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og君 Blues...

제가 좀 별나긴 합니다만... (쥘리 다셰, 이숲, 2017.)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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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좀 별나긴 합니다만... (쥘리 다셰, 이숲, 2017.)

Dog君 2019. 2. 17. 12:27


1-1. 나 스스로를 경계하는 편이다. 나는 내가 가진 습관과 기호가, 사회적 통념에 다소 어긋난다고 생각한다. 사람을 만나고 대화하고 교감하는 능력도 많이 부족하다. 


1-2. 숫자에 대한 가벼운 강박이 있다. 라디오 볼륨을 19나 23으로 하는 경우는 잘 없다. 트레드밀 위에서 2.47km만 뛰고 내려오는 일도 잘 없다. 27은 만화에 나오는 전투기의 뾰족한 수직미익垂直尾翼처럼 느껴진다. 49는 귀퉁이가 한 칸 빠진 8~12칸짜리 큐브 같아서 찝찝하고, 반대로 51은 작은 꼬다리 같은 것이 튀어나온 매끈한 직육면체 같다. 깎아내건 채워넣건 뭐라도 하고 나면 마음이 한결 편해진다.


1-3. 물건에 대한 강박도 있다. 책은 무조건 키 순서로 꽂아야 하고, 가능하면 출판사 별로 모아두기도 한다. 연필은 최대한 잘 깎아두어야 하고, 필통에는 모든 필기구가 무조건 1개씩 있어야 한다. (같은 필기구가 2개 이상 있어서는 안 된다는 뜻이다.) 모든 물건은 있어야 할 자리에 있어야 하고 정해진 규칙대로 배열되어야 한다.


1-4. 대인관계도 많이 서투르다. 기본적으로 말을 많이 하고 싶지 않고, 그렇기 때문에 넉살 좋게 대화를 주도하는 것도 어렵다. 어떤 말을 들었을 때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지도 잘 모르겠다. 솔직히 말하면 의외의 소식(기쁜 소식이건 나쁜 소식이건)을 들었을 때도 타인의 감정에 거의 공감이 안 된다. 지인이 무거운 짐을 들고 갈 때 대신 짐을 들어준다거나 혹은 최소한 짐을 들어주겠다고 말을 건네거나 해야 한다는 생각도 제때 들지 않는다.


1-5. 마음 속의 감정을 어떻게 처리해야 하는지도 잘 모른다. 소개팅에서 만난 상태가 마음에 들 때, 이 마음을 어떻게 표현해야 하는지 아무리 해도 잘 모르겠다. 화산처럼 끓어오르는 마음을 제대로 전달하는 법도 모르겠는데, 그게 또 제대로 전달이 안 되면 그건 또 그거대로 스트레스를 받는다. 그러다가도 막상 상대가 나를 마음에 들어한다는 것을 알게 되면, 그순간 바로 '내가 과연 그럴만한 사람인가, 저게 진심일리가 없다' 하는 생각이 밀려와서는 도망을 친다. 감정을 주는 것도, 감정을 받는 것도, 나에게는 너무 어렵다.


2-1. '나' 자신과 40년째 같이 살면서, 이런 '나'를 어떻게 다뤄야 하는지를 많은 시행착오와 경험을 통해 익혔다. 그 덕분에, 어지간히 친하지 않고서는 내가 저런 사람이라는 것을 알지 못하는 정도가 됐다. (성공이다 ㅎㅎㅎ)


2-2. 숫자 강박은 입 밖으로만 내지 않으면 티가 안 난다. 볼륨 조절은 그래봐야 1~2 정도만 조절하면 되는 것이고, 트레드밀의 숫자 역시 고작 몇십 미터만 더 뛰면 된다. 숫자를 모양으로 인지하는 것 역시 입 밖으로 꺼내지만 않으면 머리 속에서 벌이는 작은 유희일 뿐이고.


2-3. 물건 강박은, 잘만 관리하면 깔끔하게 정리 잘 하는 사람이라는 평판이 되기도 한다. 다른 사람이 내 물건에 손을 댔다면, 그 순간만 잘 참으면 된다. 잘 기억해두었다가 혼자 있을 때 조용히 다시 정리해두면 되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의 물건에 대해서 관여하지 않는 것도 중요하다. 내 것 남 것 가리지 않고 정리하고 싶은 욕구가 불쑥불쑥 올라오지만 그 욕구만 잘 억누르면 된다.


2-4. 사람을 만나고, 대화를 나누는 것도 오랜 훈련을 통해 어느 정도 극복했다. 먼저 말을 거는 경우도 많고, 넉살 좋게 대화를 이어가는 것도 (썩 잘 하지는 못하더라도) 비교적 잘 하게 됐다. 처음 만난 사람에게 농담도 잘 하고, 직장에서도 사람들과 대화하는데 별달리 어려움을 겪지 않는다. 어떤 상황에서 어떤 말을 하고 어떻게 반응해야 하는지도 오랜 경험을 통해 만들어진 매뉴얼 덕분에 잘 대응하는 편이다. 가벼운 놀림이나 갈굼 정도는 허허 웃으며 잘 받아넘기고, 마음에 담아두지도 않는다. 물론 가끔 그 매뉴얼이 작동하지 않는 돌발상황이 생기기도 하는데, 그 때문에 삶을 최대한 안정적이고 규칙적으로 만들어서 돌발상황의 가능성을 줄이려고 노력한다.


2-5. 다만, 1:1 관계에서의 서투름은 여전하다. 마음에 드는 이성과의 관계가 어느 정도 선을 넘어 진전되지 못하는 것, 더 정확히는 어느 선을 넘자마자 그 관계를 부담스러워하며 제대로 유지하지 못하는 것은 여전하다. 심지어 호감을 가지고 나에게 접근하는 이성에 대해서도, 자신감을 가지고 여유있게 대해야겠다고 평소에는 한참 매뉴얼을 만들어두고 연습도 해보지만, 실제 상황에서는 어김없이 머리 속의 운영체제가 다운되어 버린다. 그럴 땐 허겁지겁 전원 케이블부터 뽑아버리기 바쁘다.


3. 나 스스로는 이런 사람이지만, 의외로 대부분의 지인들은 나를 넉살 좋고 밝은 사람으로만 안다. 화술話術도 나쁘지 않고, 농담도 잘 하고, 이것저것 재주도 많으며, 주변 정리도 잘 하는 깔끔한 성격에, 규칙적이고 성실한 사람으로 알아준다.


4. 어쩌자고 이렇게 자기고백을 길게 했나 모르겠는데... 하등 쓸데없는 자기고백을 장황하게 늘어놓은 이유는, 그나마 지금 수준까지라도 될 수 있었던 두 가지 이유를 말하고 싶어서이다.


5-1. 첫번째는 가족과 친구. 나의 저 성격이 정점을 찍었던 것이 대략 중학생부터 대학생 시절까지였던 것 같다. 가족과, 그리고 그 시절에 만난 친구들은 모난 강박덩어리였던 나를 세상과 이어주는 유일한 끈이었다. 너무 늦된 나를 기다려주었고, 모든 것이 서투른 나를 인내해주었다. 스스로를 가두고 세상과 단절되기 쉬웠던 나였지만, 오로지 그들 덕분에 나는 최악의 상황으로 내몰리지 않을 수 있었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도 그들 덕분에 나는 조금씩 더 나아지고 있다.


5-2. 두번째는 나 스스로를 긍정하고 인정하게 된 것. 나의 성격을 일단 있는 그대로 긍정하고 인정하자, 그 다음부터는 나의 습관과 행동이 타인에게 어떤 의미와 모습으로 다가가는지를 객관적으로 이해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 때부터 '나'라는 존재를 어떻게 관리하고 통제할 것인지를 생각할 수 있게 되었다.


5-3. 지극히 모난 성격에도 불구하고 지금의 내가 그나마 무난하게 사회생활이 가능할 정도가 된 것이 이것 덕분이다.


6. 책 관련 팟캐스트에서 이 책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단박에 서점에 들러 이 책을 샀다. 온라인 주문을 기다릴 여유조차 생기지 없었다. 그리고 집에 가는 시간도 아까워서 바로 카페에 들어가 비닐을 뜯고 마파람에 게눈 감추듯 책을 읽었다. 읽다가 내 성격과 그 성격을 둘러싼 지난 몇십 년간의 경험이 떠올랐고, 몇 번씩 콧날이 시큰거리는 것을 꾹꾹 참아눌렀다. 물론 나는 아스퍼거 증후군이 아니다. 하지만 내가 어떤 사람인지를 정확히 알고 그것을 인정하고 나면 거기서부터 모든 것이 시작된다는, 이 책의 메시지는 꼭 아스퍼거 증후군에만 해당되는 일은 아닐 것이다.


(47쪽.)


(12x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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