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og君 Blues...
총력전 제국의 인종주의 (다카시 후지타니, 푸른역사, 2019.) 본문
이 책의 골자는 크게 두 가지다. 첫번째는 2차대전 당시 미국과 일본은 서로 맞붙어 싸웠지만 인종적, 민족적 소수자를 동원하는 이데올로기는 공히 인종주의에 기반하고 있었다는 것이고, 두번째는 미일 양국의 인종주의가 '거친 인종주의'에서 '친절한 인종주의'로 변화했다는 것이다.
그 중에서도 두번째 주장, 즉 같은 인종주의라 하더라도 그 내부에는 훨씬 더 복잡한 결이 있음을 지적한 부분이 흥미롭다. 아마도 그것이 인종주의적 폭력이 피식민민족(혹은 인종적 소수자)의 '자발적인' 동의를 유도하는 핵심적인 메커니즘이 아닌가 싶다. 이러한 지적은 식민권력이나 독재권력에 대한 부역의 문제를 논할 때도 꽤 중요하게 활용될 수 있을 것 같다.
물론 미국의 일본인과 식민지의 조선인을 동등하게 비교하는 이 책의 기본적인 구도가 과연 옳은가 하는 문제가 계속 마음에 걸리기는 한다. (이 부분은 번역자 역시 지적하는 문제다.) 식민지 경험을 가진 한국인으로서는 아무래도 이 부분이 눈에 거슬릴 수밖에 없을 것이고, 그리고 아마 그 부분이 이 책에 대한 한국 독자의 평가에서 가장 결정적인 쟁점이 될 것이다.
두 체제에서 명확히 인종적이거나 민족적인 불평등의 독트린에 기초한 정책들을 유지하기는 어렵게 되었다. 그리고 그런 견해에 대한 국가 지도자들의 공공연한 지지 표명 역시 점점 더 어려워졌다. 이는 미국과 일본이 인종주의를 확고히 제거하기 위해 쉽게 협력해 나아갔음을 뜻하지 않는다. 또 이는 두 나라에서 인종주의적으로 가장 거친 부류에 속하는 수많은 개인, 조직, 정부기관을 발견하기 어렵다는 사실을 의미하지도 않는다. 더 나아가 나는 인종주의의 거부로 인해 체계적인 인종적 폭력이 방지되었음을 암시하려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내가 제시하고자 하는 바는 일본과 미국 정부에서 똑같이 활발하게 일어났던 인종주의 규탄이 다름 아닌 제2차 세계대전 기간 동안에 발견된다는 점이다. (...) 이 책에서 내가 분석하고 주장하는 것은 이러한 미국과 일본의 인종주의 및 인종주의 거부라는 쉽지 않은 양립가능성이며, 이는 오늘날 우리에게 남아 있는 전쟁 유산 중 일부라는 점이다. (43~44쪽.)
(...) 나는 미국과 일본이 수행한 선전의 의도되지 않은 효과와 결과들을 (...) 심각하게 받아들인다. 나는 정책 입안자들의 의도들intentions을 무시하지 않는 한편, 미국과 일본이 인종주의적인 차별을 저지르지 않는 국가나 제국인 것처럼 행동했던 개인들과 기관들의 효과들effects도 고려한다. 인종이 생물학에 기초를 둔 것처럼 행동하는 일이 실제적인 힘을 가지듯이, 인종주의를 실천하지 않는 것처럼 행동하는 일, 특히 가장 명백히 드러나는 인종차별의 행태들을 조정해야 하도록 만드는 일 역시 실생활상의 결과를 낳는다. (55쪽.)
(...) 나는 미국과 일본이 경쟁적으로 총력전 체제로 전환하면서 그동안 경멸받으며 국가 공동체에서 다양한 방식으로 배제되었던 사람들로부터 더 많은 협력을 얻어내기 위한 방향으로 나아갓으며, 그에 따라 두 나라의 포용적이거나 배제적인 인종주의가 심화되었다는 사실을 보여 주고 싶다. (...) 미국은 일본계 미국인들을 수용소에서 풀어 주면서까지 국가 공동체 내부로 끌어들였다. 그리고 일본은 조선인 전체를 점점 더 국가 안에 포섭했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두 나라는 이 사람들의 병적이고 불건강한 문화, 뒤떨어진 발전 수준, 동화 등을 강조하면서 자신들과는 일정 정도 다른 특징을 그들에게 부여했다.
포용적인 정책으로 나아가는 전쟁기의 전환으로 인해, 소수민족과 식민지인들을 관리할 전략의 복잡한 재조정이 필요하게 되었다. 이는 내가 사용하게 될 용어인 "거친" 인종주의에서 "친절한" 인종주의로 나아가는 변화로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전자는 더 배타적이고 자기중심적이며 비인도적이었으며, 차이를 자연발생적인 것으로 이해하면서 동화의 가능성을 반역사주의적으로 부정했다. (...) 이에 반해 후자의 인종주의는 포용적이었다. 물론 포용적이기만 한 것은 아니었지만 어쨌든 훨씬 더 보편적, 인도주의적, 상대주의적이었으며 차이에 대해 더 문화주의적으로 이해했다. 그것은 동화의 가능성을 역사주의적으로 긍정했으며(즉, 인종적으로 열등한 사람은 역사 내부에 있다. 하지만 낙후되었거나 문화적으로 불건전하다), 주변화된 사람들의 건강과 복지 증진에 대해서도 약간은 관심을 가졌다. (...) (70~71쪽.)
군대는 조선인이 내지 일본인과 완전히 평등하다고 평가했으며, 중앙정부와 식민지 정부 역시 그렇게 말했다. 그러나 이 터무니없는 주장과 대다수 조선인의 현실적 생활조건 사이에는 커다란 간극이 있었다. 그 점을 생각할 때 우리는 왜 학자들뿐 아니라 그 외의 여러 사람들이 일본 통치자들의 발표가 단지 속임수일 뿐이었다고 즉각 결론을 내렸는지 충분히 납득된다. 이를테면 이는 "명백한 이중성론argument of obvious duplicity"이라 할 만한 관점이다. 그런데 이런 시각은 적어도 두 가지 점에서 불충분하다.
첫째, 이 논의는 역사적 조건의 변화에도 불구하고 전혀 변화되지 않는 일본의 인종주의를 전제한다. 그러나 인종주의는 여러 역사적 조건들 중의 한 부분이었다. 둘째, 평등을 선언하는 캠페인은 단지 실용적이고 미심쩍은 목적에서 비롯되었을 테지만, 그렇다고 할지라도 거기에서부터 의도되지 않은 효과가 나타나기도 했다. 하지만 이중성론은 그 편협한 관점으로 인해 그 사실을 고려하지 못한다. (...)
그런 것처럼(as if) 행동하기는 현실적인 효과들을 산출했다. 거기에는 군대에서뿐 아니라 제국 전체에 걸쳐 조선인 통치와 관련된 구체적인 정책이 변화될 것을 촉구하는 압력도 포함되어 있었다. 마침내 지배 엘리트들은 새로운 인종적 상식의 생산과 전파에 기여하게 되었다. 이는 거친 인종주의적 관점을 공공연히 채택하는 일을 더욱 어렵게 만들었다. 즉 더 이상 조선인들의 건강과 복지에 무관심할 수 없었으며, 더 큰 정치적 권리를 바라는 조선인들의 욕구를 무시할 수 없게 되었다. (103~105쪽.)
조선인 병사들에 대한 이러한 평가는 아주 경멸적이고 인종주의적으로 느껴진다. 그러나 조선인들의 풍습, 습관, 의식을 만든 것이 생물학이 아니라 역사라는 것, 따라서 조선인들은 변해야 하며 변할 수 있으리라는 생각이 이러한 평가를 상쇄하고 있었다는 사실에 다시금 주목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 점에서 《조선 출신 병사》(교육총감부敎育總監部가 1944년에 두 권으로 발행한 일본 육군 교육지침서인 《조선 출신 병사의 교육 참고 자료朝鮮出身兵の敎育參考資料》-옮겨쓴이)는 인종적 소수자들에 대한 미군의 훈련 방법과 상상 이상으로 닮아 있다. (...) 미국 전쟁성War Department의 《니그로 부대의 지휘Command of Negro Troops》는 《조선 출신 병사》와 잘 비교될 수 있는 텍스트다.
(...) 이 미국 매뉴얼은 《조선 출신 병사》와 마찬가지로 인종화된 소수자와 지배 집단 사이에 존재하는 그 어떤 생물학적 차이도 부정했다. 그 대신 비동일성을 만들어낸 요인으로 역사를 도입했다. 즉 "타고난 차이"를 부인했지만, 그와 동시에 테스트에서 나온 여러 "사실들"을 강조했다. (...)
(...) 매뉴얼은 타고난 결핍으로 인해 전투에서 흑인들을 믿을 수 없다는 가정이 잘못된 것임을 강조하기 위해 "훌륭한 병사는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진다"는 슬로건을 환기시켰다. 매뉴얼은 "지난 이삼십 년 동안 수행된 심리학자 및 다른 과학자들의 수많은 연구 중에서" "집단으로서의 니그로들이 정신과 정서의 면에서 유전적으로 결함이 있음을 증명한 연구는 단 하나도 없다"고 결론지었다. 비록 효율적인 인력 활용을 위해서였다고 할지라도, 논리적으로 보아 어쨌든 독일인들이 주장한 것과 같은 인종 이론은 거부되어야 했다.
우리는 《니그로 부대의 지휘》나 《조선 출신 병사》를 읽음으로써 교관들의 거친 인종주의적 태도가 반드시 변화했거나 군대 내의 인종차별이 사라졌으리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보다 이 텍스트들은 포용적이며 겉보기에는 친절한 새로운 인종주의로의 전이를 반영하고 촉진했다. 그것은 다른 역사, 낙후된 발전, 문화 등의 담론으로써 스스로 인종주의적인 논리를 재생산하면서도 공식적으로는 인종차별의 불법성을 역설했다. (...) (120~122쪽.)
(...) 조선의 사회사업과 사회복지에 대해서는 이미 다른 학자들도 연구해 왔으며, 나의 논의는 그 연구들에 크게 의지하고 있다. 하지만 그들은 이러한 프로젝트들이 모두 사회적 불만을 방지하고 일본 국가와 전쟁 프로그램에 이익이 되도록 의도된 불순한 것이었다고 결론지어버리는 경향이 있었다. 예컨대 그들은 빈자 구제책이 '순수한 구민救民'이 아니라고 말해 왔다. 나아가 학자들은 이런 형태의 프로그램들이 지닌 결함, 특히 조선과 일본 사이의 격차에 초점을 맞추곤 했다. 하지만 나는 권력과 관계없는 '순수한 구민'이나 사회복지 같은 것은 없다고 말해 왔다. 일본제국을 포함한 전 세계 사회사업과 사회복지의 역사는 결국 사람들을 효율적인 노동자와 군인으로 만들고 사회적 갈등을 예방하기 위해 그들의 삶을 부양했던 역사로 이해해야 한다. (...) (140쪽.)
(...) 조선인들을 일본의 생체정치적이며 정치적인 체제에 포섭하기 위한 전반적인 조치는 그 범위가 상당히 넓었다. 따라서 포용이 제한적이었으며 여전히 차별이 존재했다는 사실 등에만 집착할 경우, 우리는 전쟁 말기에 발생한 변화를 인식하지 못하게 될 것이다. 그렇게 초점을 잘못 맞출 때, 우리는 새로운 형태의 인종주의로 나아가는 근본적인 변화를 깨닫지 못하게 된다. 그리고 이 새로운 형태의 인종주의는 경멸당하는 사람들의 포용을 통해, 인종주의의 거부를 통해, 생활할 권리를 통해, 그리고 조선인들로 하여금 일본인과 똑같은 번영과 행복을 상상하게 하고, 가끔식 그것을 실현시키게도 할 방법의 확대를 통해 작용하기 시작했다. (143쪽.)
(...) 우리의 논의는 여기서 더 나아가야 할 것이다. 즉 만일 일본이 예전에 경멸당하던 주민들을 전례 없이 삶, 복지, 행복이 필요한 국민의 일부로 여기면서 국가 안에 포섭하기 시작했다면, 다시 말해 '죽일 권리'에서 '살게 할 권리'로의 전환이 있었다면, 어째서 조선인들은 죽음과 야만성을 그렇게도 많이 경험했을까? 우리는 끔찍하고 위험한 환경에서 엄청난 사망률과 부상률을 보이며 노동을 강요받았던 수십만의 조선인 남성들이 겪은 비인간적인 대우를 어떻게 설명할 수 있는가? 다른 것은 차치하더라도, 어떻게 우리는 수만의 조선 여성들이 '위안부'로서 성적인 노예 취급을 받았던 것을 설명할 수 있는가? 조선인들에 대한 조직적인 육체적 성적 폭력이, 일본이 친절한 인종주의로 전환하던 바로 그 기간에 가장 무섭고 광범위하게 행사되었음을 알게 되었을 때, 우리는 정말로 이를 어떻게 설명할 수 있겠는가? (145쪽.)
처음 소개가 시행되는 단계에서부터 일본인을 쥐에 빗댄 비유가 실제의 국가 정책이 되는 것을 우리는 발견하게 된다. 일본인들은 제대로 된 수용소가 지어지기 전에 종종 가축우리에 수용되었기 때문이다. (...) 아실 음벰베가 말하듯이, 동물성animality은 타자를 "진정한 의미에서 자유도 없고, 역사도 없으며, 개인성도 가지지 못한" 존재로 보는 관점을 조장한다. (152쪽.)
1942년 10월에 전쟁성 안팎의 견해는 군대에서 일본인을 사용하지 말라는 장교위원회의 권고에 반대하는 방향으로 바뀌었다. 군과 민간의 인력으로서 일본계 미국인이 유용하다는 논리가 계속 국가를 압박했던 한편, 단기적으로는 일본계 미국인 병사들의 존재가 글로벌한 선전전에서 엄청난 가치가 있을 것이라는 인식이 결정적인 요인으로 등장했다. 분명히 군대 및 민간의 몇몇 지도자들은 일본계 미국인들의 시민적 권리를 언급했지만, 이는 결정적 요소가 아니었다.
1942년 10월 2일에 전시정보국OWI 국장 엘머 데이비스Elmer Davis는 루스벨트 대통령에게 보낸 문서에서, 충성스런 '미국 시민 일본인American-citizen Japanese'을 육해군에서 활용함으로써 전쟁이 인종 갈등이라고 주장하는 일본의 아시아 프로파간다를 반격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데이비스는 '미국 시민 일본인'들이 미군에 자원할 수 있도록 허용함으로써 그들의 사기가 개선될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는 그런 조치가 전시정보국이 "필리핀, 버마 등에서" 역선전을 펼치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 (178~179쪽.)
그러나 이러한 변화를 이끈 도구주의적 생각은 인종주의가 기적적으로 사라지지는 않을 것임을 실질적으로 뒷받침했다. (...) 우리는 정치와 군대 엘리트들의 결정에 가장 크게 작용한 것이 일본계 미국인들에게 시민적 권리를 주려는 의도도 아니었으며 그들에 대한 인종주의적 행동을 제거하려는 욕구도 아니었음을 고찰해 왔다. 중요한 것은 그들의 노동력이었으며, 인종주의의 국가적 거부를 연출해 주는 연기자로서 그들이 지닌 유용성이었다.
라이샤워가 수많은 일본인들과 하와이 및 미국 본토에 사는 수십만 일본계 미국인들의 삶과 죽음에 영향을 미칠 정책들을 파렴치하고 계산적으로 제안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기본적으로 이 두 집단을 타자화했으며, 더 나아가 '황색과 갈색'의 사람들을 국가와 글로벌 공동체의 "우리we" 내부에 포용적으로 위계질서화 했기 때문이었다. (...)
종전 직후 라이샤워가 일본 내의 조선인들과 관련된 탈식민적 이슈 해결의 본질적인 중요성을 묵살했을 때, 소수자에 대한 라이샤워의 도구주의적인 이해는 또 하나의 문제적 양상으로 재등장하게 된다. (...) 여기서 나는 전시에 라이샤워가 보인 인종적 사고와 소수자들에 대한 도구주의적인 전유專有가 전후의 격렬한 반공주의와 쉽게 결합했다고 결론짓고 싶다. (215~217쪽.)
(...) 전시외국인수용소는 수용된 사람들이 최소한 1942년 가을까지 수용소를 떠나 재정착할 수 있게 하겠다고 공공연히 약속했다. 따라서 수용소로서는 위험인물을 가려내기 위한 효율적인 시스템이 필요했다. 전쟁성은 전쟁성대로 입대 지원자들과 전쟁에 꼭 필요한 분야에서 일하려 하는 노동자들의 충성을 판정할 수단이 필요했다. 따라서 두 기관은 배경 조사뿐 아니라 대대적인 등록 캠페인을 실시함으로써 서로 힘을 모았다. (...)
(...) 그 목적은 "(a) 전시외국인수용소에 의한 석방 허가, (b) 그렇게 석방된 사람들이 군대에 복무할 것인지 아니면 전쟁에 필요한 공장이나 기관에 고용될 것인지"를 확실히 하기 위한 것이었다. (...)
등록 프로그램에서 사용된 앙케트는 악명 높은 27번과 28번 질문만으로도 상당히 유명한 것이 되었다. 이 질문들에 답하면서 사람들은 군에 입대할 의향이 있는지 없는지, 그리고 미국에 대한 충성을 맹세하는지 그렇지 않은지 대답해야 했다. 예컨대 강제 수용과 군 복무를 다룬 뛰어난 소설로, 널리 읽힌 존 오카다John Okada의 《노 노 보이No-No Boy》(1977)는 수용소의 생활 조건 속에서는 그 어떤 합리적인 선택도 불가능했었음을 일깨우기 위해, 이 한 쌍의 질문에 대해 "노 노"라는 두 번에 걸친 부정적 답변의 수사를 구사했다. (...)
(27) 당신은 명령받은 어느 곳에서건 전투 임무를 수행하면서 미군에 근무할 의사가 있는가?
(28) 당신은 미국에 대한 무조건 충성을 맹세하고, 외국이나 국내 세력의 모든, 그리고 그 어떤 공격으로부터도 성실하게 미국을 방어하겠는가? 그리고 일본제국 및 기타 외국 정부, 권력, 조직에 대한 모든 형태의 충성과 복종을 거부하겠는가? (228~235쪽.)
요컨대 전시외국인수용소가 내세웠던 자유주의적 국민국가의 복제물 같은 이미지는 오직 사람들을 더 배제하고 더 자유롭지 못하게 할 공간 및 정책들-법무성과 군대 수용소, 모아브와 레우프 격리수용소, 결국에는 툴 레이크 격리 센터, 그리고 그 안의 영창-과의 관계를 통해서만 상징적이고 실제적으로 유지될 수 있었다. 이러한 커넥션과 더불어 마이어의 2월 11일 증언이 전시외국인수용소의 책임을 전쟁성으로 이전시키고자 했던 상원 법안 S.444를 검토하는 청문회에서 이루어졌다는 사실도 기억되어야 한다.
(...) 만일 법안이 통과되었더라면, 건강하게 기능하는 민주적 사회의 외관을 꾸미기 위한 미로 같은 새 제도는 더이상 기능하고 발전하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 그러나 이와는 반대로 법안 통과의 실패는 이러한 정치적 합리성이 일본계 미국인이라는 하위인구를 다스리는 새로운 상식으로 수립되었음을 의미했다.
전쟁성 차관보 맥클로이의 참모인 윌리엄 스코비 대령은, (...) 그가 말하고자 한 것은 이러한 군대의 역할이 사회 관리로까지 확장되지는 않을 것이라는 점이었다. (266~267쪽.)
따라서 평가자들은 첫 번째 항목, 즉 304A 양식의 1번 질문인 이름에 대한 대답에서부터 점수를 주거나 뺐다. (...) 식민지 조선에서 조선인들에게 조선 이름 대신 "일본식" 이름을 선택하도록 강제한 창씨개명의 억압성에 대해 여러 논의가 있었거니와, 이 항목 역시 문화와 국가가 결합된 유사한 사례를 보여 준다. 특히 수용소 내외의 비백인 사회에 대해 대단히 동화주의적으로 압박한 결과, 하와이에서는 1942년에 약 2,400여 명이 영어식 이름을 신청했다. (272쪽.)
따라서 '자살 특공대'와 인질들을 요구함으로써 자기의 (백인) 미국성Americanness을 증명하고자 한 마사오카의 거의 광신적인 욕망은 그를 백인이 아닌 자로 보는 (백인) 타자의 인식을 벌충하기 위한 수단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자서전에서 공공연히 말하듯이 마사오카는 일본계 미국인 혈통을 지닌 그의 인종이 명예를 회복할 기회를 환영했다. (...) 마사오카와 그의 네 형제는 모두 도전에 응했다. 한 사람은 전투 중에 죽었고 다른 사람은 심하게 불구가 되어 돌아왔다. 그러나 마사오카는 미국에 분개하지 않았다. 그는 이러한 피의 희생을 통해 그와 그의 형제들, 그리고 일본계 미국인 동료 병사들이 인종적 편견을 극복했으며 자기들에게 "아메리칸 드림을 나눌 권리"(22~23쪽)가 있음을 증명했다고 강조했다. (328~329쪽.)
군 당국은 낙관적으로 일본계 미국인 WAAC(육군여자보조부대, Women's Army Auxiliary Corps-옮겨쓴이) 지원자 수의 상한선을 500명으로 설정했다. 특히 남성들의 대답과 비교했을 때 충성도 질문에 대한 여성들의 긍정적인 대답 비율이 높게 나왔다고 지적한 수용소의 등록 실시 보고서, 그리고 일본계 미국인 여성들이 일본인으로서 익숙하게 경험하지 못했던 미국에서의 자유를 고맙게 생각한다는, 수용되어 있다는 점을 고려할 때 놀랍기 그지없는 믿음 등이 작용한 결과, 아마도 그들은 희망적인 태도를 갖게 되었을 것이다. 리사 요네야마가 논의했듯이, 미국이 유색인동 여성을 해방시켰다고 믿는 전형적인 오만함을 과시하는 일은 미군의 침략과 점령을 정당화하는 데 아주 빈번하게 활용되었다. (...) (331쪽.)
그러나 일본계 미국인들은 조건부 충성의 논리를 고집했으며, 무조건적인 지원을 하고자 하지 않았다. 그뿐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지원을 거부하기도 했다. 이는 그들이 미국이 인종과 상관없이 모든 사람들에게 자유, 평등, 안전, 행복을 보장하는 유일한 국가라는 주장을 전혀 믿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또는 수용소의 경험으로 인해 그러한 주장이 근거 없다고 확신하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지원하기는커녕, 그들은 핵심적인 질문들에 긍정적으로 답변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그들은 주어진 질문들 및 위정자들이 말하는 거짓 정의의 합리성마저 인정하지 않았다. (...)
(...) 아마도 수천 명의 하와이와 미국 본토 거주 일본인들이 진주만 공격 이전에 미군 복무에 실패했으며, 그후 일본의 제국주의적 프로젝트의 일환인 만주 이주를 선택했다. 최근의 연구는 그들의 경험을 고찰하기 시작했다. 인종주의에 직면해 일본계 미국인들은 아시아 대륙을 향한 일본의 팽창주의에 적극적으로 참여함으로써 미국 내셔널리즘의 주장들을 거부하기도 했다. (...) 더 나아가 개인적 이유가 무엇이었든 간에 1세, 2세, 키베이를 포함한 일본계 8,000여 명이 전시 또는 종전 직후에 미국을 떠나 일본으로 갔다고 집계되었다. (336~339쪽.)
하지만 냉전기의 기억 만들기가 동화주의적인 모델에서 다문화적인 모델로 변화되었다는 점에서 둘 사이에는 아주 중요한 차이가 있었다. 즉 기존의 관점은 문화적 차이를 문화적 비정상이나 미발달로 파악했다. 그러나 그러한 관점이 바뀌어, 이제 문화적 차이의 어떤 면들은 가치를 인정받을 수 있게 되었다. 이렇게 된 데에는 미국의 동아시아 헤게모니 장악을 위한 계획이 직접적으로 관련되어 있었다. (...) 그 계획은 자본주의적이며 "거의 백인이지만, 완전히 백인은 아닌" 위치를 일본이라는 국가에 부여했다. 그와 더불어 재인종화된re-racialized 전후 미국 사회 내부의 일본계 미국인들은 일본이 미국의 판도 안에서 새로운 위치를 얻은 것과 동일한 방식으로 몇몇 중요한 점에서 자기의 자리를 얻게 되었다. 일본계 미국인들이 전후 미국의 모범적인 소수자로 계속 이행해 갔던 것과 마찬가지로, 일본은 미국의 모범적인 소수자 국가model minority nation가 되었다. (360~361쪽.)
토미의 탈성화desexualization와 아동화infantilization는 전쟁이 끝난 후 일본계 미국인들이 (백인) 미국 안에 받아들여지기 위해 필요했던 하나의 조건이다. 여기에는 하나의 아이러니가 존재한다. 일본계 미국인들은 자신들에 대한 평가를 만회하기 위해 군인으로서의 용맹이라는 남성주의 담론을 동원해 왔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일본계 미국인 남성병사들을 시민으로 보는 담론은 그 한 가지 결과로서 일본계 미국인 여성들을 2류 시민으로 생각하게 하는 일도 초래했다. (391쪽.)
냉전 근대화론이 미국의 제국주의와 연결된 것임은 냉전 근대화론에 대한 비판적인 연구를 통해 이미 폭로되었다. 그러나 열전 시기부터 싹튼 미국의 아시아 헤게모니 쟁취 계획과 냉전 근대화론 사이의 통전기 연관성을 논한 연구는 이보다 훨씬 적다. (...) 라이샤워 자신이 지적했던 것처럼, 그는 "우리의 이데올로기 전쟁에서 승리하는" 한 가지 방법으로서 이 계획을 제출했다. 이데올로기 전쟁에서 승리한다는 것은 '황색과 갈색'의 국민들이 미국식 자유민주주의와 자본주의의 길을 따르도록 영향을 끼칠 필요가 있음을 의미하는 암호적인 말이었다. 1945년 1월에 이르러 미국의 가장 앞선 동아시아 전문가들은 이런 노선의 생각을 진전시켜, '근대화' 개념을 중핵으로 하는 이론화의 단계로 나아갔다.
(...) 지침은 자유민주주의와 산업자본주의 프로젝트를 미국의 프로파간다로 의심되게 할 '서구화Westernization'라는 용어의 사용을 중시하고, '근대화'를 주창하라고 강력히 촉구했다. 전문가들은 '근대화'가 더 중립적이고 세계사적인 용어라고 믿었으며, 근대화의 테마가 "다른 지역의 국민들처럼 극동의 국민들도 그들의 생활 방식을 근대화할 수 있고 근대화해야 함을 설명하기 위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들은 "근대화한다는 것이 근대적 과학기술 수단과 근대적인 사회 정치제도의 확립, 즉 과학과 민주주의의 확립을 의미한다"고 말했다. 이는 단지 전후의 계획이 아니라 아시아에서 헤게모니를 잡기 위한 미국의 탈식민주의적 계획이었다. 따라서 근대화는 도시 산업화, 커뮤니케이션, 과학적 농업(즉 농업혁명), 민주적 절차 등과 같은 핵심적인 것들의 채택을 그 지역의 국민들에게 강요함으로써가 아니라, 이러한 프로젝트의 원치고가 요소들을 스스로 받아들이도록 설득함으로써 달성될 것이었다. (...)
전문가들은 아시아인들이 근대화로써 이득을 얻을 것이며, 이 근대화 과정을 촉진하는 일이 궁극적으로 미국의 국익에 포함됨을 역설했다. (...) 그들은, "이 세계적 과정에서 아시아가 지체되는 것을 허용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아시아가 낙후성에서 벗어나지 못하거나 이전부다 더 낙후된다면, 제국주의, 혁명, 세계대전 등이 일어날 심각한 위험이 발생할 것이기 때문이다. (...)
그러나 전문가들의 제안에는 논리적인 비일관성이 있었다. 그들은 스스로 결정하는 주체로서 자유민주주의와 산업자본주의를 채택하라고 아시아인들에게 촉구하면서, 이 낙후된 사람들이 미래를 개척하기 위해 선택할 다른 길을 주지 않으려 했다. (...)
그렇다면 이 전문가들은 "낙후된" 아시아들을 근대화 프로젝트 쪽으로 밀어붙이기 위해, 그리고 그렇게 하는 일이 아시아에서 미국의 힘을 확장시키기 위한 계획의 일부가 아님을 믿게 하기 위해 어떠한 계획을 세웠던가? (...) 가장 좋은 방책은 "근대화가 미국의 독점물이 아니라, 모든 국민들이 참여할 수 있고 또 참여해야 하는 전 세계적인 성장 과정임을 보여 주는 것"일 터였다. "근대화가 국제적인 것으로 보이도록 하면 할수록 더욱더 그것은 기계적이거나 물질적이거나 분열적으로 보이지 않게 될 것이며, 특히 미국적인 삶의 변화를 아시아에 '판매'하고자 하는 미국의 프로파간다처럼 보이지 않게 될 것이다. (...) 그러나 그들은 자유주의적이고 자본주의저이며 비공산주의적인 뉴딜 모델을 명확히 제시했다. 이를 통해 노동자들은 "풍요의 열쇠인 대량생산"(3쪽)으로부터 이득을 얻을 것이었다. 그리고 프로파간다는 근대화를 위한 모델, 근대화의 "아시아적인" 모델을 널리 알리는 대신 미국화의 위험성을 축소해야 했다.
(...) 일본에 적용된 냉전 근대화론은 1950년대 말에 이르러 등장했다. 그리고 1960년대와 1970년대 초에, 달리 말해 모범적인 소수자 담론이 처음으로 뚜렷이 분절, 발화되었던 때에 가장 널리 퍼졌다. (...) 일본은 오랫동안 근대화를 기다렸다고 주장되기에 이르렀다. 일본이 가진 근대화 능력, 즉 산업화하여 경제적으로 슈퍼 파워 중 한 나라가 되었음을 주로 의미하는 이 능력의 뿌리는 몇 백 년 전인 도쿠가와 시대에 이미 존재했다. (394~398쪽.)
최유리와 미야타가 논의했듯이, 제79회 제국의회 보고를 준비하기 위해 조선총독부가 수집한 데이터는 지원한 조선인 젊은이들의 애국심이 공식적인 프로파간다가 주장했던 것보다 훨씬 적었음을 확실히 보여 준다. (...) 하지만 이 데이터는 이 역사가들의 결론에 드러나는 확실하고 강력한 어조를 상당히 무디게 할 몇 가지 의문을 일으키기도 한다. 첫째, (...) 27.9퍼센트는 소수를 의미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은 단일한 지원 동기 중 가장 큰 카테고리다. 둘째, 지역 당국이 젊은이들에게 지원을 압박했다는 강력한 증거에도 불구하고, 35퍼센트가 "자발적으로" 지원했다는 것은 무의미하지 않은 듯하다.
셋째, 많은 사람들이 가난에서 벗어나기 위한 수단으로 군에 지원했다는 주장은 설득력이 있지만, <표 4>에 따르면 지원자의 반 이상(56퍼센트)이 1,000엔 이상의 재산을 가지고 있었다. (...) (420~421쪽.)
그러나 아무리 애매하다고 할지언정, 어쨌든 조선 인구의 한 부분이 일본에 대한 애국적인 마음 때문에 군에 지원했음을 인정한다고 해서, 그것이 일본제국주의가 조선인들에게 긍정적인 권력이었다고 확언함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 대신 그것은 차별이 자행되고 식민주의의 폭력적 현실이 계속됨에도 불구하고, 포용적이고 친절한 인종주의를 표방하는 새로운 시기가 어떤 사람들에게는 예기치 않은 기회와 행복을 가능케 하는 것으로 생각되었다는 사실을 확인시켜 준다. 내셔널리즘의 권력을 이해하고자 하는 사람들은 아주 소외된 위치에 있는 개인들과 집단들이 왜 국가에 저항하기보다는 종종 충성을 선택하는 것처럼 보이는지를 더욱 철저히 이해해야 한다. (...) (423쪽.)
김성수는 그렇게 무계획적이고 아무 생각 없이 지원하게 된 동기가 정확히 무엇이었는지 확실하지 않으며, 그 몇 마디 말이 지닌 무게를 깨닫지 못했다고 고백한다. 그는 '성전聖戰'에 협력하거나 교사를 감동시키고자 하는 강력한 욕망이 전혀 없었지만, 곧 징병이 실시될 것이므로 어쨌든 끌려가게 되리라고 감지했었음을 기억한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사실은, 자기의 결정이 형제 중의 한 사람, 즉 반일 운동가로 체포되어 서울에서 경찰에 구금되어 있던 김양수가 석방되는 데에 기여할 것이라고 그가 느꼈다는 점이다. (...) (429~430쪽.)
국가총동원법(1938)과 국민징용령(1939)은 국가에 민간 노동자 징집 권한을 주었다. 그 법률적 체제하에서 총독부는 군대에 지원할 것을 거부했거나, 지원했지만 탈락한 조선 내의 학생들에게 나중에 입대하거나 징용 노동자가 되기 위해 징병검사를 받으라고 강요했다. (...) 입대하려는 욕망을 표현한 아주 적은 수의 사람들에게는 새로운 입대 기회가 부여되었다.
강덕상은 그 외의 사람들과 관련해, 그들이 단기간의 훈련을 받은 후 노동 현장으로 보내졌던 사례들을 보여 주었다. (...) 군인이 아니라 민간 노동자였을지언정, 다욱은 이 거부자들에게 일본의 국가공동체 안에 포섭될 가치가 있음을 증명할 또 한 번의 기회를 주었다. (...) 요컨대 당국은 입대가 진정한 일본인이 될 기회이기라도 한 것처럼 조선인들에게 병사가 될 다양한 길을 꾸준히 제시했다. 그러나 그 규범적인 선택을 하지 않을 경우 주어지는 대가는 국가로부터의 배제였다. (469쪽.)
이 장에서 나는 1장의 논의를 재론했다. 그것은 조선인들을 일본의 제국주의 전쟁에 끌어들이려는 정책의 추진으로 인해, 조직과 요원을 갖춘 하나의 커다란 기구가 모든 사람을 권력에 노출시켜 쓸모 있는 일본 신민으로 만들고자 맹렬히 활동하게 되었음을 보이기 위해서였다. 이 기구는 하나의 체제로서 자신이 이성, 역사, 도덕성의 세력이며, 더 나아가 자유의 세력이기조차 하다고 선언했다. (...) 체제는 절대적인 권력과 잔인성을 버리지는 않았다. 하지만 체제는 인종주의적 차별을 거부했고, 교육과 훈련의 기회를 더 많이 제공했으며, 조선인 일부가 군대 내부와 외부에서 사회적, 경제적으로 성장하도록 허용했다. (...) 그것은 '문명화의 사명'에 추동되면서 가장 반항적이고 적대적인 사람들을 제외한 모든 사람을 통치성의 체제 안에 포섭하고자 했다. 실제로 정부는 학병 지원을 거부한 학생들처럼 입대를 주저하는 사람들에게 스스로를 증명할 기회를 여러 번 주었다.
(...) 일본군과 미군은 내켜하지 않는 사람들을 동원했으며 위험한 사람들을 배제하기 위해 힘을 사용하면서도 적어도 원칙상으로는 인종적인 차별을 거부했다. 그런데 그렇게 함에 있어서 일본군이 최소한 미군만큼은 일관성이 있었으며, 어떤 점에서는 훨씬 더 일관성이 있었다고 나는 또다시 주장하지 않을 수 없다. 이는 대부분의 백인 미국인들이 군대 내부와 외부에서 '니그로들', '멕시코인들', '일본계 미국인들'을 계속 차별했던 것처럼, 대부분의 일본병사들이 아마도 조선인에 대해 편견을 품고 있었을 것이라는 점, 그리고 조선인 병사들을 차별한 많은 사례들이 있다는 점을 부인하는 말이 아니다. 그것은 미국 정부와 마찬가지로 일본의 지배 시스템 역시 인종차별을 비난하는 방향으로 결정적으로 전환되었으며, 인종차별의 거부가 그 지도자들에 의해 공식적인 정책으로 채택되었음을 인정하기 위한 말이다. (482~485쪽.)
(...) 소설에 전제되어 있는 것은 주인공이 천황과 국가의 요구를 따르는 규범적인 선택을 하지 않을 가능성이다. 이 장 및 다음 장에서 분석된 그 어떤 다른이야기보다도 쵸 카쿠츄의 〈이와모토 지원병〉은 내셔널리즘이 국가에의 복종을 선택할 자유로운 주체들을 구성함으로써 작용하는 양상을 더 많이 보여 준다. 이러한 선택에서 기인한 내적 갈등은 3장에서 논의된 바, 무기를 잡으라는 부름에 따를 것인가 말 것인가의 선택에 직면했던 일본계 미국인들의 내적인 혼란과도 훌륭히 비교된다. (529쪽.)
케두리는 자기 결정이라는 역동적인 개념에 대한 칸트의 찬사를 피히테Fichte 같은 후기 내셔널리스트 사상가가 지지했다는 사실을 제시했다. 그렇게 함으로써 피히테는 근대적 자기 형성 및 자율적인 주체에 대한 칸트의 이 유명한 서술을 내셔널리즘의 핵심에 위치시켰다. (...) "개인과 국가가 하나일 때만 개인은 그의 자유를 실현할 수 있다"(38쪽). 그러므로 칸트의 윤리학을 내셔널리즘적으로 전유하는 일은 개인적인 자기 결정과 전체에의 복종을 동시에 찬양하도록 했다. 그러나 케두리가 보기에 이러한 해결은 국가 권력이 엄청나게 남용되도록 하는 길을 열었다. (...) "민족적인 자기 결정은 결국 의지의 결정이다. 그리고 내셔널리즘은 무엇보다도 의지의 올바른 결정을 가르치는 하나의 방법이다"(81쪽). (539~540쪽.)
내선일체 담론은 차별 없고 젠더화되지 않은 포용을 제의했다. 그러나 그것은 남성들만의 완전한 편입을 약속했으며, 일본 여성이건 조선 여성이건 가리지 않고 모든 여성들에게 완전한 국민의 자격을 주지 않았다. (...) 하지만 새 법의 일반 조항들("25세 이상의 남성 제국 신민들") 아래 조선인 남성들이 포함된다는 것은, 조선인이건 일본인이건 가리지 않고 모든 여성들을 지워 버린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했다. (598~599쪽.)
나의 마지막 논점은 식민주의 이후의 내셔널리즘에 대한 위와 같은 페미니스트적 비판들에 입각해 있다. 쵸 카쿠츄와 히나츠 또는 다른 사람들의 글들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내셔널리즘의 남권주의적인 논리는 식민주의를 반대한 한국의 내셔널리스트뿐만 아니라 일본 내셔널리즘을 지지한 수많은 조선인들도 품고 있던 전형적인 사고였다. 두 경우 모두에서 남권주의적 연대는, 한국이건 일본이건 간에 국가(민족)에 소속될 길을 열었다. 그렇게 보면, 박정희 같은 사람이 일본 육사 졸업생이자 만주국 군대의 중위에서 한국의 대통령으로, 그리고 문승숙에 따르면 한국 민족을 무엇보다도 남성들의 공동체로 재현하는 국사를 확립하고자 한 탈식민주의 체제하 '공식적 민족주의official nationalism의 주설계자'로 비교적 모순 없이 나아갈 수 있었던 것을 더 쉽게 이해할 수 있다. (...) 나의 목적은 그러한 논리가 일본국가와 제국을 유지하기 위해 필수적이었고, 근대의 내셔널리즘과 식민주의 맥락 속에서 자라났으 며, 현재의 우리들에게도 영향을 미치고 있음을 말하고자 하는 것이다. (604~605쪽.)
(...) 일본의 항복은 조선 민족을 정치적이고 생체정치적인 국가 안에 포용시킬 궤도를 붕괴시켰다. 전쟁 직후 일본 국가는 미국의 후원하에, 조선인들의 일본 거주나 일본 국적자로서의 법률적 신분 등을 포함해 모든 것을 일방적으로 박탈했다. 그렇게 하면서 일본 국가는 조선인들의 정치적인 권리뿐 아니라 사회복지와 관련된 살 권리도 빼앗았다. 그와 관련해 권력은, '살게 할 권한'과 나란히 작용하기를 결코 멈추지 않았던 '죽일 권한'이라는 단순한 양식으로 퇴화했다. (...) 그리고 테사 모리스 스즈키Tessa Morris-Suzuki가 그녀의 책에서 보여 주듯이, 이는 전쟁기간 동안 일본에 살았던 수많은 조선인들이 단지 기본적인 생계 보장을 위해 북한으로 이주할 필요가 있다고 느꼈던 이유이기도 하다. (613쪽.)
(...) 미국에서 '친절한 인종주의'는 단순한 동화를 넘어 계속 진화하고 있으며, 자유주의적 다문화주의로 확립되고 있다. 하지만 표적이 된 하위인구의 목숨을 아무 설명도 없이 빼앗는 더 거칠고 잔인한 권리는 매일매일 계속되고 있다.
(...)
그러므로 각 나라에 나타나는 여러 구체적인 차이들과는 무관하게, 제2차 세계대전이 남긴 가장 뿌리 깊은 한 가지 유산은, 혼란스럽게 공존하는 인종주의와 인종주의의 거부가 여전히 우리 주위에 아주 빈번하게 출몰하고 있다는 점이다. '거친 인종주의'는 통전기를 거치며 지하로 숨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오래전에 파농이 경고했듯이, '거친 인종주의'는 결코 사라지지 않았다. (...) 때때로 '친절한 인종주의'를 방해하지만, 그와 동시에 '친절한 인종주의'를 보충하고 활성화시키기 위해서도 작용한다. (621쪽.)
교정.
320쪽 3줄 : 그 사실에 대해 적절히 파악할 수 없다 -> 그 사실을 적절히 파악할 수 없다
322쪽 7줄 : 발견한 수 있다 -> 발견할 수 있다
372쪽 12줄 : (19457.2) -> (1945.7.2)
409쪽 13줄 : 강덕상의 논의를 확인해 주었다 -> 강덕상의 논의를 확인해 준다 (의미상 과거형보다는 현재형 문장이 더 매끄럽다)
435쪽 1줄 : 1939년에는 반 정도만이 (...) 자격 기준을 충족시킬 수 있었다. 이 점에서 군 지원과 그에 따르는 훈련소 입소를 고려했던 많은 사람들에게 적어도 먹고사는 문제는 고려 대상이 아니었을 가능성이 크다. (교정대상은 아니고, 내가 이해가 안 되는 부분이라서 메모했다. 여기서 말하는 지원병 지원 조건이란 일정 수준 이상의 정신적·물질적 조건을 의미하는데, 이러한 조건을 충족시키지 못했다는 것은 먹고사는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다는 의미 아닌가? 그런데 여기서는 먹고사는 문제가 고려 대상이 아니었다고 하니까 살짝 혼란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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