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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이 동물원(켄 리우, 황금가지, 2018.)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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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이 동물원(켄 리우, 황금가지, 2018.)

Dog君 2021. 5. 19. 15:27

 

  역사에 대한 통찰을 꼭 역사책에서만 얻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1930년대의 민생단 사건을 생생하게 전달하기로는 김연수의 소설 『밤은 노래한다』에 비길만한 것이 없고, 문화혁명기 중국의 현실을 유쾌하면서도 날카롭게 드러내기로는 위화의 에세이 『사람의 목소리는 빛보다 멀리 간다』만큼 훌륭한 글도 드물다. 개인적으로는 장예모 감독의 영화 '인생'을 보고서 역사를 바라보는 제 관점이 크게 바뀌기도 했고. (그러고보니 이 영화의 원작자도 위화.) 딱딱한 연구서 외의 역사책을 권해달라고 부탁할 때 나는 이들 책을 떠올린다.

 

  켄 리우의 소설집 『종이 동물원』도 마찬가지다. 어느 독서 팟캐스트에서 소개하는 것을 듣고 큰 기대 없이 읽었는데, 이게 웬걸, 『종이 동물원』은 2019년에 읽은 책 중에서 수위를 다툴 정도로 훌륭한 책이었다.

 

  여기에 수록된 작품들은 기본적으로 SF 혹은 판타지 소설의 외양을 띄고 있지만 동아시아 역사에 대한 통찰이 담긴 이야기이기도 하다. 서구열강의 침탈과 근대화로 얼룩진 중국근현대사를 판타지와 스팀펑크 장르에 녹여낸 「즐거운 사냥을 하길」과 대만의 2.28을 파자놀이와 연결시킨 「파자점술사」, 시간여행과 양자역학에 일본 제국주의의 과거사 문제를 엮은 「역사에 종지부를 찍은 사람들」 같은 소설이 특히 좋았다. 당장 단편영화나 웹툰으로 만들어도 좋겠다 싶을 정도로 스토리텔링이 훌륭할 뿐 아니라 던져주는 메시지도 묵직하고 감정적인 여운도 길게 남는다.

 

  가장 인상깊었던 것은 양주대학살 이야기를 다룬 「송사와 원숭이 왕」. 켄 리우는 서유기에서 모티브를 빌어온 이 이야기를 통해 역사를 기록/기억하는 것이 왜 그토록 중요한지, 역사가 기록/기억되는 방식이 꼭 거창한 문자기록이어야만 하는지, 등등의 이야기를 우리에게 들려준다. 그러니까 이 소설은 역사 쓰기 그 자체에 대한 메타 소설이기도 하다. 물론 독자에 따라서는 신파 느낌이 물씬 나는 이런 이야기를 싫어할 수도 있겠지만, 음... 내가 신파에 좀 많이 약하다. ㅎㅎㅎ

 

 방금 두 사람 간의 대화의 공백을 메꿀 때 틸리는 마치...... 사이가 자기 힘으로는 데이트를 이끌어 나갈 수 없다고 믿는 듯했다. 자신이 끼어들지 않으면 사이 혼자서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모른다는 것처럼. (「천생연분」, 44쪽.)

 

  "고마워." 여자가 말했다.
  "오랜만이야."
  나는 염을 보며 그렇게 말했다. 좋아 보이네라는 말은 목구멍으로 삼켰다. 염은 좋아 보이지 않았다. 피곤해 보였고, 수척해 보였고, 차가워 보였다. 게다가 아찔한 향수 냄새 때문에 코가 다 찡했다.
  하지만 염에게 모진 낙인을 찍고 싶지는 않았다. 낙인찍는 것은 살아남으려고 발버둥치지 않아도 되는 이들의 특권이므로. (「즐거운 사냥을 하길」, 97쪽.)

 

  "미군이 처음 한국에 도착했을 때, 미군 병사들은 한국군 병사가 미국이라고 말하는 걸 자주 들었다네. 그들은 한국군이 영어로 '미(me), 국(gook)’이라고 하는 줄 알았지. 하지만 한국군은 사실 미국 사람 이야기를 하는 거였어. 미국은 '아메리카’를 뜻하는 말이거든. 국은 한국어로 '나라’라는 뜻이고. 그래서 미군 병사들은 아시아인을 '국’이라고 부르기 시작했어. 어떤 의미로는 사실상 자기 자신을 가리키는 말이라는 걸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이지." (「파자점술사」, 152쪽.)

 

  다른 여자애들 목숨을 내가 왜 챙겨야 하지? 루스는 생각한다. 나한테 소중한 건 제시카뿐인데. 제시카가 맞을지도 모르는 확률이라면, 남들이 아무리 낮다고 해도 나한텐 충분히 높아.
  기계가 딸을 구해 줄 거라 믿어도 될까? 떨리는 손을 진정시켜 달라고, 흐릿한 시야의 초점을 잡아 달라고, 총알이 빗나가지 않게 명중시켜 달라고 기계한테 부탁해도 될까?
  "엄마, 이 사람은 나중에 날 풀어 줄 거야. 날 해치지 않아. 이 사람은 그냥 달아나고 싶을 뿐이라고. 그 총 좀 내려놔!"
  어쩌면 스콧은 무사히 구한 목숨과 위험에 몰아넣은 목숨의 수를 갖고 계산을 할 수 있는 사람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루스는 그렇지 않다. 루스는 기계를 믿지 않는다. (「레귤러」, 264쪽.)

 

  "우리 슬픈 얘기는 그만 하자. 사랑해." (「모노노아와레」, 400쪽.)

 

  "전호리, 양주의 백성들은 100년 전에 죽었어. 그건 무슨 수로도 바꿀 수 없는 사실이야. 하지만 과거는 기억이라는 형태로 계속 살아가게 마련이고, 그래서 권력을 쥔 자들은 언제나 과거를 지우고 침묵시키려 해. 원혼들을 땅속에 묻어 버리려고. 이제 자네도 과거를 알아 버렸으니 더는 무지한 방관자가 아니야. 만약 아무것도 안 하고 가만히 있으면 자넨 황제와 그가 부리는 혈적자와 한패가 되는 거야. 그들이 저지르는 이 새로운 폭력, 과거를 지워 버리는 작업에서 말이야. 왕수초가 그랬듯이 이제는 자네가 목격자야. 왕수초가 그랬듯이 자네도 어떻게 할지 선택해야 해. 결정을 내려야 해. 언젠가 숨을 거두는 날 오늘의 선택을 후회할지, 안 할지를."
  원숭이 왕의 모습은 흐릿해지다가 사라져 버렸고, 전호리는 자신의 통나무집에 홀로 남아 생각했다. 기억이란 무엇인지를. (「송사와 원숭이 왕」, 458~459쪽.)

 

  전호리는 자신에게 남은 마지막 힘과 집중력을 모조리 끌어 모았다. 그런 다음 그 책에서 본 구절을 떠올렸다.
  세 병사는 포로 수십 명을 양 떼를 모는 개처럼 몰고 갔다. 너무 느리게 걷는 포로가 있으면 냅다 구타하거나 그 자리에서 살해했다. 부녀자는 실에 꿰인 진주처럼 밧줄에 줄줄이 묶여 끌려갔다.
  전호리는 그 구절을 어떻게 둔갑시킬지 생각했다. 북경 표준어와 양주 방언의 성조가 어떻게 다른지, 말장난과 유사음과 운율과 자리 바꾸기를 사용하여 어떻게 본래의 구절을 알아보지 못할 만큼 바꿀 수 있을지 생각했다. 그런 다음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세 병자는 포도 수십 알을 몰고 갔네
  양 떼를 모는 개처럼.
  너무 느리게 구르는 포도가 있으면
  냅다 구토했네.
  아니면 그 자리에서 사례하거나
  분해 자는 밭들에 줄줄이 묻고 갔네
  실에 꿰인 진주처럼.

  아이들은 말도 안 되는 가사에 신이 나서 곧장 그 노래를 외워 불렀다. (「송사와 원숭이 왕」, 466쪽.)

 

  내가 무슨 짓을 한 거지? 사람들은 죽어가는 나를 보며 웃고 있잖아. 내가 바보짓을 했다면서. 난 아무것도 이루지 못했어, 그저 가망 없는 대의를 위해 싸웠을 뿐.
  아니야, 결코 그렇지 않아. 원숭이 왕이 말했다. (...) 아이들의 노래는 온 양주 땅을 넘어 온 중국에 널리 전해질 거야. 언젠가는, 당장은 힘들겠지만, 어쩌면 100년도 더 걸릴지 모르지만, 언젠가는 그 책이 일본에서 다시 돌아올지도 몰라. (...) 어느 명민한 학자가 자네 노래에 숨은 뜻을 알아차릴지도 모르고. 그러면 진실의 불꽃이 온 중국을 활활 타오르게 할 테고, 이 사람들도 노예처럼 멍한 상태에서 깨어날 거야. 자네는 양주에서 죽어간 이들의 기억을 지켜 냈어.
  (...)
  난 영웅이 되기는 글렀지, 안 그래? 나한테도 진짜 용기가 있었더라면 좋았을 텐데.
  자넨 특별한 선택에 직면한 평범한 사람이었어. 그때 자네가 한 선택을 후회하나?
  아니. 전호리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그러고는 고통 때문에 의식이 흐려지고 이성의 빛이 천천히 꺼져 가는 동안, 굳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결코 후회하지 않아.
  그 이상 뭘 더 바라겠나. 미후왕(美猴王) 손오공은 그렇게 말하고 나서 전호리 앞에 허리 숙여 절을 했다. 황제 앞에서 굽실거리는 절이 아니라 위대한 영웅에게 바치는 경배였다. (「송사와 원숭이 왕」, 468~469쪽.)

 

  (...) 위원장님, 증인들과 저는 현재의 일본 정부나 일본 국민에게 어떤 식으로든 자신들의 유죄를 인정하라고 요청할 생각이 없습니다. 저희가 요청하는 바는 731부대의 희생자들은 마땅히 명예를 되찾고 기억되어야 하며, 극악무도한 범죄의 실행자들은 마땅히 비난받아야 한다는 것이 미합중국 의회의 믿음이라고 본 위원회가 선언하는 것입니다. 이는 재판 없이 특정인의 권리를 박탈하자는 것도 아니고, 그 특정인의 재산 행사 권리를 몰수하자는 것도 아닙니다. 저희는 일본에 보상을 요구하지 않습니다. 저희가 바라는 것은 오로지 진실을 밝히겠다는 약속, 기억하겠다는 약속뿐입니다.
  홀로코스트 추모비와 마찬가지로 그러한 선언의 가치는 오로지 우리가 희생자들과 인류애라는 공통된 유대관계를 지닌다는 것, 또 우리가 731부대 도살자들 및 그들에게 허락과 지시를 내린 일본 군국주의자 집단의 잔악성과 야만성에 한뜻으로 반대한다는 것을 공식적으로 인정하는 데에 있습니다.
  이제 저는 '일본’이 단일한 집단이 아니며, 단지 일본 정부만을 가리키지도 않는다는 점을 분명히 말해 두고자 합니다. 앞서 언급한 만행들을 세상에 밝히기 위해 오랫동안 용감히 투쟁해 온 일본 국민 개개인이 계십니다. 그분들은 거의 언제나 정부의 저항에, 또 과거를 잊고 앞으로 나아가고자 하는 대중의 저항에 맞서 싸우셨습니다. 저는 그분들께 마음 깊이 감사드립니다.
  진실은 빗자루로 쓸어버릴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현 중국 정부가 미국 정부의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이유로 희생자 유족과 중국 국민에게 정의가 실현될 수 없다고, 또 거대한 불의가 세상의 심판으로부터 가려지고 감춰져야 한다고 말해서는 안 됩니다. 만약 희생자들이 미국의 우방국 국민이었다면 어떠한 구속력도 없는 이 결의안이, 심지어 이보다 더욱 엄중한 결의안이라 할지라도, 통과되는 데에 과연 눈곱만큼의 문제라도 있었겠습니까? 만약 우리가 '전략적’ 이유 때문에 단기적인 이익이 될 어떤 것을 얻으려고 진실을 희생시킨다면, 그러면 우리는 2차 대전이 끝났을 때 우리 선배들이 저지른 과오를 단순히 되풀이할 뿐입니다.
  그것은 우리의 정신이 아닙니다. 웨이 박사는 우리에게 과거의 진실을 이야기할 기회를 주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일본 정부와 우리 정부를 향해 역사에 대한 공동의 책임을 당당히 다하라고 요구해야 합니다. (「역사에 종지부를 찍은 사람들 - 동북아시아 현대사에 관한 다큐멘터리」, 523~524쪽.)

 

  (...) 저는 오로지 희생자와 그들의 기억에 전념할 뿐, 구경거리를 만들려는 의도는 결코 없습니다. 저는 일본에 대해 핑팡에서 일어난 일의 진실을 인정하라고 요구하고 있습니다. 제 말은 구체적인 사례와 구체적인 인정에 집중하자는 겁니다. 공허한 일반론이 아니라요.
  하지만 이왕 요시다 대사님께서 사과 이야기를 꺼내기로 마음먹으셨으니, 그 사과라는 것을 더 자세히 살펴보도록 하지요.
  대사님께서 인용하신 담화문은 거대하고 추상적인 이야기로서, 모호하고 비명시적인 고통에 관해 말합니다. 사과라고 하기에는 물타기를 해도 너무 심하게 한 것입니다. 대사님께서 말씀하지 않은 사실이 하나 있는데요. 바로 수많은 개별 전쟁 범죄를 인정하는 것과 실제 희생자들을 기억하고 기리는 것을 일본 정부가 지속적으로 거부한다는 사실입니다.
  게다가 대사님께서 인용하신 것 같은 담화문이 발표될 때마다, 일본에서는 바로 얼마 후에 유력 정치인이 2차 대전 중에 일어난 사건의 진실성에 근거 없는 의혹을 제기하는 성명을 발표하곤 합니다. 세월이 흐르는 동안 우리는 마치 두 얼굴의 야누스처럼 이야기하는 일본 정부의 이런 쇼에 익숙해졌습니다. (「역사에 종지부를 찍은 사람들 - 동북아시아 현대사에 관한 다큐멘터리」, 533~53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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