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og君 Blues...
기억 전쟁 (임지현, 휴머니스트, 2019.) 본문
이 같은 부정론들은 포스트모더니즘이나 구성주의보다는 실증주의를 따르는 전통적 역사 방법론에 더 의지하고 있다는 게 내 판단이다. 물론 이 부정론자들은 필요할 때 서슴없이 포스트모더니즘이나 구성주의를 받아들인다. 자신들의 정치적 의제를 위해서는 언제든지 역사적 진실을 희생할 준비가 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문서 자료가 없거나 사라진 상황에서는 실증주의가 이들에게는 한층 더 유리한 무기이다. ‘있음’을 증명하기보다는 ‘없음’을 지키는 게 더 쉽기 때문이다. 그러니 부정론자 어빙이 증인의 기억이 사실과 어긋난다 하여 그것이 가짜는 아니며 때때로 ‘진실(목격자의 기억)’이 ‘사실’과 어긋나기도 하는 ‘아우슈비츠의 아포리아’를 이해하고 받아들일 것이라고는 생각하기 어렵다. (48쪽.)
역사적으로 따져보면 반유대주의는 오랫동안 서구의 특별한 현상이었다. 중세 기독교 세계와 비교해봐도 이슬람 세계가 유대인에게 훨씬 관대했다. 그러던 것이 1948년 이스라엘 건국을 계기로 이슬람 세계에 반유대주의가 본격적으로 뿌리내리기 시작했다. 더불어 홀로코스트 부정론도 이스라엘 건국의 정당성을 깎아내리기 위한 담론으로 이슬람 세계에 널리 유포되기에 이르렀다. 백인우월주의자인 듀크가 이슬람 세계에 주목한 것도 이런 이유에서였다. 더구나 이슬람 세계와의 접목은 홀로코스트 부정론에 제3세계적 외양을 띠게 함으로써 인종주의적 색채를 옅게 만드는 효과를 가져왔다. 최근 들어 듀크 같은 백인우월주의자들이 민족자결권의 수사를 빌려 ‘백인우월주의’ 대신 ‘백인분리주의’라는 용어를 사용하기 시작했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테헤란 회의에는 듀크 외에도 프랑스의 로베르 포리송(Robert Faurisson)을 비롯해 스웨덴, 말레이시아, 스위스, 오스트리아, 헝가리, 오스트레일리아 등지에서 내로라하는 부정론자들이 다 참가했다. 이들은 대회 기간 중 홀로코스트 연구를 위한 세계 기구를 만드는 데 동의하고, 이란의 문화부 차관이자 아마디네자드 대통령의 보좌관인 모하마드 알리 라민(Mohammad-Ali Ramin)을 사무총장으로 선출했다. (59~60쪽.)
동아시아의 상황은 더 답답하다. 포스트 일본 제국이 됐든 포스트 식민지 한국이나 중국이 됐든, 탈영병 기념비는 아예 기대조차 할 수 없다. 동아시아는 여전히 일본 총리의 야스쿠니 신사 참배 문제로 시끄럽다. 그런데 야스쿠니 신사 논란에 전사자를 기리는 행위 그 자체에 대한 문제 제기는 없다. 야스쿠니에 안치된 위패의 주인공과 참배객을 놓고 일본과 그 주변 국가들이 입씨름을 벌이는 수준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한다. 사실, 21세기 동아시아의 기억 문화는 국가가 전사자를 호국영령으로 제사함으로써 전사자 추모를 호국영령 숭배라는 정치종교의 차원으로 승화시킨, 전사자 숭배의 정점을 보여준다. ‘무명용사의 탑’이나 ‘꺼지지 않는 불꽃’에서 볼 수 있듯이 ‘국가를 위해 희생한’ 자들의 죽음을 특권화하고 제사하는 20세기의 국민국가적 제의는 동아시아의 기억 문화에서 중심을 차지한다. 단순화를 무릅쓰고 말한다면, 러일전쟁에서 시작하여 총력전체제에서 만개한 일본 제국의 정치종교가 여전히 동아시아 각국의 정치 문화를 지배하고 있는 것이다. (77~78쪽.)
희생자 대 가해자라는 단순한 이분법적 구도에서는 그로스의 주장이 자칫 폴란드인들의 희생을 무시하고 그들을 가해자로 몰고 가는 논리로 변질되기 쉬운 것도 사실이다. 그렇게 되면 제2차 세계대전에서 누구 못지않게 큰 희생을 치른 폴란드인들로서는 억울하기 짝이 없는 일이다. 또 목숨을 걸고 유대인을 숨겨준 양심적 폴란드인도 적지 않았다. 요컨대, 희생자 대 가해자라는 이분법으로는 역사 현실의 복합성을 설명할 수 없다는 것이다. 예드바브네 사건은 역사의 행위자들이 희생자이면서 동시에 가해자일 수 있음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91쪽.)
당시 대선에서는 레흐 바웬사(Lech Wałęsa)와 타데우쉬 마조비에츠키(Tadeusz Mazowiecki)가 결선에 진출했는데, 아우슈비츠 인근에 게시된 선거 벽보의 마조비에츠키 사진 위에 누군가 다비드의 별을 그려놓았던 기억이 생생하다. 아우슈비츠 수용소 주변의 퇴락한 건물 담벼락에도 페인트로 칠한 다비드의 별과 반유대주의 낙서가 어지러웠다. 거의 반세기 동안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를 주문처럼 외워온 사회주의 국가에서 반유대주의 낙서를, 그것도 바로 아우슈비츠 앞에서 볼 것이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던 나는 그저 망연자실했다. 홀로코스트처럼 끔찍한 반인륜적 범죄가 일어난 바로 그 땅에서 반유대주의가 그토록 완강하게 지속되었다는 게 도저히 믿어지지 않았다.
실제 폴란드 같은 현실사회주의 국가들에서 홀로코스트는 기억해야 할 역사적 비극이 아니라 사회주의 체제의 정통성을 확보하는 데 필요한 도구로 활용된 면이 크다. 이들 국가는 독일이나 기타 서구 자본가들이 나치를 지지했다는 사실을 근거로 홀로코스트를 자본주의의 부산물로 규정하고, 비판의 초점을 자본주의에 맞추었다. 서구 마르크스주의자들의 경우에도 사정은 비슷했다. 유대인의 비극을 너무 강조하다 보면 프롤레타리아 계급의 고통을 소홀히 할 수 있다는 사회주의적 보편주의가 이들을 지배했다. 사회주의의 진보를 위해 홀로코스트의 인종적 기억은 지워져야 했다. (119~120쪽.)
나치즘과 스탈린주의의 기억은 양자택일의 문제도 아닐뿐더러, 어느 한쪽을 강조한다고 해서 다른 한쪽의 기억이 지워지는 제로섬 게임도 아니다. 이 두 기억에는 연대가 필요하다. 자신이 아프다고 타자의 아픔을 무시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아픔으로 인해 타자의 아픔을 더 잘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는 기억의 연대를 이루어야 한다. 그리고 ‘이것이 어떻게 가능한가’라는 질문은 여전히 답을 찾고 있다. (144쪽.)
놀라운 점은 지금까지 나치 독일군 가운데 비무장 민간인을 학살하라는 명령을 거부했다가 끔찍한 처벌을 받은 사례는 단 한 건도 없었다는 것이다. 유제푸프의 ‘101 예비경찰대대’ 대원들도 마찬가지였다. 이들은 본인이 원하기만 하면, 학살 임무를 거부할 수 있었다. 학살 임무를 거부한 일부는 자신이 ‘경찰 본연의 업무 이외의 임무’에 부적합하다는 청원을 제출해 본국으로 전출되기도 했다. 그러니 예비경찰대대의 대원들이 처벌에 대한 두려움이나 상관의 강압 때문에 학살에 참여했을 것이라고 지레짐작했다면, 한마디로 ‘틀렸다.’
더 놀라운 것은 101 예비경찰대대의 장교와 하사관을 제외한 일반 대원들의 사회적 배경이 지극히 평범했다는 점이다. 평균 연령 39세의 이들은 대부분 반(反)나치 성향이 강한 함부르크 출신이었고, 63퍼센트가 블루칼라 노동자였다. 항구도시의 특성상 부두 노동자와 트럭 운전기사가 가장 많았고, 보세창고 노동자, 건설 노동자, 선원, 식당 종업원도 있었다. 나머지 37퍼센트 중 35퍼센트는 판매사원이거나 민간 회사 혹은 공공기관의 사무직 노동자, 즉 중하층 화이트칼라 노동자였다. 교사, 약사 등 중산층 전문직 종사자는 단 2퍼센트에 불과했다. 하층 계급 출신이 대부분인 이들은 초등학교를 졸업한 뒤 도제교육이나 직업훈련을 받은 것 외에 고등 교육을 받은 적이 없었다. (147~148쪽.)
히틀러와 나치 수뇌들에게 홀로코스트의 책임을 묻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그러나 그들에게만 책임을 전가한다면 곤란하다. 동유럽의 학살 현장에서 실제로 유대인을 죽인 것은 나치 수뇌부의 펜이나 명령이 아니라 평범한 독일 병사의 소총이었다. 구조가 사람을 학살할 수는 없다. 오직 사람만이 사람을 학살할 수 있다. 나치의 학살 기계도 현장에서 그것을 효율적으로 운영하는 사람이 없다면 작동할 수 없었다. 그러나 학살 명령을 내린 권력자뿐만 아니라 학살 기계를 작동시킨 아주 평범한 실행자에게도 책임을 묻는다고 해서 문제가 다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그들을 ‘평범한 독일인’으로 볼 것인가, 아니면 ‘평범한 사람’으로 볼 것인가의 문제가 여전히 남는다. 그들이 평범한 ‘독일인’이라면 학살은 독일만의 특수한 문제가 된다. 따라서 독일 역사의 고유한 특징들을 찾아내서 제거하면 그만이다. 하지만 그들이 평범한 ‘사람’이라면 문제가 달라진다. 특정한 조건만 주어진다면 전 세계의 아주 평범한 사람 누구라도 ‘101 예비경찰대대’ 아저씨들처럼 학살자가 될 수 있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 (151쪽.)
광주에 대한 사회적 기억은 신군부 살인자들을 비난하는 차원을 넘어 이 평범한 청년들이 왜 아무 의심 없이 사살 명령을 이행했는가를 묻기 시작할 때 책임감 있는 기억으로 바뀔 것이라고 나는 믿는다. (…) (156쪽.)
여기까지라면 아름답기 짝이 없다. 그러나 현실은 훨씬 복잡다단하다.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의 고통에 적극적으로 공감하면서 평화의 소녀상 제막식에서 연설까지 했던 시나얀 시장의 행보부터 그렇다. 제막식에서의 감동적인 연설의 여운이 사라지기도 전에 그는 온라인에서 동성애자와 여성에 대한 성적 편견을 드러내고, 라티노와 무슬림에 대해 인종주의적 발언을 한 일로 구설에 올랐다. 할아버지가 아르메니아 제노사이드의 희생자였다는 데서 오는 인권적 감수성도 한결같지는 않았던 듯하다.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에 대한 지지가 글렌데일의 한인 유권자를 겨냥한 단순한 정치적 제스처는 아니었길 빈다. 제노사이드 희생자의 후손이라는 데서 오는 도덕적 우월감이 자신을 성찰적으로 되돌아보기보다는 다른 마이너리티 희생자들에 대한 오만한 태도를 낳았는지도 모르겠다. 같이 일했던 미주 지역의 한인 활동가들에 따르면, 시나얀을 비롯한 아르메니아계 미국인들은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과 아르메니아 제노사이드 희생자들을 비교하고 같은 반열에 놓는 시도에는 분명히 선을 그었다고 한다. “우리가 도와는 주지만, 같이 놀자고 하면 곤란하다”는 식의 기운이 읽힐 때가 많았다는 것이다. 오스만튀르크가 저지른 아르메니아 제노사이드와 비견될 수 있는 비극은 나치의 홀로코스트가 유일하다는 게 아르메니아계 미국인들의 생각이다. 그것은 아르메니아 본국의 역사학계가 견지하고 있는 시각이기도 하다. 아르메니아 학계에서 1960년대부터 사용하기 시작한 ‘아르메노사이드’라는 조어는 아르메니아 제노사이드야말로 가장 제노사이드다운 제노사이드였다는 뜻을 담고 있다. (166~167쪽.)
《안네의 일기》는 사실 1947년 첫 출간 때부터 이런저런 논란에 시달렸다. 정통파 유대교도들은 안네 프랑크의 생활이나 생각이 너무 세속적이라고 불만을 터뜨렸다. 실제로 일기 어디에도 가족이 유대교의 계율을 지키려 한 흔적을 찾기 어렵다. 독일에 동화된 유대인으로 살다가 나치 집권 이후 네덜란드로 피신한 집안이니 세속적이라고 해서 새삼스러울 것은 없다. 시온주의자들도 불만이 많았다. 아무런 저항도 못하고 속수무책으로 죽어간 유대인이라는 수동적 이미지를 벗기 위해 바르샤바 게토 봉기와 같은 영웅적 투쟁을 강조하려는 그들에게 안네 프랑크의 일기는 소심하고 수동적인 유대인이라는 기존의 통념을 강화하는 것으로 비쳤다. 그런 이유에선지 처음 영어와 독일어로 번역되었을 때는 독서시장의 반응도 미지근했다. 1952년에는 일본어 번역판이 출간과 함께 베스트셀러가 되어 400만 부 이상 판매되고 청소년용 만화 등으로 출간되기도 했지만 일본의 열기는 오히려 예외적인 현상이었다.
서구에서 안네 프랑크가 크게 회자되기 시작한 것은 1955년 브로드웨이에서 연극 〈안네 프랑크의 일기〉가 상연되면서부터였다. 이 연극은 토니상 연극 부문 최우수상과 희곡 부문 퓰리처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그러나 정작 유대인들의 반응은 싸늘했다. 정통파 유대교도들은 연극으로 만들어지는 과정에서 안네 프랑크의 유대인으로서의 정체성이 지워졌다고 분노했다. 그들의 눈에 비친 연극 속의 안네는 옆집의 비유대인 소녀와 다를 바 없었다. 시오니스트들 사이에서는 심지어 《안네의 일기》를 불태우고 금서로 지정해야 한다는 극단적인 목소리까지 나왔다. 그런데 사실 《안네의 일기》가 세계적인 베스트셀러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유대인들의 특수한 정서를 넘어선 보편성 때문이다. 사춘기 소녀라면 누구나 가질 법한 내밀한 고민과 미세한 감정의 떨림이 국경과 인종, 종교를 넘어 큰 호소력을 지녔던 것이다. 역설적이게도 안네의 일기는 유대인들의 지탄을 받은 그 보편성 때문에 홀로코스트라는 유대인의 비극을 전 세계의 청소년에게 알리는 데 크게 공헌하게 된 셈이다. (171~172쪽.)
‘서양’ 지식인들이 유독 히틀러의 나치즘에 분노하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아프리카를 문명화하려 했던 무솔리니와 달리 나치는 유럽인을 문명화의 대상으로 삼았기 때문이다. 에메 세제르(Aime Cesaire)의 촌철살인을 빌리면, 그들은 히틀러가 ‘인류’에 반하는 범죄(crime against the humanity)를 저질렀기 때문이 아니라 ‘백인’을 대상으로 범죄(crime against the white man)를 저질렀기 때문에 용서할 수 없었던 것이다. 양심적 백인 지식인 대부분이 홀로코스트 이전에 일어난 식민주의 제노사이드에 대해서는 침묵으로 일관했다는 점을 감안하면, 세제르의 비판은 설득력이 있다. 홀로코스트가 ‘야만적인’ 아프리카나 아시아가 아니라 ‘문명화된’ 유럽의 한복판에서 일어났기 때문에 유별나게 비판을 받았다는 사실은 지구촌이 기억하는 제노사이드가 서구중심주의에서 자유롭지 못하다는 의미이다. (…) (203~204쪽.)
인디언 제노사이드와 홀로코스트를 나란히 놓고 보면 뜻밖의 결과를 얻게 된다. 미국의 민주주의는 홀로코스트의 대척점에 서 있는 게 아니라 홀로코스트의 가능성을 내장한 체제라는 결론이 그것이다. 근대 문명은 홀로코스트를 내장하고 있다는 지그문트 바우만의 지적은 미국의 민주주의에도 해당된다. 홀로코스트를 ‘전근대적이고’ ‘반(半)봉건적인’ 독일사의 특수성으로 국한시키려는 시도에는 정치적 알리바이의 냄새가 짙다. 식민주의 제노사이드의 맥락에 홀로코스트를 배치하는 순간, 영미식의 자유민주주의에 내장된 식민주의 제노사이드와 인디언 제노사이드의 원죄가 드러나는 것이다. 민주주의와 파시즘, 나치즘이 같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19세기와 20세기의 민주주의가 저지른 학살의 역사를 비판적으로 기억할 때 민주주의의 민주화를 향한 21세기의 고민이 길을 찾을 것이라는 이야기이다. (206쪽.)
(…) 제3세계의 관점에서 보면 홀로코스트는 지리상의 발견 이래 지난 500여 년 동안 식민주의가 전 세계의 선주민들에게 행사해온 폭력과 크게 다를 바 없다. 선주민이 아니라 유럽인을 대상으로 했다는 점만 제외하면 폭력의 양상이 놀랄 정도로 유사하다. 폭력으로 얼룩진 유럽 식민주의의 역사가 홀로코스트의 선례라는 점에 대해서는 많은 파시즘·나치즘 연구자가 동의하는 바이다. 남북전쟁 직후 미국의 남부에서 결성돼 흑인에게 살인적 폭력을 일삼은 KKK단을 파시즘의 주목할 만한 예고편이라고 본 로버트 팩스턴(Robert Paxton), 백인 이주민이 아메리카 인디언을 대량 학살한 사건에서 홀로코스트의 전조를 찾은 시몬 비젠탈(Simon Wiesenthal), 반유대주의의 전통은 식민주의적 대학살의 전통과 만난 후에야 대량 학살에서 홀로코스트로 발전했다는 스벤 린드크비스트(Sven Lindquist)의 지적 등은 모두 제3세계적 관점을 드러내준다. (292~293쪽.)
기억의 정치라는 관점에서 보면, 용서는 폭력적일 때도 많다. 특히 이미 죽은 피해자를 대신해 누군가 살해범을 용서하는 행위는 피해자의 고유한 권한을 부정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니 피해자에게는 또 다른 폭력일 수 있다. 가령 자기 아이를 죽인 범인을 용서했다고 치자. 그것은 가장 사랑하는 사람을 강제로 자기 삶에서 빼앗아간 행위에 대한 용서일 수는 있지만, 살인을 용서한 것일 수는 없다. 생명을 빼앗아간 행위를 용서하는 것은 그에게 살해당한 아이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다. 그럼에도 부모가 마치 살인을 용서하는 것처럼 행동한다면, 이는 자식을 자율적 인간이 아니라 소유물로 대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연인이나 친구를 대신해서 그/그녀를 죽인 가해자를 용서할 수 있다는 생각도 위험하기는 마찬가지다. 누구도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다른 사람의 생명권을 소유할 수는 없다.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착각일 뿐이다.
이렇게 폭력적인 용서가 정말 위험한 것은 그 행위가 사람들로 하여금 아직도 억울한 피해자를 잊어버리도록 만들기 때문이다. 억울하게 죽은 자는 말이 없으니, 사람들은 사과와 용서의 힘겨운 줄다리기가 끝났다고 생각하고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듯 평온하게 살아가게 된다. 그러나 이 평화는 여전한 피의 얼룩을 짐짓 못 본 척하는 거짓 평화일 뿐이다. 기억의 정치에서 중요한 것은 서둘러 가해자를 용서하고 상처를 봉합해서 평화의 길로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끔찍한 행위조차도 인간성의 일부임을 아프게 인정하고 인간의 그 끔찍한 일부가 다시는 세상에 드러나지 않도록 더 나은 기억의 방법을 모색하는 것이리라. 홀로코스트 이후 전 세계에서 벌어진 크고 작은 제노사이드만 50여 건을 헤아리는 상황에서 용서란 도대체 어떤 의미일까? (265~266쪽.)
(…) 도덕적 자기 정당성이 강할수록 자책의 자리는 점점 좁아지고, 자신에 대한 도덕적 성찰은 더 어려워진다. 도덕주의가 강할수록 더 도덕적이지 못한 것이다. (…) (27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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