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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making of a racist (Charles B. Dew, University of Virginia Press, 2016.)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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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making of a racist (Charles B. Dew, University of Virginia Press, 2016.)

Dog君 2019. 5. 6. 17:00


0. 아마 신영복 선생의 『강의』였을 것이다. 어쩌다 그렇게 고전을 탐독하시게 됐냐는 질문에 무료한 옥중생활을 달래는데 책만한 것이 없는데, 반입할 수 있는 책이 많지 않으니 자연스럽게 시간이 많이 걸리고 여러 번 읽을 수 있는 고전을 읽게 됐노라고 답했다는 이야기를 읽은 적이 있다. 지금 내 상황이 그와 비슷하다. 내 평생 다시 없을 긴 외국생활을 하다보니 평소처럼 종이책을 읽을 수가 없게 됐고, 그래서 한편으로는 전자책을 읽게 됐고 또 한편으로는 쌓아만 놓고 읽지는 않는 원서를 이참에 읽어보자는 결심을 하게 됐다. 그래서 3년 쯤 전에 출장길에서 별 생각 없이 집어든 후로는 표지도 안 열어봤던 이 책을 읽었다. 160쪽 조금 넘는 얇은 책이지만, 영어실력이 워낙에 짧다보니 한 달 넘게 읽은 것 같고, 그냥 사전 없이 읽은 부분도 꽤 많아서 내가 이해한 내용이 정확한지도 확신이 없지만,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영원이 안 읽을 것 같아서 억지로라도 내용을 정리해볼란다.


1. 저자인 Charles B. Dew는 미국 남부의 노예제를 연구한 미국의 역사학자라고 한다. (나 같은 우물안개구리가 알 리가 없잖냐...) 제목과 표지, 그리고 겉표지에 쓰인 짤막한 글귀로 금방 알 수 있는 것처럼, 자수성가한 남부의 건실한 집안에서 태어나 자연스럽게 인종주의자로 성장한 저자가 어떻게 인종주의적 편견에서 벗어나 노예제를 연구하는 연구자가 되었는지에 대한 자전적 에세이다. 그리고 마지막 1/3 정도는 실제 사료를 인용하여 노예제와 인종차별의 사회경제적 기반을 살펴본다.


2. 저자에 따르면 1900년대 중반 남부의 인종차별은 명시적인 폭력이나 거친 언사로 드러나는 것이 아니었다. 그의 부모와 주변 사람 모두 건실하고 온화한 성격이었고, 특별히 흑인에게 거만하게 대하는 것도 아니었다. 개인으로 떼어놓고 보면 그보다 더 좋은 사람일 수도 없었다. 하지만 그러한 ‘점잖음'은 어디까지나 흑인과 백인의 구분(더 정확히는 차등)이 지켜질 때에만 유지될 수 있는 것이었다. 예컨대 저자는 흑인과 백인을 구분하여 교육해서는 안 된다는 1954년의 ‘브라운 판결’ 이후 그 점잖던 아버지가 격렬하게 분노를 쏟아내는 모습을 묘사한다. 어쩌면 그 순간은 인종차별의 암묵적 전제 위에 쌓아올린 자신의 평온한 일상이 처음으로 명시적으로 파열하는 순간이었을지도 모르겠다.


*. 아래 번역은 내가 임의로 한 것으로, 다소 의역을 했다. 내 형편없는 영어실력 때문에 오역의 가능성이 매우 높으니 주의하시길.


  During the spring if me sixth-form year, something momentous happened less than a hundred miles north of Woodberry that went right over my head at the time. It should not have. On may 17, 1954, a unanimous decision of the United States Supreme Court in the case of Brown v. Board of Educational of Topeka held that racial segregation in public education was unconstitutional, a clear violation of the equal protection of the laws clause of the Fourteenth Amendment. I was too preoccupied with final exams and graduation to realize that the South had just been rocked by a legal, social, and political earthquake, that something revolutionary had happened to my part of the world, something that had the potential to change everything I had grown up believing with regard to race.

  I certainly got an earful abut Brown when I returned home that summer. Pop had held his tongue, out of deference to my mother, I suspect, during graduation, but he felt no such restraint once we all returned to Florida. The Brown decision had infuriated him, and he dismissed it as a gross violation of true constitutional principle. My father was an excellent lawyer (…) But his view on politics would have been a better fit for the antebellum South than for what I naively imagined was a much more enlightened twentieth-century South. And his political views certainly bled into his opinion of Brown. Chief Justice Earl Warren and the rest of the vindictive cabal he had browbeaten into a unanimous Court were all, to use a dismissive phrase Pop employed often, “not worth the powder to blow them up.” This was probably the tamest comment he made on the Brown decesion.

  6학년이던 해 봄, 학교에서 북쪽으로 100마일이 채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중대한 사건이 일어났는데 당시에는 미처 깨닫지 못했다. 사실 그래서는 안 되는 일이었다. 1954년 5월 17일 미국 대법원은 '브라운 대 토페카 교육위원회 사건’에 대해, 공교육에서의 인종 분리는 위헌이며 수정헌법 14조의 동등 보호(equal protection) 조항에 대한 명백한 위반이라고 만장일치로 판결했다. 나는 기말시험과 졸업에 너무 정신이 팔린 나머지, 그것이 내가 자라며 믿어온 인종에 대한 모든 것을 바꿀 수 있는 잠재력이 있는 사건임을 미처 알지 못했다.

  그해 여름 집에 돌아왔을 때 나는 '브라운 판결’에 대해 여러 이야기를 들었다. 아버지께서는 어머니를 신경쓰느라 졸업 과정 중에는 잠자코 계셨지만, 우리가 플로리다로 돌아가자 아버지는 더이상 자제하지 않으셨다. 브라운 판결에 아버지를 격분했고 그것이 진정한 헌법 원리에 대한 중대한 위반이라고 생각했다. 내 아버지는 훌륭한 변호사이셨지만 (…) 정치에 대한 그의 견해는 계몽된 20세기보다는 남북전쟁 이전의 남부에나 더 어울리는 것이었다. 정치에 대한 아버지의 견해는 브라운 판결에 대해도 마찬가지였다. 얼 워렌 대법원장과 그의 윽박으로 만장일치 판결을 내린 나머지 사람들에 대해서 아버지께서는 종종 “그럴만한 가치도 없는 놈들”이라고 하셨다. 그나마 그것이 브라운 판결에 대해 그가 한 말 중에 가장 점잖은 것이었다. (23쪽.)


3. 그것은 기실 남부인들 사이에서는 너무도 당연한 문화이기도 했다. 웃자고 하는 사소한 농담에도 인종차별이 녹아있었다. 그것을 너무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남부인은 그것이 얼마나 문제적인지 제대로 인식조차 하지 못했지만, 딱 한 발짝만 떨어져 나와도 그것이 얼마나 시대착오적인 것인지를 금방 깨달을 수 있었다. 저자 역시도 어릴 때부터 익혀온 자연스러운 생활양식과 지식으로 자연스럽게 인종차별을 체화하고 있었지만, 고향을 떠나 많은 사람들과 접촉하고 대화하기 시작하면서 자신의 문제를 금방 깨닫게 되었다고 고백한다.


  Fourteen turned out to be a big year for me when it came to reading matter. U. C. Barrett (very few people knew what those initials stood for, but for some reason I did-Uel Curtis), one of my father’s partners in the firm of Cook, Harris, Barrett, McGlothlin & Dew, gave me a slender volume entitled Facts the Historians Leave Out: A Youth’s Confederate Primer. (…)

(…) I am not sure why he passed this book on to me, but I suspect that he, too, felt it was important for a southern boy to grow up on the right side of history.

(…)

  “Southern men”-Patrick Henry, George Washington, Thomas Jefferson, James Madison-founded “our nation.”

  The north was basically responsible for slavery. “The Puritans of Massachusetts … carried on a large trade in negroes imported from overseas,” and by 1787, “Rhode Island held first place in the traffic.” But not for long. “New York City forged to the front,” and then “Philadelphia soon found the slave-business attractive.” And so “what did the Northern traders do with their slaves?” Tilly asked. “They sold them to Southern planters.”

  Most southern slave owners treated their slaves well, the author claimed, and for good reason: “If he paid $1,000 for a worker would he be so shortsighted as to starve or mistreat him?” And besides, since most slaves were “childlike, good natured, well-behaved” field hands, severe discipline was unnecessary.

  독서에 있어서 14살은 내게 중요한 해였다. 아버지와 함께 Cook, Harris, Barrett, McGlothlin & Dew에서 일하시던 U. C. Barrett씨(그의 이니셜이 무엇을 줄인 것인지 아는 사람은 거의 없었지만 어찌된 영문인지 나는 알고 있었다. Uel Curtis였다.)가 내게 ‘역사가들이 숨긴 사실들: 청년을 위한 남부 연합 입문서’라는 얇은 책을 주었기 때문이다. (…)

(…) 그가 내게 그 책을 준 이유는 모르지만, 추측하건대, 그 역시도 남부 소년에게 올바른 역사를 곁에 두게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느꼈던 것이 아닌가 싶다. 

  패트릭 헨리(버지니아 출신의 미국 독립운동 지도자-옮겨쓴이), 조지 워싱턴, 토머스 제퍼슨, 제임스 메디슨(버지니아 출신의 미국 독립운동 지도자, 제4대 미국 대통령-옮겨쓴이) 같은 “남부인”이 “우리 나라”를 만들었다

  기본적으로 노예제에 대한 책임은 북부에 있다. “매사추세츠의 청교도들은 ... 해외에서 노예를 들여온 흑인을 대규모로 거래했고” 1787년에는 “로드아일랜드가 유통량 1위를 차지했다.” 하지만 오래지 않아 “뉴욕시가 선두를 차지했고” 이어 “필라델피아도 곧 노예사업이 매력적인 사업임을 알았다.” 그리고 저자인 Tilley는 “북부의 노예상이 이들 노예를 어떻게 했겠는가?”하고 묻고 이렇게 답한다. “남부의 농장주에게 팔았다.”

  저자는 대부분의 노예에 대한 남부 노예소유주의 처우는 좋은 편이었다고 주장한다. “만약 1,000달러나 지불한 일꾼을 굶기거나 학대할 정도로 근시안적으로 행동할 리가 있는가?” 그리고 대부분의 노예는 “아이처럼 착하고 천성이 바르고 품행이 바른” 일손이었기 때문에 가혹하게 대우할 필요도 없었다는 것이다. (16~17쪽.)


(…) I started telling one of these jokes in a friend’s room in my freshman dorm when one of our classmates passed in the hall just outside the open door. This classmate, Ted Wynne, who lived in my entry, was African American. I stopped my joke in mid sentence when I realized Ted was within earshot. It was one thing to tell a dialectic joke; we all did this where I came from (if you were white). It was quite another to consciously inflict direct hurt on another human being either black or white, and to embarrass oneself at the same time. I had done both. It is small compensation now to say that I never told another “Rastus and Lulabelle” joke again, ever, either at Williams or beyond.

(…) As I look back on it, I think it marked my tentative first step along a lengthy road that would carry me away from the worst of the culture of my native region. (…)

(…) 신입생 기숙사의 친구 방에서 농담을 하고 있을 때 반 친구 중 하나가 열린 문 밖을 지나고 있었다. 테드 윈이라는 친구였는데 아프리카계 미국인이었다. 나는 내 농담을 테드가 들었을 수 있다는 것을 깨닫자마자 곧 말을 멈췄다. 이런 만담은 내 고향에서는 누구나 하는 것이었다. (물론 백인이라는 전제하에서.) 하지만 또 한편으로 그것은 흑인이나 백인에게 의식적으로 직접적인 상처를 주거나 혹은 스스로 부끄러움을 느낄 수도 있는 일이었다. 나는 그 두 가지를 모두 느꼈다. 그 날 이후 윌리엄스에건 어디서건 “라스투스와 룰라벨” 같은 농담을 단 한 번도 하지 않았다.

(…) 돌이켜보면, 그때가 내 고향에서 배운 최악의 문화로부터 한 걸음 멀어지는 첫 걸음이었던 것 같다. (…) (31~32쪽.)


4-1. 자기 신념과 외부 세계가 충돌할 때 어떤 사람은 더 강한 아집의 세계로 빠져들지만, 또 어떤 사람은 그것에 의문을 품고 더 많은 사람들과 이야기하며 자기 자신을 되돌아보는 계기로 삼는다. Charles B. Dew는 후자에 속하는 사람이었던 것 같다. 그는 자기가 익혀온 습관과 외부 세계가 충돌하자 그 차이를 해소하기 위해 더 많은 사람과 접하고 이야기하려고 애썼다. 흑인에 대한 자기의 편견을 교정하고 그들을 동등한 인간으로 바라보게 된 가장 결정적인 계기는 자기 집에서 가정부로 일했던 일리노이와 오래도록 대화한 것이었다. 저자는 운전연습을 핑계로 퇴근길의 일리노이를 집까지 데려다 주면서 그와 많은 이야기를 나누게 된다. 가볍게는 가족에 대한 이야기부터 무겁게는 인종차별에 대한 이야기까지 말이다. 그 과정에서 그는 흑인 역시 백인과 꼭같은 경험과 감정과 권리를 가진 동등한 존재임을 이해하게 된다.


  My conversations with Illinois while I was home during my last two years of college were probably the most important step I took along the path that led ultimately to my unmaking as a racist. Looking back, I think that they were more important than anything else that I did, or read about, or studied in class, or watched on television.

  대학 졸업 전의 2년간 일리노이와 나눴던 대화는 인종주의자에서 벗어나는 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경험이었던 것 같다. 돌이켜보면, 책이나 수업, TV에서 본 그 무엇보다 더 중요했던 것 같다. (73쪽.)


4-2. 그리고 또 하나 중요한 계기는 역사를 공부한 것이었다. 그는 자기가 맞닥뜨린 세계관의 모순을 이해하고자 노예제 역사 세미나에 참석했고, 그를 통해 비로소 자기 삶을 비판적이고 분석적으로 돌아볼 수 있었노라고 회고한다. 14살 때 받았던 역사책(한국으로 치면 유사역사학? ㅎㅎㅎ)이 인종주의에 대한 편견을 강화시켰던 것에 반해, 대학에서 배운 역사는 노예제를 비판적으로 성찰하는 중요한 도구가 될 수 있었다. (여기서 새삼 느끼는 역사 공부의 중요성... ㅋㅋㅋ)


  My Old South seminar was a revelation to me. (…)

(…) I was thinking about my part of the country in ways that had never occurred to me before, critically, analytically, with a mounting need to know and understand. (…) Halfway through the seminar, I wanted to be a historian. I would be applying to graduate school in history, not headed to UVa law school like my brother.

  남부 지역사 세미나는 나에게는 계시와도 같았다. (…)

(…) 그 전까지는 생각해보지도 못했던 방식으로, 그러니까 비판적이고 분석적으로 내 고향을 생각하게 되었다. 또 그렇게 알고 이해할 필요도 있었다. (…) 세미나를 하며 역사학자가 되고 싶어졌고, 그래서 나는 형과 달리 로스쿨 대신 역사 전공으로 대학원에 지원하기로 했다. (78~79쪽.)


5-1. 그렇다면 그런 인종차별이 어떻게 만들어져서 그렇게나 뿌리깊게 자리했을까. 이에 대해 저자는 ‘노예 매매’, 더 정확히는 인간을 상품으로 보는 인식이 원인이라고 지적한다. 책의 마지막 1/3에서 저자는 사료를 인용해서 흑인을 대하는 당대의 인식을 찾아들어간다.


5-2. 연구자마다 차이는 있지만 남북전쟁 직전 미국 남부 노예의 총 ‘가치’(표현 참 애매하다...)는 최소 30억 달러에서 40억 달러에 이르렀을 것으로 추산된다고 한다. 남부에서는 농업을 제외하면 그 어떤 분야보다 압도적으로 높은 수치다. 더욱이 남북전쟁 직전에 노예의 가격이 날로 상승했기 때문에 노예시장의 규모와 이윤도 계속 커지는 상황이었다. (미국 남부를 제외하고는 노예제가 철폐되었기 때문에 공급이 감소한 것이 주요 원인이라고 한다.) 물론 그들도 사람인지라 일부 자료에서 노예 매매에 대한 회의적인 감상이 발견되기는 한다. 하지만 압도적으로 커지는 시장과 이윤 앞에서 그런 감성이 오래 지속되기는 힘들었을 것이라고 본다. 인간의 등급으로 나누고 다시 값을 매겨 이윤의 대상으로 삼았던 역사가 있고 그것이 제대로 청산되지 않은 채 이어지면서 인종차별의 깊은 뿌리가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Two historians have recently offered detailed figures that support Verlin’s generalizations. James L. Houston in 2003 estimated that the value of slave property in the South in 1860 stood at $3 billion, an “unbelievable amount of wealth … compared with other sectors of the United Stated economy in 1860.” Unbelievable indeed. That $3 billion figure “was almost 50 percent more that the $2.2 billion invested in railroads and manufacturing” in the entire country in 1860, Houston pointed out. Another historian, Steven Deyle, writing in 2004, noted that the value of "slave property had surpassed the assessed value of real estate” in the South, which stood at just over $2.4 billion. (…)

(…) Their $3 billion figure assumes and average price of $750 for the close to 4 million human being who made up the slave population in the South in 1860. (…) I think that $1,000 figure, multiplied by the 1860 slave population of almost 4 million, gives us a more accurate total, one that is closer to what contemporary southerners were estimating in the eve if the Civil War: $4 billion.

  최근 두 연구자 역시 Verlin의 일반화를 지지하는 연구를 제출했다. 2003년 James L. Houston은 1860년 남부 노예의 가치를 “1860년 미국 전체에 비겨도 엄청난 수치인” 40억 달러에 달했다고 추산했다. 정말 놀라운 수치다. Houston의 지적에 따르면 30억 달러는 "1860년 전국의 철도와 생산설비 투자액인 22억달러보다 거의 50% 이상 많은 것이다.” Steven Deyle 역시 2004년에 발표한 연구에서 남부에서는 "노예의 가치가 부동산의 평가가치를 상회했다”고 했는데, 부동산 가치를 24억 달러로 추산했다. (…)

(…) 이들이 추산한 30억 달러라는 수치는 1860년 당시 400만 명에 달한 노예의 평균 가격을 750달러 정도로 본 것이다. (…) 나는 평균 가격을 1,000달러로 보는데, 이를 1860년의 노예 인구인 400만으로 곱하면 좀 더 정확한 수치를 얻을 수 있다. 남북전쟁 직전에 당시의 남부인들이 추산한 수치에 가까운 40억 달러 규모다. (138~139쪽.)


  These dollar figures from the late antebellum era may not mean much to modern readers, but they were, even by the standards of that day, astonishing. We do have a means of translating them into values for our own time, however. The very useful website MeasuringWorth.com, sponsored by the University of Illinois at Chicago, indicate that one 1860 dollar should be multiplied by a factor of approximately 29 to get that earlier dollar into contemporary purchasing power.

  Thus the August 2, 1860, Betts & Gregory figures would look something like this day:

  Extra Men priced at $1,550 to $1,615 in 1860 would be $44,950 to $47,125.

  Extra Girls ranging from $1,375 to $1,450 would be $39,875 to $42,050.

  No. 1 Men priced from $1,450 to $1,550 would be $42,050 to $44,950.

  No. 1 Girls listed at $1,300 to $1,350 would be $37,700 to $39,150.

  The tallest category of Boys and Girls, five feet in height, priced at $1,100 to $1,250 in 1860 would be $31,900 to $36,250.

  The “Good young woman & first child” ranging from $1,300 to $1,450 would represent $37,700 to $42,050 in contemporary purchasing power.

  Even the prices for the smallest children listed as a separate sales category, four feet high, $500 to $600, would translate into five-figure sums today: $14,500 to $17,340.

  남북전쟁 직전의 물가가 지금의 독자에게는 익숙하지는 않지만, 당시의 기준에서 봐도 꽤 놀라운 수준이다. 당시 물가를 지금 기준으로 환산할 때는 일리노이 대학에서 운영하는 웹사이트가 유용하다. 여기에 따르면 1860년대의 달러에 대략 29를 곱하면 지금의 구매력으로 환산할 수 있다.

  따라서 1860년 8월 2일에 Betts & Gregory의 수치는 이렇게 환산할 수 있다.

  1,550~1,615달러의 특등급 남자는 44,950~47,125달러.

  1,375~1,450달러의 특등급 여자는 39,875~42,050달러.

  1,450~1,550달러의 1등급 남자는 42,050~44,950달러.

  1,300~1,350달러의 1등급 여자는 37,700~39,150달러.

  소년소녀 중에서 가장 키가 큰 등급인 5피트는 1,100~1,250달러인데, 이것은 31,900~36,250달러.

  “첫 아이가 딸린 양호한 젊은 여자”는 1,300~1,450달러인데, 이것은 현재의 구매력으로 37,700~42,050달러.

  심지어는 가장 키가 작은 4피트 정도의 아이도 500~600달러로, 14,500~17,340달러다. (102~103쪽.)


(…) The totality of Williams’s and Dickson’s correspondence reveals an almost unfathomable level of heartlessness and a total disregard for the humanity of their highly valuable “merchandise.” Thomas Williams and Richard Dickinson had commodified the black men, women, and children who passed through their hands. That commodification, above all, constituted the core of their activity and defined who they were as human beings. (…)

(…) 윌리엄스와 디킨슨이 주고받은 서한은 그 가치 있는 “상품”에 대해 그들이 얼마나 헤아릴 수 없이 비정했고 인간의 존엄에 대해 무관심했는지를 보여준다. 토머스 윌리엄스와 리처드 디킨슨은 그들의 손을 거쳐간 흑인 남성과 여성, 아이들을 모두 사고파는 물건으로 만들었다. 무엇보다 이러한 상품화야말로 그들의 행동을 핵심적으로 규정하는 것이었고 인간으로서의 그들을 정의하는 것이었다 (…) (112쪽.)


6-1. 차별과 폭력은 암묵적인 동의와 사소한 행동 하나하나에도 녹아 있기에 일상에서부터 차별과 폭력을 경계해야 한다고 했던 『제노사이드와 기억의 정치』의 내용을 한 번 더 확인할 수 있었다. 그리고 거기에 더해서 인간을 ‘상품’으로 대하는 태도가 결국 어디까지 이어지는지를 확인할 수도 있었고.


6-2. 저자가 어려서부터 익혀왔단 자연스러운 인종차별이 바깥의 세상과 처음 모순을 일으켰던 대학 시절이 갈림길이었을 것 같다. 자기가 익힌 것과 실제 세계가 파열을 일으켰을 때, 우리 앞에는 두 가지 선택지가 놓인다. 자기 아집에 빠질 것이냐 아니면 이해하고 설명하기 위해 노력할 것이냐. 후자가 훨씬 더 어렵고 더 많이 노력해야 하는 길이다. (그래서 전자를 택하는 이들이 그리 많은가.) 저자는 자기가 그러한 선택을 할 수 있었던 것이 (아이러니하게도) 부모님 덕분이라고 말한다. 비록 인종주의자였지만 사람에게 지켜야 할 예의를 잊지 않았고 (비록 그것이 흑인이라 해도) 자기 직업윤리에 대해서도 투철했던 것이 결국에는 저자 자신이 인종주의를 극복하는 바탕이 되었다는 것이다. 약간 부모님 자랑 같아서 낯간지럽기도 하지만, 어쩌면 그렇게 최소한의 인간다움을 포기하지 않는 자세에서부터 차별과 폭력을 이기는 힘이 나오는 것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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