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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국에서 민국으로 가는 길 (박광일, 생각정원, 2019.)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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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국에서 민국으로 가는 길 (박광일, 생각정원, 2019.)

Dog君 2019. 2. 23. 15:12


1-1. 대학 1학년 봄답사의 무대는 경주 일대였다. 불국사에 갔을 때였다. 오른쪽으로 난 작은 문으로 들어섰을 때 나도 모르게 “헉”하고 짧게 탄식했다. 다보탑은 내가 생각한 것보다 훨씬 더 압도적이었다. 그때까지 다보탑이란 10원짜리 동전이나 애국가에서 본 것이 전부였다. (중고등학교 때 수학여행에서 경주엔 안 갔던 모양이다.) 그때의 나는 (그 이후로도 한참을 더 그랬지만) 술 먹고 놀거나 집회에나 나갈 줄 알았지 공부 같은 것에는 도통 관심이 없었던 놈이었는데도 다보탑에 완전히 압도되어 탑을 한참이나 우러러 보았던 기억이 난다.


1-2. 그러고도 답사의 진짜 의미를 알아가는 데는 시간이 한참 더 걸렸다. 흔적만 남은 절터나 낡아빠진 건물 따위나 보러 돌아다니는 것이 아니라 터만 남은 곳에서 웅장한 건물을 상상하고, 빛바랜 건물에서 그 안을 돌아다니던 사람들의 모습을 떠올릴 수 있을 때 비로소 답사의 진짜 맛을 알 수 있었다. 석사학위를 마치고 나서 문화재 관련 일을 몇 년 했던 것이 결정적이었다. 경기도에 흩어진 수많은 유물유적, 아니 ‘유물유적’이라는 이름조차 붙이기 어려운 사소한 흔적들을 찾아다니면서 거기에 의탁해 살았던 사람들을 상상하는 연습을 했다.


  토교를 찾아가는 것은 생각보다 어려웠다. 이전에 이곳을 다녀간 분들이 남긴 블로그나 지도를 참고해 이미 폐공장이 된 철강공장을 찾기는 했지만 그다음이 문제였다. 사람이 거의 없는 넓은 공장 안에서 ‘한인촌 구지(한인 거주 옛터)’라는 기념비를 찾을 수 없었다. (…) 어쩔 수 없이 공장에 들어올 때 만난 중국사람에게 부탁을 했고 서너 사람을 거친 끝에 기념비를 찾을 수 있었다. (…) 책을 보고 마을 터가 강 옆 너른 곳이라고 생각했는데 조금 생뚱맞게도 공장 안의 어느 건물 마당이었다. 다만 벽이 없다고 가정하면 앞으로는 흐르는 물이 있고 뒤로는 마을이 연결되니 살기에 그럭저럭 무난한 위치로 보였다.

(…)

  우리는 공장 안팎을 다니며 토교를 이뤘을 만한 곳을 구경했다. 토마토도 기르고, 고구마와 옥수수도 심어 가꾸던 임시정부 가족들의 일상이 여기에서 펼쳐졌으리라. 아이들은 학교에 다니기도 하고, 아프면 병원에도 갈 수 있었다. 토교에는 의사도 살았던 것이다. (324~326쪽.)


2. 역사학에서 중요한 것은 상상력이다. 혹자의 말을 빌리자면, 조각조각 흩어진 사료를 이용해서 전체 역사상을 재구성하는 것은 흡사 말라비틀어진 노가리를 보고 동해바다를 헤엄치는 명태떼를 떠올리는 것과 같은 일이다. 그러한 상상력은 때로는 우리에게 현실을 넘어서는 힘을 주기도 한다. 노가리가 처음부터 노가리였던 것이 아니고, 노가리가 반드시 노가리여야만 하는 필연이 있는 것도 아님을 알게 되면, 비로소 우리는 생태와 동태와 코다리를 꿈꿀 수 있다. 지금 우리 눈 앞에 있는 건 몇 천 원짜리 노가리지만, 우리는 거기에서 몇만원짜리 황태구이정식을 꿈꿀 수 있다.


3. 먹는 얘기를 하니까 이야기가 좀 많이 저렴해졌는데 (내가 지금 배고파서 그런가보다) 암튼 마, 내가 하고 싶었던 이야기는 상상력의 극치를 보여주는 행위가 바로 답사라는 것. 답사란 구체적인 공간을 찾아가 그 공간 속에 역사 속의 인물과 건물과 사건을 소환해서 배치하는 것이다. 눈에 보이는 주춧돌 위에 눈에 보이지 않는 건물을 쌓아올리고 그 건물에 살았던 사람들과 그 사람들의 생각에 공감하는 것. 나는 그것이 ‘답사’의 진짜 의미라고 생각하고, 역사학 연구자가 답사를 게을리하지 말아야 하는 이유라고 생각한다.


4. 이 책의 직접적인 소재는 중국 내 임시정부의 행로를 뒤쫓는 것이다. 현대사, 그 중에서도 경제 분야로 국한된 내 평소 공부와는 그다지 겹치지 않는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이 책을 읽으며 울림을 얻었던 것은, 답사를 대하는 이 책의 태도 때문이다. 이 책에 있어서 답사란, 이미 한참 전에 죽고 없어진 사람들과 대화하고 공감하기 위한 수단이다. 역사 공부의 핵심이 현재를 당연시하지 않는 상상력을 키우는 것에 있다고 믿는 나에게 이보다 더 좋은 답사지침도 없다(라고 나 혼자 생각한다 ㅋㅋㅋ).


  역사를 구성하는 요소 가운데 시간과 공간의 의미를 생각해보자. 역사서 기록만을 읽은 이들에게 임시정부는 1919년에서 1945년(또는 1949년)까지 시간으로 기억되겠지만, 답사를 다녀온 사람들에게는 상해에서 (또는 다시 서울)까지라는 공간이 더 강한 이미지로 남지 않을까.

(…)

  특히 임시정부 답사는 우리 역사의 흐름에서 시간의 단절과 공간의 확대에 대한 고민을 던진다. 3·1운동과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새로운 시대에 대한 관심이 큰 사건이었다. ‘독립’을 외쳤던 이들은 대한제국으로 돌아간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독립은 ‘국가 건설’의 과정이었다. 조선과 대한제국의 역사와 단절하고 세우는 새로운 국가는 ‘황제’가 주권자인 나라에서 ‘시민’이 주권자인 나라로 바뀌어야 했고, 이 생각은 한 번 세상에 표출된 후 다시 돌아가지 않았다. (…)

(…) 이 시기 독립운동의 역사를 일본의 압박에 대한 탈출로만 파악한다면 일부분만 보는 것과 같다. 이 시기에 독립운동을 한다는 것은 사람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사회와 나라는 어떻게 되어야 하는지, 더 나아가 세계가 어떻게 움직여야 하는지 끊임없이 고민하며 실천하고 또 그 방향을 수정해나가야 하는 정치·철학적인 일이었다. 3·1운동도 대한민국 임시정부도 이런 치열한 고민 속에서 존재가치를 찾으려 했다. 그들의 최종 목표는 독립이 아니라 새로운 국가의 건설이었기 때문이다.

(…) 우리에게는 그들과 공감할 수 있는 역사적 감수성이 필요하다. 답사는 그 시간, 그 공간에 있었던 사람을 찾아가 시도하는 대화다. (5~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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