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og君 Blues...
북조선 탄생 (찰스 암스트롱, 서해문집, 2006.) 본문
1-1. 북한에 대한 우리의 이미지는 양 극단 사이를 폭넓게 오간다. 도저히 존속할 수 없을 것 같은 체제와 그 속에서 사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사람들의 이미지가 오른쪽 끝에 있다면, 깔끔하게 친일파를 청산하고 유례없이 성공적으로 토지개혁을 완수하여 사회주의의 이상을 그나마 현실에 가깝게 (잠시나마) 구현했던 국가라는 이미지가 왼쪽 끝에 있다. 오른쪽 끝의 이미지는 냉전을 통해 형성된 시각이었고, 왼쪽 끝의 시각은 그에 대한 반대급부로 만들어진 것이었다. ("일제 부역자들이 다스리고 영화를 누리는 남한에서 자란 청년들이 반공 파시즘의 굴레에서 벗어났을 때, 그런 정통성에서 우월한 북한체제에 호감을 갖는 건 한편으론 당연한 일이었다.")
1-2. "양 극단 사이"라고 써놓고 보니, 그러면 그 사이의 스펙트럼이 엄청 다양하고 넓은가 보네...로 들리기도 하지만, 사실 남한처럼 "씨발 그래서 넌 누구 편이냐고" 질문이 횡행하는 사회에서 "양 극단 사이"라는 표현은 그냥 "양 극단 중 하나"의 의미로 사용되기 마련이다. 상황이 이렇다보니 북한에 대한 우리의 입장도 결국에는 "종북빨갱이" 아니면 "친미반공" 중 하나를 골라야 하는 상황으로 몰리곤 하고, 좀 진지하게 이야기해볼라치면 꼭 "김정일 개새끼" 한 마디 정도 덧붙여줘야 쓸데없는 오해를 안 사는 상황도 생긴다. 온갖 전제를 구구절절 붙이지 않고 북한 이야기를 할 수 있는 때는 대체 언제쯤 올까요. (아니 뭐 그게 얼마나 대단한 거라고...) 어쨌거나 그런 양 극단의 이미지에서 바라본 북한 사회의 창세기 역시 만만찮게 극단적이다. 소련의 괴뢰국 등장 아니면 사회주의 낙토의 건설.
1-3. 이렇게 진부한 썰을 풀어놨으니 다음에 올 내용이 뭐겠노. 양 극단의 이미지를 넘어서 그 중간에 있는 객관적 이미지가 어쩌고저쩌고... 알지?
2. 대구에서 태어나 지금은 미쿡 콜럼비아 대학에 계신 찰스 암스트롱이 이 책에서 줄곧 물고늘어지는 주장은, 북한 체제의 성립은 소련 사회주의가 단순하게 이식된imposed 혹은 외삽된 것이 아니라 김일성의 만주 유격대 경험 약간에 북한 지역의 역사지리적 조건, 식민지 시기의 경험과 체제, 그리고 훨씬 이전부터 내려온 한국 사회의 유구한 체제가 연속된 결과에 가깝다는 점이다.
(전략) 남부에서의 잠재적 반란은 일본 당국에 의해 효과적으로 봉쇄되었지만, 동북지역은 반란의 열린 공간이었다. 강력한 사회적 연줄망이 존재했고, 지주에 대한 종속이 약했으며, 중앙의 간섭에 저항했던 전통이 함경도 지역의 농민들로 하여금 1920년대 말에서 1930년대 초의 급진시위에 참여할 수 있는 능력과 의지를 부여했다고 볼 수 있다. 당시 남부 농촌에서의 급진주의는 쇠퇴했다. 동북지방 농촌의 두터운 '전통주의'는 식민 후기 일제가 이 지역을 침범할 때, 농민 급진주의의 중심지가 되도록 했다.
한편 함경도는 1930년대 말 조선 북부의 신흥 공업기지였으며, 특히 함경남도 함흥과 원산이 중심이었다. 따라서 동북지역은 민중적 농민 동원의 장소였으며, 정통 레닌주의자들이 활동하던 도시선동의 현장이었다. (중략) 1920년대 후반에서 1930년대 초반 사이 일본 당국은 동북지역이 공산주의 활동의 '최전선'이라고 믿었고, 조선의 공산주의자들 스스로도 그렇게 생각했다. 이는 식민통치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고 또한 중국 동북지역 국경선 너머의 급진적 세력이나 인물들과 접촉할 수 있었던 지역적 이점 때문이었다. (pp. 38~39.)
(전략) 기록이 거의 없지만, 조선공산주의자들의 정치적 목표와 그들이 세우고자 했던 사회유형이 주는 단서로 보아, 상대적으로 단기적인 '소비에트 구역'은 실제로 세워지기도 했었다. 김일성은 1940~1945년 사이 소련 망명보다는 만주에서 유격활동에 많은 시간을 보냈다. 이 시기는 그의 인생의 대부분을 형성한 시기였다. 토지개혁, 통일전선 정치, 그리고 사회개혁 등을 비롯한 해방 이후 북한에 등장한 많은 조치들은 1930년대 유격대가 지배했던 만주에서 이미 시행되었던 것이었다. 이런 점에서 1945년 이후의 북한은 소련의 배후 조종보다는 반식민지투쟁의 산물이었다. (pp. 62~63.)
김일성의 조선 공산주의는 대중적이었지만 마오쩌둥의 중국 공산주의가 자발적이었고 심지어는 백가쟁명식이었던 것과는 달랐다. 좋은 의미든 나쁜 의미든 간에, 북한의 공산주의는 중국보다 더욱 규율이 잡히고 안정적으로 오랫동안 살아남을 수 있었다. 이는 순전히 김일성의 특출함에서 기인한 것이라기보다는 근세사에서 중국보다 훨씬 정통orthodoxy과 안정stability을 추구했던 조선의 오랜 정치문화가 반영된 것이었다. (p. 112.)
그러나 조선의 토지개혁 정책의 역사는 1930년대 행동주의activism보다 훨씬 더 거슬러 올라간다. 수 세기 전에 이미 공산주의 비슷한 것이 존재했는데 조선의 사회개혁가들은 토지개혁이 사회재건과 개혁을 위한 핵심이라고 생각했다. 토지재분배는 한국에서 지난 2천여 년간 논의되어 온 주제로서, 북한이 나이, 성별, 가족구성원 수에 따라 토지를 분배한 것은 그 전통과 합치한다. (중략) 요약하자면, 조선인들은 소련과 중국의 공산주의 '모델'과 함께 스스로의 전통을 통해 토지개혁 프로그램을 단행할 수 있었다. 조선의 사회변화를 위한 국가주도 토지개혁에는 20세기에 유입된 특수한 사상만이 그 핵심적 위치에 있는 것이 아니었다. (pp. 133~135.)
3-1. 여기까지 쓰고나서도 그냥 그저 그런 썰이네... 싶어 보인다. 세상 그 어느 제도나 사상 중에 외부로부터 원형 그대로 이식되는 것은 없고 항상 원래의 그 무엇과 외삽된 그 무엇의 짬뽕이었으니까. 그래서 여기서 반드시 던져야 할, 더 중요한 질문은 그 결과물이 무엇이냐는 것이다.
3-2. 북한은 기존의 가부장제적 위계와 신분제적 위계의 완전한 전복을 통해 새로운 사회 건설의 동력을 확보했다. 그러니까 기존의 위계에서 하위에 있던 사람들을 상위로 끌어올리는 작업은 그들에게 사회적 상승과 해방의 경험을 주었고 그들은 다시 사회 변혁의 충실한 일꾼이 되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여기서 "전복"이 곧 "해체"를 의미하지는 않았다는 점이다. 사회적 위계 그 자체는 뒤집어진 형태, 혹은 약간 변형된 형태로 온존되었다. (이 점에서는 린 헌트의 '프랑스 혁명의 가족 로망스'가 살짝 생각난다.) 이렇게 온존된 사회적 위계는 훨씬 오래 전부터 한국 사회가 유지해왔던 사회적 질서의 연장이기도 하고, 뒤이어 북한 사회가 계속 지켜가게 될 사회적 안정성의 열쇠이기도 했다. 예컨대 젠더와 가족 문제, 즉 대가족주의는 핵가족의 이미지를 설파하거나 모성성을 공산당 혹은 수령에게 옮기는 방식으로 전복되었다. (이 점은 다시 권헌익과 정병호의 '극장국가 북한'에서 본 바와 같다.)
어머니로서 여성의 역할은 북한에서 한번도 심각하게 의문시되지 않았다. 중국과 달리, 북한은 결코 가족의 단위를 깨려고 하지 않았다. 사실상 가족은 사회의 기본 '세포'로 묘사되고, 핵가족을 유지하는 것이 지속적으로 강조되었다. 북한은 일반적으로 핵가족에 대한 보수적 입장을 취했다. 1945년부터 1950년대 중반까지 북한에서 이혼이 급격히 증가했고, 그 이후 이혼을 금지했다. 토지세습이나 포괄적인 씨족관계와 같은 봉건적 가족 관습은 1946년 토지개혁을 하면서 공격을 받았고, 세습이 금지되고, 1947년에는 호적을 없앴다. (중략)
효도는 북한에서 가치 있는 미풍양속으로 남았다. (중략) 어머니의 이미지는 북한이 발전행면서 국가선전물에서 점차적으로 두드러졌다. 1980년대, 김정일이 김일성의 후계자가 되었을 때, 북한에서 여성성의 상징으로 격찬을 받았던 두 명의 여성은 김일성의 어머니 강반석과 그의 첫 번째 부인이자 김정일의 어머니였던 김정숙이었다. (중략) 그런데 북한의 선전물들이 조선시대 유교전통 즉 문화와 도덕의 주요한 전달자로서의 어머니 상을 공유하고 있었지만, 가치는 분명히 달랐다. 사실상 대부분의 단일 정당체제로부터 구분 짓는 북한 선전물의 특징 중 하나는 모성적 이미지를 국가 그 자체를 대표하는 것으로 결합시켰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조선로동당은 반복적으로 '어머니 당'으로 그려진다. 아이들이 어머니를 사랑하지 않을 수 있을까? (pp. 160~162.)
북한의 많은 청년들이 민청의 정치노선을 적극적으로 동의하지 않았다는 점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중략) 그러나 태산면 같은 곳의 가난한 10대와 20대의 농부들에게 민청은 새로운 정권을 접할 수 있는 직접적인 계기였고, 신기한 교육의 기회, 정치적 책임감, 사회적 진보, 청년으로서의 집단정체성을 제공했고, 소련으로부터 온 것임에도 불구하고 정치 프로그램이나 당파적인 것들도 많은 사람들에게 분명히 매력적이었다. (pp. 170~171.)
역설적이게도 하위계급에 의한 상위계급과의 혁명적 자리바꿈은 새롭지만 과거와 똑같이 불변의 사회적 위계를 만들게 된다. (중략)
사회적 위계와 안정성은 과거 조선시대에 오래 지속된 한 요소였으며, 이는 전통사회의 측면에서 조선과 중국을 구별하는 중요한 측면이다. 1940년대의 사회개혁을 통해 사회적 위계의 내용물이 급격하게 변화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사회적 위계 그 자체는 '보수적인 북한 공산주의의 가장 두드러지고 지속적인 요소 중의 하나가 된다. (pp. 172~173.)
3-3. 해방 직후 북한 정치에서 주도적 위치를 차지하지 못했던 북조선노동당이 다른 정당들, 특히 천도교청우당을 굴복시켜가는 과정도 이 맥락에서 설명이 가능할 것 같다. 천도교청우당의 성격과 지향, 그러니까 동학의 성격과 지향을 설명할 때도 성리학과의 연속성과 토지개혁을 빼고 말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북조선노동당이 천도교청우당을 압도할 수 있었던 것은 청우당 자체의 성격과 지향이 사회주의 개혁에 일정 정도 선취당했기 때문이다.
(전략) 천도교의 종교적 신념은 언제나 1894년 동학농민항쟁으로의 복귀라는 정치적인 함의를 갖고 있었고, 이는 종종 잠재적으로 매우 급진적이었는데, 특히 사회적 평등이라는 부분에서는 더욱 그랬다. 그러나 북조선 청우당은 많은 부분에서 종종 공산주의 이념과 일치하는 방향으로 천도교 교리를 해석했다. 가령 '인내천'이라는 천도교의 핵심 교리는 북조선 청우당의 문헌들 속에서 "정치, 경제, 문화, 그리고 사회 분야에서 모든 사람의 완벽한 평등과 자유"를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되었다. '개벽'이라는 개념은 민족, 독립, 사회를 위한 종교적 계몽을 의미했고, 모든 사람들이 충분한 잠재력을 실현할 수 있는 사회적 질서의 근본적 변화를 의미했다. 조선의 '새로운 민주주의'는 모든 '봉건적 관계를 청산하고, 식민주의의 흔적을 지우고, "반동적 파시즘"을 극복하고, 통일된 노동대중의 주도권을 촉진하는 것이었다.
1947년 6월의 천도교 팸플릿에는 '보국안민'과 지상천국'이라는 오래된 동학개념을 상세히 설명하고 있다. 이 두 가지는 '인간개조'라는 근본적 교리에 기초하여, 천도교의 두 가지 목적을 표현하고 있다고 설명하였다. (중략) 그런데 당시 소련, 동유럽 그리고 북한이 이들보다 이 길을 조금 앞서 나가고 있는 상황이 발생한 것이었다. (pp. 208~209.)
4. 이처럼 북한 고유의 맥락이 좀 더 중요하다고 한다면 커다란 장애물 하나가 새롭게 등장하는데, 당시의 북한 사회가 사회주의 건설을 위한 조건이 거의 갖춰지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인구의 절대다수가 빈농 상태였고 농업 기반 경제를 벗어나지 못한 상황에서 노동계급이 중심이 되는 사회주의 건설은 아나콩콩. 사회주의란 무릇 경제와 계급이라는 튼실한 하부토대 위에 세워지는 상부구조이지만, 하부토대가 없는 북한에서는 언감생심이지. 따라서 북한의 사회주의 혁명은 아래로부터는 토지개혁으로 농민의 지지와 본원적 축적을 동시에 노리는 한편 상부구조(문화)로부터 하부토대를 '만들어내는' 과정이었다.
(전략) 토지개혁은 정치적이고 경제적인 두 가지 목적을 가지고 있었는데, 농촌에서 정권 지지를 획득하는 것과 생산성을 고취시키고, 농업 경제에서 체계적으로 수탈하는 것이었다. (중략) 비록 1950년 가을 유엔군이 면담한 농민들은 정권의 수탈 방법에 대해 불만이었지만, 개혁 이전 상태보다 토지소유자로서의 자신들의 지위에 여전히 만족했다.
법률이 입안되었을 때부터, 토지개혁의 명백한 의도는 북한의 공업화를 위해 농업 부문으로부터 잉여가치를 추출하는 것이었다. (후략) (pp. 232~233.)
모든 집단적 범주들 중에서, 노동자는 아마도 가장 '구성된' 범주였을 것이다. 산업노동자들의 수가 절대적으로 적었음에도 불구하고, 북한은 프롤레타리아트 국가, 좀 더 정확히 말하면 '노동자-농민 국가'가 되었다. 노동자는 정체성과 과거에 결코 가져보지 못했던 사회적 역할을 국가로부터 부여받았다. 간단히 말해서 국가는 노동자들에게서 "상상된 계급 공동체"를 형성하려 시도했고, 조선인민 전체를 대표하도록 했다. 노동자로서 노동자의 정체성은 노래, 포스토, 표어, 문학, 일상적인 연설을 통해 강화되었다. (중략) 마르크스주의의 용어로, 북한에서의 노동자는 '계급 그 자체Class in itself'이기 이전에 '형성되는 계급Class for itself'으로 만들어졌다. 북한에서는 주관적 의식이 객관적 상황을 앞섰다. 조선의 공산주의자들은 언제나 "올바른 사상"이 정치·경제적 변화를 이끈다고 함으로써, 마르크스를 바로 세우려고 했다. (pp. 150~152.) 1
5-1. 이런 식으로 뒤집어진 순서의 혁명이 가능했던 것에 다시 또 한국 사회의 역사적 맥락이 작동한다. 오랜 시간 동안 지식인이 지식 권력을 독점했던 경향이라거나 교육을 통한 사회적 상승 열망이 강하게 이어졌던 것, 식민지 시기에 시작된 잘 짜여진 감시체계 등이 이러한 뒤집어진 순서의 혁명을 가능케 한 조건이었다. 더욱이 만주 유격대 시절 다져진 항일운동의 견실한 경험과 민생단 사건으로 학습된 민족주의적 경향과 '좌경화 오류'에 대한 반성 등이 '북조선 사회주의'의 특성을 빚어냈다.
북한의 감시체제 설립에 있어 소련의 영향력이 명확한 것이었다면, 일제의 식민요소는 표면 아래에 내재한 것이었다. (중략) 북한의 사법체계는 남한에서보다 복잡한 방식을 통해 식민유산 위에 구축되었다. 새로운 정권은 보안부서에 대한 일반의 인식과 그 구성을 급진적으로 변화시키려 했지만 그 사회적 역할과 권위는 그대로 두었다. (후략) (pp. 302~303.)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사회와 국가 조직"에 관한 북한의 초기 교본에는 "자본주의 국가와 일제 식민압제 시절의 경찰과는 달리 보안기관 역시 인민들의 손으로 만들어졌다"며, 현재 "남에서는 '국민보안군'과 경찰이 애국동지들을 죽이고 있다"고 적혀 있다. 최용달이 기술하고 있듯이, 경찰의 임무는 단지 범죄를 관할하는 것만이 아니라 토지개혁법, 노동법과 남녀평등법, 그리고 산업국유화와 같은 국가정책들을 포함하는 것이었다. 결과적으로 경찰은, 식민조선의 경찰보다는 2차 세계대전 이전의 일본 경찰의 임무와 거의 흡사한 광범위한 사회적 임무를 부여받았다. (p. 324.)
그러나 '프롤레타리아트' 개념은 매우 느슨하게 정의되었다. 민족에 대한 사랑과 일본 제국주의 및 그들의 주구에 대한 증오가 엄밀한 계급적 배경보다 더 중요한 것이었다. (중략) 소련식 사회주의가 아닌 반식민적 민족주의가 북한 공산주의문학의 중요 주제였고, 이후 북한정치 전반의 가장 중요한 주제가 되었다. (p. 105.)
다시 말해 이 분석에 따르면 북한 문화는 소련의 지배라는 사실을 단지 위장만 하는 "형식상의 민족주의, 내용상의 사회주의"였다. 그러나 한국전쟁 이후 이어진 북한의 발전은 북한에서의 민족주의와 소련식의 사회주의 사이의 관계가 1940년대 후반에서조차 그 반대라는 사실을 보여준다. 그렇지 않다면 적어도 1945년과 1950년 사이에 보이는 민족주의적 표현의 발전은 전쟁 이후에 북한이 소련으로부터 자율성과 고유성을 확보하도록 했다고 볼 수 있다. 1960년대 후반 무렵, 이러한 고유성은 주체 사회주의라는 형태 또는 북한이 말하는 '우리식 사회주의'라는 모습을 띠어갔다. (후략) (p. 299.)
5-2. 여기서 와다 하루키의 '북조선'에서 풀리지 않았던 한 가지 의문, 항일유격대 식으로 산다는 것은 대체 어떻게 사는 것이고 그것이 전사회적인 지향으로 관철될 수 있었던 과정은 어떠했는가 라는 질문에 대해 어느 정도 답변할 수 있겠다. 적어도 상층 정치high politic의 수준에서 항일유격대 경험이라는 것은, 첫째 항일소비에트에서의 농촌개혁 경험이 북한에서 관철되는 과정에 녹아들어갔고, 둘째 좌경화 오류에 대한 비판이 대중지향적/인민전선 전술로 구현되었다고 보면 될 것 같다. (물론 의문이 완전히 해소된 것은 아니다. 이 책에서는 항일유격대 경험을 1/n으로 간주하고 있는데, 이게 어떻게 전체 북한 사회의 지향으로 확장되었는지, 그리고 인민 개개인의 도덕 수준에서의 항일유격대 경험이 무엇인지라는 질문이다. 이 의문은 또 다음 언젠가로 남겨둬야겠다.)
6-1. 북한이 단기간에, 특히 남한보다도 훨씬 빨리 국가 건설에 성공할 수 있었던, 그래서 국가 수립 2년이 채 되지 않아 남한은 전면 침공할 수 있는 역량을 기를 수 있었던 것은 아마도 이러한 체제형성사가 있었기에 가능했을 것이다. 38선 이남의 남한정부가 온갖 내홍에 시달리며 쩔쩔매고 있을 때 북한은 벌써 총동원이 가능한 정도의 안정적 국가를 건설해냈다.
6-2. 하지만 탈식민의 관점에서 볼 때, 그것은 과연 성공이었을까. 저어기 위에서 말했던 양 극단의 관점 사이에서 찰스 암스트롱이 잡은 위치는 여기에서 드러난다. 찰스 암스트롱이 보기에 북한은 소련의 단순한 모방은 아니었고 심지어는 민중의 광범위한 지지와 동원을 끌어내기도 했지만 그것이 결코 성공으로 낙착되지는 않았다. 오히려 그것은 과거의 식민지 유산으로부터 완전히 결별하지도 못했고 기존의 사회적 위계를 완전히 뒤집지도 못했다. 북한 사회가 그 이후, 지금까지 겪어온 그 많은 사연들은 아마도 안정성을 얻는 대신 사회적 역동성과 유동성 포기했기 때문은 아닐랑가.
일제 식민지의 '잔재'를 청산하는 것은 새로운 정권이 가장 자주 언급했던 목표 중 하나였다. 그러나 일제 식민통치의 유산은 모호하다. 한편으로, 북한은 과거 식민지 관료, 경찰, 군대를 제거하고, 이들이 예전의 자리로 되돌아가는 것을 막았다는 점에서, 남한보다 훨씬 더 성공적이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일제 부역자들에 의해 구축되지는 않았지만, 식민지 경험을 토대로 형성된 것이었다. (중략) 새로운 정권에서 군사적 동원을 포함한, 대중 동원은 비록 정치적 내용이나 지도체제는 달랐지만, 일제하 사회적 동원의 연속선상에 있다고 볼 수 있다. (후략) (p. 383.)
북한을 세운 사람들의 목적이 조선 땅에 소련의 충직한 모방을 세우는 것이었다면, 그들은 실패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의 목표가 조선에 깊고 오래 뿌리내릴 공산주의 국가를 세우는 것이었다면, 소련점령시기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세운 유격대, 간부, 농민, 그리고 지식인들은 확실히 성공했다. 이것은 독특하고, 색다른 '조선'의 특색을 지닌 것이었고, 참혹한 전쟁, 수십 년간 남한 및 미국과의 대치, 장기간 지속된 경제위기, 기아, 그리고 소련을 포함한 거의 모든 공산주의 국가들의 붕괴에서도 북한을 살아남게 만들었다. 좋은 상황보다는 주로 나쁜 상황이겠지만, 북조선혁명은 지속될 것이다. (pp. 386~387.)
덧. 다 읽고보니 이 책과 와다 하루키의 '북조선, 권헌익과 정병호의 '극장국가 북한'은 뭔가 북한 트릴로지 같다. 나란히 두고 읽으면 서로 보완하는 내용이 꽤 있다.
- 'Class in itself'와 'Class for itself'의 번역은 좀 어색해 보인다. 앞에 있는 "마르크스주의의 용어로"라는 표현을 생각하면 '즉자적 계급'과 '대자적 계급'이라는 좀 더 정확하지 않나 싶다. 물론 이렇게 번역하면 더 이해가 쉽기는 하지만 이 책을 읽을 정도의 사람이 이 정도도 모를리는 없고... 이것을 포함해서 이 책에는 번역과 교열 과정에서의 자잘한 실수가 몇몇 눈에 띈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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