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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군, 만들어진 신화 (송호정, 산처럼, 2004.)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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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군, 만들어진 신화 (송호정, 산처럼, 2004.)

Dog君 2017. 1. 30. 19:39


1-1. 때마침 명절이다. (요즘에는 덜 하긴 하다만은) 집에 가면 유독 자기 집안 내력을 줄줄 늘어놓으시면서 '우리 집안이 말이야, 언제언제 무슨무슨공 할아버지 몇 대손으로 뼈대 있는 집안인데 말이야, 누구누구 때 멸문지화를 입어서 집안이 홀딱 디비져서 지금 집안 꼬라지가 이리 됐니라...'하는 분이 한 분 정도는 계시지? 나는 한 번 뵌 적도 없는 할아버지의 할아버지의 할아버지의 삼촌의 오촌당숙 되는 분이 정승 벼슬을 지내고 오랑캐를 몰아낸 게 지금 내 먹고사는 것과 무슨 관련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은, 그래도 그런 '신화'가 누군가에게는 지금의 고단한 삶을 견딜 수 있게 하는 힘이 되어줄 수 있다면, 그게 그렇게 나쁜 일인 것만은 아닌 것 같다.


1-2. 단군할아버지가 세우셨다는 한반도 최초의 국가인 고조선의 땅덩어리를 이따시만하게 크게 그려놓고, 한사군의 위치를 가리키는 손가락이 어찌어찌 평양 근처로 가기만 해도 당장 입에서는 거품을 무시고 손목으로는 뒷목을 잡으시는 아저씨들 이야기도 그런 면에서 보면 아주 이해가 안 가는 것은 아니다. 식민지 시기에 만들어졌던 '식민사관'은, 조센징들이라는 것들은 다른 나라가 쳐들어오면 아무 것도 못 하고 굽신거리기나 했던 못난 놈들이니까 일본의 지배를 받는 것이 마땅하다는 주장을 하기 위한 근거로 활용되었는데, 고조선의 땅덩어리를 이따시만하게 크게 그려놓으면 우리 할아버지들이 그렇게까지 못난 놈들은 아니라는 주장이 되는 셈이니까. 물론... 중간에 고구려 백제 신라 고려 조선 전부 다 빼먹고 2000년도 더 전에 망했다는 나라의 땅덩어리가 얼마나 큰지가 식민사관 극복과 대체 무슨 관련이 있는지는 여전히 의문이지만.


2. 단군/고조선에 대한 송호정이 이 책에서 내내 강조하고 있는 것은, 신화로서의 단군/고조선과 역사로서의 단군/고조선을 구분하자는 것이다. 신화는 "원시/고대인들이 자신들의 정신적 논리 구조에 따라 어떤 사실을 표현하고 설명하는 방식"(p. 118.)이다. 그러니까 환웅이 풍백과 우사와 운사를 거느리고 이 땅에 강림하사 곰을 인간으로 만드는 외계문명급 유전자 조작을 행하시고 그와 혼인하여 우리 민족을 만드시었...을리가 당연히 없잖은가. 물론 송호정은 단군/고조선 신화가 할 수 있는 역사적 역할을 깡그리 무시하지는 않는다. 단군 신화가 처음 문자화된 것이 외적의 침입에 몸살을 앓던 고려시대였고, 단군/고조선 신화는 식민지 시기의 독립운동에도 큰 영감을 주었으니까.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당장 이 나라가 백척간두의 지경에 이른 것도 아니잖아. 그렇게 나라가 걱정이면 차라리 촛불을 들고 광화문에 한 번이라도 더 나가시는 것이 어떨지.


3-1. 현존하는 고조선 관련 사료를 다 긁어모아봤자 몇 글자 안 된다고 한다. (심재훈은 자신의 책 "고대 중국에 빠져 한국사를 바라보다"에서, 고대사에 대해 누구나 말을 보태고 있는 사태의 원인이 여기에 있다고 지적한 바 있다;;;) 그 때문에 역사로서의 고조선에 대해 우리가 아는 것은 극히 제한적이다. 송호정에 따르면, 대략 기원전 8~7세기 정도는 되어야 고대 문헌에서 '조선'이라는 이름이 발견되고 기원전 4세기에 비로소 '초기 국가'라고 간주할만한 실체가 감지되는 정도일 뿐 그 당시의 구체적인 역사상과 사회상이 어땠는지를 소상히 알기는 어려운 형편이다. 특히 이른바 '재야사학'에서 쏟아내는 고조선 이야기들은 학문적 객관성을 상실한 경우가 많다고 한다. 생각나는대로 하나씩 간단히 살펴보자면.


3-2. 고조선의 문화적 원류로 꼽히는 홍산 문화니 하가점 하층 문화니 하는 것들은 일단 시간적으로 고조선과 거리가 너무 멀기 때문에 고조선과 직접 연결시키기 어렵고.


3-3. 고조선의 영역과 곧잘 동일시되는 비파형 동검은 당시 중국 동북 지역에 거주했던 여러 부족/종족/민족들 사이에서 흔히 사용되었던 물건이기 때문에 그것의 출토 범위로 고조선의 영역을 말하기는 어려운 데다가, 심지어는 일본 열도에서도 출토되는 것이고. (그런데 바로 어제 봤던 KBS의 "한국사기"라는 프로그램에서는 당당히 비파형 동검을 고조선만의 특징적인 유물인 것처럼 말하고 있다. 그리고 또 놀라운 것은... 바로 그 다음에 송호정 교수의 인터뷰를 이어 붙였다는 것;;;)


3-4. 고조선의 영역에 대해서는 과연 초기 청동기시대에 그 넓은 영토를 지배한 국가가 존재할 수 있는지 의문이고. (그나마도 대부분은 농업생산을 기대하기 어려운 땅이다.)


3-5. 고조선에 대한 거의 대부분의 이야기는, 짧게 잡아도 수백년 가량 지속된(백번 양보에서 기원전 2333년에 건국되어 기원전 108년에 망했다고 본다면, 대충 신석기시대부터 초기 철기시대까지다;;;) 고조선 사회를 단일한 성격이었던 것처럼 이야기하고 있고.


4. 중국 고대사 전공인 심재훈은 "고대 중국에 빠져 한국사를 바라보다"라는 책에서 우리가 우리의 고대사를 이야기할 때 누가 보아도 객관적 타당성을 지닐 수 있어야 한다고 했는데, 신화로서의 단군/고조선과 역사로서의 단군/고조선을 구분하자는 송호정의 이야기도 그와 같은 맥락인 것 같다. 신화로서의 단군/고조선이 가진 의미 때문에, 역사로서의 단군/고조선까지 비틀어 왜곡시키면, 그게 바로 우리가 교과서에서 그렇게 비웃었던 "화랑의 후예" 아닌감.


  단군을 중심으로 찬란한 우리 역사를 부르짖는 사람들은 오히려 과거 우리 역사의 모습에 자신감을 상실한, 어찌 보면 열등감에 사로잡힌 국수주의자와 비슷하다. 전문 연구자나 재야사학자 모두 이러한 소모적 논쟁에 시간을 낭비해서는 안 된다. 우리 역사에 대한 관심과 열정이 그렇게 크다면 연구자나 일반 시민 모두 한국 고대사의 특성과 고대사 전체의 체계를 잡는 쪽으로 눈을 돌려야 할 것이다. 과거에 땅덩어리가 컸고, 우리 역사가 세계에서 가장 오래됐다는 환상에 집착하는 데서 벗어나 냉정한 역사 인식이 필요한 때이다. (p. 2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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