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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라시아 견문 2 (이병한, 서해문집, 2018.)

Dog君 2019. 1. 21. 11:33


1. 저자의 전작인 『반전의 시대』와 『유라시아 견문 1』을 모두 읽은 나로서는, ‘서구’와 ‘근대’에 의해 각하되었던 지적 전통으로부터 새로운 길을 찾자는 저자의 문제의식이 아주 새롭지는 않다. 작금의 ‘근대’가 (어떤 식으로든) 위기에 처했다는 저자의 진단과, 비서구의 지적 전통을 너무 쉽게 폐기해버렸다는 저자의 인식과, 진보와 보수의 구도로는 작금의 정치상황을 온전히 이해할 수 없다는 저자의 주장에, 대체로 공감한다. 이 책의 주장을 단지 '낭만적 복고주의’로 몰아세우는 것은 부당하다고 생각한다. 이 책이 주장하는 것은 과거에 대한 향수가 아니라 다가올 미래에 대한 적극적인 대안 모색이기 때문이다. 이 책은 ‘서구식’ 혹은 ‘근대식’ 정치체제를 폭발적인 경제성장과 풍부한 지하자원에 의존했을 때나 가능했던 일시적인 현상으로 보는데, 그렇기 때문에 저성장과 자원부족이 보편화될 향후의 세계에는 그에 따른 정치적 변화가 수반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 ‘민주주의 대 전체주의’의 대결로 잘라 말하기 어렵다. 아시아의 냉전 또한 자유주의/자본주의와 사회주의/공산주의의 다툼이 전부가 아니었다. 그런 양분법이야말로 두터웠던 역사를 말소해버리는 이데올로기이자 프레임이다. 그래서는 동아시아의 대분단체제도, 남아시아의 대분할체제도 제대로 살필수가 없다. 여전히 20세기는 올바른 이름을 갖지 못했다. (…) (53쪽.)


  한국도 미래의 영감을 스스로의 역사에서 구할 때가 되었다. (…) 고려는 삼국시대를 정리했다. 조선은 고려시대를 갈무리했다. 그런데 대한민국은 스스로의 관점과 언어로 조선을 마감하지 못했다. 그래서 민주화 이후 갈피를 잃은 것이다. 백 년간 따라하고 따라갔을 뿐, 독자적인 길을 개척하지 못한 것이다. (…) (90~91쪽.)


  트럼프 현상 또한 민주주의가 쇠퇴해서 일어나는 것이 아니다. 가면 아래 민낯이다. 백 년도 안 된 이 새파란 제도는 20세기 후반 줄곧 오작동했다. (…) 그럼에도 외면하고 간과했을 뿐이다. 고도성장이 지속되었기 때문이다. 경제발전의 풍요가 민주주의의 실상을 가렸던 것이다.

(…) 저성장 혹은 성장 없는 살림살이가 일상이 되어가고 있다. 아버지만큼 잘사는 아들이 나오기 힘든 시대로 진입한다. 20세기만큼 풍요로운 세기 또한 도래하고 어려울 것이다. ‘자연 상태’로 되돌아간다. 그럴수록 민주주의의 오작동은 더 빈번하게 일어날 것이다. ‘인간 해방’의 욕망을 충족시켜줄 자원이 한정되어 있기 때문이다. 욕망의 절제를 미덕으로 삼고, ‘자유인’을 동경하기보다는 성인聖人을 존경했던 정치문화가 재차 기지개를 펼 것이다. 인권Human Right을 내세우기보다는 인성人性 도야가 강조될 것이다. 목전의 내 이익을 대변해주겠다는 사람보다는 나의 양심을 충족해주고 도덕성을 고무해주는 인물을 지도자로 선호하게 될 것이다. (78~79쪽.)


(…) 석유에만 기대어 일시적으로 솟아난 나라들이 과연 22세기에도 지속될 것인가? (…) 나로서도 몹시 회의적이다. 20세기와는 달리 21세기, 22세기에는 지하자원보다는 짓아자원, 그중에서도 전통과 역사라는 ‘재생 가능 자원’이 더욱 관건적일 것 같기 때문이다. 걸프만의 ‘테마파크’들을 작위적으로 세웠던 영국과 프랑스는 이미 쇠락했고, 그들을 계승했던 미국조차도 갈수록 힘이 떨어지고 있다. 아무래도 페르시아제국의 후신 이란(과 오스만제국의 후예 터키)이 주도하는 새로운 ‘이슬람의 집’이 구축되어 가면서 ‘중동’이라는 명칭 자체를 지워갈 공산이 크다고 하겠다. (500쪽.)


(…) 200년 새파란 근대문명과는 비교를 불허하는 장구한 문명적 유산이 민중의 생활세계에 존속하고 있었다. 그 거대한 뿌리가 민주주의의 장착과 더불어 도저하게 재귀하고 있는 것이다. (…) 일각에서는 근본주의와 정통주의로 비뚤어지고 있다. 또 다른 쪽에서는 탈근대적 정치로 새 물결을 만들어가고 있다. 반동과 반전이 커다랗게 교차한다. 어느 쪽이 대세가 될지 장담하기는 아직 힘들다. 다만 정/교 분리, 성/속 분리의 ‘근대 정치’가 영영 지속가능하지는 않을 것 같다. 혼과 백을 재결합하는 제2의 민족해방운동이 유라시아 도처에서 굴기하고 있기 때문이다. (…) 주체성 확립(독립)에 이어 정체성 재건(중흥)이 시대정신이 되어간다. 정치적 건국 다음의 문화적 건국, 복국復國을 향해 진화하고 있다. (141쪽.)


2. 문제는 그 다음이다. 대체로 1.의 분석까지는 공감할 수 있는데 (솔직히 말하면, 그의 주장을 반박할 정도로 앎이 넓지 못한 거지만 ㅋㅋㅋ) 그렇다고 그에 대한 처방까지 공감하느냐 하면 거기까지는 아직 잘 모르겠다는 거다. 나는, ‘서구’와 ‘근대’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유라시아의 지적 전통으로 ‘돌아가는’ 것은 불가능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 책은 ‘국민’과 ‘국가’보다 훨씬 더 전에 훨씬 더 큰 규모로 존재했던 ‘문명’에 주목하고, 그것이 가졌던 포용성을 되살려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렇다면 이 책의 주장에 대한 찬반은 아마도, ‘문명’에서 ‘국가’로의 이행 과정이 불가역적인지 가역적인지에 따라서 갈릴 것 같다. 나는 불가역적이라고 보는 편이다. 아직까지는.


(이병한-옮겨쓴이) 그 인도의 마음, 인도 문명의 요체는 힌두 문명입니까?

(샤시 타루르-옮겨쓴이) 아닙니다. 고대 힌두의 전통은 여전히 살아 있지만 인도 문명의 일부일 뿐입니다. 이슬람 문명의 영향이 천 년 가까이 있었습니다. 당장 인도의 타지마할 아닙니까. 이슬람 건축의 절정이 인도에 있습니다. 더불어 영국의 식민 통치가 200년이나 지속되었습니다. (…) 이 누천년의 역사가 축적된 복합문명이 오늘의 인도 문명입니다. 힌두 국가Hindu Nation가 아니라 하이브리드 국가Hybrid Nation가 더 어울리는 접근법이에요.

그 복합문명이 가능한 바탕에 힌두교가 있는 것 아닐까요? (…)

인도 문명의 기저에 이슬람이나 기독교가 깔려 있었다면 현재의 일도가 보여주는 그 놀라운 다양성과 복수성을 담지하기는 어려웠겠죠. 힌두교는 교황도 없고 메카도 없는 종교입니다. 힌두식 이룡일도 없고요. 위계적이지도 않고, 교조적이지도 않습니다. (318~319쪽.)


3. '국민/민족국가’는 이미 엄연히 존재하고 있는 질서이고, 그 질서의 규정력은 생각보다 훨씬 막강하다. 그냥 없었던 셈 치고 과거로 돌이킬 수가 없는 거다. (‘국민/민족국가’ 안 겪어본 역사 삽니다...가 안 된다고.) 무슨 말인고 하니, 이 책에서 예로 들고 있는 몇 가지 주목할만한 변화들 역시 ‘국민/민족국가’의 틀 속에서 이뤄지고 있다는 거다. 아마도 이 책에서 가장 논쟁적인 부분은 인도의 모디와 터키의 에르도안에 대한 내용일 것이다. 이 책에서는 모디와 에르도안의 정치적 실천들을 힌두와 이슬람 문명의 회복이라는 관점에서 접근한다. 하지만 주지하다시피 모디와 에르도안의 정치는, 종교적 전통의 외피를 썼을 뿐 지극히도 세속적이고 배타적인 국가주의/민족주의로 보는 것이 훨씬 더 지배적인 해석 아닌가. 당장 이것부터 설득력 있게 반박하지 못한다면, 이 책의 주장이 온전하게 설득력을 얻기는 어렵다.


4. 물론 이 책이 그러한 위험을 모르는 것은 아니다. 책 곳곳에 그에 대한 우려를 심어두기는 했다. 하지만... 적어도 내가 아는 바에 따르면, ‘기대’보다는 ‘우려’가 좀 더 현실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이 책은 저성장과 경제위기 때문에라도 근대 이전의 ‘문명’에 대한 발전적인 회귀(혹은 재발견)가 필요하다고 말하지만, 지난 역사를 돌이켜보면 저성장과 경제위기는 언제나 퇴행적이고 배타적인 방식으로 국민국가의 이기심을 더 자극하곤 했잖은가.


  역사는 민족주의적 본능이 국제주의적 의식보다 훨씬 더 강력한 대중적 힘을 갖는다는 것을, 심지어는 사회주의 사회에서조차 그렇다는 것을 입증한 바 있다. 로자 자신 또한 "본능적 충동은 교육으로 얻은 모든 지혜보다 강하다"고 토로한 바 있지만, 정작 이 교훈을 민족문제에는 적용시키지 않았다. (임지현, 「로자 룩셈부르크와 민족문제」, 『역사비평』 42, 1998.)


ps. 하지만 나는 여전히 저자 이병한의 향후 작업에 지대한 관심이 있고, 앞으로도 충실히 따라갈 것이다. 동의 여부와 무관하게, 생각의 폭을 확장하고 많은 영감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 친구는 히잡을 쓸 때도 있고, 긴 머리칼을 풀어헤치는 날도 있었다. 하루는 왜 답답하게 히잡을 쓰고 운동을 하느냐고 물었다가 된통 혼이 났다. ‘무슬림 페미니스트’이기도 했던 것이다. 조금도 갑갑하지 않단다. (…) 답답한 것은 너 같은 엉큼한 수컷일 뿐이라고 반격한다. 자신은 도리어 자유롭다고 했다. 흘낏거리는 남성의 끈적끈적한 시선에서 벗어날 수 있기 때문이란다. 유행에 휩쓸리지도, 소비주의에 끌려 다니지 않을 수도 있다고 했다. (…) 자신의 신체를 남성의 시선을 매개한 자본의 논리에 정복당하지 않겠다는 여성적 주체성의 발현이라는 것이다. 본인이 원할 때, 원하는 장소에서, 원하는 남자 앞에서만 머리를 푼다. (…)

(…) 남을 만족시키는 것이 아니라 나를 충족시키는 것이며, 남의 시선으로 의식을 분산하는 것이 아니라 나 자신에게 집중하게 된다는 것이다. 히잡을 쓰는 날이면 더더욱 자신이 무슬림 여성이라는 자각을 더 하게 된다고도 했다. 무슬림적 정체성을 드러냄으로써 반듯하고 경건하게 살겠다는 다짐을 보태게 된다는 것이다. (563~56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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