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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농담이다 (김중혁, 민음사, 2016.)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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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농담이다 (김중혁, 민음사, 2016.)

Dog君 2016. 11. 3. 10:26


1. 김중혁을 그저 위트 있고 재기 발랄한 문장을 쓰는 사람이라고만 생각했고 이 책도 역시 그런 문장으로 이루어져 있다. 거기에, 이렇게 콧날 시큰한 소설을 쓰는 사람이라는 것도 보태야겠다.


2. 사람과 사람을 이어주는 건 뭘까. 전세계 인류가 단체로 엑스맨 유전자를 물려받아서 텔레파시로 의사소통을 하거나 아니면 교육과정이 혁신적으로 개혁되어서 독심술을 초등학교 필수과목으로 배우거나 하지 않는 이상, 사람과 사람을 잇는 것은 결국 ‘언어’다. 내가 나를 표현하기 위해서도 언어를 사용해야 하고, 내가 다른 사람을 이해하기 위해서도 또 언어를 통해야 한다. 왜 저기 ‘언어적 전환’이라고, 세상을 바라보는 우리의 인식구조 자체를 규정짓는 것이 곧 언어라고 주장한 그 뭐시기 소쉬르인지 소실점인지 이름만 들어서는 언어학시간인지 미술(혹은 도면그리기)시간인지 헷갈리게 만드는 아저씨가 주장한 바도 있고 말이지.


3. 언어 중에서 다시 범위를 좁히자면, 글보다는 말이겠지. 산중암자에 틀어박혀 하루 종일 말 걸 상대 하나 없이 글만 쓰는 사람 아닌 다음에야 글보다는 말의 비중이 훨씬 클테니까. 고래적부터 내려오는  ‘염화미소’니 ‘이심전심’이니 ‘불립문자’니 하는 불가의 말이 있고, 최근 들어서는 언어의 불완전성을 이야기한 포스트 머시깽이 어려운 이론들도 있지만(이 소설의 주요 인물 중 하나가 ‘강차연’이다. ‘차연’이라니, 이거 참 의미심장하지 않은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국 우리가 다른 사람과 연결하기 위해 사용해야 할 것은 ‘말’ 아니겠나. 우리가 죽어서 남기는 것도 내가 한 말들일 것이요, 내가 다른 사람에게 해 줄 수 있는 것도 결국 말 뿐이니, 평소 주변 사람들에게부터 좋은 말 많이 하고 살아야겠다고 생각.


(전략) 제가 평생 죽지 않고 살아야 한다면, 아, 생각만 해도 끔찍한 일이긴 하죠? 그래도, 어쩔 수 없이 그래야 한다면, 저는 어디에 살 건지 정했습니다. 저는 말 속에 살 겁니다. 말 중에서도 농담 속에서 살 겁니다. 하나님은 농담을 거의 안 하시지만, 음, 기억나는 게 없긴 하죠? 하나님 농담만 따로 묶어서 책 내려고 준비하고 있는 중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저는 농담속에서 살면 좋을 거 같습니다. 형체는 없는데 계속 농담 속에서 부활하는 겁니다. 죽었는 줄 알았는데 농담에서 또 살아나고, 평생 농담 속에서 사는 겁니다. 형체가 없어도, 숨을 못 쉬어도 그렇게 살면 좋겠어요. 비참한 사람들끼리 하는 농담들 속에도 있고, 계속 울음을 터뜨리다가 갑자기 터져나오는 농담들 속에도 있고, 여자와 어떻게 한번 해 보려고 작업하는 남자들의 농담들 속에도 있고, 오랜 친구들과 함께 웃고 떠느는 여자들의 농담들 속에도 있고, 모든 농담들 속에 스며 있었으면 좋겠어요. 그럼 죽어도 여한이 없죠. 아니지, 참, 죽지 않는 거죠? 평생 거기서 살 겁니다. 나중에 농담할 일이 있으면 농담 속을 잘 들여다보세요. 거기에 제가 살고 있을 수도 있습니다. 부사와 전치사 사이에, 아니면 명사와 동사 사이에 제가 살고 있을 겁니다. 지금까지 농담이었고요, 저는 토요일에 다시 찾아오겠습니다. (pp. 194~195.)


  관제 센터 들리나?

  낙하산……, 낙하산이 보인다. 아니다. 잘못 본 것 같다. 해파리 같다. 멀어지다가 가까워졌다가, 사라졌다. 다시 나타났다. 별의 잔해 같기도 하고, 해파리 같고, 낙하산처럼 생겼다. 누군가 아래로 떨어지고 있다. 아니다. 여긴 떨어지는 게 없지. 멀어지는 거다. 가까웠는데 점점 멀어지고 있다. 우주복을 입은 채 어둠 속에 떠 있다. 여기서는 어둠이 들여다보인다. 어둠 속에 아무런 빛이 없는데도 어둠 속을 볼 수 있다. 손을 뻗으면 어둠 속으로 모든 게 빨려 들어갈 것 같다. 나는 소멸된다. 소멸이라는 단어가 적당할 것 같다. 남은 산소량은……, 아니다, 신경 쓰지 않겠다. 모두들 안녕, 시스템이 꺼질 때까지 혼자 떠들어야겠다. 어쩌면 나는 죽는 게 아니라 우주 공간 속에서 영원히 소리로 남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소리는 전달되지 않겠지만 소리의 덩어리가 되어 곳곳을 날아다닐 것이다. 모두들 안녕, 내 소리를 듣고 있는 사람이 있다면, 안녕. 우주인들끼리 하는 농담이나 하면서 소멸되는 것도 괜찮겠다. 내 동생처럼 농담을 잘할 자신은 없지만 말이다. 외계인들이 나를 발견해서 소리를 들을 수 있다면 좋겠다. (pp. 204~205.)


  송우영은 잠자코 세미의 목소리를 들었다. 죽은 어머니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세미는 늙은 여자의 목소리, 조금 아픈 여자의 목소리로 편지를 읽고 있었다. 송우영은 세미가 신기했다. 어머니를 만난 적이 없는데, 비슷한 목소리를 내는 게 놀라웠다. 송우영은 강차연과 소파에 앉아서 말없이 편지 내용을 들었다. 두 사람 다 편지 내용을 알고 있었지만 처음 듣는 내용인 것처럼 몰두해서 들었다. 세미의 호흡과 발음과 감정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세미의 목소리는 하나의 독립된 우주처럼 막을 만들어 냈다. 막 속에 숨낳은 생명채게 서식하고 있었다. 물을 마시며 잠깐 쉬는 동안에도 다른 말은 하지 않았다. 녹음실 바깥 사람들은 전혀 의식하지 않고 오직 편지에만 몰두했다. 엔지니어 정훈도 별말 없이 기기만 조절하고 있었다. 세미는 한 시간 반 동안 거의 쉬지 않고 편지를 읽었다. 마지막 편지를 읽고 나서 깊은 한숨을 쉬더니, 세미는 갑자기 울음을 터뜨렸다. 세미는 급하게 마이크를 껐지만 울음소리가 마이크를 타고 바깥으로 흘러나온 뒤였다. 세미의 울음소리를 듣고는 녹음실 바깥에 있던 강차연까지 울기 시작했다. 송우영은 울 수 없었다. (pp. 218~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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