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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주 클럽 (팀 피츠, 루페, 2016.)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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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주 클럽 (팀 피츠, 루페, 2016.)

Dog君 2019. 4. 8. 16:20


1. 마지막 1/3 지점에서 분위기가 급변하는 것을 제외하면, 꽤 재미있다. 이 부분 때문에라도 호불호가 꽤 갈릴 수 있다. 하지만 적어도 나에겐 전반부의 유쾌함이 그것을 충분히 상쇄하고도 남는다. 카페에서 읽는데 현웃 터지는 것을 끅끅 참아가며 읽었다.


2. 재미를 논하기 전에, 다소 불쾌하게 느껴질 수도 있는 부분도 있다. 어딘지 모르게 가부장제와 성매매를 낭만화시키는 듯한 느낌이 있기 때문이다. 나보다 좀 더 내공이 있는 분이 분석해주면 좋겠다 싶은데...


(…) 한국은 아프리카와 달라서 어디선가 튀어나온 사나운 야수의 발톱에 갈가리 찢길까 겁먹을 필요도 없고 말라리아도 쿠데타도 염려할 필요가 없다. 동남아시아가 아니니까 역시나 콜레라든 말라리아든 쿠데타든 걱정할 필요가 없고, 미국이 아니니까 누군가의 사유지에 발을 들였다고 총에 맞을까 마음 졸이지 않아도 된다. 캐나다가 아니니까 얼어 죽을 염려도 없고, 멕시코가 아니니까 괴한한테 목숨 잃을 염려도 없다. 한국의 도시에서 산다면 숨 막혀 죽을 것 같을 테고 과다 분비되는 위산에 익사할지도 모르지만, 산이라면 얘기가 다르다. 산에서는 마음 가는 대로 어디든 걸을 수 있고 딴 일에 신경 쓰고 걸음을 옮길 수 있다. 저 위쪽 비무장지대에만 얼씬하지 않는다면 이보다 좋은 세상이 없을 정도다. 나는 남아 있는 미지근한 커피를 단숨에 들이켠 뒤 서류가방에서 아직 냉기가 반쯤 남은 오비 캔 맥주를 꺼내 이 경이로운 발효 곡주를 몸 속으로 흘려 넣었다. (26쪽.)


(…) 아, 참기름. 한국 요리의 풍운아. 나는 참기름을 그냥 마실 수도 있다. 진짜 그러기도 했고. 이 초자연적인 기름이 담긴 병을 집어 들어 90도로 꺾어 풍미 가득한 경이로운 액체를 내 위 속으로 몇 숟가락 분량 쏟아 넣었다. 속 쓰림 따위 꺼져 버려라. 너의 천적을 맞이하라. 막걸리와 참기름이 나가신다. (47쪽.)


(…) 시중에 나온 새 소주가 나는 싫다. 아스파탐과 화학물질 범벅이다. 우리나라의 위대한 전통 하나가 엉망진창이 되었다. 한국에서 술을 마신다는 건 이제 자기혐오의 자해행위가 되고 말았다. 예전에는 음주가 흥청대는 놀이와 저항, 가무와 섹스의 촉매제 역할을 했지만 어느새 음주는 천치가 되는 지름길로 전락했다. 소주를 마시면 몸도 마음도 돌로 변한다. 뇌의 실행 기능을 정지시키는 데 소주 한두 잔만 한 게 없다. 나는 한 가지 묻고 싶다. 1996년 연세대 사태 이후 격렬한 학생 운동이 갑자기 주춤한 것과 소주에 인공감미료가 첨가된 것은 과연 우연일까? 우연이 아닐 것이다. 새로 나온 소주가 나는 정말 싫다. 우리의 자랑스러운 문화가 망가지고 있음을 반영하는 게 아니면 뭐겠는가. (...) (90쪽.)


  길에다 피를 뚝뚝 흘리며 달려가는 남자한테 눈길을 주는 사람이 이렇게나 없다는 사실이 놀라운 따름이었다. 어쩌다 알아챈 사람들은 뒤로 홱 물어나 나를 무슨 끔찍한 전염병 환자 보듯 했다. 병원 접수원도, 심지어 내 상처를 소독하고 꿰매는 간호사들도 그랬다. 나는 여전히 가쁜 숨을 몰아쉬며 병원 침대에 앉은 채 대체 무슨 일이냐는 그들의 질문을 들었다. 나는 자초지종을 털어놓았고 그렇게 말하는 동안 유리 부스 안의 그 여자가 형의 그 여인이 아니었음을 깨달았다. 청량리의 여자들은 마치 종족을 표시하듯 손이나 발에 문신이 있었다. 아까 그 여자에게는 그런 문신이 없었다. 문득 그런 여자들 중 비슷한 사연을 가진 사람이 얼마나 많을까 싶었다. (164~165쪽.)


  뭐 이런 바보들이 다 있나. 나는 혈압이 올라가지도 내려가지도 않았다. 일본한테 뭘 기대했단 말인가? 저렇게 분노하면 일본이 옳은 일을 할 능력이 있다고 믿어주는 것밖에 안 된다. 일본은 그럴 능력이 없다. 그들은 그런 능력을 갖게 되지도 않을 것이고 그런 능력을 가져본 적도 없다. 하나의 국가로서 일본이라는 나라는 앞으로도 날마다 우리 한반도에 대고 오줌을 갈길 것이고, 그들이 잠깐 가만있다 하더라도 그건 그저 원기 회복을 위해 잠시 숨고르기를 하는 것일 뿐이다. 그들의 행동에 발끈하는 건 그들이 변했다고 가정하는 것이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이렇게 충격을 받을 수 있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왜 분개하는가? 물론 마땅히 분개해야 한다. 마땅히 분노해야 한다. 허나 이런 분노와 분개가 무슨 일이 있을 때만 불쑥 솟아나는 것이어서는 안 된다. 이러한 분노와 분개는 지속성을 지녀야 한다. 절대 스멀스멀 잦아들어서는 안 된다. 한결같은 수준을 유지하며 지속되어야 한다. 그리고 거기에는 어떤 식으로든 행동이 뒤따라야 한다. 그 행동이 단지 자각에 불과한 것일지라도. (179~180쪽.)


  아버지와 바다에 나오다니 별일이다. 결국 아버지 뜻대로 되었다. 이런 식으로 아버지를 보고 있으니 이상한 느낌이었다. 이틀 전에 갯바위로 낚시하러 갔을 때도 그랬다. 아버지가 술에 취해 있을 때도, 아버지만의 기술을 시연할 때도, 고기잡이에 몰두해 바다를 노려보며 순간의 판단으로 지시를 하고 그물을 끌어 올리고 할 때도. 술을 얼마나 마셨느냐 따위는 별 상관이 없었다. 아버지가 자기 기술을 발휘할 때 즉각적으로 정신이 말짱해지는 효과가 나타났다. 짐작건대 아버지가 완전히 인사불성이 되는 듯한 어느 시점, 말하자면 알코올중독이라 부를 그런 지점에 깔딱 넘어가는 구분점이 존재하는 모양이다. 그 한계만 넘지 않으면 아버지는 고기잡이 기술로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는 존재가 되었다. 아버지가 고기잡이와 무관할 때 정반대의 상황이 펼쳐졌다. 술을 많이 마셨든 안 마셨든 상관없이 고기를 잡는 해우이와 거리가 멀어질수록 아버지는 사람들을 못살게 굴고 광포해졌다. 술 취한 사람의 특징을 온 몸으로 고스란히 체현해냈다. 아버지의 몸은 바다와 멀어질수록, 당신이 사랑하는 것과 떨어져 있을수록 상태가 나빠졌다. 나는 예상치 못한 지점에서 일면 죄책감을 느꼈다. 왜 이런 부분을 헤아리지 못했던가? 어머니는 왜 아버지를 그냥 바다에서 살게 하지 않았던가? (221~222쪽.)


(…) 그 일은 식은 죽 먹기다. 물은 반만 넣고 잘게 자른 고구마를 섞어서 밥을 지으면 된다. 그런 다음 누룩을 섞는다. 손으로 골고루 잘 으깨며 섞은 뒤 설탕을 넣고 휘휘 젓는다. 거기다 물을 더하고 항아리에 담아 사흘간 둔다. 곤죽이 된 걸 야무지게 짜서 즙을 내 물을 더해 맛을 본 후 집에 가져가면 끝. 투박하고 촌스러운 맛을 원한다면 곧바로 마셔도 되고 냉장고에 이틀 이상 뒀다가 마시면 천국의 맛을 볼 수 있다. 나는 어렸을 때 어머니와 막걸리를 빚곤 했다. 그 옛날 조치원에서 배를 따며 그래도 괜찮은 가을날을 보낼 무렵에도 나는 술을 빚었다. 고구마 대신 배를 썼냐고? 그랬지. 천상의 맛이었나? 그랬지. (…) (27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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