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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문점은 왜 판문점일까 (1)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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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문점은 왜 판문점일까 (1)

Dog君 2019. 2. 1. 13:36


  2018년 4월 27일,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판문점에서 만났습니다. 분단이 시작되었던 바로 그 장소에서, 분단을 끝낼 방법을 논하는 두 정상의 모습은 역사적으로나 정치적으로나 의미가 깊었습니다. 불과 몇 달 전까지만 해도 전쟁을 하니 마니 하는 소리가 오갔던 것을 생각하면, 더 그렇습니다. 저 역시 한창 업무시간 중이었는데도 불구하고 한쪽 귀로 정상회담 중계를 들었던 기억이 납니다. 저처럼 통일이나 민족 같은 가치에 대해서 시큰둥한 녀석에게도 남북의 정상이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는 장면은 그렇게나 벅찬 것이었습니다. 


...만 개인적인 감상을 끄적이는 것은 이 글의 목적이 아니므로 개인적인 감회는 여기서 각설하고. 






  남북정상회담만큼이나 세간의 주목을 받은 것은, 남북정상회담의 무대였던 판문점이었습니다. 판문점은 흔히 ‘공동경비구역(Joint Security Area, JSA)’라고도 불리는데요, 정식명칭은 ‘유엔군사령부 군사정전위원회 판문점 공동경비구역’이라고 합니다. 판문점은 한양에서 개성으로 가는 길목에 위치한 한적한 농촌마을이었지만, 1951년에 한국전쟁 휴전회담의 장소로 지정되면서 일약 세계사의 중심으로 떠올랐죠. 이러한 드라마틱함 때문일까요, 남북정상회담이 한창이던 2018년 4월에는 판문점의 역사에 대한 언론보도도 함께 쏟아져 나왔습니다.


  그런데 저는 기사를 읽다가 좀 의아하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바로 이 지역의 지명 때문인데요, 기사들은 한결같이 이 지역의 본래 이름은 ‘널문’이었는데 이곳이 한국전쟁 휴전회담 장소로 지정되면서 ‘널문’을 휴전회담 당사국 중 하나인 중국을 위해서 한자(혹은 중국어) 표기할 필요가 생겼고,그에 따라 ‘판문板門’이라는 지명이 만들어졌다고 이야기합니다. (‘점店’이라는 명칭은 여기에 가게(혹은 주막)[店]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설명합니다.) 


거의 모든 언론이 이렇게 설명을 했습니다.






  그런데 저는 이 설명이 어딘지 모르게 많이 이상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지난 수천년간 한국은 한자가 지배했던 나라였습니다. 그랬던 나라에서, 한자로 된 지명이 없었고 대신 ‘널문’이라는 한국어식 표현만 있었다구요? ‘판문’이라는 한자 표기가 1951년에야 중국어 표기 때문에 만들어진 것이라구요? 그러면 예전에는 이 지명을 어떻게 표기했다는 거죠? 이두로 쓴 걸까요? 조선이라는 국가가 미처 파악하고 관리하지 못한 탓에 한자식 지명을 가지지도 못했던 동네가 있었던 걸까요? 아니, 한양에서 그다지 멀지도 않은 지역인데도, 조정에서 제대로 파악도 못하고 있었던 건가요? 그러면 그보다 먼 다른 지역은 얼마나 더 엉망이었던 거죠? 


  의문이 꼬리에 꼬리를 뭅니다. 이런 의문을 앞에 두고 그냥 가만히 있다면, 그것은 잉여력 터지는 역사학도의 올바른 자세가 아닙니다. 




  그래서, 역사학도의 두 번째 잉여력 대폭발 시간은 ‘판문점’이라는 지명을 파고들어가는 걸로 준비했습니다. 




  사실 위의 의문은 금방 풀 수 있습니다. 1951년 이전에 ‘판문板門’이라는 지명이 사용되었는지 여부만 확인하면 되니까요. 


  그러면 멀리 갈 것도 없습니다. 조선왕조실록에서 ‘板門’만 검색하면 됩니다. 아주 많지는 않지만 ‘판문’이라는 지명을 확인할 수 있는 정도는 되는데요, 개성부에 속한 지명으로 ‘판문’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물론, 이걸로도 충분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저 우연의 일치로 개성부에 ‘판문’이라는 지명이 있었을 뿐, 그게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판문점’과는 무관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조선왕조실록의 기록을 앞뒤 문맥에 맞춰 보면 증명할 수 있지만, 그래도 좀 더 정확한 증명을 위해서 18세기 중반에 제작된 ‘해동지도’를 통해 이 지명을 확인해 보겠습니다. 해동지도의 장단부 지도를 보면 임진강을 건너 장단부(하단 파란색 원)를 지나 송도(개성, 상단 파란색 원)으로 가는 길목에 있는 '판적교(板積橋, 빨간색 원)’라는 지명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원문은 여기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다리는 임진강의 지류를 건너는 것으로 되어 있구요. 그러니까 (비록 ‘판문점’이라는 표기는 아니지만) ‘판적교’라는 한자 표기가 이미 18세기 중반에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1864년에 김정호가 편찬한 『대동지지』에서도 서울과 의주를 잇는 이른바 ‘의주대로’ 상에 임진나루[臨津渡]를 건너 동파역(東坡驛)과 장단(長湍)을 지난 다음에 '판적천교(板積川橋)’가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 역시도 '판문점'이라는 표기가 아니다 뿐이지 한자로 표기된 지명이 있다는 사실만큼은 확인할 수 있습니다.


  더 결정적인 것은 『장단읍지』입니다.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지리지 종합정보에 따르면, 현재 전해지는 『장단읍지』는 1842년 『경기지』에 수록된 것을 후대에 전사한 것이라고 합니다. (자료마다 조금씩 내용이 다릅니다.) 정확하게 언제 전사되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거기에 수록된 지명만큼은 1842년의 그것과 별 차이가 없다고 봐도 될 것 같습니다. 바로 이 『장단읍지』의 점막(店幕) 항목에서 동파점(東坡店)과 판문점(板門店)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미 1840년대의 공식기록에서 ‘판문점’이라는 한자 표기를 확인할 수 있는 것입니다. (장단읍지의 원문은 이 글을 참조했습니다.






여기서 TMI 하나. 어떤 지명地名과 그 유래를 이야기할 때 글자 하나하나와 디테일에 얽매이는 것에는 주의할 필요가 있습니다. 지명이 한 두 글자씩 다르게 표기되는 것은 예사고, 지명의 유래 역시 출처마다 조금씩 디테일이 다른 경우가 많죠. 심지어는 지명이 먼저 생기고, 그 유래가 사후적으로 덧붙여지는 경우도 있습니다. 제가 사는 수원의 팔달산(八達山)이 대표적입니다. '팔달산'이라는 지명이 '사통팔달四通八達'에서 왔다는 것이 대체로 통용되는 유래입니다. 하지만 조선시대의 기록에서 간혹 '팔탄산(八呑山) 같은 이름이 등장하기도 하는데요, 이 이름은 그 유래와 전혀 어울리지 않죠. 더욱이 팔달산 인근이 화성 축성 전에는 한적한 시골마을에 불과했다는 점을 생각하면 ‘사통팔달’이라는 표현은 아무래도 정조대 이후의 수원에나 어울립니다. 그렇다고 이 지명유래를 완전히 무의미한 것으로 치부할 수는 없습고, 아마도 '팔달산', '팔탄산' 등으로 어지럽게 사용되던 지명이 먼저 있었고, 여기에 정조대 이후 수원 지역이 교통의 중심지로 떠올랐다는 사실이 지명에 반영되면서 '팔달산'이라는 이름으로 고정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러니까 지명에 관해서는 글자 그대로 내용을 이해하기보다는 어느 정도는 융통성을 가지고 해석할 필요가 있다는 겁니다. 간혹 유사역사학에서 기록에 따라 지명이 한 두 글자 다른 것에 착안해서 ‘썰’을 푸는 경우가 왕왕 있는데요, 그런 이야기들이 얼마나 허무맹랑한 건지 이제 아시겠죠?


팔달산의 지명유래에 관해서는 아래의 글을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http://www.esuwon.net/2461

http://www.esuwon.net/2524

http://www.esuwon.net/2621




  즉, 1951년에 중국군을 위해서 ‘널문리’라는 표기 대신 ‘판문’이라는 한자 표기를 만들었다는 말은 분명한 오류입니다. 우리는 위의 자료들을 통해서 ‘판문’이라는 지명이 그 이전부터 사용되고 있었음을 확인했습니다. 


  여기서 자연스럽게 다른 질문이 뒤이어 떠오릅니다. 과연 이런 오해는 과연 어디에서 시작되었는가? 하는 것 입니다. 이 문제는 다음 글에서 확인하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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