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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이 칼이 될 때 (홍성수, 어크로스, 2018.)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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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이 칼이 될 때 (홍성수, 어크로스, 2018.)

Dog君 2019. 2. 23. 14:08


1-1. 박찬승 선생님의 『마을로 간 한국전쟁』은, 한국전쟁 당시 마을에서 일어났던 학살의 구체적인 양상은 전쟁이나 이데올로기 같은 외부적이고 커다란 요인이 아니라 그 마을(혹은 공동체) 내에 평소에 내재되어 있던 조건들, 즉 공동체의 결속력이 얼마나 강했는지, 공동체의 구심점 역할을 할 수 있는 명망가가 있었는지, 집안 혹은 계급간 역관계는 어떤 식으로 형성되어 있었는지 등에 의해 결정되었다고 말한다. 학살이 한국전쟁과 이데올로기 충돌이라는 외부적 자극에 의해 추동된 것은 사실이지만 각각의 구체적 양상은 그 이전에 내재해 있었던 조건과 반응에 따라 결정되었다는 것이다. 학살 이후의 양상도 마찬가지다. 똑같이 전쟁과 학살에 휩쓸렸지만 어느 마을은 서로를 죽이다 못해 전쟁 끝나고 수십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그 트라우마에 시달리는 반면 또 어떤 마을은 참사의 크기를 최소화하고 전쟁의 상처도 일찍 이겨낼 수 있었다. 그러한 차이가 생기는 원인 역시 비슷하다. 그러니까 평소에 갈등 관리를 어떻게 해왔고 그것을 해소할 수 있는 체계가 얼마나 잘 갖춰져 있는지가 어마어마하게 중요하다는 말이다. 


1-2. 한편 허버트 허시의 『제노사이드와 기억의 정치』는 제노사이드라는 미증유의 사태가 재발하지 않게 하기 위해서는 배제와 혐오가 우리의 삶 속에 침투하지 못하도록 평소부터 애쓰는 것, 그리고 언제나 '인간적임'을 포기하지 않는 것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허약한 원칙론처럼 들릴 수도 있지만 그는 그것이야말로 제노사이드가 반복되지 않도록 하는 가장 구체적인 힘이라고 주장한다. 


  인종주의적 혹은 성적 농담처럼 작은 것일지라도 비인간성을 무시하다보면 개인은 억압과 부정의를 무시하는 데 익숙해지고, 비인간성이 자기 앞에 벌어졌을 때 그것을 인지하는 능력을 잃게 된다. 결론적으로, 억압과 부정의한 행위에 분개하는 감각을 잃게 된다. 우리는 일상의 삶에 가장 직접적으로 영향을 끼치는 제도 안에서 정의감과 동정심을 배우거나 다시 배울 수 있다. 우리가 침입 국가의 세력과 정치적 삶의 슬픈 현실들로부터의 보호와 구원을 구하는 것은 일상의 작아 보이는 영역들 안에 있다. 우리의 매일매일의 존재는 우리를 부정적인 현실과의 대면에서 분리시키는 완충물이며, 우리가 애착과 정체감을 발전시키도록 해준다. 그러나 사랑과 애정의 대상에 대한 이러한 애착은 어떤 공백 속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애착은, 우리가 부정의와 비인간성을 똑바로 대면하도록 배우는, 그래서 우리가 삶의 파괴와 보존 사이에서 선택하는 능력을 발전시킬 수 있는 그런 보다 큰 맥락의 일부이다. 그렇게 하는 사람들은 또한, 자신이 권능empowerment의 한 형태를 가졌다는 것을 깨달을 때, 즉 자신이 무력하지 않으며 선택권을 갖고 있으며 또한 삶의 보존을 선택한 다른 사람들과 합류하는 경우에는 지역·국가·세계 정치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을 때, 긍정적인 자기 이미지를 발전시킨다. 알베르 카뮈가 언급했듯이, 만일 우리 모두가 희생자가 되는 것도 처형자가 되는 것도 선택하지 않는다면, 우리를 둘 중 어느 것으로 만들려는 사람들은 자신들의 파괴 욕망을 한껏 채우는 데 어려움을 겪을 것이다. (허버트 허시, 『제노사이드와 기억의 정치』, 책세상, 2009, 250~251쪽.) 


1-3. 한국전쟁을 다룬 『마을로 간 한국전쟁』과 나치의 홀로코스트를 다룬 『제노사이드와 기억의 정치』는 얼핏 완전히 무관해 보인다. 아마 실제로도 무관할 것이다. 두 책의 저자가 서로를 참조한 것 같지도 않고, 서로를 의식하며 쓴 것도 아니다. 그런데 결론은 놀랍도록 비슷하다. 두 책 모두 평소에는 사소한 것처럼 보였던 작은 갈등이 특정한 외부적 충격을 만났을 때 얼마나 거대한 참극으로 변하는지를 지적하고, 따라서 거대한 비극을 막기 위해서는 평소 일상에서부터 배제와 혐오 같은 갈등의 요인을 관리하고 그에 대처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지적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러한 통찰은 당연하게도 역사 속의 한국전쟁과 홀로코스트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다. 


2. 위의 두 책에서 지적한 ‘배제’나 ‘혐오’, ‘갈등의 요인’ 같은 것들을 2019년의 현실에서 찾자면 아마도 ‘혐오발언’이 거기에 해당할 것이다. 이 책에서 말하는 ‘혐오발언’은 대단히 폭이 넓다. 예컨대 이 책은 젠더 선입견에 기초한 사소한 발언조차도 ‘혐오발언’으로 분류하는데, 그러한 것들조차 어떤 특정한 계기가 있으면 차별과 폭력으로 이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평소에는 크게 문제되지 않았던 집안 간 갈등이나 유대인에 대한 선입견이 전쟁이라는 특정한 상황에서 거대한 참극으로 발전했던 것처럼 말이다. 


  혐오표현의 수위는 다양하다. 일본의 반한시위대가 한국인 밀집지역에서 “착한 한국인도, 나쁜 한국인도 다 죽여라”, “바퀴벌레 조선인을 몰아내자!”라고 외친 것을 두고 혐오펴현이라고 부르는 것에는 별 이견이 없을 것이다. 한국인에 대한 혐오를 표명했을 뿐만 아니라, 그들을 사회에서 배제하고 몰아내고자 하는 의도가 명백히 담겨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좀 더 낮은 수위의 차별적 언사들도 있다. “여대생들은 매일 스마트폰으로 예쁜 옷이나 구경한다. 그래서 불행한 거다.” 한 대학 교수가 강의실에서 학생들에게 한 말이다. 요즘은 이런 말들도 여성‘혐오’로 간주된다. 설사 여학생들이 걱정되어 한 말이라고 해도 여전히 문제다. 이 말은 그 의도와 무관하게 여대생에 대한 부정적인 이미지를 고착화시키고 여성을 무시하거나 열등한 존재로 보고 차별하는 것으로 이어진다. 그런 말들이 자꾸 발화될수록 그런 이미지가 더욱 강화되어 사실로 둔갑하고, 이것이 다시 차별을 낳게 되는 것이다. 이런 낮은 수위의 혐오표현이 ‘죽여라’, ‘몰아내자’ 같은 말 못지않게 해악이 있다면 역시 혐오표현이라 불릴 수 있다. (25쪽.) 


  여전히 낮은 수위의 차별적 표현에 혐오표현이라는 무시무시한 말을 붙이는 것에 거부감이 있을 수 있다. 하지만 소수자의 입장에서 보면 어떨까? ‘된장녀’라는 말을 ‘여성혐오’로 간주하는 것에 대해 여성들은 별다른 거부감을 느끼지 않는 경우가 많다. 오히려 여성혐오라고 부르는 것이 현실의 문제를 적절하게 드러낸다고 말한다. ‘된장녀’라는 말이 여성차별이나 폭력으로 연결될 수 있다는 것을 직감적으로 알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여성들은 ‘된장녀’나 ‘김치녀’에도 민감하게 반응할 수밖에 없다. 여성을 차별해온 과거가 있고, 그 차별이 현존하며,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 자명한 상황에서 여성들은 그 어떠한 사소한 차별 발언도 가볍게 넘길 수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다양한 수위의 모든 차별, 혐오, 배제, 폭력의 표현들을 하나의 용어로 포괄해서 지칭해야 하지 않을까? 혐오표현 문제의 심각성을 환기시키려면 ‘혐오’와 같은 강한 뉘앙스의 말이 적격일 수 있다. 극심한 차별에 고통받는 소수자일수록 다양한 수위의 차별적 언사들을 혐오로 받아들이는 데 주저함이 없다. 한국에서 시민으로서의 권리를 실제로도 법적으로도 누리지 못하는 동성애자들이 “동성애에 반대한다”는 말을 들었을 때 “이것은 동성애 혐오다”라고 반응하는 것은 당연하다. 제3자의 입장에서는 다소 과해 보일지 모르지만 차별받는 소수자의 입장에서는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질 수 있다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그렇다면 다수자의 입맛에 맞는 용어가 선택되어야 할까, 아니면 소수자의 입장에서 문제의 본질에 부합하는 용어가 선택되어야 할까? 

  많은 사람들의 일상적 어감에 부합하는 용어를 택하는 것이 문제를 부드럽게 이해시키는 데 유리할지 모른다. 그런데 다수자 입장에서 거부감이 없는 용어를 쓴다고 해서 혐오표현의 심각성에 관한 문제의식이 고양될 수 있을지 의문이다. ‘차별표현’, ‘멸시표현’처럼 완화된 용어로 이슈화되었다면 “왜 그게 혐오냐?”고 따지는 사람들이 선뜻 문제의식을 받아들였겠냐는 얘기다. 도리어 ‘사실을 말했는데 왜 차별이냐’, ‘걱정되어 한 말인데 왜 멸시냐’ 등등 또 다른 방식으로 거부감을 표출했을 것이다. (32~33쪽.) 


  혐오표현이 잠재적 가해자들 사이에서 확산성이 있다는 점도 혐오표현이 해악을 가중시킨다. 명예훼손이나 모욕은 특별히 전염성이 있는 것 아니다. 하지만 혐오표현은 다르다. 역사적 뿌리를 가지고 있는 혐오감정이나 차별적 편견이 권력욕이나 경제적 궁핍, 사회불만 등과 결합되어 문제의 원인을 소수자에게 전가하고 희생양을 만들기도 하고, 혐오이데올로기가 후대에 전승되어 사회에 뿌리박히고 혐오조직의 결성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편견을 가지고 있다고 해서 누구나 그것을 내뱉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옆 사람이 그런 말을 하는 것을 듣는 순간 얘기가 달라진다. “어라, 저렇게 말해도 괜찮네.” 한 사람, 두 사람 거침없이 혐오를 드러내기 시작하고 어느 순간 더욱 강도 높게 말하는 것이 인기를 끌게 되어 혐오표현에 대한 비판적 문제의식을 무력화시키기도 한다. 그러면 서 혐오표현은 점차 확대·강화되고 활개를 치게 된다. 이러한 혐오표현의 전염성을 ‘선동’으로 설명하기도 한다. 증오선동은 혐오표현의 가장 극단적인 형태로 간주된다. 이러한 혐오표현의 전염성은 일반적인 모욕과 명예훼손에서는 찾아보기 어렵다. 이런 상황에서 모욕과 명예훼손으로 인한 손해는 법으로 보호하고, 혐오표현으로 인한 고통을 무시하는 건 누가 봐도 모순된다. 그 해악의 정도나 확장성, 위험성 등을 고려하면 오히려 혐오표현이야말로 가장 시급히 규제되어야 할 문제라고 할 수 있다. (83~84쪽.) 


3. ‘혐오표현’의 범위를 매우 넓게 보는 이 책의 관점은 여러 면에서 쟁점이 될 수 있다. 먼저 정책제안이나 사실적시의 형식을 빌린 ‘혐오표현’의 문제부터 보자. 일전에 어느 팟캐스트에서 이주노동자 문제를 다루다가 ‘샤리아’를 거론하면서 무슬림 이주노동자들의 종교와 생활습관을 경계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그 말을 했던 패널은 내가 평소에 꽤 호감이 있던 이였다. 선험적인 진영논리에 빠지지 않고, 팩트에 기초하여 비교적 합리적으로 논리를 전개한다는 느낌을 주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무슬림 문제에 대해서는, 거주이전과 노동의 권리를 옹호해야 한다는 당위 때문에 무슬림의 종교적 배타성을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한다고 주장하는 것을 보고 많이 답답했다. 샤리아의 여부에 대해서도 반박할 이야기가 있지만, 무엇보다 폭력성과 배타성을 무슬림의 ‘종특’으로 만드는 것은 너무 위험한 논리였다. 본인은 팩트를 확인한 것이 뭐가 문제냐고 반박하겠지만, 특정한 부류의 사람에게 일괄적인 정의를 내리는 것은 언제나 신중에 신중을 거듭해야 하는 일이다. 그것이 그들의 시민적 권리와 의무와 연결되는 일이라면 더더욱 그러하다. 


  이러한 형태의 말들이 초래하는 해악이 과격한 욕설이나 선동보다 덜하다고 보기 어렵기 때문에 이것들도 일종의 혐오표현으로 간주된다. 이것이 편견이나 차별을 확산하거나 조장하는 유형의 혐오표현이다. 사실 적시, 학술 발표, 종교적 신념의 표명, 개인적 양심의 표출, 정책 제언 등으로 차별을 암시하는 표현을 하는 것이다. (…) 표현의 수위가 훨씬 점잖고 증오선동처럼 선동성이 있는 것도 아니다. (…) “조선족이 한국에 들어오기 전에는 토막 살해가 없었죠. 자국민을 보호하기 위해서라도 외국인 노동자 관리가 조금 더 철저하게 이루어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라고 한다면 ‘범죄 대책’을 제안하는 형식이다. 문제는 이렇게 조언이나 정책 제언을 빙자한 혐오표현들이 일견 온건해 보이지만 실제로는 더 심각한 해악을 낳을 수 있다는 점이다. 더 은밀하고 치밀하게 차별을 조장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조선족을 몰아내자”고 하는 것보다 조선족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을 지속적으로 조장하는 것이 궁극적으로 그들을 차별하고 배제하는 효과가 더 클 수 있다. 그래서 차별을 조장하는 표현도 혐오표현의 범주에 넣어야 한다는 것이다. (63쪽.) 


4. 미러링에 대해서도 이야기할 여지가 있다. 나 역시도 미러링이 혐오의 확대재생산이라고 생각하는 편이고, 그 때문에 전략전술의 측면에서 (ㅋㅋㅋ) 결코 바람직하지 않다고 본다. 그에 대해 이 책은 남성과 여성 사이에 엄연히 존재하는 권력의 차이를 고려할 것을 주문한다. 똑같이 ‘혐오’를 생산한다고 하더라도 남성과 여성이 그것을 받아들이는 정도가 분명히 다르고, 그것이 초래하는 위험의 크기도 차이가 있다는 것이다. 현실에 엄연히 존재하는 권력의 차이를 고려하지 않은 상태에서 반복하는 ‘폭력과 혐오는 나쁘다’는 식의 원칙론은 현실을 멀쩡히 초월하기 십상이다. 뭐랄까, 식민권력의 폭력과 그에 저항하는 폭력을 동일한 잣대로 평가해서는 안 되는 것처럼 말이다. 오히려 그러한 원칙론은 젠더에 대한 건강한 문제제기까지 싸잡아서 비난하기 마련이다. 어쨌거나 ‘미러링’ 전략에 대해서는 좀 더 섬세하고 다양한 고려를 바탕에 두고 이야기를 이어나가야할 것 같다.  


  나도 남성이라서 남성을 일반화하여 비난하는 발언을 들으면 기분이 썩 좋지는 않다. 하지만 남성에 대한 차별적, 모욕적 표현이 난무한다고 해서 내가 차별과 성폭력의 피해자가 될 것을 걱정하지는 않는다. 그저 좀 언짢을 뿐이다. 하지만 여성혐오는 여성을 열등한 존재로서 차별하는 것을 넘어 일상적인 공포를 야기하기도 한다. 열등한 존재인 여성을 대상화하고 종속화하는 남성 지배 문화에서는 여성을 폭력의 대상으로 삼기도 한다. 강남역 여성 살해 사건이 발생했을 때 여성들의 분노, 불안, 공포, 그리고 저항의 몸부림은 여성에 대한 일상적 폭력이 얼마나 뿌리 깊은지를 보여주는 장면이었다. 하지만 남혐은 이러한 공포와 불안으로 연결되지 않는다. 실제로 <시사IN>과 아르스 프락시아가 디시인사이드 ‘메르스갤러리’와 나무위키의 ‘메갈리아’ 항목을 분석한 결과, 여성혐오를 당한 여성들의 감정적 반응은 ‘공포’로 귀결되는 반면, 남성혐오를 당했다고 주장하는 쪽의 감정선에는 공포가 없다는 결론이 나왔다. 남혐과 여혐이 사회에서 작동하는 기제가 똑같다고 볼 수 없고 남혐을 여혐과 비교하여 ‘그게 그거고 다 나쁘다’는 식으로 동일시할 수는 없다. 

  이쯤에서 미러링은 좀 다르다는 의문을 제기하는 독자들이 있을 것이다. 미러링은 혐오에 대해 혐오로 맞받아친다는 점에서 일견 고개를 갸웃하게 할 수도 있는 운동 방식이다. 자신은 여성을 차별하거나 혐오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남성들이라면 더더욱 거부감이 들 수 있다. 하지만 앞서 설명한 대로 남성혐오와 여성혐오를 동일한 잣대로 평가할 수는 없다. 그 사회적 작동 방식과 위험 초래의 가능성이 전혀 다르기 때문이다. (44~45쪽.) 


5. 내가 공부하는 역사학과 연관되는 논점으로는 ‘역사부정죄’가 있다. 한국에서 역사부정죄 논의는 꽤 연원이 깊다. 재미있는 것은 한국에서의 역사부정죄 논의가 재미있는 것은 진보와 보수 모두가 각자의 이해에 맞춰서 역사부정죄를 이야기한다는 점이다. 진보적인 쪽에서는 '식민지 미화'나 '독재 찬양'을 처벌하기 위해서, 보수적인 쪽은 ‘종북'이나 '국가 정통성 모독'을 처벌하기 위해서 역사부정죄를 끌어온다. 이처럼 한국에서 역사부정죄는 대체로 역사적으로 확정된 사실의 부정을 처벌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지는데, 역사학의 관점에서 보아도 이것은 결코 법적인 영역에서 해결되어서는 안 될 문제다. 학문적 논의를 사법적 잣대로 평가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물론 학문적 논의의 형식을 쓰고 벌어지는 명백한 명예훼손이나 진실호도는 또 다른 문제이다. 비록 그것이 학문연구의 산물이라 하더라도, 그것이 공공의 영역으로 발화되는 순간 연구자는 그 결과물의 사회적 영향력에 대해서 책임질 의무가 있다.) 이 책에 따르면 그것은 혐오표현의 맥락에서 받아들어져야 한다. 특정한 해석을 내놓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심지어는 그것이 사회적인 통념을 벗어나는 것이라 하더라도) 그것이 사회 공동체의 안녕을 해치고 특정한 집단에 대한 편견과 혐오를 조장하는 것을 문제삼아야 한다는 것이다. 


  느닷없이 역사부정죄 이야기를 꺼낸 이유는 역사부정이 혐오표현과 긴밀한 관계가 있기 때문이다. 한국에서 제출된 기존 역사부정죄법안들의 제안 이유로 대개 “유럽에서는 역사부정을 처벌한다”는 것이 핵심 논거로 제시되며, 언론에서도 이 점을 유난히 강조한다. 그런데 유럽의 역사부정죄와 한국의 역사부정죄는 그 배경과 입법 취지와 목적 등에서 다소 차이가 있다. 

(…) 대개는 홀로코스트 등의 제노사이드에 대한 부정을 처벌한다. 홀로코스트는 인류 역사상 최악의 범죄행위다. 그리고 그에 대한 처절한 반성으로 유엔이나 EU처럼 평화와 인권을 지향하는 국제 질서가 탄생했다. 홀로코스트라는 ‘역사적 사실’을 부정하는 것은 이러한 국제 질서의 대전제를 부정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 하지만 (…) 역사적 진실 자체가 문제라면 홀로코스트만큼 중요한 역사적 진실의 목록은 무한히 확장될 수 있다. 

  제노사이드는 단순히 여러 사람을 죽였다는 의미가 아니라 인종, 이념 등을 이유로 특정 집단의 구성원을 대량 학살하는 것을 뜻한다. (…) 아무 맥락 없이 특정 인종 집단을 학살할 리는 없다. 그 집단을 혐오하고 차별하고 배제해온 역사가 있고 그런 맥락 속에서 어떤 계기가 주어지면 그 집단에 대한 폭력, 그리고 극단적으로는 학살이 자행되는 것이다. 홀로코스트는 오래전부터 존재해왔던 반유대주의anti-semitism가 나치에 의해 정치적으로 악용되어 극단적인 유대인 학살로 이어진 것이다. 홀로코스트로 유대인만 학살당한 것은 아니다. 다른 소수인종집단과 장애인, 동성애자, 종교적 소수자도 수십만 명이나 학살당했다. 홀로코스트는 소수자‘들’에 대한 학살이었던 것이다. (109~111쪽.) 


6-1. 역사부정죄 이야기에서도 살짝살짝 드러나는 것처럼 이 책은 사법적 수단을 통해 혐오표현에 맞서는 것은 경계해야 한다고 말한다. 유죄와 무죄의 경계가 뚜렷한 법적 잣대의 특성상 혐오표현의 다양한 맥락 역시 이분법적으로 재단될 수 있다는 것이다. 유죄면 다 나쁜 것이고 무죄면 다 좋은 것이라는 식으로 이해되기 십상이기 때문이다. 이 책에서 줄곧 강조하고 있는 것처럼 혐오표현에 맞서기 위해서는 다양한 맥락에 대한 섬세한 고려가 필수적이다. 또한 혐오표현을 법적으로 제한할 경우, 이는 표현의 자유 전체에 대한 후퇴로 이어질 수도 있다. 


  혐오표현이 금지되면 사회의 담론이 합법 표현과 불법 표현으로 이분화되어 그동안 도덕·비도덕, 사회적·반사회적 등 다양한 가치판단에 의해 논의되던 것들이 합법·불법이라는 논점으로 급격하게 빨려 들어갈 수 있다. 이전에는 반사회적으로 비판받던 것들이 ‘합법이라는데 뭐가 문제냐’는 식의 엉뚱한 정당화 기제를 갖게 될 수도 있다. 형법의 판단은 일도양단一刀兩斷이다. 유죄 아니면 무죄다. 이론상 무죄는 ‘국가형벌권을 동원할 문제가 아님’이 소극적으로 표명된 것에 불과하지만 현실에서의 무죄는 ‘문제없음’으로 이해되는 경우가 다반사다. (159쪽.) 


6-2. 저자가 말하는 대안은 ‘표현의 자유를 증진하는 개입’이다. 더 많은 표현으로 혐오 표현을 격퇴해야 한다는 것이다. 혐오표현의 대상자에게는 스스로를 표현할 수 있는 더 많은 기회와 권리를 제공해야 하고, 혐오표현의 내용에 대해서도 더 많이 더 공개적으로 논의할 수 있도록 하여 그것이 자연스럽게 시민의 상식에 의해 격퇴되도록 유도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냥그냥 좋은 말 대잔치처럼 느껴질 수도 있지만 사실 이건 가장 현실적인 대응책이기도 하다. 여론 형성의 중심이 SNS로 압도적으로 쏠린 이 시대에 법적인 규제는 언제나 미완의 조치일 수밖에 없기도 하니까. 


  표현의 자유는 원래 ‘소수자’의 권리로서 의미가 있는 것이다. 다수자나 강자는 자유자재로 표현의 자유를 누릴 수 있지만 소수자에게 표현의 자유는 자신의 인권을 실현하기 위한 핵심적 가치가 생존권, 평등권, 참정권, 노동권 등 모든 권리의 실현을 위해 소수자는 자신의 권리를 표현할 수 있어야 한다. 표현의 자유는 다른 권리의 실현을 위한 전제조건인 것이다. 그래서 소수자의 권리를 보장하기 위하여 표현의 자유를 제한하는 것은 최대한 신중해야 한다. 표현의 자유에 대한 규제 총량이 증가하는 것은 언제든 부메랑으로 돌아올 수 있음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는 것이다. 표현의 자유를 훼손하지 않으면서 혐오표현 문제를 해결하는 것은 소수자의 관점에서도 유리한 선택지일 수 있다. 

  따라서 혐오표현에 대한 개입은 혐오표현을 ‘금지’하고 ‘처벌’하는 것보다는 더 많은 표현이 혐오표현을 격퇴시킬 수 있도록 표현의 자유를 ‘지원’하는 쪽으로 방향을 잡아야 한다. 이것이 바로 ‘표현의 자유를 증진하는 개입’이다. 즉 “희생자와 그 지지자들에게 혐오표현행위에 대응하게 하는 실질적, 제도적, 교육적 지원”을 함으로써 “희생자들로 하여금 혐오표현행위의 ‘침묵하게 만드는 효과’에 도전하게 하고, 혐오표현 화자의 주장을 반박”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정책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 

  표현의 자유를 증진하는 개입이야말로 부작용이나 규제 남용의 위험 없이 혐오표현을 억제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이다. 금지와 허용의 무익한 대립을 넘어설 수 있는 제3의 선택지이기도 하다. 이러한 형성적 규제를 통한 해결이 더 풍부하게 논의되고 실행되어야 한다. 강제적 금지 조치를 배제하자는 것은 아니다. 그에 관한 논의는 형성적 규제로 해결될 수 없는 문제 영역이 무엇인지 찾는 것에서부터 시작될 수 있을 것이다. (150~153쪽.) 


7. 책의 주장에 대체로 공감하지만 완전히 동의하기 힘든 부분도 꽤 있다. 내 주변 사람들도 이 책에서 제기하는 논점에 대해 꽤 다양한 의견을 갖고 있다. 그래서 그런가, 책을 읽는 내내 주변 몇몇 사람들과 이 책을 사이에 놓고 토론을 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계속 들었다. 내가 이미 알고 있는 것을 재확인해주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통찰을 주고 더 많은 독서와 앎에 대한 자극을 주는 것을 좋은 책의 조건이라고 한다면, 이 책은 거기에 완전히 부합한다. 


그 외에 밑줄 그은 부분들. 


  그렇다면 왜 증오범죄를 특별히 이슈화하는 것일까? 혐오표현과는 달리 증오범죄는 증오범죄로 분류되지 않아도 그 자체로 처벌하는 범죄인데도 말이다. 가장 큰 이유는 증오범죄의 해악이 중대하기 때문이다. 증오범죄는 피해자 집단에게 ‘너희들도 피해자가 될 수 있다’고 경고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이는 피해자 집단이 평등한 사회 구성원이 아님을 선언하는 것이며, 차별과 배제를 공공연하게 예고하는 것이다. 예컨대 성소수자 환영 현수막을 훼손한 것은 ‘이곳은 성소수자가 평등하게 대우받을 수 있는 곳이 아니’라는 점을 알리기 위해서다. 그렇게 직접 ‘말’할 수도 있겠지만 현수막 훼손이라는 ‘범죄’를 통해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실제로 증오범죄가 발생하면 그 피해자들은 ‘집단적으로’ 피해를 공유한다. 자신도 언제든 피해의 당사자가 될 수 있다는 사실에 극심한 공포감을 느끼고 위축된다. 혐오표현이나 증오범죄의 파급력은 상당히 유사하다. (9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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