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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감자 (수전 캠벨 바톨레티, 돌베개, 2014.)

Dog君 2021. 5. 19. 15:16

 

  1845년의 일이다. 늦감자 수확을 앞둔 10월의 어느 날, 아일랜드의 감자밭에 원인모를 병이 돌았다. 잎줄기에는 검은 반점이 피었고, 땅밑의 감자도 검게 썩어 물컹거렸다. 문제는 감자밭만이 아니었다. 8월말에 캐서 보관해둔 햇감자들도 마찬가지로 썩기 시작했다. 이 병은 전염성도 강해서 순식간에 아일랜드 전역으로 퍼져나갔다. (하루에 80km 속도로 퍼졌단다.) 한 번 썩은 감자는 되돌릴 방법이 없었다. 썩은 부분을 도려내거나 잘 익혀서 먹으면 괜찮을줄 알았지만, 아무리 조리를 잘 해도 썩은 감자를 먹은 사람은 틀림없이 설사와 고열에 시달렸다. 내년 농사를 위한 씨앗은커녕 당장 겨울을 날 식량조차 없어진 것이다. 감자 역병은 1847년 8월께부터 겨우 가라앉기 시작했지만 이미 예년의 1/4 수준으로 주저앉은 감자수확량이 회복되는데는 더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엎친데 덮친격으로 1848년에는 콜레라까지 창궐했다.

 

  1871년 인구통계청은 아일랜드의 인구를 441만 2,000명으로 발표했다. 대기근 직전인 1845년에 800만을 헤아렸던 인구가 절반으로 줄어든 것이다. 1871년이면 역병이 끝나고도 20년이 지난 후니까 그간 어느 정도 인구가 회복되었으리라는 것을 염두에 두면 대기근이 아일랜드인에게 끼친 영향이 얼마나 어마어마했다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역사학자들의 추산에 따르면 대기근동안 사망자는 100만을 넘고, 고향을 등지고 이주한 사람도 200만을 넘는다고 한다. (물론 이 숫자를 1871년의 통계와 결합하면, 계산이 안 맞다. 하지만 19세기의 사건에 대한 추산치에 수학적 정확성을 요구할 수는 없을 것이다.) 1910년까지 아일랜드를 떠난 사람은 총 500만에 달한다고 한다. 2019년 현재 아일랜드의 인구는 484만으로 대기근 이후에 비해 아주 크게 늘어나지는 않았다. (물론 영국령 북아일랜드가 제외된 수치라는 점도 염두에 두어야 한다.)

 

  기획 의도 자체가 청소년용 역사서이기 때문에 대단히 새로운 내용이나 주장이 담겨 있지는 않다. 내가 피상적으로 알고 있던 아일랜드 대기근의 상식으로부터 크게 벗어난 내용도 아니다. 다만 그 ‘피상’을 좀 더 두툼하게 만들 수 있다는 점에서 유익한 독서였다. 이미 충분히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주제라서 더 이상 알 필요가 없다는 생각만큼이나 건방진 것도 또 없을 것이다. 이미 알고 있는 것도 다시 확인하고, 더 보탤 것 없다 싶은 주제도 다시 두들겨 보고 끊임없이 내 생각을 고쳐먹는 것이 바로 공부하는 사람의 기본자세 아니겠나.

 

  『검은 감자』가 말하는 대기근의 원인은 단연 불평등이다. 소수의 지주를 제외한 압도다수의 아일랜드인은 소규모 소작농이거나 혹은 소작할 땅조차 갖지 못하고 노동을 팔아 연명한 농업노동자였다. 이들은 대기근 이전부터 이미 만성적인 가난에 시달리고 있었다. 작년에 수확한 늦감자가 다 떨어지는 5월부터 햇감자 수확이 시작되는 8월까지, 이른바 ‘감자고개’라는 시기가 매년 아일랜드인들을 괴롭혔다. 아일랜드인의 주식인 감자를 제외한 다른 곡식들은 대체로 지주의 손에 들어가거나 영국으로 ‘수출’되었다.

 

  대기근은 이런 상황에서 터졌다. 그러니까 감자 역병 때문에 대기근이 일어났다는 주장은 절반만 맞다. 대기근으로 사람들이 죽어가던 그 순간에도 감자를 제외한 다른 작물들은 여전히 영글고 있었고, 이것들은 소수의 지주의 몫으로 남거나 영국으로 ‘수출’되었기 때문이다. 파이가 작은 것이 아니라 파이가 제대로 나눠지지 않았던 것이다.

 

  감자 역병이 2년 내리 발생하리라고는 누구도 짐작하지 못했다. 지난겨울을 나면서, 노동자 대부분이 돈 될 만한 것은 다 팔거나 전당 잡혔다. 그렇게 마련한 돈으로 식량과 씨감자를 샀다. 그런데 감자 농사는 쫄딱 망쳤고, 팔 것도 하나 남지 않았다. 수입 옥수수도, 일자리도 없었다.
  그러나 아일랜드 들판에는 곡식이 가득했다. 밀, 귀리, 보리, 호밀 등 가루를 내어 빵이며 죽이며 케이크로 만들어 먹을 곡식들이 자라고 있었다. 여기에서 대기근의 아주 커다란 모순 한 가지를 깨닫게 된다. 아일랜드 백성이 주식으로 삼는 감자 농사를 망쳐 굶주림에 시달리는 동안, 다른 한편에서 노동자들은 입에 댈 수도 없는 곡식들이 영글고 있었다. 그것은 지주와 농민 것이었다. 굶주린 노동자들은 그저 곡식을 베고 털고 빻아 수레에 싣고 시장을 내가는 것만 지켜보았다. 그 곡식은 영국과 다른 나라에 팔 것들이었다.
  어떤 역사학자들은 이렇게 주장한다. 대기근이 두 해째로 접어든 그해 아일랜드에서 생산된 곡식, 가축, 모직, 아마가 아일랜드인을 먹이고 입힐 만큼 넉넉했다고. 다른 사학자들은 이런 주장에 반박한다. 굶주린 사람이 워낙 많아서 수출하지 않았더라도 그 식량으로는 다 먹여 살리지 못했을 것이라고. 게다가 대기근 시기에 수출한 것보다 수입한 곡물이 네 배나 많았다는 사실을 보여 주는 수치까지 제시한다.
  역사학자들이 엄연한 역사적 사실을 어떻게 해석하든 상관없이, 이 진실은 변함없이 남는다. 아일랜드 백성은 굶주리고 있는데, 그 땅에서 난 곡식과 가축을 한가득 실은 배가 영국과 다른 나라의 시장으로 떠났다는 사실이다. 윌리엄 파월의 말을 빌리면, 그 사실이 뜻하는 것은 단 한 가지였다. “네, 아일랜드 대기근은 인재였습니다. 우리네 지배자가 이 땅에서 난 식량을 영국으로 싣고 가도록 주선했고, 이 땅 백성은 굶주리도록 내팽개친 겁니다.” (79~81쪽.)

 

  파이의 크기가 아니라 파이의 분배가 문제인 상황이라면, 아일랜드에서 브리튼으로 넘어가는 곡물의 행렬을 온전한 의미의 ‘수출’로 볼 수는 없다. 완전한 자유를 가진 개인(혹은 집단) 간의 평등한 계약에 따라 맺어진 관계가 아니기 때문이다. 역사에 관심있는 한국인이라면 여기서 자연스럽게 이른바 ‘식민지근대화론’을 떠올리게 된다. 식민지시기 조선에서 일본으로 미곡이 건너간 것은 금전을 매개로 한 ‘수출’이지 ‘수탈’이나 ‘이출’이 아니라는 주장 말이다. 물건이 한쪽에서 다른쪽으로 이동했고 그 댓가로 금전이 반대방향으로 이동했으니 ‘수출’로 보아야 한다는 주장 말이다.

 

  아일랜드의 대기근에 관한 책을 이야기하면서 굳이 식민지 조선을 상세하게 언급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사실... 그럴 능력도 못 된다;;) 다만, 식민지 조선에서 ‘자유로운 의지를 가진 개인’으로서의 조선인(개인이건 집단이건)이라는 것을 상정할 수나 있는지, 그게 궁금하다.

 

  책의 내용과 별개로, 이 책에서 가장 가슴 뭉클했던 부분은 아래 인용이다. ‘연대’ 내지 ‘협동’, ‘사랑’ 같은 가치야말로 인간이 인간일 수 있게 하는 것 아닐까...하는 생각을 아일랜드 대기근에서 다시 한 번 확인한다.

 

  무엇보다 아메리카 원주민인 촉토족의 원조가 아주 특별했다. 이 인디언 부족은 시련을 겪고 있는 아일랜드인에게 남다른 동병상련을 느꼈다. 촉토족은 15년 전, 1831년에서 1832년으로 넘어가는 겨울에 조상 대대로 살아오던 미시시피 땅에서 쫓겨났다. ‘눈물의 이주길’에 올라, 오클라호마까지 1,000킬로미터를 걸어가는 동안 촉토족 부족민 절반이 사망했다. 그들은 1847년에 아일랜드 구호 기금으로 110달러[약 350만 원]를 기부했다. (12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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