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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노사이드와 기억의 정치 (허버트 허시, 2009, 책세상.)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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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노사이드와 기억의 정치 (허버트 허시, 2009, 책세상.)

Dog君 2016. 2. 15. 09:22



1-1. 어느 학과나 다 비슷할 거라고 생각하는데, 사학과도 학교 처음 입학하면 '이 (자본의) 시대에 역사학의 필요는 무엇인가?!' 라는 거창한 질문부터 던지고 시작한다. 이렇게 좀 거창한 질문을 던져줘야 선배고 교수고 좀 멋있어 보이잖아. 거창한만큼 진부하기도 한 질문이다. 질문이 진부하니까 답도 뻔하다. "과거는 있잖아,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데 필요한 지혜를 주거든? 그러니까 지금 우리가 더 나은 삶을 살려면 과거 역사를 잘 알아야 되는거란다. 하하하."


1-2. 이런 답변이 멋있어 보이는 건 대학 신입생 때 정도까지만이고 짧게는 한 학기 아니면 암만 길어봐야 2년이 채 안 돼서 이게 거짓말과 아주 가까운 말이란 걸 알게 된다. 아니 시발 사마천이 '史記'를 쓰고나서도 벌써 수천년동안 그 많은 역사를 써왔는데, 뭐 정작 20세기가 제일 극단의 시대고 폭력의 시대라네;;; 과거 사실을 그리 많이 알았고, 이제는 정보가 쌓이다 못해 아주 뭐 빅데이터의 시대라는데 우리 사는 인생은 왜 아직도 이런지 설명을 좀 해바바. 단순해보이지만, 정작 당사자에게는 콜럼버스의 달걀 정도 되는 이 놀라운 발견을 하고 나면 많은 전공생들이 전과를 하거나 휴학을 하거나 일찌감치 공무원시험을 준비하거나...


충공깽.


2-1. 꼭 한국에서만 그런건 아니었던 모양이다. 허버트 허시라는 양반도 이와 비슷한 질문으로 이 책을 시작한다. 아니, 폭력은 나쁜 것이라는 걸 세상 60억 인구 중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는데, 왜 지금 이 순간까지 대량학살은 멈추지 않는단 말입니까.


(전략) 어떻게 일간 신문을 읽거나 텔레비전 뉴스를 시청할 수 있으며, 이러한 비난에 동조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발작이나 야수성의 어떠한 단절도 없었다고 보이기 때문에, 우리는 19세기와 20세기의 정치·사회·문화·종교·교육 제도들이 인간을 인간답게 만들기(즉 인종적·종교적·민족적·국가적 증오를 이유로 수많은 사람들이 서로 죽이는 인간 최초의 충동을 통제하는 것) 위한 소문난 시도들이 왜 실패해왔는지를 짚어보아야 한다. 그것이 실패로 보이는 것은, 이 길고 파괴적인 시대 내내 국제 정부에서, 개선된 교육에서, 제안된 다른 방식을 이행하는 것에서 우리의 시도들이 인간 삶의 대량 파괴를 중단시키는 데 성공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p. 21.)


2-2. 여기에 대해서 허다한 답들이 있었다. 구조적 요인을 말하고 싶었던 사람들은 무슨 뭐 노동계급의 패배가 어쩌고 나치즘의 발흥이 저쩌고 하는 이야기들을 했고, 특정한 인물이 역사를 만들어간다고 봤던 사람들은 히틀러나 스탈린 같은 이들이 얼마나 정신병자였는지를 말했다. 그리고 오늘의 타자, 허버트 허시가 주목한 것은 '기억'이다.


(전략) 사실 그러한 범죄를 저지르도록 부추기는 방법은, 폭력을 낳는 인종적·민족적·국가적 증오를 자극하는 신화를 창조해 사람들의 역사적인 기억을 조작하는 것이다. 이러한 측면에서 정치는 기억과 매우 밀접하게 관련돼 있고, 우리가 정치와 기억 사이의 이 복잡한 연결을 이해하고 알게 될 때까지 대량 학살의 끝없는 반복은 계속될 것으로 보인다. (p. 30.)


3-1. 저자가 말하는 '기억'이란 '역사'나 '언어'로 바꿔서 이해해도 크게 무리가 없는데 그렇게 우겨도 되는 것이 '기억'의 속성이 '역사'와 '언어'와 속성이 비슷하기도 하거니와 '기억'이 '역사'로 가공되어 '언어'를 통해 표현되기도 하기 때문이다.


  기억과 역사는 과거에는 종교나 가족과 연결되어 있었지만, 근대 시기에는 국민-국가와 연결되었다. 역사로 변형된 기억은 사회에서 긍정적 역할과 부정적 역할 모두를 수행한다. 기억은 비균질적인 국민에게 사회적 응집력의 기반을 잘 마련해준다. 다른 한편, 캐먼이 인식한 것처럼, 권력을 갖고 있는 사람들은 사회적 합의의 환상을 만들기 위해서 보통 기억에 의존한다. (중략)

  이와 같이 억압적이지만 당당한 연대기는, 신화가 국가나 개인에 의해 어떻게 창조되었는지, 그래서 어떤 행위를 어떻게 정당화하곤 했는지를 매우 잘 설명해준다. 특별한 용도에서 국민-국가들은 영속시키고자 하는 그들 자신에 대한 신화를 창조하거나 그렇나 신화에 대응한다. 다시 말하면 신화는 국가 수뇌부가 추구하고 싶어 하는 정책을 정당화하거나 합리화하는 데 이용된다. 국가의 자기 이미지는 기억, 특히 국가가 어떻게 위기 상황에 대응했는지에 대한 기억에 의해 강화된다. 이러한 시화들은 국민이 현실을 직면하는 것을 피하게 해주며 어떤 기억들을 잊거나 억누르게 해준다. 모든 국가는 이러한 활동에 참여하며, 이에 대한 예를 찾는 것은 어렵지 않다. (pp. 55~56.)


3-2. 그러니까 '역사'란 곧 '공식화된 집합적 기억'이라고 할 수 있을텐데 이 과정에서 권력이 작용한다는 점은 뭐 이제는 상식 수준이라 하겠다. 여기서 '언어'의 속성을 생각하면 한 걸음 더 나갈 수 있는데, 첫째, 언어는 그 의미가 고정되어 있지 않으며, 둘째, '언어'가 인간 사고/활동의 산물인 동시에 인간의 사고/활동을 규정하기도 하는 것인 것처럼 '기억' 역시 정치/권력의 산물인 동시에 정치/권력을 규정하기도 한다.


3-3. (여기서 여담을 좀 덧붙이자면) 이렇게 이해하면 '역사' 혹은 '기억'을 두고 단순히 엄정한 학문의 산물 어쩌고저쩌고 라고 말하는 게 상당히 헛발질/똥볼차기임을 알 수 있다. 세상에 애초부터 객관적이고 엄정하게 중립적인 역사/기억이란 건 없는 거 아닐까. '역사'나 '기억'이란 건 이미 그 자체로 권력이 다투는 '담론'의 영역이라는 점이 너무 자주 잊혀진다. 그러니까 자꾸 '진짜 역사', '올바른 역사' 뭐 그런 얘기 좀 그만 하라고. 아이참... 뭐 암튼 이 이야기는 나중에 또 더 할 때가 있을 것이고...


4-1. '기억'에 집중하는 것은 곧 감정적이고 정성적이고 질적인 연구태도를 취한다는 뜻일텐데, 저자는 '객관'이라거나 '정량적 분석', '과학적 연구' 같은 것에 대해 무척이나 부정적이다. 저자가 보기에 이러한 태도는 오히려 연구자와 연구대상을 감정적으로 멀리 떨어뜨리고, 대량학살에 대한 우리의 분노를 제대로 담아내지 못한다. 저자는 이것을 (로버트 제이 리프턴을 빌어) '마비'라고 정의하는데 이러한 공감능력의 저하는 다시 대량학살의 풍부한 토양의 일부가 된다.


  리프턴이 정의했듯이, "생존자는 죽음과 마주치고 죽음에 노출되고 죽음을 목격했던 사람이며 살아남은 사람이다". 생존자의 기억에 대한 반응은 종종 리프턴이 "마비"로 언급한 바 있다. 마비는 리프턴이 인간 삶의 반복적인 파괴를 설명하기 위해 도입한 핵심적인 개념 중 하나이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마비는 "우리 시대 두 번째 스캔들로서, 우리가 인간이 저지른 홀로코스트에, 대량 학살에 분개하는 데 실패한 스캔들"이다. 리프턴에게 마비는 "내가 발달 과정이라고 부르는 것의 중단, 상징화라는 인간 존재의 본질적인 정신 기능의 손상을 의미한다. 이 용어는 심리적인 저지 현상으로 인해 혹은 누군가를 그러한 경험과 연결할 수 있는 이전의 이미지의 부재로 인해, 어떤 종류의 경험을 대면하거나 느끼는 데 무능력한 것을 가리킨다. 따라서 이미지와 관련 감정 사이의 본질적인 분리가 있다. 나는 이것이 현재의 마비의 시대보다 더 큰 문제라고 생각한다".

  마비는 모든 사람들에게 광범위하게 나타나지만, 리프턴에 따르면 특히 전문가들 사이에서 현저하게 나타난다. (중략) 전문가들은 객관성의 신화와 과학적 방법론의 가면에 눈이 멀어, 과학적 엄격함의 이름으로 대량 학살을 감정적으로 대면하는 것에 거리를 둘 수 있었다. (후략) (pp. 145~146.)


4-2. 여기서는 고개를 좀 갸웃하게 만드는 부분이 있다. 무슨 말씀을 하고 싶은건지는 충분히 알겠다만은, 연구자로서의 거리두기가 안 되면 그것도 그것대로 문제 아닌가 모르겠다...


5. 그러니까 어떤 비극의 경험/기억을 기록하고 전달하는 것은 그러한 일을 다시 반복하지 않고 그것을 넘어서기 위한 노력이다. 예컨대, 프리모 레비가 그 끔찍했던 수용소 경험을 되살리는 고통에도 불구하고, 살아돌아올 수 있었던 경험을 자꾸 글로 써냈던 것은 그런 몸부림의 하나였던 것이다. 프리모 레비는 어떤 순간에도 인간으로서의 자존감과 존엄성을 잃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프리모 레비가 자신의 책에서 인간 사이의 인간적인 관계들이나 일상적인 실천을 통해 자존감을 유지했던 경험에 주목했던 것은 그 때문이었다. 여기서 나오는 '자존감'이라는 키워드는 밑에 가서 또 나오니까 일단 기억해두기로 하고.


  현대 사회에서 아주 일상적으로 제도화된, 그리고 극히 이례적인 상황에서 생존에 매우 필수적인 이기주의의 원리에 영향 받지 않은, 아우슈비츠의 '선하고 순진한' 사람을 상상해보라. 레비는 다음과 같이 생각한다. "내가 오늘날 살아 있는 것은 진정 로렌초 덕분이었다. 그의 물질적인 도움 때문이 아니라, 그가 그 자신의 존재에 의해, 그의 자연스럽고 꾸밈없는 선한 태도에 의해 우리 자신의 외부에 올바른 세계가 여전히 존재하고 있음을, 여전히 순수하고 완전하고 부패하지 않았고 야만적이지 않고 증오 및 테러와 관계없는 어떤 것, 어떤 사람이 존재하고 있음을, 정의하기 어려운 어떤 것, 요원하지만 살아남을 이유가 되어주는 선의 가능성이 여전히 존재하고 있음을 끊임없이 나에게 일깨워주었기 때문이다". (p. 87.)


  사람들은 다양한 방식으로 소름끼치는 경험에 대응한다. 어떤 이들은 모든 기억을 지우려 하면서 침묵으로 후퇴한다. 또 어떤 사람들은 증오에 차서 복수심에 불타게 된다. 레비의 대응은 삶의 수수께끼를 풀기 위해 계속 노력하는 것, 그리고 자신의 기억과 생각을 우리 나머지 사람들 모두와 소통시키는 데 여생을 바치는 것이었다. 그의 과거와 20세기 후반의 사건들에 대한 그의 투쟁은 그의 가장 최근의 책들에 자세하게 설명되어 있다. 그는 계속 생존하기 위해서뿐만 아니라 자신의 인간적인 시각을 유지하기 위해서도 싸웠다. (p. 93.)


6-1. 그런데 안타깝게도 (앞에서 얘기한 것처럼) 기억은 국민-국가에 의해 점령된다. 국민-국가가 점령한 집합적 기억으로 재구성되어 구성원 개개인의 사회화 과정에 녹아드는데, 이건 구성원들읠 소속감을 확인시켜 줄 수도 있지만 동시에 외부인들을 비인간화하는 언어를 낳기도 한다. 예컨대, 나랑 일면식도 없는 스포츠선수가 어디 외국 리그에 나가서 개인 성적을 올리는 것에 괜히 우리들 마음까지 들뜨는 것이 그 소속감의 예일 것이고, 반유대주의 같은 것이 비인간화에 해당하겠지.


6-2. 여기까지 정리하고 나니 비로소 책이 본격적으로 재미있어지는데...


7. 그러니까 제노사이드라는 것이, 전쟁이라고 하는 특수한 맥락이나 상황에서만 나타나는 돌출적인 상황이 아니고, 이미 그전부터 쌓아온 배제의 언어와 복종의 질서 같은 것 때문에 가능했다는 것이다. 박찬승 선생님이 '마을로 간 한국전쟁'에서 한국전쟁 당시 마을에서의 학살사건들은 그 이전부터 있어왔던 마을 내 갈등이 한국전쟁을 계기로 폭발한 것이라고 했던 것이 이것과 닿는 맥락이 있다. (물론 한국전쟁기의 학살을 제노사이드로 볼 수 있는가에 대해서는 이론異論의 여지가 있다. 이에 대해서는 이 책 말미에 소개된 '정치적 학살'의 범주를 참고할 수 있고, 더 나아가서 이데올로기나 문화에 따라 벌어진 범주적 살인이라는 점에서 제노사이드로 볼 수 있다고 했던 최호근의 논의도 참고할 수 있다.)


  순응과 복종을 보증하는 가장 효율적인 방법은 정치적 사회화를 통해 사회의 지배적인 이데올로기와 합치하는 행위 규범을 전파하는 것이다. 사람들이 이러한 규범이 '정당'하다고, 적절한 행동을 규정한다고 확신할 수 있다면, 그러면 권력자는 반체제자, 즉 규범을 따르지 않는 사람들을 억누르기 위해 힘에 호소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이를 성취하기 위해서 모든 국가와 조직들은 현실에 대한 바람직한 시각을 주입하고자 새로운 성원들을 사회화한다. 이러한 과정의 가장 중요한 측면 중 하나는 동의된 혹은 집합적인 기억을 창출하는 것이다. 그러면 한 나라나 사회의 모든 혹은 대부분의 개인들은 똑같은 상징묶음을 긍정적으로 평가할 것이고, 정당하거나 정당하지 못한 것에 대한 시각을 공유하게 될 것이다. 따라서 문화와 사회는 일탈을 정의한다. 정당하지 못한 것으로 정의된 정치 영역에서의 행동에는 제재가 발동되며, 결국 주민들은 통제된다. (p. 180.)


  문화적 조건들은 보통 국가의 파괴적인 활동을 합리화하거나 정당화하는 데 이용되는, 문화 혹은 국민-국가에서 강조되는 신화 및 이데올로기와 연결되어 있다. 우리가 앞서 언어에 대한 논의에서 보았듯이, 모든 사회는 국가나 민족의 기원에 대한 신화학에 바탕을 둔 어떤 설명, 어떤 계보학을 요구한다. 일반적으로 이러한 신화들은 집단이나 국가의 성원들이 신성한 원천의 자손이라거나 신성한 개입에 의해 보호받는다는 내용을 갖고 있다. 이러한 유형의 생각은 그 집단이나 국가를 다른 모든 집단 혹은 국가와 차별화하고, 국가가 공격적인 행위로 맞서고자 하는 대상인 '적'으로 인식된 사람들을 비인간화하는 이유로 작용한다. '적들'은 보호받지 못한다는 사실, 혹은 '적들'은 같은 혈족의 자손이 아니며 같은 혈통을 갖지 않는다는 사실은 제도사이드의 정당화에 이용된다.

  다시 말하면, 문화나 국가에서 강조되는 신화와 이데올로기는 국경선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문화적 적응과 사회화의 과정을 통해서 권위있는 주요 인사들의 언어로 표현되고 전해진다. 사람들이 이러한 신화들을 믿기 시작하고 흡수하기 시작하면 이에 길들어, 다른 상황에서는 도덕적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던 행위를 하도록 명령받았을 때 기꺼이 복종하게 되는데, 이는 그동안 구성되어온 정교한 정당화체계 때문이다. 이러한 대량 학살을 위한 문화적 조건들은 심리적인 조건들과 관련 있는데, 이 심리적 조건들은 시민들에게 권위에 복종할 것을 가르치는 명백한 메커니즘들에 초점을 맞춘다. (pp. 207~208.)


8-1. 정리하자면 '기억'이 사회화를 통해 우리의 일상적 사고에 침투하는 셈이다. 우리가 평소에 사용하는 언어들에 배제와 혐오의 논리가 밀려들지 않도록 계속 힘써야 하는 이유는 그것이 국가/권위에 대한 복종이고, 타인에 대한 공감능력의 상실이며, 다른 공동체에 대한 공격성이기 때문이다.


  인종주의적 혹은 성적 농담처럼 작은 것일지라도 비인간성을 무시하다보면 개인은 억압과 부저의를 무시하는 데 익숙해지고, 비인간성이 자기 앞에 벌어졌을 때 그것을 인지하는 능력을 잃게 된다. 결론적으로, 억압과 부정의한 행위에 분개하는 감각을 잃게 된다. 우리는 일상의 삶에 가장 직접적으로 영향을 끼치는 제도 안에서 정의감과 동정심을 배우거나 다시 배울 수 있다. 우리가 침입 국가의 세력과 정치적 삶의 슬픈 현실들로부터의 보호와 구원을 구하는 것은 일상의 작아 보이는 영역들 안에 있다. 우리의 매일매일의 존재는 우리를 부정적인 현실과의 대면에서 분리시키는 완충물이며, 우리가 애착과 정체감을 발전시키도록 해준다. 그러나 사랑과 애정의 대상에 대한 이러한 애착은 어떤 공백 속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애착은, 우리가 부정의와 비인간성을 똑바로 대면하도록 배우는, 그래서 우리가 삶의 파괴와 보존 사이에서 선택하는 능력을 발전시킬 수 있는 그런 보다 큰 맥락의 일부이다. 그렇게 하는 사람들은 또한, 자신이 권능empowerment의 한 형태를 가졌다는 것을 깨달을 때, 즉 자신이 무력하지 않으며 선택권을 갖고 있으며 또한 삶의 보존을 선택한 다른 사람들과 합류하는 경우에는 지역·국가·세계 정치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을 때, 긍정적인 자기 이미지를 발전시킨다. 알베르 카위가 언급했듯이, 만일 우리 모두가 희생자가 되는 것도 처형자가 되는 것도 선택하지 않는다면, 우리를 둘 중 어느 것으로 만들려는 사람들은 자신들의 파괴 욕망을 한껏 채우는 데 어려움을 겪을 것이다. (pp. 250~251.)


8-2. (여기서 여담을 또 좀 덧붙이자면) 결국 중요한 것은 개개인의 일상적 실천이다. 푸코가 일찌기 갈파했듯이, 근대의 권력은 우리의 의지를 길들이고 우리의 신체 하나하나를 작용의 거점으로 삼는다. 이 말인즉슨 그만큼 권력의 망이 촘촘하다는 뜻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우리 각자의 힘으로 그것을 균열낼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나는 개인적으로, 푸코가 말한 판옵티콘의 모델이 권력의 허약함을 드러낸다고 생각한다. 판옵티콘이 성립하고 효율적으로 기능하기 위해서는 중앙의 감시탑이 반드시 비어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가득 차 있다면, 굳이 판옵티콘을 만들 이유가 없으니까.) 흔히 말하는 "너나 잘해"라는 말이 그래서 무서운 거다. 제 눈 앞의 들보를 보는 능력을 기르는 것이 중요하다.


9. 자 그러면 각 개인은 어떻게 제노사이드를 막을 수 있는 실천력을 가질 수 있는가. 여기서 '자존감'이 다시 등장한다.


  게다가 한 가지 복잡한 요인은, 개인적인 자아 개념과 함께 사람들이 집합적 자아를 갖는다는 것이다. 이것은 자존감이 사회와 개인이라는 두 수준에서 작동하고 있을 때 분석되어야 함을 의미한다. 간단히 말해서 어떤 사람을 낮은 개인적 자존감을 표명할 수도 있으며, 이러한 낮은 개인적 자존감은 높은 사회적 자존감으로 귀결되거나 어떤 다른 가능한 조합의 변이로 귀결될 수 있다. 이것은 높은 수준과 낮은 수준의 자존감 모두 우월함이나 열등함에 대한 시각으로 나아갈 수 있으며, 상상컨대 다른 집단에 대한 적대를 정당화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중략)

  예를 들어서 낮은 자존감은, 자신의 집단을 다른 집단들보다 우월한 것으로 바라봄으써 자신이 잘 알고 있는 열등함을 보상할 필요를 강화할지 모른다. 개인들은 자존감이 다 다르지만 "자기 문화, 나라, 사회, 삶의 방식의 우월함에 대한 믿음을 공유한다". 자존감의 유형 간의 관계는 일반적으로 생각되는 것보다 훨씬 복잡하며, 높은 자존감이 반드시 다른 집단에 대한 관심으로 나아가는 것은 아니다. 사실 어떤 경우에 높은 자존감은 자기 회의를 숨기고 있을 수도 있고, 또 "다른 집단에 대한 제한된 관심과 결합"될 수도 있다. 민족에 대한 집합적 혹은 사회적 자아상은, "그들의 집단에 대해 공유되는 평가, 자아 개념과 이상적 자아를 전달하는 신화, 민족이 그들 자신에게 맞추었던 목표, 그리고 (예컨대 다른 집단에 대한) 공유된 믿음을 포함한다. 그것은 또한 불확실성, 불안정성, 그리고 걱정을 포함하거나 감추고 있다". 이러한 분석은 기억의 요소에 대해 우리가 앞에서 논한 것과 매우 가까우며, 개인을 집단성에 묶으려 하는 기억을 국가나 집단이 사회화하고 전달하려고 함을 시사한다. 다시 말해 한 집단의 성원이 자신의 자존감과 확신을 지원하기 위해 집단에 의존할 때, 그 성원은 집단의 결정을 따르기가 보다 쉬울 것이다. (pp. 223~224.)


  그러므로 구조자들은 자신의 삶이 위협받더라도 "올바른 일을 하기 위해서" 도덕적 양심을 기꺼이 따르는, 복종과 순응으로부터 자유로운 독립적인 사상가들로 보인다. 비록 정체성이 요인으로 언급되지는 않았지만, 위의 특징을 가지고 있는 개인들이 매우 강한 자아감을 지닐 것이라고 믿는 것이 논리적이다. (중략)

  소바주가 언급하고 있듯이, "다른 사람들에게 관심을 갖는 것 또한 자기 자신에게 관심을 갖는 것"임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누군가에게 관심을 갖는 것은 강한 정체성을 나타내는 것이다. 확실히 정체성에 대한 강한 내심(內心) 없이는 나치로부터의 유대인 구출과 같은 위험한 활동을 맡을 수 없다. 그렇다면, 강한 자아감이 유대인을 도운 사람의 특징이라면, 그러면 그것은 어떻게 발전했는가?

  후네케와 그로스먼은 부모의 역할 모델이 관용, 정의, 그리고 평등의 윤리를 가르치는 데 책임이 있었음을 시사한다. 한 관찰자가 주장하듯이,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는 양육자[구조자] 유형은 구조자들에게, 예민한 개인적인 책임감과 다른 사람에 대한 많은 감정이입, 그리고 법적·사회적 결과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느낌과 가치에 근거해 활동하는 확신과 자립심을 주었다". 구조자들의 회상은, 자신들이 자식들과 따뜻하고 신뢰적인 관계를 구축하여 마음을 터놓은 비권위주의적인 아버지들과 애정 깊은 어머니들에게서 이러한 특성들을 배웠다는 것이었다. 예상한 대로 "안전, 용인, 그리고 사랑을 경험한 아이들은 어려움에 처한 다른 인간 존재에게 쉽게 감정이입을 할 수 있었다". (후략) (pp. 243~245.)


10. 여기까지 읽었을 때, 자연스럽게 한국 사회의 모습(일베라든지 일베라거나 아니면 일베 같은 것들)이 겹쳐보였다. 혹자는 지금의 한국 사회의 모습, 그러니까 꼭 일베 뿐만이 아니라 일상화된(이제는 위선적이지조차 않은, 심지어는 그런 것을 쿨하다고까지 생각하는) 혐오 발언들과 심화되는 정치적 편향 같은 것들을 예로 들어서 파시즘의 도래를 점치기도 하는데, 이 책을 읽고 나니 그게 꼭 과장만은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사실 책 중반까지는 약간의 감동 비스무리한 것도 느껴지고 그랬는데, 이 생각을 하자마자 등골이 오싹했다. 시발 우린 이제 다 망한걸까.


어째 이번 글은 시작과 끝이 다 충공깽.


ps. 여기까지가 2부의 내용이다. 3부는 좀 사족 같은 느낌이 있다. 6-1.의 내용으로부터 다시 가지를 뻗어서, 제노사이드를 막기 위한 구체적인 대안으로 내셔널리즘을 넘어선 국제 기구의 개입 같은 것을 이야기하고 있는데 별로 현실성 있는 이야기처럼 느껴지질 않는다. 국제기구고 나발이고 아직도 우리의 일상은 국민국가가 졸라게 강하게 지배하고 있거든요. 저자님이 한국 안 살아보셔서 그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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