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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풍의 언덕 (에밀리 브론테, 민음사, 2015.) 본문

잡冊나부랭이

폭풍의 언덕 (에밀리 브론테, 민음사, 2015.)

Dog君 2019. 4. 8. 16:48


1. 에이, 그런게 어딨냐... 하고 타박을 들어 마땅한 말이지만, 인생의 어느 특정한 시기에 어울리는 책이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을 종종 한다. 예컨대 『제인 에어』나 『데미안』, 『수레 바퀴 아래서』 같은 소설은 늦어도 20대 중반 이전에 읽어두지 않으면 안 되는, 뭐랄까 '청소년 권장 도서' 같은 느낌이 있다. (물론 이것은 엄청난 고정관념이다. 나도 인정한다.) 나에게는 『폭풍의 언덕』도 비슷한 느낌이다. 때를 놓치면 영원히 읽을 일 없을 것 같은, 그 때 아니면 별로 읽고 싶은 마음도 들지 않는 그런 소설.


2. 갑자기 『폭풍의 언덕』에 손을 댄 것은 순전히 영국으로의 파견근무 때문이었다. 외국 생활은커녕 외국 여행에 대해서도 별달리 흥미가 없는지라, 두어 달 전부터는 그렇게나 가기가 싫었다. 그렇다고 이미 결정된 것을 어찌 할 수는 없는 노릇이라, 어떻게든 스스로에게 동기부여를 해줘야겠다는 마음으로 이걸 골라들었다. 이걸 읽으면 영국의 날씨에도 어느 정도 낭만이 생길테고, 꼭 가보고 싶은 장소가 생길 수도 있으니까.


3. 읽고 보니, 아니 히스클리프는 그냥 찌질한 놈이잖아 ㅋㅋㅋ 이런 애가 2019년 한국에서 태어났으면, 어휴 정말... 어쨌거나 책을 덮은 다음 워더링 하이츠에 꼭 한 번 가보고 싶은 생각이 남았으니 그걸로 일단 목적은 달성한 셈이다.


  워더링 하이츠란 히스클리프 씨의 집 이름이다. ‘워더링’이란 이 지방에서 쓰는 함축성 있는 형용사로, 폭풍이 불면 위치상 전면으로 바람을 받아야 하는 이 집의 혼란한 대기를 표현하는 말이다. 정말 이 집 사람들은 줄곧 그 꼭대기에서 일 년 내내 그 맑고 상쾌한 바람을 쐬고 있을 것이다. 집 옆으로 제대로 자라지 못한 전나무 몇 그루가 지나치게 기울어진 것이나, 태양으로부터 자비를 갈망하듯이 모두 한쪽으로만 가지를 뻗고 늘어선 앙상한 가시나무를 보아도 등성이를 넘어 불어오는 북풍이 얼마나 거센지 짐작할 수 있으리라. 다행히 이 집을 지은 건축가는 그것을 감안하여 튼튼히 지었다. 좁은 창들은 벽에 깊숙이 박혀 있고 집 모서리는 크고 울퉁불퉁한 돌로 견고하게 되어 있었다. (9쪽.)


  그런데 그 어른이 다시 화내는 것을 보고 아가씨는 손에다 입을 맞추고 주무시게 노래를 불러드리겠다고 했어 그러고는 아주 나직한 소리로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는데, 이윽고 아가씨가 잡고 있던 어르신의 손이 툭 떨어지며 고개도 앞으로 푹 수그러졌어요. 그래서 저는 아가씨에게 잠이 깨시면 안 되니까 움직이지 말고 잠자코 있으라고 했어요. 우리는 모두 꼬박 반 시간 동안을 생쥐처럼 숨죽이고 있었어요. 만약 조셉이 성경을 다 읽고 일어서서, 기도를 드리고 주무시도록 주인어른을 깨워야겠다고 말하지 않았더라면 우리는 더 오래 그러고 있었을 거예요. 조셉은 앞으로 다가가서 주인어른을 부르며 어깨에 손을 얹었어요. 그런데 주인어른은 움직이려 하지 않으셨어요. 그래서 조셉이 촛불을 들고 어르신을 살펴보았지요.

  조셉이 촛불을 놓았을 때 저는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두 아이의 팔을 잡고 “위층에 가서 자요. 큰 소리는 내지 말고요. 오늘 밤에 둘이서만 기도해도 돼요. 조셉은 할 일이 있으니까요.” 하고 속삭였어요.

  “내가 먼저 아버지한테 안녕히 주무시라고 인사드릴 테야.” 캐서린 아가씨는 우리가 말릴 새도 없이 어르신의 목을 껴안고 말했어요.

  가엾게도 아가씨는 아버지가 돌아가신 것을 이내 알아치리고는 소리를 질렀어요.

  “아버지가 돌아가셨어, 히스클리프! 아버지가 돌아가셨어!” (73쪽.)


  히스클리프는 처음에는 좀처럼 눈에 띄지 않았답니다. 캐서린 아가씨가 집을 비우기 전에도 히스클리프는 남에게 관심을 두지 않았고 남의 관심을 받아보지도 못했지만 아가씨가 돌아온 뒤로는 열 배나 더 그러했어요.

  그에게 더러운 아이라고 일러주고 일주일에 한 번은 몸을 씻으라고 말하는 친절을 베푼 사람도 저밖에는 없었어요. 게다가 그 나이 또래는 비누와 물을 천성적으로 좋아하는 아이는 거의 없는 법이지요. 그러니 석 달 동안이나 진흙과 먼지 투성이인 채 갈아입은 적 없는 그의 옷과 제대로 빗지 않은 숱 많은 머리칼은 말할 것도 없고, 얼굴과 손은 기분이 언짢을 만큼 더러웠지요. 머리가 헝클어져서 나타나리라고 생각했던 제 짝이 그렇게도 아름답고 맵시 있는 아가씨가 되어 돌아온 것을 보고, 그가 긴 의자 뒤에 숨어버린 것도 무리는 아니었지요. (88~89쪽.)


  “이건 아무것도 아니야.” 아가씨는 외쳤어요. “천국은 내가 갈 곳이 아닌 것 같다고 말하려 했을 뿐이야. 나는 지상으로 돌아오려고 가슴이 터질 만큼 울었어. 그러자 천사들이 몹시 화를 내며 나를 워더링 하이츠의 꼭대기에 있는 벌판 한복판에 내던졌어. 거기서 나는 기뻐서 울다가 잠이 깼지. 이것이 다른 것과 마찬가지로 내 비밀을 설명해 줄 거야. 나는 천국에 가지 않아도 되는 것처럼, 에드거 린튼과 꼭 결혼할 필요도 없는 거지. 저 방에 있는 저 고약한 사람이 히스클리프를 저렇게 천한 인간으로 만들지 않았던들 내가 에드거와 결혼하는 일 같은 것은 생각지도 않았을 거야. 그러나 지금 히스클리프와 결혼한다면 격이 떨어지지. 그래서 내가 얼마나 그를 사랑하고 있는가 하는 것을 그에게 알릴 수가 없어. 히스클리프가 잘생겼기 때문이 아니라, 넬리, 그가 나보다도 더 나 자신이기 때문이야. 우리의 영혼이 무엇으로 되어 있든 그의 영혼과 내 영혼은 같은 거고, 린튼의 영혼은 달빛과 번개, 서리와 불같이 전혀 다른 거야.”

  이 말이 끝나기 전에 저는 히스클리프가 옆에 있다는 것을 깨달았답니다. 약간 움직이는 기척이 나기에 그쪽을 돌아다보니 그가 긴 의자에서 일어나서 가만히 나가버리는 것이었어요. 그는 캐서린 아가씨가 그와 결혼한다면 격이 떨어질 거라고 말할 때까지 듣고 있다가 그 이상은 듣지 않고 나갔던 것이지요.

  캐서린 아가씨는 바닥에 앉아 있었기 때문에 긴 의자의 등에 가려져 있었던 것도 나간 것도 몰랐지만, 저는 깜짝 놀라 아가씨에게 조용하라고 말했어요.

(…)

  “그가 외톨이가 된다고! 우리가 헤어진다고!” 아가씨는 화가 난 어조로 말했습니다. “누가 우리를 갈라놓는단 말이야? 그따위들은 밀로와 같은 꼴이 될 거야? 내가 살아있는 한 나는 그를 버리지 않아, 엘렌. 그 누구를 위해서도. 린튼 가문의 사람이 지상에서 모조리 사라지더라도 히스클리프를 버릴 생각은 없어. 오, 전혀 그럴 생각 없어. 그럴 작정은 아니고말고! 그러한 희생을 치러야 한다면 나는 린튼 부인 같은 건 되지 않을 거야! 히스클리프는 예전에 그랬듯이 앞으로도 내겐 소중해! 에드거는 그를 싫어해선 안 되고 적어도 그에게만은 너그러워야 해. 히스클리프에 대한 나의 진정을 알면 그도 그렇게 할 거야. 넬리, 넬리는 나를 지독히 이기적인 계집애라고 생각하겠지만, 만약 내가 히스클리프와 결혼한다면 우리가 거지가 될 거라고 생각한 적 없어? 하지만 내가 린튼과 결혼한다면 히스클리프가 오빠의 손아귀에서 벗어나게 도울 수가 있어.”

  “(…) 린튼에 대한 내 사랑은 숲의 잎사귀와 같아. 겨울이 돼서 나무의 모습이 달라지듯이 세월이 흐르면 그것도 달라지리라는 것을 나는 잘 알고 있어. 그러나 히스클리프에 대한 애정은 땅 밑에 있는 영원한 바위와 같아. 눈에 보이는 기쁨의 근원은 아니더라도 없어서는 안 되는 거야. 넬리, 내가 바로 히스클리프야. 그는 언제까지나, 언제나 내 마음속에 있어. 나 자신이 반드시 나의 기쁨이 아닌 것처럼 그도 그저 기쁨으로서가 아니라 나 자신으로서 내 마음속에 있는 거야. 그러니 다시는 우리가 헤어진다는 말은 하지 마. 그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니까. 그리고……” (133~136쪽.)


  “(…) 그리고 캐서린 당신한테는 이런 이야기가 나온 김에 몇 마디 하지. 당신이 나를 지독하게, 정말 지독하게 대접한 것을 내가 기억하고 있다는 걸 알아달라고. 알겠어? 만약 내가 모르고 있다고 우쭐거린다면 당신은 그야말로 바보야. 다정한 말 몇 마디로 날 위로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당신은 천치야. 또 내가 복수도 않고 그냥 있으리라고 생각한다면 얼마 안 있어 그렇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겠어! 그러나 당신 시누이의 비밀을 내게 말해 준 것은 감사해. 나는 그 비밀을 최대한으로 이용할 작정이야. 당신은 방해나 하지 마!” (185쪽.)


  내가 헤어튼과 함께 거실에 앉아 있을 때는 밖에 나가면 그녀를 볼 수 있을 것 같고, 벌판을 쏘다니다 보면 집 안으로 들어오는 그녀와 만날 수 있을 것 같단 말이야. 그래 집을 나갔다가도 급히 돌아오는 거지. 그녀가 틀림없이 워더링 하이츠의 어느 곳엔가 있을 것만 같아서 말이야! 그녀가 있던 방에서 잠을 자게 되는 날에는 난 쫓겨나고 말아. 거기에 누워 있을 수가 없어. 눈을 감자마자, 그녀가 창밖에 나타나거나 판자벽 뒤로 살그머니 몸을 숨기거나, 그렇지 않으면 방으로 들어오기도 하고, 심지어 그녀가 어렸을 때 쓰던 그 베개 위에도 그 귀여운 머리를 누이기도 하거든. 그러면 보려고 감았던 눈을 뜨지 않을 수 없단 말이야. 나는 하룻밤에 몇 번씩이나 눈을 떴다 감았다 해. 언제나 실망하게 마련이지만! 그렇게 나를 못살게 굴었어! 난 가끔 끙끙 소리를 내어 앓았고, 그 늙은 조셉 녀석은 틀림없이 내 양심이 마음속에서 마귀를 부리는 거라고 생각했을 거야. (482~483쪽.)


교정.

111쪽 5줄 : 탄복게 -> 탄복케

333쪽 16줄 : 내쫓아 보라지 (줄바꿈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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