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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디의 우산 (황정은, 창비, 2019.)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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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디의 우산 (황정은, 창비, 2019.)

Dog君 2019. 2. 20. 10:28


1. 혁명은 왜 필요할까. 세상이 바뀐 후의 세상은 어때야 할까. 이 모든 질문에 ‘사람’이 생략되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2. 황정은이 새 글을 내놓을 때마다 찾아서 읽는다. 특별히 문학적 감수성이 뛰어나거나 한 것도 아니고, 문장을 평하거나 문학을 논할 능력이 없는데도 그렇다. 일견 염세적으로 보이지만, 그의 소설은 언제나 ‘사람'을 생각하게 한다. 


  1996년에 서수경이 연세대에서 열린 범민족대회와 통일대축전에 학생회장단으로 참석한 이유는 그해 3월에 노수석이 죽었기 때문이었다. 노수석이 전투경찰에 쫓기다가 사망한 장소는 서울 을지로 일대였고 그 부근은 서수경이 중학생이었을 때부터 영화를 보거나 햄버거를 먹으러 놀러 가곤 했던 장소였다. 서수경은 자신이 안다고 생각했던 거리에서 누군가가 전투경차에게 맞아 죽을 수도 있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았고 그가 자신과 동갑이라는 사실에도 충격을 받았다. 1996년 8월에 연세대에서 우리가 모인다,라는 공지를 접했을 때 서수경이 떠올린 것은 그러니까 연세대 법학과 학생으로 시위에 나었다가 사망한 동갑내기였다. 모종의 부채감이 있었다고 서수경은 말했다. 

  그러나 그뿐, 싸움의 의지 같은 것은 없었다. 범민족도 통일도 서수경의 관심사가 아니었다. 서수경은 90년대 후반 내내 그같은 사실을 반추하며 후회했다. 그곳에 함께 간 서수경의 후배 중에는 학교 정문과 백양로 등지에서 백골단을 향해 돌을 던졌다는 이유로 구류를 살고 나온 사람이 있었고 당시 광주전남지역총학생회연합 즉, 남총련의 범상치 않은 기세에 압도된 뒤 전남대 출신 한총련 의장의 삭발식을 보고 감명을 받아 머리를 밀고 운동권으로 전향했다가 학업을 다 마치지 못한 채 학교를 떠난 사람도 있었다. 그들을 그 장소에 데려다놓았다는 생각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다고 서수경은 말했다. 별다른 각오도 고민도 없이 어쩌면 모꼬지를 가는 마음이었을지도 몰랐는데 그 정도의 마음으로, 그들을 그 장소에 데려다놓았다는 후회에서. (177~179쪽.) 


  세면대에서 손을 씻고 해치마당으로 나가보니 화장실 입장을 기다리는 사람들의 줄은 여전히 끝이 없었다. 광화문광장으로 올라가는 완만한 비탈을 천천히 올라갔다. 서수경이 있는 곳은 세종대왕 동상에서 광화문 방향으로 50여 미터 떨어진 자리였다. 광장을 꽉 채우고 앉은 사람들 사이로 오솔길처럼 난 틈을 아슬아슬하게 걸어 가기로 돌아갈 일이 아득했다. 눈은 그쳤지만 여전히 춥고 이제 더 추워질 테고. 느슨해진 목도리를 풀어 다시 묶으며 세종문화회관 방향으로 올라가는데 손팻말을 가슴 높이로 들고 서 있는 남성이 보였다. A4 사이즈인 그의 손팻말에 평범한 인쇄체로 다섯 글자가 적혀 있었다. 

  惡女 OUT. 

(…) 화장실에 다녀오는 길에 악녀 아웃이라고 적힌 팻말을 봤다고 나는 서수경에게 말했다. 

  ‘녀’가 빨간색이었다고. 

  불쾌했겠다고 서수경은 말했다. 나는 그랬다고, 불편하고 불쾌했다고 대답했다. 

  왜냐하면…… 그걸 목격한 사람은 청와대 깊숙이 숨은 대통령이 아니고 그 팻말 앞에 선 나였으니까. 계집女인 나. 惡女 OUT이 지금 그의 언어라면 그것이 그의 도구인데 그의 도구가 방금 여기서 내게 한 일을 그는 알까. 그는 자기처럼 이 자리에 나온 많은 여성들은 왜 보지 않을까. 惡女라고 빨갛게 지칭할 때 ‘그 사람’의 여성은 그렇게 선명하게 보면서도. 그 팻말 앞에서 나는 이렇게 하지 말라고, 이렇게 말하지 말라고…… 

  말했어? 

  말할까 말하지 말까를 계속 망설였는데 왜냐하면 지금 우리가 우리니까…… 

  모두가 좋은 얼굴로 한가지 목적을 달성하려고 나온 자리에서 분란을 만드는 일을 거리끼는 마음이 내게 있었고 그래서 결국은 그 팻말 앞을 그냥 지나쳐 왔는데 오늘 밤 집에 돌아가서 이 일을 계속 생각할 것 같다고 나는 말했다. 내가 그 말에 적절하게 반응하지 못했다는 생각을, 말하자면 그걸 말하지 않았다는 생각을 자꾸 할 것 같다고. 우리가 무조건 하나라는 거대하고도 괴로운 착각에 대해서도. (303~307쪽.) 


  사람들은 오늘을 어떻게 기억할까. 

  탄핵이 이루어진다면 혁명이 완성되는 것이라고 사람들은 말했지. 동학농민운동, 만민공동회운동, 4·19혁명과 87년 6월 항쟁까지, 한번도 제대로 이겨본 적 없는 우리가 이기는 것이라고. 이 나라 근현대사에서 우리는 최초로 승리를 경험한 세대가 될 것이라고. 탄핵을 바라며 거리로 나선 사람 모두에게 그 경험은 귀중하고 벅찬 역사적 경험이 되어줄 것이고 그리고…… 그렇지 내게도 그러할 것이다. 산다는 것은 우리보다 먼저 존재했던 문장들로부터 삶의 형태를 받는 것…… 저 문장을 빌려 말하자면 우리는 지난 계절 내내 새로운 문장을 써왔고 사람들의 말에 따르면 이제 그 문장은 완성되었다. 그래서 오늘은 그날일까. 혁명이 이루어진 날. 사람들이 말하는 것처럼 피 한방울 흘리지 않고 혁명은 마침내 도래한 것일까. (313~31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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