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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성룡인가 정철인가 (오항녕, 너머북스, 2015.)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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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성룡인가 정철인가 (오항녕, 너머북스, 2015.)

Dog君 2019. 4. 14. 23:30


1-1. 역사학의 기본은 '사실 관계'의 확인이라고 배웠다. 숫자로 수학을 하고 문자로 문학을 하듯, 역사학은 '사실'을 재료로 삼는다. 물론 거기에만 멈춰서는 곤란하겠지만, 어쨌거나 정확한 사실 관계의 확인은 역사학에서는 기본 중의 기본이다. 그런데 그 사실 관계의 확인이라는 것이, 생각만큼 쉽지가 않다. 과거와 현재를 잇는 다리 역할을 하는 사료라는 놈은 언제나 불충분하기 마련이어서, 언제나 역사학 연구는 호프집 노가리 안주를 보면서 오호츠크해 명태 어장을 떠올리는 것처럼 막막한 작업이 되기 마련이다.


1-2. 이 사료라는 놈이 참 웃긴다. 부족해도 문제지만 너무 많아도 문제다.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많은 것 자체가 문제라기 보다는, 사료가 많아지면 사료끼리 서로 충돌하는 경우가 생길 가능성이 높아진다. 이래도 문제가 꽤 복잡해진다. 충돌하면 뭐가 충돌하는지, 왜 그렇게 충돌하는지도 알아야 하기 때문이다. 간혹 역사학자들이 별로 중요해보이지 않는 사소한 사실관계까지 꼼꼼하게 따지고 들어가는 것처럼 보일 때가 있는데, 대체로 이것 때문에 그렇다고 보면 얼추 맞다. 글자 하나가 있고 없고가 가진 의미가 얼마나 큰지 막상 헤아려보기 전에는 아무도 모르기 때문이다. 사소한 사실관계에 너무 집착한다는 핀잔을 들어가면서도 역사학자들이 그런 작업을 소홀히 할 수 없는 이유다.


1-3. 사실 관계의 확정에 있어서 또 하나의 장애물은 연구자 스스로이다. 연구자도 결국 사람이기 때문이다. 연구자가 가진 주관과 입장이 사료에 대한 해석에 영향을 주는 경우가 왕왕 있다. 나보다 윗세대 연구자들이 '사료로 하여금 말하게 하라'라는 경구를 지루할만치 반복하는 것도 아마 이 때문일 것이다. 인간이기에 가질 수밖에 없는 주관성의 맹점에 빠지지 않도록 끊임없이 긴장하라는 것.


  그(이덕일-옮겨쓴이)는 “수백 년 전에 있었던 이런 사건의 진위 공방을 검토할 때 가장 중요한 것은 사건의 기본 성격을 파악하는 것”이라고 했다. 흥미롭다. 그런데 사건의 기본 성격을 파악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하면서, 그 기본 성격을 규정하는 사료로 가장 편파적인 기록을 끌어왔다. ‘기축옥사는 처음부터 정철을 비롯한 서인들의 정치 공작이란 비난이 들끓었다’는 인용이 그것이다. 이 사료는 동인 일부의 주장으로, (…) 스스로 편파적 자료에 입각하여 ‘기본 성격’을 규정해놓은 것이다. 짐짓 객관적인 듯하지만, 이는 ‘순환 논증 오류’의 전형적 사례에 불과하다. (…)

  사료史料를 조사할 때 초보 단계가 판본 조사이다. 즉 그 사료가 언제 작성되었고 전해졌는지, 누가 작성했는지, 다른 사료와는 어떻게 다른지 살피는 것이다. 그런데 이덕일은 이 과정을 ‘장황하다’고 한다. 이 말에 순간 나는 이분이 역사학자가 맞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32~34쪽.)


2-1. (믿고 보는 저자인) 오항녕은 어느 토론 자리에서 이덕일과 논쟁을 하던 중에 그가 기축옥사와 관련하여 사실 관계를 잘못 알고 있는 것을 알고, 그 부분을 지적했다. 그런데 이덕일의 반론이 의외였던 모양이다. 이덕일은 기축옥사 당시 이발의 노모와 아들이 죽은 것은 정철이 위관이었던 1590년의 일이라고 주장했다. 이덕일은 정철을 비롯하 서인이 중심이 되어 동인을 핍박한 사건으로 기축옥사를 생각하고 있을테니 정철이 위관을 맡았던 시점에 이발의 가족이 변을 당했다고 보는 것이 맞을 것이다. 기축옥사(정여립의 난)를, 정철을 비롯한 서인의 정치적 음모라고 일부의 주장 역시 그러한 관점에 부합한다. 아니나 다를까, 이덕일이 오항녕의 주장을 반박하는 근거 중 하나가 오항녕의 주장은 서인의 주장을 그대로 반복하고 있을 뿐이라는 것이었다.


2-2. 하지만 오항녕이 알기로 이발의 노모와 아이가 죽은 것은 유성룡이 위관이었던 1591년의 일이다. 동인 서인 따질 것도 없고, 그냥 사실 관계가 그렇다. 그런데 그는 이 토론 과정에서, 정철이 위관일 때 이발의 노모와 아이가 죽었다는 오해가 매우 널리 퍼져 있으며(심지어 이발의 집안에서조차!), 그 연원 역시 무척 오래된 것임을 알게 된다. 이 책은 그로부터 시작된다. 이런 오해는 대체 어디서 시작된 걸까.


  택당은 『선조실록』과 다른 관점이나 사실을 제공하는 사료를 함께 보관해두는 것도 주묵사의 교훈이라고 밝혔다. 택당의 뒤를 이어 효종 때 『선조수정실록』을 완성한 채유후蔡裕後 역시 역사 기록에는 잘못된 곳이 있게 마련이므로 『선조실록』처럼 정사正邪가 바뀐 경우 주묵사의 예에 따라 바로잡되 신구본新舊本, 즉 『선조실록』과 『선조수정실록』을 모두 보존하겠다고 말했다. 그 결과는 현재 우리가 보는 바와 같다. 그 기본 정신은 ‘한 시대의 전형典刑을 후대에 증거로 남기는 것’, 즉 원문 기사와 수정기사를 구별해놓아 ‘보는 사람’들이 그 사실에 대한 객관성과 시비를 판단하게 하는 데 있었다. ‘최종 심판은 후대 사람의 몫’이라는, 곧 후대 사람들의 눈을 현재화하는 역사관을 당대사인 실록의 수정에 적용하여 자신들의 수정 작업까지도 객관화한 것이었다. (213~214쪽.)


  광해군 대에 이발의 노모 사망이 송강이 위관이었을 때라는 설이 돌았으나, 적어도 공론화되지는 않았고 비난하는 북인이든 변론하는 송강의 아들이든 신묘년설이 사실에 가깝다는 증거를 보여주었다. 그래서 『선조수정실록』에도 신묘년설을 채택한 것으로 보이며, 포저가 인용한 근거도 이런 흐름의 연장에 있다. (226쪽.)


3. 저자는 책의 많은 분량을 할애해서, 정철이 위관일 때 이발의 노모와 아이가 죽었다는 오해가 언제 처음 등장해서 어떤 과정을 거쳐서 점점 발언력을 얻어가는지는지를 꼼꼼하게 추적한다. 그렇게 해서 저자가 도달한 답변은...


4-1. 그에 대해서는 각자 책을 읽어보시도록 하시고 ㅎㅎㅎ. 책 제목이 '유성룡인가 정철인가'로 달려 있지만, 사실 이 책의 진짜 목적은 이발의 노모와 아이가 죽을 당시의 위관이 과연 유성룡이었는지 정철인지를 밝혀내는데 있지 않다. 저자에 따르면 오히려 그런 질문 자체가 제대로 된 이해를 가로막는 몹쓸 프레임이다. 기축옥사를 전후한 당대의 정치를 파악하는 우리의 관점을 동인과 서인의 대립이라는 프레임으로 가두기 때문이다. 아니, 백 보 양보해서 동인과 서인의 대립으로 기축옥사를 본다손 치더라도, 당시 추국청의 구성상 이발의 노모와 아이가 죽은 것을 위관만의 책임으로 돌릴 수도 없다.


4-2. 그러니까 이발의 노모와 아이가 죽은 것의 책임을 정철에게 물어야 한다는 이덕일을 비롯한 세간의 주장(혹은 오해)은, 기축옥사를 바라보는 우리의 프레임이 동인과 서인의 대립이라는 프레임에 너무 단단히 결박되어 있기에 생겼다는 것이다. 즉 다시 말해 어떤 역사적 사건의 원인과 이유를 단지 인간의 의지에서만 찾으려는 편향이라는 것이다. 그러한 편향이 사료를 보는 우리의 시선에까지 영향을 주어, 내 관점에 맞는 사료만 취사선택하게 했다는 것이고.


  종종 의심은 확실성을 압도한다. 자료가 불확실하다는 것은 의도하든 의도하지 않든 그 의심 및 기억의 편향성을 강화한다. 이때 우리는 억울함을 해소하거나 극복하기보다 되새기며 상처를 유지하거나 덧낸다. (260쪽.)


5. '유성룡인가 정철인가'라는 제목은 실은 낚시였던 셈이다. 지금 우리 살아가는 세상이 꼭 그러하듯, 역사적 사건 역시 객관적 조건과 주관적 의지, 그리고 우연이 겹쳐서 일어난다. 이건 아마도 낙엽이 떨어지는 것에 비유할 수 있겠다. 나뭇잎을 떨구며 겨울을 준비하는 활엽수의 생태가 객관적 조건이라면, 어떤 나무는 낙엽을 좀 일찍 떨어뜨리고 또 다른 나무는 좀 더 늦게 떨어뜨리는 것은 (나무에게도 의지가 있다는 전제하에) 각 나무의 주관적 의지일 것이며, 그 낙엽이 정확히 어느 지점에 낙하하는지는 거의 순전히 우연의 결과일 것이다. 내 비유가 좀 개떡 같기는 하지만, 저자가 말하고 싶었던 것은 조건, 의지, 우연을 모두 염두에 두어야만 사건의 진짜 의미가 파악된다는 것이고, 지금의 우리를 돌아볼 수 있는 통찰 역시 그러한 관점에 섰을 때만 비로소 얻을 수 있다는 것일테다.


(…) 당쟁론은 사태를 편 가르기 방식으로 이해할 우려가 크다. 이에 비하여 기축옥사를 하나의 사건으로 접근하면, 사람의 의지와 판단에 따라 풀어갈 수 있는 영역과 어쩔 수 없는 객관적 조건을 다 고려할 수 있다. 그러므로 후자가 진실에 더 다가갈 수 있는 접근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아무튼 2009년에 있었던 논쟁은 뜻밖의 과제를 남겨주었다. 내가 이발의 노모와 아들이 죽은 것은 선조 24년이라고 아무런 의심 없이 생각했던 것을, 이덕일은 당연하게 생각하지 않았던 것이다. 단순히 그가 잘못 알았다는 것으로 치부할 수 없는, 무려 400년 동안 지속되었고 미묘하게 기억이 뒤틀려온 배경이 자리잡고 있었다. 왜 이런 일이 생겼을까? 이런 기록과 기억의 변주가 보여주는 역사적 의미는 무엇일까? (38쪽.)


  그렇다면 당쟁론은 식민사관의 특수한 논리가 아니라, 보편적 인식의 결여를 보여주는 사유 또는 접근 방식이라고 말할 수 있다. 권력의 배분, 정책의 결정과 시행, 사회와 나라의 비전을 다루는 정치사를 인간의 의지나 욕망만을 잣대로 서술하고 설명할 때 나타나는 보편적 오류의 하나인 것이다. 객관적 조건 그리고 안타까운 우연은 당쟁론에서 고려되지 않는다. 당쟁론은 역사학적 관점에서 보았을 때 사건을 설명하기에는 근본적으로 편협하고 비논리적 시각이다. 타율성론도 이와 마찬가지이다. 당쟁론이 인간의 의지나 욕망을 절대화한다면, 타율성론은 객관적 조건만을 절대화하는 오류를 범한다. (259쪽.)


6. 아유, 뭘 그렇게 복잡한 걸 다 생각하고 사나... 하고 생각할 수도 있겠다. 실제로 우리는 종종 복잡한 중간과정을 모두 생략하고 곧장 결론부터 얻고 싶은 충동에 휩싸이곤 한다. 솔직히 까놓고 말하자면, 정말로 결론부터 간명하게 제시해야 하는 때가 있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나는 복잡하고 골치아프게 고민하고 성찰하는 것이야말로 진정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라고 믿는다. 단순명쾌하게 얻어낸 단순한 성찰로 분석하기엔, 지금 우리가 사는 세상은 너무 복잡하기 때문이다. 복잡한 문제를 풀기 위해서는, 복잡하게 설명하고 복잡하게 성찰해야 한다.


교정.

226쪽 18줄 : 유영순이 -> 유영순은

226쪽 20줄 55번 미주 : 미주 페이지에 55번 주석이 없다. 아마도 이 자리에는 "『선조실록』 29년 1월 4일”이 들어가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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