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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명의 말들 (후지이 다케시, 포도밭, 2018.)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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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명의 말들 (후지이 다케시, 포도밭, 2018.)

Dog君 2019. 1. 21. 13:54


1-1. 거의 무조건 산다 하는 특정한 주제나 형식의 책이 있다. 역사학 연구자자가 쓴 에세이나 칼럼집이 그 중 하나다. (무조건 다 사면 통장잔고가 배겨나겠나 싶을 수도 있겠지만 걱정마라. 그런 책 별로 없다.) 그 중에서도 SNS에 쓴 글이거나 나와 나이 차이가 크게 나지 않는 연구자의 글을 특히 좋아한다. 


1-2. 이런 책에 꽂힌 것은 재작년 정도였던 것 같다. 지금도 여전히 나의 화두인, ‘역사학자(혹은 역사학을 연구하는 사람)의 사유’라는 것이 무엇인지 궁금하기 때문이다. 나처럼 말만 번드르르하고 게을러터진 녀석 말고, 진중하게 문서에 천착하는 성실한 연구자만이 도달할 수 있는 어떤 경지가 있을 것이고, 그 경지에서 세상을 바라보면 더 많이 더 깊이 보이는 것이 있으리라고 믿는다. 그리고 그것에, 역사학이 세상에 던져줄 수 있는 어떤 통찰이 있으리라고도 믿는다. 나는 내가 하는 공부가 나 자신이 아닌 누군가(더 나아가서는 사회)에게도 도움이 된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라도 ‘역사학자의 사유’가 무엇인지 너무 궁금하다. 


2. 이 책이 나에게 보여준 ‘역사학자의 사유’는 현실에서는 보이지 않는 가능성을 보아내는 능력이다. 그 가능성이란, (몇 개의 단어에 가두어 표현하기는 어렵지만 그래도 굳이 그렇게 하자면) 부조리한 현실의 권력관계를 전복할 수 있는 가능성, 그리고 한 사람의 인간이 온전히 한 사람의 인간으로서 존중받을 수 있는 가능성 정도가 될 것 같다. 이 책의 저자인 후지이 다케시 선생님은 줄곧 그 가능성이란 무엇이고 어디에서 찾을 수 있으며 어떨 때 그것이 꺾이는지를 줄곧 이야기한다. 눈에 보이는 현실 속에서 선택가능한 정답지를 두고 고민하기보다는, 현실의 언어로는 가둘 수 없는 근본적인 가능성을 사유하고 이야기한다. 


(…) 역사교육의 핵심은 학생들이 자신의 사유를 현재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하는 데 있다. 즉, 자명해 보이는 현재의 질서도 어떤 역사적 과정의 산물이며 그 과정 속에는 현재와 다른 다양한 미래의 가능성이 있었다는 것, 그리고 지금도 그 과정은 진행 중이라는 것을 알게 하는 것이다. 그럼으로써 현재의 단순한 연장이 아닌 미래에 대해 스스로 고민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이 역사교육의 중요한 기능이다. (…) (「헌법에 따른 역사교육?」, 30쪽.) 


(…) ‘유능한 정부’에 대한 기대는 우리의 실제 모습을 외면하는 행위가 될 수도 있다. 누군가가 우리를 지켜준다고 믿고 있는 한 우리는 스스로의 무지와 무능을 깨달을 필요를 느끼지 못한다. 정부의 무능을 탓할 때, 사실 우리는 우리 스스로가 유능해질 기회를 놓치고 있는 것이다. 지금 많은 사람들이 느끼고 있듯이, 우리가 살아가는 데 필요한 의학을 비롯한 지식들은 결코 특정 전문가들만 알고 있으면 되는 문제가 아니다. 또한 그들만이 알고 있으면 되는 문제가 아니다. (…) 필요를 깨닫게 되면 우리도 언제든지 전문가가 될 수 있다. 위기는 우리를 유능하게 만든다. 우리를 무능한 상태로 머무르게 하는 것은 스스로에 대한 불신이다. 정부가 ‘허위사실’ 유포를 단속하겠다고 나서는 이유는 우리가 알아서 정보를 주고받으면서 전문가 집단에 대한 의지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그들은 우리보다 우리의 힘을 더 잘 알고 있다. (「흐린 날엔」, 67~68쪽.) 


  신자유주의를 도입하면서 추진된 이 ‘균형 잡힌’ 역사교육의 목적은 교육을 통해 생겨날 수 있는 ‘편향’된 주체들을 처음부터 봉쇄하려는 데 있다. 그동안 뉴라이트를 비롯한 이들이 진행한 역사 다시 쓰기 작업에서도 핵심을 이룬 것은, 식민지배나 독재와 같이 어떤 적대를 드러내고 감정을 자극할 수 있는 부분을 완화시키려는 것이었다. 그들은 친일이나 독재를 적극적으로 미화하려 했다기보다는, 그것을 어쩔 수 없었던, 담담하게 받아들일 만한 ‘객관적 지식’으로 만듦으로써 학생들 스스로가 주체적으로 고민하고 판단할 여지를 없애려고 했을 뿐이다. 

  민주주의가 끊임없이 새로운 균형을 만들어나가는 역동적 시스템이라고 한다면, 그 역동성을 담보하는 것은 다름 아닌 편향이다. 많은 편향이 생겨나야 사회는 더욱 생동한다. 편향의 억제란 민주주의의 죽음을 의미한다. 균형은 교과서에서 잡는 것이 아니라 교실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균형 잡힌’ 역사교육이란?」, 91~92쪽.) 


  문제는 굴복이라는 행위 자체가 아니다. 어떤 상황에서는 그럴 수밖에 없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자신이 굴복이나 패배를 당했다는 것을 직시하고 있는 한, 승부는 끝난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새로운 형태의 저항을 만들어내는 기점이 될 수도 있다. 하지만 강요당한 굴복을 합리화하기 시작한 순간부터 진정한 패배가 다가온다. 어떻게 보면 패배의식이란 패배를 외면하는 데서 비롯되는 것이다. 계속 패배하고 있는 한 승부는 끝나지 않는다. 승부는 패배를 그만둔 순간에 끝난다. 

  자신의 패배나 굴복을 직시하는 것은 괴로운 일이다. 특히 그것이 먹고사는 문제처럼 일상적인 것일수록 그 불편함은 커진다. 갈릴레이나 친일파에 대한 이해심도 이런 불편함에서 벗어나고 싶은 마음에서 생겼을 것이다. 하지만 그 유혹에 넘어갔을 때 우리는 불편함과 더불어 저항의 가능성도 잃어버리게 된다. (「패배의 경험」, 111~112쪽.) 


3-1. 새삼스럽게도, 이 책을 읽으면서 좋은 문장이란 어떤 것인가를 생각하게 됐다. 예전부터 후지이 다케시 선생님의 글은 정말 좋은 글이라고 생각했는데, 이 책을 읽으면서는 감히 질투가 난다거나 부럽다거나 하는 생각조차 들지 않게끔 하는 글이라는 느낌을 받았다. 뭐랄까, 던지고 싶은 메시지가 확실하니까 그에 따라 문장도 말끔하다는 느낌이랄까. 뭐 암튼 왜 이게 좋은 글인지는 여전히 잘 설명 못하겠지만 나처럼 흐리멍덩한 사람에게서는 찾아볼 수 없는 명료함 같은 것이 느껴졌다. 


3-2. 물론 그 ‘메시지의 확실함'을 예전에도 몰랐던 것은 아니다. 신문에 연재하셨던 칼럼을 간혹 읽곤 했으니까. 이제 와서 고백하자면, 사실 그 때는 너무 근본주의적이지 않나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 아니 뭐, 그렇게까지 철저하게 이야기하실 것 있나... 하는 생각 말이다. 하지만 글들을 모아 한 권의 책으로 엮으니, 짧게 읽을 때는 느끼지 못했던 다른 호흡이 느껴진다. 내가 근본주의적이라고 곡해했던 것들은, 저자에게는 절대로 양보해서는 안 되는 최소한의 조건이었다. 그 최소한의 조건이 있고 없고의 차이가 지금은 아주 작은 것처럼 느껴지지만, 그 작은 차이는 시간이 흐름에 따라 점점 크게 벌어질 것이고 그 차이는 결국 어느 순간 거대한 낙차로 우리를 위협할테니까. 지금은 그냥 보아넘기기 쉬운 작은 차이에도 눈길을 거두지 않는 섬세한 시선, 아마도 그것이 이 책이 우리에게 주는 중요한 통찰 중 하나가 아닌가 싶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과거에서 현재까지 이어지는 긴 시간을 공부한, 호흡이 긴 자만이 보여줄 수 있는 통찰력일 것이고.


  이 사건을 ‘세월호’라는 고유명사로 부르는 것의 위험성은 여기서 생긴다. 나를 포함해 대부분의 사람들이 세월호라는 배 자체와는 거의 무관하기 때문이다. 세월호, 단원고, 청해진해운과 같은 고유명사를 부각시키는 일은, 마치 그들을 기억하려는 작업처럼 보여도 사실은 망각을 위한 준비 단계로 봐야 한다. 청와대 대변인 입에서 나온 “순수 유가족”이라는 말이 단적으로 보여주듯이, 지금 이 사회를 유지하려는 이들이 노리는 것은 우선 이 문제를 특정 소수의 문제로 한정해 나머지 이들을 ‘일상’으로 복귀시키는 것이다. 그것만 성공한다면 나머지 일은 그야말로 시간이 해결해준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이와 같은 ‘고유명사화’에 저항하면서 기억하는 일이다. 그러기 위해서 고유명사를 빼고 이 사건을 ‘4·16’이라고 부르는 것도 하나의 방법일 수 있을 것 같다. ‘4·16’이라는 시간은 결코 ‘그들’만의 시간이 아니었다. 그 충격으로 일상이 깨지면서 우리 모두가 당사자가 됐다. 우리는 세월호를 공유하지는 않았지만 ‘4·16’은 분명히 공유했다.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죽인 이들만이 아니라 이들의 죽음을 지켜보면서 느낀 우리 자신의 붕괴감이다. 그 암담한 심정, 글픔, 분노가 ‘4·16’이다. (「멈춘 세월, 흐르는 시간」, 15~16쪽.) 


  퀴어축제에서 볼 수 있었던 어떤 모습은 불쾌감을 불러일으켰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불쾌감이 우리 몸에 새겨진 감각을 다시 생각하는 계기가 된다면, 그 불쾌감은 오히려 새로운 사회관계에 출발점이 될 수 있다. (…) (「폐를 끼치며 살기」, 72쪽.) 


(…) 너무나 ‘평화적인’ 촛불집회 모습은 어떻게 보면 이 집회가 일상의 질서를 건드리지 않겠다는 태도 표명처럼 보이기도 한다. 시민들에게 불편을 주지 않는 파업이 별 효과를 내지 못하는 것처럼, ‘착한 시위’는 많은 이들의 호응을 얻기는 쉽지만 그것이 영향을 미칠 수 있는 범위는 제한적이다. 평화롭게 세상이 변하는 것을 비판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무엇이 ‘평화’인지 우리 스스로가 결정하지 못하는 한, 그 평화는 주어진 질서의 별명일 뿐이다. 집회 현장에 배치된 경찰들을 명령을 따르지 않을 수 없는 불쌍한 이들로 보려는 ‘이해심’에는 일상 속에서 명령에 저항하지 못하는 자신의 모습이 투영되어 있는 것은 아닐까? 이렇게 각자의 위치를 고정하고 ‘존중’하는 데서 새로운 사회는 생겨나지 않는다. 

(…) 사회는 명령이 거부될 때 변하기 시작한다. 우리가 광장에 끌리는 것도 거기서는 명령이 통하지 않기 때문이다. 명령이 통하지 않기에 우리는 대화를 시작한다. 이런 관장이 무수히 생겨나 일상을 침범하는 날을 새해에 상상해본다. (「더 많은 광장을!」, 143~144쪽.) 


  대의제 민주주의는 동일성의 논리를 그 핵심으로 삼는다. 한 명의 대통령이 국민 전체를 대표할 수 있다는 것도 ‘국민 전체의 의지’라는 것이 존재하고, 그것을 대통령의 의지와 같은 것으로 간주하기 때문인데, 루소가 상정한 ‘일반의지’처럼 대의제라는 ‘무리수’를 정당화하기 위해서는 ‘국민’을 비롯한 어떤 동일성을 설정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런데 대의제 민주주의만을 민주주의로 생각하는데 익숙해지다 보면 이 동일성이 민주주의의 바탕이라는 착각에 빠지기 쉽다. 마치 차이를 지우고 한목소리를 내는 것을 민주주의인 것처럼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합의 자체가 우선시되고 합의 형성 과정은 되도록 줄여야 할 일종의 ‘거래비용’으로 간주된다. 그런 관점에서 본다면, 사회적 논쟁을 유발하는 사안이 기피대상이 되는 것도 당연할지 모른다. 

  그런데 그런 동일성, 또는 ‘합의’를 손쉽게 이루기 위한 방법으로 한국 사회에서 오랫동안 사용된 것이 다름 아닌 차별과 혐오였다. 나치즘이 유대인을 그렇게 이용한 것처럼, 어떤 소수자를 배제하며 철저하게 차별하는 것을 통해서 나머지 이들에게 합의를 강요하는 것은 독재자들이 즐겨 쓰던 방법이다. 툭하면 ‘종북몰이’를 일삼던 박근혜 정권의 정치 방식도 바로 그런 것이었음을 우리는 생생하게 기억한다. 이런 ‘민주주의’를 거부하기 위해 나타난 것이 촛불이 아니던가. (「차별금지법과 촛불민주주의」, 171~172쪽.) 


  이 영화는 어떤 의미에서 한국 사회를 아주 리얼하게 그려냈다. 구청 공무원들에게 늘 기피 대상이었던 ‘도깨비 할매’가 ‘위안부’ 생존자였다는 것이 알려지고 그가 미국에서 증언을 하는 데 어려움이 생기자 그 공무원들이 적극적으로 나서서 그가 증언할 수 있도록 돕는 장면은, 이 사회에서 ‘말할 권리’가 어디에 있는지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재개발 문젤ㄹ 제기할 때는 귓등으로도 안 듣던 이들이 ‘위안부 문제’에 대해서 왜 이렇게 귀를 기울이는 것일까. 물론 ‘위안부 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어떤 활동을 시작하는 것이 나쁜 일일리는 없다. 하지만 그것을 계기로 그들이 다른 민원인들의 말에도 진지하게 귀를 기울이게 되지 않는다면, 거기에 있는 것은 말들 사이에 세워진 위계 뿐이다. (「후 캔 스피크」, 178~179쪽.) 


ps. 저자인 후지이 다케시 선생님과는 구면이다. 몇 차례 세미나를 같이 한 적이 있다. 하지만 그래봐야 오며가며 아는 척을 하는 정도나 되지 깊은 이야기를 나누는 정도는 못 된다. 책을 읽으면서, 예전 세미나 때 좀 더 오래 붙잡아두고 이것저것 더 많이 물어보고 더 많은 이야기를 들어볼 걸 하는 후회를 했다. 서문에서 밝히고 있는 것처럼, 이 책은 글 쓰는 이로서의 후지이 다케시가 남기는 유고집이다. 본인은 글 쓰는 후지이 다케시는 이제 더 없다고 말하지만, 언제가 되어도 좋으니 글 쓰는 후지이 다케시를 다시 만나고 싶다. 읽고 싶은 글이 많고 듣고 싶은 이야기가 많다. 나 말고도 기다리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 


ps2. 2019년의 책의 가장 강력한 후보로 노미네이트.


교정. 

162쪽 17줄 : 활씬 -> 훨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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