 성당도 썩은 거 아닌감. 교회가 썩었다고들 말하지만 사실 교회 담장 안과 밖의 차이는 생각보다 적다.


8-2. 물론 이 말이 교회보다 사회에게 먼저 책임을 돌려야 한다는 뜻은 아니다. 사회 문제를 해결하면 교회 문제도 알아서 해결될 거라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그보다는 교회는 교회 그 자체의, 신앙은 신앙 그 자체의 맥락과 질서에 따라 움직인다는 변명에 대한 답변에 가깝다. 교회 문제의 해법도 무슨 뭐 성경구절 어디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교회가 놓여있는 사회의 맥락에서 찾아야 하는 거 아니겠냔 말이지. 몸이 사람 사는 세상에 있는데 하느님 나라에서 답을 구하려 들면 되겠냔 말이다.


ps. 책장을 덮고 나면, 사실 잘 쓴 책이라는 느낌까지는 들지 않는다. 전체적으로 논리가 헐거운 편이고 되물을 여지도 많기 때문이다. 한국현대사 전반을 기독교라는 키워드로 설명한다는 것이 책 한 권 정도로 마무리지을 수 있을 정도로 만만한 작업이 아니라는 점을 생각하면 그러한 논리적 헐거움은 어쩌면 당연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아마도 한국현대사와 기독교를 연결짓는 작업이 아직 많지 않음을 감안한다면 이 책의 가치는 얼마나 논리적으로 쫀쫀하냐에 있다기보다는 새로운 연구의 화두를 던졌다는 연구사적 의의에 있지 않을까 싶다. 이 책은 앞으로 연구자들 사이에서 많이 언급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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