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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문점은 왜 판문점일까 (3)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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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문점은 왜 판문점일까 (3)

Dog君 2019. 2. 13. 10:23

  한가하고 게으른 역사학도의 잉여력 터지는 TMI 시간. 오늘은 판문점이 휴전회담 장소가 된 이유를 찾아갑니다. 


  1950년 6월 25일에 발발한 한국전쟁의 초반, 전선戰線은 매우 드라마틱하게 변했습니다. 남과 북 양측 모두 각자를 패배 직전까지 몰아넣었고, 인천상륙작전과 중국군의 참전으로 전황이 거듭 뒤집히기도 했으니까요.


  하지만 1951년 중반 정도부터는 전선戰線이 지금의 휴전선 부근에서 교착된 채로 일진일퇴의 공방전만이 거듭됩니다. 양측 모두 상대를 압도할 수 있는 역량이 없었기 때문이겠죠. 그리고 이런 상황은 자연스럽게 휴전회담 논의로 이어졌구요.


  휴전회담 장소로 처음 고려된 곳은 덴마크 국적의 병원선 유틀란디아(Jutlandia)였습니다. 덴마크는 UN군의 일부로 남한 측을 지원하고는 있었지만 인도주의적인 의료 지원으로만 그 범위가 한정되어 있었기 때문에 덴마크 국적의 배에서 회담을 진행한다는 것이 크게 문제시되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무엇보다 해상에 있는 병원선이라는 점은 휴전회담 장소로는 꽤 큰 장점이었습니다. 실제로 전투가 벌어지고 있는 현장으로부터도 거리가 꽤 떨어져 있으니 전투 때문에 회담이 방해받을 일이 없으니까요.


  하지만 휴전회담 장소로 최종 결정된 것은 개성에 있는 내봉장(來鳳莊)이었습니다. (당시 내봉장의 풍경에 대해서는 『동아일보』 1951년 7월 18일자 기사인 「개성 현지보고」를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휴전회담 장소로 개성이 결정되는 과정을 굳이 여기서 길게 설명할 필요는 없겠습니다만, 결과적으로 이는 휴전회담에 상당한 악영향을 끼쳤습니다. 휴전회담이 진행되는 장소는 중립지대로 설정되어 전투행동이 엄격하게 금지되어야 하지만 개성은 공산군의 주요한 전략적 거점 중 하나였던데다가 실제로 교전이 이뤄지고 있는 지역에서 그다지 멀지도 않았기 때문입니다. 


  아니나다를까 휴전회담이 개시된 이후 중립지대 위반 사건이 연달아 일어났고, 급기야 8월 23일에 회담 자체가 무기한 연기되는 지경에 이르고 말았습니다. 




여기서 TMI 하나. 개성을 휴전회담 장소로 고른 것은 유엔군의 전략적 실수라는 것이 대체적인 평가입니다. 개성 일대가 중립지대로 선포된 이상 개성을 탈환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개성 일대가 공산군의 영역이었다는 점이 중요합니다. 적진 한가운데서 휴전회담을 하는 셈이었으니까요. 




  회담이 연기된 이후에도 회담 속개를 위해서 유엔군과 공산군은 지속적으로 연락을 취하고 있었습니다. 이 과정이 미국대외관계문서(Foreign Relations of the United States, 이하 FRUS)와 휴전회담회의록에 기록되어 있는데요, 이 자료를 찬찬히 살펴보면 판문점이 휴전회담 장소로 지정된 이유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먼저 1951년 9월 11일의 FRUS를 봅시다. 여기에서 당시 UN군 총사령관이었던 리지웨이(Ridgway)가 미국 합동참모본부로 보낸 전문을 확인할 수 있는데요, 그 문서 중에서 판문점을 언급하고 있는 부분은 발췌하면 아래와 같습니다. 


Subject to your contrary instr, I therefore now propose to make another effort to break the curr impasse by addressing a statement to Generals Kim Il Sung and Peng Teh Huai which will cover the following points (…) c. Reiterate my willingness to dispatch my liaison officers to meet with theirs at the bridge at Pan Mun Jom to make arrangements for the resumption of negotiations whenever they, the Communist commanders, are ready to terminate the suspension of negotiations they declared on 23 Aug, and which they have continued to date. 


  해석하자면 대충 이렇습니다. 


  합참의 지시사항에 따라, 현재의 교착상태를 해결하기 위해 김일성과 펑더화이에게 아래와 같은 사항을 제안한다 (...) c. 언제든지 공산군이 협상을 재개할 준비가 되면 아군의 연락장교단을 파견하여 판문점 다리에서 공산군의 연락장교단을 만나 협상 재개를 위한 일정을 협의하겠다는 본인의 의사를 반복(하여 표명)한다. 




  위와 같이 보고를 하고 며칠이 지난 후 리지웨이는 비슷한 내용의 전문을 김일성과 펑더화이에게 보냅니다. 1951년 9월 23일자 휴전회담 회의록에서 해당 부분을 인용하면 아래와 같습니다


  Since you are now ready to terminate the suspension of armistice talks which you declared on 23 August, my liaison officers will be at the bridge at Pan Mun Jom at 1000 hours on 24 September to meet your liaison officers and to discuss conditions mutually satisfactory for a resumption of the armistice talks. 


  이것도 대충 해석하자면 이렇습니다.


  귀측이 8월 23일에 선언한 휴전회담 연기를 귀측이 철회할 준비가 되었으므로, 우리측 연락장교단이 9월 24일 10시에 판문점 다리에서 귀측 연락장교단과 만나 정전 논의 재개를 위해 상호 만족할만한 조건을 논의할 것임. 




  이상의 자료에 따르면, 판문점에서 휴전회담이 열리기 이전에 이미 남과 북의 연락장교단이 판문점에서 접촉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UN군 대표단이 있었던 파주 문산리와 공산군 대표단이 있었던 개성의 중간지점으로 판문점이 선택되었던 것입니다. 다시 말해 판문점은 UN군과 공산군 모두에게 개성과 문산의 중간지점으로 간주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해석을 뒷받침하는 자료는 더 있습니다. 위의 두 자료는 9월 11일과 9월 23일의 것이라고 말씀드렸는데요, 이 시기는 개성에서의 회담이 연기된 후, 회담의 재개를 논하는 때입니다. 그런데 개성에서 휴전회담이 열리기 전인 1951년 7월 8일에 이미 판문점을 언급하고 있는 자료가 있습니다. 1951년 7월 8일의 FRUS인데요, 여기서 해당 부분을 인용하면 아래와 같습니다.


Our Liaison Group established contact with Communist Liaison Group at 080933K. (…)  returned Munsan-Ni at 081640K. Agreements reached as follows: (…) 5. Agreement reached for Eighth Army to clear and improve road from Munsan-Ni to Pangmunjom (BT 950033). Communist will clear road Pangmunjom to Kaesong


  저의 해석은 아래와 같습니다.


  우리측 연락장교단은 한국 시각 8일 09시 33분에 공산군 연락장교단과 접촉을 가졌다. (…) 한국 시각 8일 16시 40분에 문산리로 귀환하였다. 합의사항은 다음과 같다: (…) 5. 문산리에서 팡문점에 이르는 길은 8군이 정비·보수한다. 팡문점에서 개성에 이르는 길은 공산군이 정비한다. 


  위 문서는 리지웨이가 미국 합동참모본부에 보낸 휴전회담 보고입니다. 1951년 7월 8일 양측 연락단(Liaison Group)이 휴전회담의 실무에 관하여 6개 항목을 합의했다는 것인데, 그 중 다섯 번째 항목이 문산에서 개성에 이르는 도로의 정비에 관한 내용입니다. 여기에서 다시 한 번 판문점이 양측의 경계지점으로 간주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팡문점Pangmunjom'으로 표기되어 있기는 합니다만... 이 정도는 그냥 오타겠죠?) (한편 아래의 사진은 1951년 7월 8일 양측 연락단이 만났을 때의 모습입니다. 이 사진에 대한 상세한 정보는 국사편찬위원회 전자사료관을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오른쪽의 UN군 측 연락장교는 제임스 머레이(James C. Murray, 제일 위), 앤드류 키니(Andrew J. Kinney ,검은 모자 쓴 이), 이수영(李壽榮, 1921~1972, 바로 아래 안경 쓴 이).









  하지만 지도에서 판문점의 위치를 생각해보면, 판문점을 개성과 문산의 경계로 삼았다는 것이 선뜻 이해되지 않습니다. 판문점이 문산과 개성의 정확한 중간지점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문산리보다는 개성에 훨씬 더 가깝죠. 문산보다 개성에 훨씬 가까운 판문점이, 문산과 개성의 중간지점으로 간주된 이유는 또 무엇일까요? 






  이것은 아마도 판문점의 지리적 조건과 연관되어 있을 것입니다. 제가 1편에서 판문점이 임진강의 지류인 사천강을 지나는 지점이라고 말씀드린바 있습니다. 그렇다면 사천강을 남과 북을 나누는 자연경계로 보는 것이 군사적으로나 뭘로나 자연스럽습니다. 문산에서 개성으로 가는 길 위에는 사천강 외에 딱히 경계로 삼을만한 것이 없거든요. (FRUS와 휴전회담 회의록에서 '판문점 다리'라는 표현을 사용했다는 점도 염두에 두어야겠습니다.) 이렇게 생각하면 판문점이 양측이 만나는 지점이 된 것을 자연스럽게 이해할 수 있고, 판문점이 휴전회담 장소로 결정된 이유도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굳이 이유를 더 찾자면, 판문점이 전략적인 가치가 떨어지는 한적한 농촌마을이었다는 점도 보탤 수 있겠습니다. 전략적인 가치가 떨어지기 때문에 중립지대를 위반할 우려가 적으니까요. (아래 사진은 휴전회담 당시의 판문점입니다. 회담을 위해 새로 만들어진 도로와 회담장을 빼면 보통의 농촌마을과 별로 다르지 않은 모습입니다. 사진 오른쪽의 기구氣球는 중립지대임을 표시하기 위해 띄운 것입니다. 이 사진에 대한 상세한 정보는 국사편찬위원회 전자사료관을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더 간단하게 정리하자면 이렇습니다. (별달리 퇴고도 안 하고 쓰는 난삽한 글이라 이 정도 정리는 필수가 아닌가... 마 그리 생각하고 있습니다.)


  1. UN군 대표단은 파주 문산리에, 공산군 대표단은 개성에 있었다.

  2. UN군과 공산군 모두, 판문점을 문산과 개성의 중간지점으로 간주했다. 

  3. 판문점은 사천강을 건너는 지점이었기 때문이다. 사천강이 양측의 자연경계 역할을 했다. 

  4. 개성에서의 회담 연기 후, 개성과 문산의 중간지점으로 간주된 판문점에서 회담이 재개되었다. 


  파주와 개성을 잇는 길 위에 있던 작은 마을이었던 판문점이, 휴전회담이 열리는 역사적인 장소가 된 이유는 바로 이것입니다! 으하하하.




  그런데 여기서 살짝 반전이 있습니다. 휴전회담 조인 이후에 벌어진 작고 사소한 반전인데요, 제가 이 글을 쓰는 목적이 TMI에 있다는 점을 감안하면 이 역시 그냥 넘길 수 없죠. 잉여력 터지는 역사학도의 마지막 TMI는 다음 편에서 계속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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